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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刻木爲信, 邑落傳行, 無文字
2.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위에 두 줄의 기록이 있습니다.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자가 없고, 나무에 (무언가) 새겨 신표로 삼은 뒤, 읍락마다 (그것을) 전한다.
2. 문자가 없고, 나무에 (무언가)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소통은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가능하다.
어떻습니까? 양자의 기록이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위의 두 줄의 기록은 분명히 다른 기록입니다. 위의 것은『삼국지』「위서」〈오환전〉의 기록이며 밑에 것은『양서』「열전」〈신라전〉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기록들이 모두 중국측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문자라는 것은 한자(漢字)를 말하는 것이며, 한자 대신에 나무에 새겨서 신표로 삼아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체계는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은 다른 북방 유목민이나 고구려, 백제 등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앞서 제가 어떤 나라에 속해있다는 정체성을 구별하는 것 중에 무엇이 있다고 했는지 기억하시죠?
이걸로는 부족하다고요? 당연하지요. 그럼 하나 더 보겠습니다.
1. 數百千落自爲一部
2.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于珍部{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위에 문장은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수백에서 수천까지의 마을이 어우러져 스스로 하나의 부(部)를 이룬다.
2.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쳤으며 성은 이씨이고,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쳤으며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쳤으며 성은 설씨로 정하였다.
어떻습니까? 기존 부락을 유리이사금이 새롭게 재편한 기록입니다. 얼핏 보면 유리이사금 9년(32)의 이 기록은 별차이 없이 부의 이름만 바꾼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잘 있는 마을 이름을 바꾸고 그 성씨를 하사하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닌 전면적인 정치적 개편을 의미합니다. 마치 오늘날 기존 정당이 이름을 바꾸는 것이 단순한 의미가 아닌 정치판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과 같은 개념이지요. 물론 엄밀히 말해서 양자는 다르지만요.
유리이사금의 이 기록을 지금까지는 모두 부인해 왔습니다. 6부를 재편, 성씨를 하사, 17관등을 제정한다는 내용이 요지인데 삼국 중 가장 레벨이 낮다고 보는 신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이처럼 확고하게 국가 체제를 확립한다는 기록이 나오니 당연히 덮어놓고 무시할 수 밖에 없지요. 왜 이 기록이 후대에 조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말이죠. 이는 후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남해차차웅 집권 이후, 박혁거세 거서간의 의지에 따라 국가체계를 오환족의 그것으로 바꾼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부 체제'를 연구해서 학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셨던 노태돈 선생님의 명저『고구려사 연구』를 보면 이에 관련된 얘기가 나옵니다. 중국 사서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제가 1번에 제시한 기록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실제적으로 강한 정치적인 지배 질서나 필수적인 경제적 이해 관계에 따라 묶여진 집단이 아니었지만 대인이라고 불리던 오환족의 수장층이 절대권을 행사했던 것을 보면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느슨한 조직체지만 그렇다고 정치적인 성격이 전혀 없는 집단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부의 용례는 여러번 중국 사서에 나오는데 어떨때는 한 족속 전체를 하나의 '부'로 규정하기도 하지만 그런 전체 족속 '부'에 속한 여러 하위 집단을 '부'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즉, '부내부(部內部)'의 존재를 규명한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위에서 유리이사금의 6부 재편이 예삿일이 아니라고 했던 겁니다. 기존의 6부를 재편함으로써 성씨를 하사하고 새롭게 부의 범위를 설정함으로써 유리이사금은 통치력을 공고히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5부도 등장하지만 그 부의 개념은 이것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행정 단위로서의 의미가 더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을 단위의 집단이라기보다는 거의 독립적인 소국, 즉 국가체제를 갖춘 단계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과는 의미가 다르지요. 이 부(部)의 용례가 중국 사서에는 '오환', 한국 사서에는 '신라'에 가장 이른 시기에 가장 비슷하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봅니다.
1. 建武二十五年, 烏丸大人郝旦等九千餘人率衆詣闕, 封其渠帥爲侯王者八十餘人, 使居塞內
2. 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 封其渠帥三十餘爲王
3.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4.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5.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위 기록들은 거수에 대한 용례를 제가 추린 것입니다. 1, 2번은『삼국지』「위서」〈오환전〉의 내용이며 3번은『삼국지』「위서」〈동옥저전〉, 4번은『삼국지』「위서」〈예전〉, 5번은『삼국지』「위서」〈변진전〉의 내용입니다. 해석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1. 건무 25년(49), 오환 대인 학단 등이 9천여 무리를 거느리고 궐에 이르렀다. 그 거수를 후왕으로 봉하니 80여인에 달하였고 (요)새 안쪽에 살게 하였다.
2. (경초 원년 : 237) 구루돈이 아우 아나반 등을 보내 궐에 이르러 조공했다. 그 거수 30여인을 왕에 봉하였다.
3. 옥저 각 마을의 거수들을 자칭 삼로라고 칭하였다.
4. 후에 도위를 폐지하고 예족의 거수를 제후로 삼았다.
5. 변진 역시 12국이다. 여러 읍이 있고 통수자를 거수라 하였다.
윤내현 선생님의 견해대로 거수(渠帥)라는 명칭은 당시 동북방 일대에서 널리 쓰이던 군주명에 대한 호칭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중국 왕조가 제후로 삼은 것을 보면 윤내현 선생님이 이들을 단군조선의 제후와 동일시삼은 것도 이해가 됩니다. 저는 이 거수라는 호칭이 변모해 거서간(居西干)이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거수라는 명칭이 북방에서 유목민들이 쓰는 군주명인 간(干) · 한(汗) 등과 뒤섞여 사용되었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김성호 선생님은『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에서 갈문왕제가 거란의 국구장제와 비슷하며 거란 역시 동호의 일파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박원길 선생님의『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을 보면 그는 유라시아 대륙에 2개의 큰 문화권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 몽골 동북쪽 부류가 주몽의 고향이면서 황토 및 판석묘(고인돌) 문화권을 둘째, 몽골 중서부쪽 부류인 사슴돌과 케렉수르라 불리는 거대한 돌무더기 제단 문화권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흉노, 오환, 선비, 탁발선비, 유연, 돌궐 · 회골, 계단 · 여진, 몽골의 순으로 샤머니즘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시레'나 한국의 '씻김굿' 전통이 오환과 닮아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의 잣대로 '민족'이나 '국가'니 하는 것을 들이대면 안 됩니다.
묵특선우는 순식간에 그들을(동호) 격파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멸망 시기는 기원전 209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인 기원전 207년 안팎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붕괴되면서 그 사이 흉노가 마음놓고 북방의 군소 유목민들을 통합한 뒤, 중원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환과 선비의 시작도 기원전 207년 안팎부터로 봐야하는데 문제는 이 동호라는 집단이 과연 우리 민족과 큰 연관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고고학적으로 아직 정설로 해명되지는 못하였으나, 요녕성에 있는 판석(板石) · 돌덧널무덤 등이 동호의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가 주출(鑄出)되어 있는 랴오닝식 동검[遼寧式銅劍]과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 도끼 등이 껴묻거리로 출토된 바 있는데 다뉴세문경은 중국계가 아닌 우리 민족 고유의 특징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요령성 자오양현성[朝陽縣城]의 남서쪽 약 12.5km 지점에 있는 기원전 6∼5세기의 랴오닝문화에 속하는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라는 고분터가 1958년 발견되었는데 총 3기의 고분이 정식 발굴되었습니다.
1호 고분은 표토 아래 2m의 직사각형 수혈광(竪穴壙) 내에 자갈 등으로 밑바닥과 벽을 만들고 널따란 돌로 천장을 덮어, 서쪽벽에 청석판으로 묘문을 만들어 놓았고 석곽 내의 밑바닥에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마련하여 남녀 합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둘레에 껴묻거리를 하였는데 북쪽 유체의 머리와 발이 있는 곳에는 다뉴경형(多鈕鏡形)의 동장식품이, 가슴부분에는 랴오닝식 동검 2자루가 있었고 남쪽 유체에서는 동도(銅刀) · 동어구(銅魚鉤) · 각종 장식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껴묻거리는 청동기가 대부분이며 앞에서 든 것 외에 부(斧) · 촉(鏃) · 착(鑿) · 추(錐) 등의 공구류, 장식품과 석기, 도제방추(陶製紡錘) 등이 있었습니다. 2호 고분은 청석판만으로 곽실(槨室)이 만들어졌고 합장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부장품은 1호와 거의 같고 랴오닝식 동검, 다뉴세문경의 원조형, 유환장판상(遊環長板狀) 동구(銅具) 등출토되었으며 3호 고분에서도 다뉴세문경이 출토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랴오닝식 동검이 바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비파형동검과 돌널무덤, 미송리식토기가 공반유물로서 흔히들 단군조선의 영역권을 설명하는데 많이 등장한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비파형동검문화권은 요양시-송화강-한반도에 걸치는 청동기문화권과 거의 일치하며, 넓은 의미의 예맥족(濊貊族) 문화권이라 할 수 있죠. 다만 요양 일대의 청동기문화에는 북방계 요소가 강하게 녹아있어, 그 주인공이 예맥 혹은 단군조선과 다른 북방 유목민족, 즉 동호의 문화라는 견해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요령성 시펑현[西豊縣] 시번거우에 있는 서분구유적(西坌溝遺蹟) 또한 주목됩니다. 1956년, 4∼500기의 토갱묘가 발굴 조사되어 무려 1만 3,8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곳인데 청 · 장년층이 매장된 유구가 많고 무기 · 마구 외에 말이 껴묻거리로 발견되어 기마 유목민족의 전사묘(戰士墓)임이 밝혀졌습니다. 촉각상(觸角狀)이나 자루가 있는 긴 철검, 환두대도(環頭大刀) · 창 · 도끼 · 화살촉 등의 무기가 출토된 것은 당연하며 동물을 그려넣은 청동식판(靑銅飾板)도 출토됐습니다. 또한 한나라에서 수입된 청동거울과 철제 도구, 흉노(匈奴) · 동호(東胡) 등 각 민족의 문화유물이 출토되어 복잡한 문화 양상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파형동검과 다뉴세문경 등이 주로 출토된 십이대영자 유적의 경우는 동호의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서분구유적의 경우는 동호의 유적이었다가 훗날 흉노의 공격으로 인해 타문화권의 문화적 요소가 유입된 결과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말을 껴묻거리하는 풍습은 기마민족이었던 스키타이족에서부터 찾아지는 오랜 풍습으로 소위 쿠르간이라고 하는 북방의 거대한 고분에서도 확인되는 양상입니다. 그러나 이른 시기의 비파형동검이나 다뉴세문경 등이 발견되지 않고 동물을 그려넣은 청동식판 등이 발견된다는 것은 뒷시기에 흉노 문화가 유입되었음을 알려주는 근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동호도 단군조선과 동일한 문화권 안에 포함되는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동호가 멸망당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그 일파가 갈라져 오환과 선비라는 큰 두 집단을 형성했음은 앞에서 누차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일파 이외에 다른 갈래는 없었을까요? 중국학자 변종맹의 경우, 부여의 건국을 흉노에게 패한 동호인의 이주와 연관시켜 이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실위와 거란, 고막해, 두막루와 비슷하며 또한 이들 언어가 부여와 비슷하다고 했기 때문에 동호와 부여와의 관련성은 충분히 언급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여는 중국인이 봤을때 동북방 일대에서 가장 평탄한 대지를 차지하고 있어 농경이 발달했지만 그렇다고 옥저나 동예처럼 농경만 행한 것이 아니라 목축도 굉장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부여에 북방 문화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으로 이 역시 동호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지요.
하지만 동호인 자체가 곧 부여를 건국했다고 볼 수는 없고, 부여의 건국과 맞물려 동호인의 유입이 있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이처럼 동호가 멸망한 다음에 그 국호는 사라졌지만 그 구성원들은 상당수 남아서 각지로 흩어졌고, 오환족 멸망시도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 봅니다.
계속해서『삼국지』「위서」〈오환전〉을 살펴보겠습니다.
自其先爲匈奴所破之後, 人衆孤弱, 爲匈奴臣服, 常歲輸牛馬羊, 過時不具, 輒虜其妻子.
至匈奴壹衍鞮單於時, 烏丸轉彊, 發掘匈奴單於塚, 將以報冒頓所破之恥. 壹衍鞮單於大怒, 發二萬騎以擊烏丸.
大將軍霍光聞之, 遣度遼將軍範明友將三萬騎出遼東追擊匈奴. 比明友兵至, 匈奴已引去.
烏丸新被匈奴兵, 乘其衰弊, 遂進擊烏丸,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還. 後數復犯塞, 明友輒征破之.
조금 길지요. 그럼 먼저 해석부터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게 격파된 이후부터, 그 무리들은 고립되어 약해져 흉노의 신하가 되어 복종했다. 항상 세세토록 소, 말, 양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으며 그 시한을 넘겼음에도 물량을 채우지 못하면 그들의 처자를 종으로 보내야만 했다.
흉노의 일연제 선우 시절, 오환이 강해졌고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이는 장차 묵특선우의 거처가 박살난 것을 알려 치욕감을 주기 위함이었다. 일연재 선우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2만 기병을 출병시켜 오환족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대장군 곽광이 이 사실을 알고 도요장군 범명우로 하여금 기병 3만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격해 흉노를 격파하게 하였다. 하지만 명우의 군대가 도달했을때 흉노의 군대는 이미 그 곳을 떠나고 없었다.
오환은 또 다시 흉노병을 피하여 달아났고 그들은 이미 무너지고 피폐해졌다. (범명우는) 다시 진격해 오환을 추격하여 6천여급의 머리를 베고 세 왕의 머리를 얻어 돌아갔다. 훗날 (오환이) 자주 요새를 침범하자 (범)명우가 다시 정벌해 그들을 깨뜨렸다.
흉노와 오랜 전쟁을 벌이던 한 무제는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이 80여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사로잡으면서 흉노의 주력을 격파함으로써 일단 한나라의 승리로 마감했습니다.
그 이후 흉노의 재침을 두려워한 한 무제는 우수한 말을 얻기 위해 서역 경영을 시도하게 되고 기원전 100년이 오기 전까지 꾸준히 서역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북방의 흉노는 여전히 강성했으며 기원전 99년,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이광리 장군을 도와 흉노군의 배후를 공격하던 이릉의 5천 보병은 8만의 흉노군에 포위당해 전원 항복하는 치욕을 당합니다
이를 시점으로 흉노는 서서히 세력을 회복하지만 양측은 만리장성 혹은 몽골 고원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북부 타림 오아시스 지역, 소위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이 지역들을 차지하기 위해 지루한 소모전을 벌입니다. 기원전 77년, 누란왕이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에 반대하자 한나라가 그의 목을 베고 그 일대에 둔전을 설치한 것이 그 한 예이지요. 특히 기원전 73년 등극한 선제는 '한나라에는 법이 있는데 이는 정복자의 법이다'라고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타림분지에 대한 경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60년 무렵까지 흉노의 실크로드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빼앗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흉노는 그 이후 내분이 일어나 동흉노와 서흉노로 갈리직까지 합니다. 기원전 44년의 일입니다.
호연제 선우는 바로 흉노와 한나라가 실크로드를 두고 다투는 그 시점의 흉노 선우로서 즉위기간은 기원전 85~69년까지로 치세는 17년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곽광입니다.
곽광은 대단한 인물인데 바로 한 무제 시절, 흉노 정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표기장군 곽거병의 이복 동생입니다. 10여 세라는 어린 나이때부터 무제를 보필하였고 무제 말기에는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박륙후(博陸侯)라는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제를 보필하였고, 정적을 타도한 뒤에는 소제를 계승한 창읍왕을 폐하고 자신이 멋대로 선제를 세우게 됩니다. 조금 복잡하죠? 그리고 그 공으로 증봉되는데 훗날 황후 허씨(許氏)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듦으로써 일족의 권세를 강화하는 우를 범하게 되고 선제는 기원전 68년, 곽광이 병사하자 그의 일족을 반역죄로 몰아 모두 죽여 버리고 황제권을 강화합니다.
이후 선제는 서역 36국을 정벌해 지배기반을 공고히 하고 기원전 51년 남흉노의 선우가 입조함으로써 전한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데『한서』「소무전(蘇武傳)」에 의하면 기원전 51년 남흉노의 선우가 입조하자....
곽광이 대장군직에 임명된 시기가 기원전 87년이므로 이 기록은 기원전 87년부터 곽광이 병사하는 기원전 68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박혁거세의 출생시기를 앞에서 기원전 69년으로 추정한 것입니다.
박혁거세 집단은 어디에선가 유입된 외부 세력이며『삼국사기』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13세때 즉위하여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 왕의 호칭은 거서간(居西干)으로 했다고 나와있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저는 왜 하필 13세때라고 했을까, 가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서 저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10여년간 박혁거세 집단이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기원전 57년에 갑자기 어떤 이유로 나라를 세웠다고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태어났을 시점인 기원전 69년 무렵에는 박씨 집단이 한반도로 유입되어 10여년간 이동하다가 기원전 57년, 어느 지역에 정착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박혁거세가 태어나기 직전인 기원전 69년,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그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이주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는 한반도에 들어와 태어난 것이며 만주 일대에서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나머지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왔겠죠. 앞서 범명우가 3명의 오환족 왕을 베었다고 했으니 오환족에는 최소한 3명 이상의 왕이 존재했을 것이며 그 지도자의 명칭은 거수였을 겁니다. 그리고 박혁거세의 아버지 역시 또 다른 거수로서 생존하여 구사일생으로 도주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벌어진 사건은 박혁거세가 태어나기 이전인 기원전 69년 이전에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군다나 호연제 선우도 기원전 69년에 사망하므로 오환의 궤멸은 최소한 기원전 87~70년 사이에 벌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한서』를 보면 漢復得匈奴降者, 言烏桓嘗發先單于冢, 匈奴怨之, 方發二萬騎擊烏桓라 하여 기원전 79년, 흉노에서 투항한 자에게 '오환이 일찍이 (묵특)선우의 총(무덤)을 열자 흉노(호연제선우)가 분노하여 2만 기병으로 오환을 격퇴하려 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그러니 오환의 발흥은 아마도 기원전 79년 직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리고 곽광은 제장(諸將)들에게 '오환과 흉노가 싸운다고 하는데 만이(蠻夷)가 서로 공격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병사를 파견하여 모두 토벌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봅니다. 그때 중랑장(中郎將)직에 있던 범명우가 '가격(可擊 : 깨뜨릴 수 있다)'이라고 대답하여 곽광은 범명우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임명하고 2만(『삼국지』는 3만)의 기병을 주어 요동에서 출격하게 합니다.
이후 흉노는 범명우가 이끄는 한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곳을 떠납니다. 아마도 오환족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한군까지 온다면 양쪽에서 협공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삼국지』에서는 마치 한군이 오기 전에 일을 다 끝마치고 흉노가 떠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한서』에는 분명히 흉노군이 한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를 떴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상황에서 본다면, 당시 흉노군 2만이 아무 준비도 안 된 오환족을 일방적으로 살육한 것이 아니라 양쪽이 일정 규모의 병력을 갖고 전투를 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이겼다 하더라도 흉노측 피해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봤을때 저는『한서』의 기록대로, 오환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흉노군이 한군의 진격 소식을 듣고 도주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곽광이 범명우가 출정하기 직전, 뭔가 따로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兵不空出, 即後匈奴, 遂擊烏桓. 바로 '병력을 헛되이 출병시킬 수 없으니 즉시 흉노를 공격한 후에 다시 오환을 격파하라‘는 밀령(密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범명우는 이미 떠난 흉노 대신에 피폐해진 오환족을 사정없이 도륙한 것이었죠. 그 공으로 범명우는 귀환하여 평릉후(平陵侯)에 봉해집니다.
또한『한서』에는 孝昭元鳳三年正月 泰山萊蕪山南匈匈 有數千人聲 民視之 有大石自立 高丈五尺 大四十八圍 入地深八尺 三石爲足 石立處 有白烏數千集其旁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해석하자면 '원봉 3년(기원전 78) 1월, 태산 지역의 내무산 남쪽에 슁슁하는 수천명의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가보니, 큰 돌이 스스로 섰는데 높이가 1장 5척이며 크기가 48위, 땅속 깊이 8척의 돌 3개가 다리를 하여 세워져 있었다. 돌이 세워진 곳에는 흰까마귀(百烏)들이 수천마리 몰려있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3개의 돌이 다리로 받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탁상식 고인돌이 틀림없으며 크기를 한나라 척도로 계산하면 약 3.5미터에 깊이는 1.86미터로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인돌로 추정되는데 ...변광현은『고인돌과 거석문화-동아시아편』에서 이 흰까마귀(百烏)는 실제 동물이 아닌 비유적인 표현일 것이라 했습니다. 흰 옷을 입은 동호의 후예인 오환족을 그렇게 명칭한 것이 아닐까 하고 저자는 말하는데 흰 옷이 부여의 습속인 것을 감안한다면 앞서 언급했던 동호와 부여와의 관계가 전혀 없지만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기원전 78년, 산동성 일대에 터를 잡고 고인돌을 제작할 정도로 수천명의 오환족이 그 지역에 있었다면 이는 단순히 그 지역에 잡거(雜居)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독자적인 신앙 체계와 나름대로의 영역을 갖추고 있었음을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79년 오환족이 범명우에게 참패를 당하여 그야말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난 다음, 기원전 78년, 오환족의 일파가 그 곳에 자리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대놓고 오환족의 뒷통수를 노린 한나라쪽으로 오환족이 도망갔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태산 일대에 고인돌을 쌓으며 지내던 오환족은 ‘흉노-한-오환족’과의 전쟁과 무관한 다른 갈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미 고인돌이 서 있었고 그 곳에서 오환족이 어떤 제례의식을 치루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고로 저는 이들이 다른 갈래의 오환족이라고 보고자 합니다.
실제『삼국지』「촉서(蜀書)」〈선주전(先主傳)〉을 보면 時先主自有兵千餘人 及幽州烏丸雜胡騎, 又略得飢民數千人이라 하여 조조가 도겸을 공략하던 193~194년에 제(濟), 즉 산동성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가 사병 1천여명과 그 정도 규모의 유주 오환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족(雜胡)의 기병, 또 굶주린 백성 수천명을 얻어 다스리고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기원전 71년, 흉노의 지배하에 있는 오손을 이용해 한나라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는데『한서』「흉노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遣御史大夫田廣明爲祈連將軍, 四萬餘騎, 出西河;度遼將軍范明友三萬餘騎, 出張掖;前將軍韓增三萬餘騎, 出雲中;後將軍趙充國爲蒲類將軍, 三萬餘騎, 出酒泉;雲中太守田順爲虎牙將軍, 三萬餘騎, 出五原:凡五將軍, 兵十餘萬騎, 出塞各二千餘里. 及校尉常惠使護發兵烏孫西域, 昆彌自將翕侯以下五萬餘騎從西方入, 與五將軍兵凡二十餘萬眾. 匈奴聞漢兵大出, 老弱奔走, 敺畜產遠遁逃[三], 是以五將少所得.
기련장군 전광명이 4만기, 도요장군 범명우가 3만기, 전장군 한증이 3만기, 포류장군 조충국이 3만기, 호아장군 전순이 3만기 이렇게 5명의 장군이 총 16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으며 교위 상혜가 일리 계곡에 있던 오손(烏孫)의 도움을 부탁하니 곤미(昆彌 : 오손의 군주명)가 스스로 장수와 흡후(翕侯)들과 함께 5만여기를 동원해 서쪽에서 흉노를 공격하기로 했던 것이죠. 그리고 기원전 71년 여름에 벌어진 전쟁에서 흉노는 대패하고 뒤이어 흉노의 지배에 있던 소부족들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그 해 겨울, 호연제선우는 이전 패배를 만회하려고 스스로 장수들과 함께 1만기를 이끌고 오손을 공격했으나 이미 흉노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고 모두 회군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니 무슨 싸울 맛이 나겠습니까. 게다가 큰 비와 눈이 내리는 바람에 동사자가 크게 늘어 십분의 일이 돌아오지 못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정령(丁令)이 북쪽에서, 오환(『삼국지』는 丸이라 하고『한서』는 桓이라 쓰고 있다)은 동쪽에서, 오손은 서쪽에서 흉노를 들이치니 3국 연합군은 수만명의 흉노군을 베고 수만필의 말과 우마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오환이 2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멸족할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한서』에는 其(元鳳)六年 二月, 度遼將軍范明友擊烏桓還이라고 적혀 있어 원봉 6년(기원전 75) 2월, 도요장군 범명우가 오환을 격퇴하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오환족이 기원전 79년, 흉노와 한군에게 패했으면서도 그 잔당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과 4년 뒤에는 정령, 오손과 함께 흉노를 공격해 대승을 거둘 정도로 그 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럼 마지막으로 정리해 볼까요?
기원전 80~79년 사이, 오환족은 다시 힘을 길러 강성해집니다. 그리고 선조 동호를 멸망시킨 흉노에 복수의 칼을 들이밀지요. 기원전 79년 어느 시점, 오환족은 흉노족의 사기를 저하하기 위해 그들의 영웅인 묵특선우의 무덤을 도굴합니다.
기원전 75년 범명우는 다시 한번 오환족을 공격하고 돌아오는데 이는 그만큼 오환족이 한나라와의 국경 지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오환족은 기원전 71년 겨울 정령, 오손과 같이 흉노를 합공하여 엄청난 전과를 세울 정도로 힘이 회복됩니다.
대부분의 연구 성과들은 박씨 집단이 '북쪽에서 온 집단'이라는 것에는 일단 100% 통일된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씨 집단이 해상으로 들어온 집단이라든지, 남방에서 유입된 집단이라는 식의 해석은 하지 않고 있지요. 그리고 그 집단이 '기마민족'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견해가 집중되어 있지요. 하지만 저는『삼국사기』의 농사와 양잠을 장려했다는 기록과 신라의 기병 활용 기사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박씨 집단이 기마민족이라는 것에 희외를 품고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기마민족이라 하더라도 그가 건국한 서나벌이라는 국가 자체는 기마민족의 그런 '유목국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지배집단이 기마민족이기 때문에 국가의 정체성(Identity)이 완전한 '정주국가'와 같을 수도 없겠지요.
『삼국사기』권1「신라본기」제1〈박혁거세거서간〉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위 기사는 박혁거세 거서간 재위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입니다. 이 해에 고구려의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기원전 37년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겠지요. 이처럼 신라는 고구려가 건국되기 20년 이전에 이미 국가를 건국해 경영해왔습니다. 일국의 왕이 건국한지 20년간 그럼 어디서 지냈단 말입니까? 물론 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냈을 수도 있고, 그간 이동 생활을 하느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여 도읍에 성을 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암튼 이 기록만 보더라도 신라, 즉 박혁거세의 서나벌이라고 하는 국가가 갖고 있는 특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대까지 건너갈 것도 없지요. 고려시대「대악후보(大樂後譜)」라는 책에 실린〈쌍화점(雙花店)〉이라는 노래의 악보를 보면 당시 이슬람 문화권에서 온 '회회인(回回人)'이라 불리는 이슬람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강의 악보는 '샹화점(雙花店)에 샹화(雙花)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 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싸미 이 점(店)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인데 그 뜻을 풀이하자면 '쌍화점이라는 가게에 샹화, 즉 술을 넣어 발효시킨 몽골식 빵을 사러가자 이슬람인이 내 손목을 쥐었는데, 이 소문이 나서 알아보니 점포 밖에 드나드는 가게 일꾼 네가 퍼뜨린 말이라 하더라' 뭐 이런 뜻입니다. 또한 중국 광동성 광주의 이슬람 성지에서 '라마단(剌馬丹)'이라는 이름을 가진 38살의 고려의 이슬람 신도의 묘비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건국신화를 보면 처음 박혁거세는 태어나서 6촌장들에게 길러지는데 10여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6촌장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왕으로 삼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及年十餘{三}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
일단, 6촌장들에 의해 박혁거세가 길러졌다는 내용은 가라일 겁니다. 왜냐하면 박혁거세의 탄생 자체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다소 신화적인 윤색이 이뤄진 상태였죠. 그렇기 때문에 박혁거세라는 어린 아이를 6촌장이 얻었을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박혁거세라는 인물은 곧 박씨 집단을 대표하는 대명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박혁거세가 이때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박혁거세 집단이 이때 처음으로 6촌장들과 만난 것이라고 봐야 옳을 듯 합니다.
즉, 박혁거세가 태어난 기원전 69년, 오환족은 한반도 내지로 이주해온 상태에서 과거 조선의 유민, 즉 단군조선의 유민으로 보이는 6촌장 집단들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양집단의 접촉 방법은 당연히 무력 대결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6촌장 집단의 경우, 기원전 1세기 중반이기 때문에 분명히 철기문화에 기반을 둔 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박씨 집단의 경우야 뭐 이미 북방에서 전쟁이라면 이골이 난 집단인데다가 역시 철기에 기반을 둔 기마민족이었습니다. 고로 둘다 철기문화에 바탕을 둔 집단이었다 하더라도 양측의 대립에서 박씨 집단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기선을 제압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이때 박씨 집단의 수장(首長)은 당연히 박혁거세의 아버지인 '○○ 거수'였겠죠. 이름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현재는~
그리고 박혁거세가 10여세가 되기까지 박씨 집단은 국가를 건설하지 못 합니다. 즉, 박씨 집단은 기마민족인 오환족이 주축이 되어 재지집단인 6촌장 세력을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을 못 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다가 박혁거세가 10여세가 되어 총명하고 행동이 조신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왕으로 모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박혁거세가 10세가 되는 기원전 60년부터 뭔가 주변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박혁거세가 10세가 되는 기원전 60년부터 어떤 계기에 의해 건국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박혁거세가 13세가 되는 기원전 57년에는 서라벌이 건국...
분명한 건 기원전 79년 격파되어 도주하던 오환족이 기원전 57년, 건국한 서라벌의 도읍이 한반도 동남쪽 끄트머리 경주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참고한것
『신라사 둘러보기』 신광철 저著,
첫댓글 모르지요. 흉노가 서양까지 갔던걸 보면 혁거세의 조상들이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는 확증도 없겠지요. 만약 경주가 아니라면 경주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신라시대의 유물이라 추정(?)되는 것들은 뭐란 말입니까?
저는 가끔 대륙삼국설이니, 대륙고려설이나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래... 삼국이 대륙에 있었고 고려도 대륙에 있었다 치자... 그러면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유적들은 뭐냐... 외계문명이냐... 아니면 일본문명이냐... 도대체 뭐라 대답할거냐...
뭔가 주장을 하려면 때로는 반증도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그저 사서를 바탕으로 주장을 하지 실질적인 실물을 근거로 주장하지 않지요.
이 내용은 대륙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위에서 박혁거세 21년에 성을 쌓았다는 금성이 경주이고, 원래 국가를 건설한 곳은 다른 곳일 거라는 내용이죠.
네. 어디까지나 사족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 보기로는 윗글을 쓰신 신광철 님은 대륙삼국론자 아닙니다. 제가 조금 오해하게 글을 편집한것 같은데 신광철님은 박혁거세 집단이 오환족이라면 한반도 이동하는경로로서 도읍한 서라벌이 지금의 경주는 아니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뭐. 그럴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