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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운동의 율법에 대하여.. / 김규욱목사의 "기독교 윤리학"에서 발췌
이 글은 자유게시판 10036번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올림을 참고바랍니다.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아래 글의 내용을 네가지 색으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보라색은 저자가 보수신학(전통적 개혁신학)의 율법과, 성화와 관련해 문제점들을 비판한 글이고
-빨강색은 저자가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 입장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파랑색은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서 본 김규욱목사의 견해에 대한 저의 지적입니다.
-검은색은 일반적인 내용과 인용글로 보시면 됩니다.
율법부분, 성화부분, 그외 부분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누었고 제 견해는 파랑색으로 글 밑에 적었습니다.
길어서 글쓰기가 안되어 우선은 율법부분만 올리고 성화부분과 그외 부분은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윤리학"
말씀운동 산하의 광야의 교회, 저자:김규욱목사, 출판사:진리의 말씀사, 2004년 8월1일 초판발행
저자소개: (책 내부표지에서 발췌)
저자는 1956년 대구에서 출생, 고등학교 시절 교회를 다녔으나 전혀 신앙에 눈을 뜨지 못했다.
경북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대학시절 정신적 방황을 거친 후 졸업직전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을 수록 성경의 진리에 대한 의문과 갈증이 심했고 도피처로 신학교를 생각하던 중
말씀운동을 접했다(1981)
서울대에서 교육학 석사를 마치고 총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M.div).
그 후 서울대에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2001)
또한 말씀운동 산하 교육기관인 로고스 성도대학과 로고스 신학원을 졸업했다.
뉴질랜드 바이블칼리지(BCNZ)에서 방문 학자로 1년반 동안 연구(2002~2003)
현재 18년동안 광야의 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로고스성도대학장과 로고스신학원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http://www.logos.or.kr/theology_03.html)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방법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넣으시기도 하시고 거기서 건져 내기도 하는 분이다.(15p)
이 책은 지난 20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박용기 목사님을 통해 제창되고 정립되어온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이론적 체계화의 과정을 근접거리에서 밀도있게 배우고 거듭거듭 확인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17p)
이 책은 저자의 은사이신 박용기 목사님의 소중한 지도의 산물이다.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여름
시골 어느 교회당에서 있었던 말씀운동 로고스 성도대학 사경회였다.(24p)
율법 관련부분
2. 신본주의가 인본주의로 변질
(43~44p) ~~~보수신학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 계시중심의 신학을 명제적으로 표방한다. 그러나 보수신학 안에 인본주의적인 도덕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구속사적 신학의 결정적인 약점에서 기인한다. 구속사적 보수신학에 의하면, 구속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구속받은 이후의 삶은 상당 부분 인간의 도덕적 책임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즉 도덕법으로서의 율법 특히 십계명을 성도가 지켜야 함을 역설한다. 이 점에서 전통적 구속사적 입장에 서 있는 보수신학은 철두철미한 계시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계시와 도덕을 잘못 결합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
1.2.2 현존 기독교 윤리학의 인본주의적 도덕화 현상
1. 보수신학적 기독교 윤리학의 규범주의적 도덕화
(47~49p) 보수신학의 기독교 윤리학은 성도 행위의 근거와 정당성을 구약의 율법의 조항에다 둠으로써 구약 율법의 계시적 혹은 언약적 성격을 간과하고 율법을 도덕적인 명령 혹은 규범으로 이해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실상 종교개혁 이후 5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전통적 개혁신학이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즉 율법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는 기독교 윤리학의 문제점은 나름대로 건전한 개혁신학의 전제와 원리를 그 자체 안에서 허물어 버리는 결정적인 모순과 취약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보수신학,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전통적 개혁신학은 성경의 권위를 수용하는 토대 위에서 하나님 주권과 영광 그리고 인간의 전적타락과 이신칭의와 같은 주옥과 같은 신학적 명제들을 산출해 내었고 그 나름의 역사적 소임을 수행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결함, 즉 율법을 성도생활의 규범으로 해석하는 신학적 오류가 개혁신학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보수신학 안에 율법 해석과 관련을 갖는 기독교 윤리학의 문제점은 개혁신학이 지니고 있는 매우 건전한 신학적인 원리와 명제들의 타당성을 내적으로 부정하는 모순을 야기시키고, 더 나아가 신학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 간혹 구약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으며 율법주의적 경향에 대한 문제점들이 현실적으로 지적되고는 있지만 종교개혁 이 후 율법을 도덕적 규범으로 간주하는 신학적 전통을 혁파하고 성경적인 대안적 논리를 제시하는 신학적 해명은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즉 율법을 기독교 윤리의 규범으로 보는 것이 율법주의적 경향을 낳게 된다면 그것이 아닌 어떠한 복음적인 원리에 의해 성도의 거룩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아직도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보수신학의 딜레마이다. 기독교 윤리학에서 율법을 강조하게 되면 율법주의로 흐르게 되고, 반면에 율법을 규범으로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면 방종주의나 혹은 율법폐기론으로 규정된다. 이 때문에 보수신학 안에서 율법을 둘러싼 기독교 윤리학은 접근하기를 꺼려하고 회피하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까다로운 주제가 되고 말았다.
2.1.1 보수신학의 기독교 윤리학 - 율법주의적 오류
(89p) ~~~칼빈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대해 역설했고, 인간 구원의 영원한 예정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인 원리를 잘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 신학적인 원리와는 정면에서 배반되는 점을 기독교 윤리 분야에서 드러내었다. 즉 율법을 성도생활의 규범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규범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 순종을 강조했고 이는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 주권이라는 명제를 무색하게 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생활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을 하고 말았다.
(91p) ~~~그러나 후대 개혁신학자들은 루터와 칼빈의 신학체계를 거의 절대화하여 정통신학이라는 미명아래 개혁자들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강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림으로 인해 원래의 복음적 취지와 생기를 상실해 가는 문제를 야기했다. 특히 율법의 문제에 대한 그릇된 신학적 해석은 후대의 전통적인 보수신학이 종교개혁자, 특히 칼빈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하게 된 중대한 오류였다. 올바른 성경관과 구원론에 의해 출발한 종교개혁의 진리운동이 그릇된 율법해석의 거대한 장벽에 부닥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해명과 청산이 없는 한 보수신학의 앞날은 암울하게만 보인다.
2.1.2 자유주의신학의 기독교 윤리학 - 상황주의적 오류
(101p~102p) ~~~정리하자면 보수신학의 기독교 윤리는 주어진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어떻게 지킴으로써 성도의 삶을 추슬러 갈 것인가라는 규범주의적인 시도를 하고 있고, 자유주의신학의 기독교 윤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함을로써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행복주의적인 대답을 하려고 한다. 둘 다 철두철미 인간 중심적 논리이다. 전자는 철학적 윤리학에서 말하는 칸트식의 의무론적 윤리학의 주장, 즉 규범의 보편성과 그것에 대한 의무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고 있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혹은 행복론적 윤리학의 주장, 즉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일인가를 추구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성경의 입장에 의하면 그 양자의 철학적인 시도는 허탄한 시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며 또한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성경은 규정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율법아래 두셔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성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성취하시고 하늘의 복을 거저 베풀어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깨달아 가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 복을 깨닫는 농도만큼 참된 복이 있으며 그런 자에게는 사랑의 법이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인간 중심의 율법(의무)주의적 시도와 행복주의적인 시도를 완전히 벗어난다. 그러나 보수신학과 자유주의신학 양자는 기독교 윤리가 지녀야 할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단순히 인간의 행위의 차원으로 전락시켰다. 즉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혹은 인간은 어떻게 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라는 인간 본위적이며 행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고 있다.
2.2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
(108~109p) ~~~성경 전체의 의미적인 통일성과 그것을 드러내는 해석학적인 원리가 전제되지 않는 성경의 부분적인 연구는 신학의 연구를 더욱 난삽하고 혼란하게 할 뿐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악순환의 결과를 빚어낼 뿐이다. 이전의 부분적인 연구의 결과가 이후의 연구자의 선행조건과 선지식이 되어 점차 성경의 전체를 보는 안목은 흐려지고 따라서 전체적인 숲을 조망하기 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매몰되는 연구만이 양산되게 되었다. 그것도 전문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이루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전문적인 신학 작업과 현장 목회와의 괴리감과 상호 불신감은 오래 전부터 심화되어 왔고, 신학 작업과 목회 현장은 각기 다른 윈리를 가지고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학 적업은 목회 현장과는 겉도는 지엽적이고 난해한 이론적인 문제의 질곡을 헤매고, 목회 현장은 건전한 신학의 지원을 받지 못하므로 진리의 원칙에 입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부흥의 원칙들만이 난무하게 된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이제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총체적인 전환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즉 전통적인 구속사적 관점의 편협성, 성경 전체에 대한 안목과 전체 원리의 지원없이 이루어지는 성경 부분에 대한 연구 이른바 전문적 연구의 경향들, 교의신학적 전통과 전제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폐쇠적인 교리의 연구들, 성경의 전체 원리에 대한 이론적 관점을 포기한 채 아예 지엽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실천신학적인 응용연구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은 이 모든 연구 경향들을 문제시 한다. 그러한 연구들은 하면 할수록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상실한 파편적인 성경지식과 그에 따른 인간 본위적인 내용, 그리고 목회 기술적인 방법론만이 산출될 뿐이다.
3.1.2 기독교 윤리의 주관자
(170p) ~~~루터로부터 시작된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적 모티브는 인간의 구원 문제였다. 구원의 문제에 신학적 총력을 기울인 나머지 그 이후의 보수신학은 전체적인 신학의 틀이 구속사적 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성도의 생활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를 하나님 중심으로 개진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칼빈은 전체적으로 보아 구원론 중심의 루터 신학보다는 하나님중심으로 진일보한 면이 있지만 특히 구원 이후의 성도생활의 문제에 가서는 오히려 루터보다도 더욱 인본주의적인 문제점을 노출하고 말았다. 칼빈은 구약 율법중 십계명을 도덕법으로 간주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고, 구원 이후의 인간은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그토록 강조하고자 한 하나님 주권사상이 성도의 생활에는 실질적으로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율법이 교훈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음으로 그것을 성도생활의 규범으로 지켜야한다고 하는 이른바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대한 칼빈의 강조는 율법에 대한 오해일 뿐 아니라 그것은 성도생활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말았다. 라고 하면서 아래 주장에서는 “성경신학에서는 성도생활의 규범 혹은 법을 말하되...”라고 또 다르게 이야기를 합니다.
3.2.2 기독교 윤리의 기본
(206~207p) ~~~ - 롬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게재
위의 말씀처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이며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다. 그 사랑은 과거의 죄악된 옛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앞의 3장(3.1.1) '기독교 윤리의 행위자'에서 검토한 대로 성도는 지체로서 행하게 된다. 즉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베푸는 사랑의 공급을 통해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을 법조문에 의해서 조항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의 법이 성령의 절대적인 도우심과 인도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성령의 성취사역이다. 다시 말해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약속대로 오신 성령이 성도로 하여금 행하게 하시는 성취사역이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 위의 줄친 부분에서 사랑의 법 안에 율법의 근본정신이 내포되어 있다는 뜻인데 다른 곳에선 율법의 근본정신이란 이야기를 전혀 볼 수 없었는데 그래도 여기서 그 용어를 쓴 것은 좀 다행인 것 같습니다.
결론짓자면, 성경신학에서는 성도생활의 규범 혹은 법을 말하되 보수신학에서처럼 인간 밖에서 인간에게 당위를 요구하는 무거운 법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 속사람의 성장을 통해 내면에서 이루어져가는 가벼운 사랑의 법이다. 그리고 이 때 사랑의 법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인본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만이 성취할 수 있는 아가페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구약처럼 돌비에 새겨놓은 법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법으로서 성령께서 진리의 깨달음과 감동을 통해 성취해 가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법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러한 성령의 법 혹은 그리스도의 법 또는 사랑의 법의 인도 아래 있기에 이제는 무거운 정죄의 법인 율법의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또한 아무런 행위의 규범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무정부주의적인 방종주의를 완전히 극복한다. 예수 안에 성도는 율법으로 벗어나 자유롭되 성령의 법에 매여 기꺼이 사랑의 종노릇하고자 하는 질서 있고 섬기는 삶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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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윤리학 초반부에(15p)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방법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으로 슬로건처럼 이야기하며 논리 주장을 시작하는 것을 보아서도 느끼듯, 말씀운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것의 목적이 다 하나님의 영광 선포를 위함이라고 그들이 자주 쓰는 말도, 써서는 안될(사단을 창조하신 목적..) 곳에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이야기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번째 문항에서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명시가 되었듯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최근 자유게시판 10066번에 올린 "장안중앙교회 해명과 답변" 글에서도 그들의 신학관점을 대충 짐작하셨듯이 율법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위의 글 (47~49p)에서 반면에 율법을 규범으로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면 방종주의나 혹은 율법폐기론으로 규정된다 라고 말했지만 제가 보기엔 말씀운동의 현실은 이와 다를바 없습니다. 칼빈의 율법관을 지나치게 한쪽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을 뿐아니라 보수신학(개혁신학)의 율법관도 왜곡하여 신도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말씀운동에서 이야기하듯 율법을 교훈으로 받아드리며 인간의 의지로 율법 조항들을 지키려 하는 목회자들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신학 안에 인본주의적 도덕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하며, 보수신학을 따르는 모든 교회들이 다 그렇듯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말씀운동에 몸담고 있는 신자들을 오도하고 있는 처사입니다. 이것은 말씀운동의 주장을 정당화 시키려는 의도이고 신자들을 말씀운동에 정착시키려는(묶어두려는) 뜻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보수신학에서는 말씀운동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을 인간의 의지로 법조문 하나하나 지켜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며, 새 언약하에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힘주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게 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운동에서는 보수신학을 성령의 도움을 배제한 인간의 의지로 지키겠다는 율법주의로 몰아붙여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 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17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율법과 구약성경을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밝히고 계십니다.
김규욱목사의 율법관은 박용기목사를 비롯 강남노회 목사들과 같습니다. 제가 장안중앙교회에서 년2회로 발간하고 있는 계간지(1980년부터 발간- 강남노회 목사들의 소고들을 모은 계간지이며 모든 강남노회 교회에 공급하고 있음)를 처음호부터 대부분 갖고 있어서 그 안의 내용들을 보고 강남노회 목회자들의 율법관이 같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국제총회에 소속되어 있는 강남노회입니다. 개혁국제총회의 총회헌법에 성경소요리문답은 아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입니다. 율법부분이 전체 중 약 40%의 비중을 두며 다루는 것은 그만치 율법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런데 말씀운동은 예장 개혁국제총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장로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문답에 있는 여러 부분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이 나오게 된 취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소요리문답(小要理問答, Shorter Catechisms)은 17세기부터 지금까지 350년간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가 교리 표준으로 또한 자녀 교육의 지침서로 삼아 온 총 107 문답서로 된 기독교의 중요 교리서이다. 소요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대요리문답과 함께 1647년에 작성된 것으로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성경 골자의 요약, 칼빈주의 교리의 완숙한 표현, 개혁주의 신학의 집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천년 신앙역사속에 이단과 싸우며 성경을 정립하여 남겨둔 각종 신조는 많은데 그 중에 장로교가 교제로 사용하는 문답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문답입니다. 고백문헌들은 이단들의 도전이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교회가 신앙하는 바를 조리 있게 체계화 한 것입니다.
참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중에서 일부 발췌
소1.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2. 어떻게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해야 하는지 우리를 지도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규범을 주셨는가?
☞ 구약과 신약성경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 해야 하는지 우리를 지도해 주는 유일한 규범이다.
소3. 성경은 주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 성경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소3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인가?
☞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그가 나타내신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소40.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법규로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법규로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도덕상의 법칙이다.
소41. 이 도덕상의 법칙은 어디에 요약되어 있는가?
☞ 이 도덕상의 법칙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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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중에서 일부 발췌
대3.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 구약과 신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범이다.
대91.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인가?
☞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그의 계시된 의지에 순종함이다.
대93. 도덕법은 무엇인가?
☞ 도덕법은 인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이다. 모든 사람이 개별적으로 온전하게 영원토록 이 법을 지켜 순종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이 해야할 모든 의무를 성결과 의로 행하도록 지시하고 요구한다. 이 도덕법을 지키면 생명을 약속하고 이것을 위반하면 죽음으로 경고한다.
대94. 타락한 후의 사람에게도 도덕법이 소용있는가?
☞ 타락후에는 아무도 도덕법에 의하여 의와 생명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크게 소용되는 것이다.
대95. 도덕법이 모든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 도덕법이 모든 사람에게 소용되나니,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뜻과 그들이 따라서 행해야 할 의무를 알게 하는데 소용된다. 또 도덕법은 그들이 이를 지키는데 무능함과 그들의 성품과 마음과 생활의 죄악된 타락성을 확신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와 재난을 느껴 겸손케함으로서 그리스도와 그에게의 완전한 순종의 필요성을 보다 더 명백히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98. 어디에 도덕법이 요약되어 포함되어 있는가?
☞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시내산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르시고 두 석판에 친히 써 주신 것으로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첫 네 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나머지 여섯 계명에는 사람에 대한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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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느티님의 그 반론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네요. 상대방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을 제기 할 수도 없는지도 모르지만).... 단지 "우리도 그리는 생각하고 있으니까 우리를 너무 매도하지(오해하지)는 말라" 라는 투의 글로 보입니다.
그런데요, 소위 님이 말하는 그 "정통 보수주의" 를 표방하는 분들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 설교하며 교리와 삶(목회)를 같이 하고 계신 분들이 누구인지요? 이것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져 "우리 정통 보수신학도 그리한다!' 라는 주장은 한낫 탁상공론이요 말장난이 아닐까요?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저 나름대로는 그 "정통 보수주의자이며 근본주의자" 입니다. 물론 그 말의 정의는 각각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요.
말씀운동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떨림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떨림님은, 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통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그렇게 설교하시는 분들이 없다는 이야기신지요? 떨림님이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어떤 근거를 갖고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까? 제게 아무 근거없이 주장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표현을 잘못한 것 같네요. 보수주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근거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근거는 제가 지금까지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서적을 통해, 주위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터넷이나 그외 매스컴을 통해, 카페활동을 통해,,, 듣고 본 것들을 바탕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제가 잘못 알 수도 있으니까 설득력 있게 권고하세요.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떨림님이 이야기를 하셨듯 반론이라고까지 생각지는 않습니다. 단지 말씀운동에서 보수신학 쪽의 사람들 모두가 말씀운동에서 말하는 것처럼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고 신도 자신이 율법을 따른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를 말한 것입니다. 말씀운동은 이 율법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와 맞물려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말씀운동은 언약성취라는 논리로 성경 전체를 달리 보고 있기 때문에 보수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대부분 다른 시각과 논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보수신학이 갖고 비성경적인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차원에서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필요하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연구해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운동처럼 혁명적으로 모든 것을 뒤집어 가며 앞서 가려다 기독교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언약성취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옳다 봅니다. 님도 인정하다시피 일부 소위 정통보수신학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지, 윗글의 주장은 옳은 것입니다. 저는 인간구원을 위한 신학으로 성경의 촛점을 맞추어 가는 것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발상이라 봅니다.
맞습니다. 언약성취의 관점은 좋은데 말씀운동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저도 관심이 많아 신학자나 목사님들의 언약에 관한 글을 읽고 있습니다. 구속사보다 더 성경적이고 넓은 차원에서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있다고 봅니다. 말씀운동은 자칭 삼대언약(창1:28절)이라는 것에 모든 것을 꾀 맞춘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다보면 성경 전체를 오해할 소지가 많습니다. 곡해도 하게 되구요. 하나님의 약속중 하나라고 해석하면 좋을텐데.. 다음 글에 구원과 성령에 관해서 글을 올리려는데 그것도 한번 읽어 보세요.
그렇다고 제가 구속사신학을 전부 감싸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성경적이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들은 과감히 도려내야 겠지요. 보수라는 단어도 말씀운동에서 썼기 때문에 같이 쓰고 있습니다만 개혁이라는 뜻과 용어가 저는 더 좋습니다. 말씀운동이 개혁차원에서 연구해낸 것은 찬사를 보낼만 하지만, 400여년 동안 선진들에 의해 땀흘려 이어져 내려온 신학을 말씀운동에서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신학의 잣대로 마구 칼질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그 신학의 문제점들에 대해 실상을 전하고 다시한번 검토해 보시라는 뜻에서 밝히는 것입니다. 11:43
네. 감사합니다. 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사실 저는 말씀운동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져 님이 올려주신 글을 보고 그 한도내에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 '말씀운동' 이라는 그 자체나 단체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계속 수고하여 주십시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