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와 앙제여행1 - 기차로 낭트에 도착해 고성에서 낭트 칙령을 회상하다!
10월 24일 아침에 투르 역 인근에 있는 로시니 호텔 De Rosny Hotel 에서 체크아웃
을 하며 호텔비 를 계산하는 데......
내 생각으로는 98 유로 정도일거라 짐작했는데, 무려 115 유로를 달라고 하네요?
인터넷 예약사이트 아고다에서 트윈룸 하루밤을 49 유로에 예약했었지만, 프랑스 철도
파업 으로 몽셀미셀 에 가지 못하는 바람에 하루 먼저 도착해 이틀을 묵었던 것인데....
아고다를 통해 미리 예약한 것은 49유로이나, 현지에 도착해 하루를 더 예약한 것은
그 보다 더 비싼 62유로 이고 거기에 로비에 있는.......
컴퓨터를 2번 썼으니..... 2유로씩 4유로를 더하여 모두 115유로 랍니다???
이때 내 안색 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울 마눌은 무슨 일이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기에 화들짝 놀랍니다!
실은 호텔에 몇푼 더 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절약정신이 몸에 배인
마눌이 혹여 "바가지" 를 썼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일 이라....
울 마눌은 단돈 100원이라도 더 내면 참지 못하는 성미라..... 저기압 이 되어 말도
안하고 토라지면..... “앞으로의 여행이 난감”해 지는 것입니다!
호텔비는 대행업체 아고다를 통한 사전 예약이 할인 이 된 것이라 현지 직접 예약 과
금액이 다르다면 그것도 규칙이라 항의해 보아도 소용없으니.....
얼른 웃으며, 컴퓨터 사용료를 2유로나 달라고 하네, 하고 얼버무리며 수습을 합니다!
그리고 걸어서 5~ 6분 만에 투르역에 도착해 오를레앙 가는 기차시간을 확인하는데...
철도 파업 중이라 수시로 노선이 없어지고 시간도 바뀌는 터라 전광판을 보니.....
아니 저기 낭트 Nantes 가는 기차가 떴네요?
순간의 망설임..... 그래 나중에 후회하기 보다는 좀 무리를 해서라도 가보기로
하자고 생각하고는 유레일패스로 기차에 바로 올라타서는 자유석 에 앉습니다.
기차는 투르 Tour 시가지를 벗어나 서쪽으로 달려 넓은 들판을 지나.... 어제 다녀온
그 소뮈르 Saumur 역을 지나 서쪽으로 달리는 데....
애드벌룬 기구를 타는 사람들이며 농약을 살포하는 기계를 스쳐 지나 앙제 Angers
역으로 들어 갑니다.
여기 앙제 는 돌아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계속 달리니... 숲이 우거진 마을에 뾰족탑
교회당이 보이고 이어 방어용인 듯 큰 원형으로 쌓은 성의 탑도 보이네요!
그러고는 투르를 출발한지 2시간만에 드디어 낭트 Nantes 에 도착하였는 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코인라카 Consignes 가 보이지를 않으니 이를 어쩌나???
할 수 없이 배낭을 메고 남문 으로 해서 밖으로 나오니 현대식 역사는 물결 무늬 가
특색이 있어 보입니다.
( 낭트 성과 대성당이며 시가지로 가려면 북문 으로 나가야 합니다! )
그러고는 우리 부부는 배낭을 메고 루아르 강 으로 연결되는 생 팰릭스 운하 에 정박
중인 배들을 구경하며 내려가서는....
다리를 건너 화단을 지나 낭트성 을 찾아가는 데... 고풍스러운 집들이 늘어선 주택가와
공원을 지나 드디어 성 아래에 다다릅니다!
옛날 성 밖에 둘렀던 해자 는 이제 약간은 물이 차고 나머지는 잔디며 나무가 들어찬
공원인데, 그래도 성벽은 참 높아 보입니다!
낭트 Nantes 는 일찌기 켈트족의 땅 으로 10세기에“브르타뉴 공국의 수도”였으며....
15세기에 브르타뉴공 프랑수아 2세가
여기 낭트성 그러니까 브르타뉴 대공 성 Chateau des Ducs Bretagne 을 축성했습니다.
1,491년 영주 프랑수아 2세 공작 이 후사(아들)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 왕 챨스 8세 는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 황제와 경쟁 끝에....
프랑수아 백작의 딸로 상속자인 안 드 브르타뉴 과 결혼 해서는 브르타뉴를 차지 하니...
켈트족의 나라 브르타뉴 는 이때 비로소 프랑스 땅 이 됩니다!
그후 여기 낭트 는 18세기에 이르러 무역항 으로 번영하였으니 식민지에서 들어온
소금과 사탕수수가 이 항구로 부터.....
프랑스 전역과 영국으로 실려 나갔으며 노예, 직물과 더불어 삼각무역의 한 축 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또 낭트성인 브루타뉴 대공 성 Chateau des Ducs Bretagne 에서 1,598년 앙리 4세 가
가톨릭 과 개신교도간의 종교전쟁인 내전 종료를 선언하며 낭트칙령을 공포 하였습니다.
낭트칙령 은 1,598년 앙리 4세 가 가톨릭과 신교도의 종교전쟁인 내전을 종식하고
신교도인 위그노 의 종교자유 를 일부 보장한 칙령이지만......
그것은 "신교도가 사는 지역에 국한된 것" 이고 파리에서는 가톨릭만 믿어야 하며....
신교도 예배를 금지 하는 등 불리한 면도 있었습니다!
과거 프랑수아 1세 가 구교 가톨릭 이외 신교 프로테스탄트는 이단으로 규정해 밀고자
에게는 압수한 재산의 25% 를 주었는 데....
1,562년 가톨릭을 대표하는 기즈 공작이 신교도를 학살 하면서 프랑스에서 내전 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앙리 4세는 발루아가의 방계인 부친으로 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권 후순위를 부여받았
으며 스페인 국경 나바르의 여왕인 어머니 잔달브레 에 의해 신교도로 양육되었습니다.
하여 신교도 총수 로 1,562년 부터 프랑스판 30년 전쟁에서 가톨릭군과 싸우다가 앙리
3세의 부인 피렌체의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기즈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사위로 삼는데...
결혼식을 위해 파리 를 방문한 어머니 진달브레가 가톨릭측에게 독살 당하는 와중에도
앙리 4세 는 800명 의 지지자 를 이끌고 파리로 올라와 결혼식 은 진행되었는 데......
축하연 도중에 기즈 공작과 다시 손잡은 카트린느 왕비 에 의해 “성 바르톨로뮤 축일
에 파리에서만 수천명의 신교도가 학살“ 당합니다.
이후 연금당한 앙리 4세가 탈출하여 내란이 재발 한후 발루아가의 남자들이 병으로
죽거나, 또 기즈 공작의 세력이 커지자 앙리 3세가 기즈를 암살 하니....
기즈 측에서도 가톨릭 수도사가 앙리 3세 왕을 암살 하는등 후손이 끊기자 앙리 4세 는
방계로 왕이 되니“부르봉 왕조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파리의 구교도 귀족 들을 설득하기 위해 앙리 4세 는 가톨릭으로 개종 하고 신교도에게
일부 제한된 종교 자유를 부여한 것이 낭트 칙령 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후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를 거치면서 낭트 칙령은 폐지 되고 종교 탄압 이
다시 시작되자.....
서남부 100만 신교도 중에서 일부는 학살당하거나 개종을 강요 당하고 나머지 40 만명은
네델란드, 영국, 프로이센으로 탈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걸어서 물어물어 생피에르 생 폴 대성당 Cathedrale St. Pierre
St. Paul 에 도착 합니다.
이 생피에르 생 폴 대성당 은 1,434년 브르타뉴 공작 5세 가 건설을 시작하여 4세기가
지나 완공 되었는데, 2차 대전과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대성당은 최근에야 재건했다는데, 프랑수아 2세 공비의 묘 와 대리석 르네상스 장식이
있다기에 찾아 보는데..... 교회에 놓인 석관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13세기 부터 현재까지 미술품을 소장하며 조르주 드 라투르, 앵그르 등 프랑스 화가
들이 주를 이룬다는 근처 낭트 미술관 Musee des Beaux Arts de Nantes 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너무 오래동안 걸은지라..... 그만 포기하고는 걸어서 뒤세스안
광장 공원길을 걸어 트램 1호선이 다니는 도로를 건너 다시 낭트역 으로 향합니다.
여기 낭트시 동부에는 볼로테로 공원 Parc du Grand Blottereau 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한국 정원 이 있다고 합니다.
낭트역 에 도착하니 조금전에 우리가 나온 남문 이 아니고 북문 인데.... 안으로
들어가니 세상에나!!! 여기에 코인 라커 콘시그나 Consignes 가 있었네요?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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