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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무대에 서서 내 인생의 아름다운 주연이 되고 싶어”
안영근 국회의원(열린우리당·인천 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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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군대 갈 나이가 되었네….” 나는 집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지체장애 3급이면 군입대가 가능한지… 가능하면 군대라도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국방위원회 간사인 나도 잘 모르겠다. 속마음을 눈치챈 집사람이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당신이 군대에 안 갔으니 우리 아이들은 가야겠는데요.”
1978년, 박정희 유신체제가 극성을 부리던 그 해가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국민은 오로지 지배와 통솔의 대상이었던 그때,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체육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국가수반을 선출하는 것도 의아했지만 그 결과가 더 재미있었다. 99%의 참석에 99.8%의 찬성으로 단독 입후보한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선출되었던 것이다.
국민은 엄숙할 정도로 조용했다. 궁금해서 펼쳐본 신문은 선거 뒷얘기와 박정희 대통령의 신통한 영도력에 대한 기사만 나열할 뿐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나의 주변에는 유신헌법과 군사독재의 문제점에 대해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물어물어 이념서클을 찾아갔다. 그들은 나를 매우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신정권의 감시하에서 회원이 늘지 않는 상황에 용감한 학생 하나가 제 발로 걸어 들어 왔으니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뭄에 단비’ 격이었다. 결국 그 해 유신정권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했을 즈음, 나는 공포의 특별법인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 최고형인 것을 알면서….
감옥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0.75평의 독방에서 머리맡에 재래식 화장실을 둔 채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잠을 청한 감옥에서의 첫날밤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새장에 갇힌 것이다. 일정한 시간마다 순시하는 교도관은 철창 사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곤 했다. 때로 화장실의 오물이 넘쳐 이불을 적시고, 곤히 잠든 한밤중에 생쥐가 나타나 내 귀를 물어뜯으며 놀다 갔지만 곧 콩밥의 콩알을 헤아리며 식사하는 맛에 길들여졌다. 어쩌다 마주하는 흉악범도 인간의 따스한 피가 온전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처한 환경이 왜곡되면 인간은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독방 끝 쪽에 갇혀 있는 막걸리 반공법 아저씨들의 억울한 사연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납북됐다 송환된 어부들, 술 한잔 걸치고 정권 욕하다 붙들려 온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연행당한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문 당하고 자신의 혐의를 시인하고 고문이 무서워 진술서에 찍은 지장으로 인해 간첩으로 둔갑하여 갇혀 있었다. 정권의 유지를 위해, 정보기관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인간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탄시키고도 태연한 지독한 유신정권이었다. 이처럼 콩밥과 생쥐, 똥냄새와 함께 1978년, 내 스무 살의 겨울은 지나갔다.
실제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데가 있다. 내가 겪은 스무 살의 경험은 지금의 젊은이가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나이 스무 살에 겪었던 이런 역사의 비극은 이제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스무 살이 되면, 이런 내 스무 살의 척박한 기억 속에 묻혀왔던 아련한 추억, 서슬 퍼런 유신의 압제하에서도 애잔하게 살아있던 스무 살 청춘의 낭만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도 싶다.
내가 스무 살이 된다면, 진짜 2006년에 스무 살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선 28년을 덤으로 더 살 수 있어서 좋고, 야간 통행금지가 없는 세상에서 한밤중까지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어서 좋을 것이다. 내 자신이 스무 살이 된다면, 나는 무엇보다 연극을 하고 싶다. 대학 1학년 때 연극부 단원 모집 포스터를 유심히 바라보며 내 몸매와 얼굴 모습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집에서 거울을 마주하고 아무리 내 얼굴을 뜯어보아도 나는 신성일처럼 잘생기지 못하였다. 결국 혼자 망설이다 지원도 못해보고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망설이지 않고 용감하게 연극부를 지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단역이든, 조역이든, 맡은 역을 잘 소화해내면서 한 편의 아름다운 연극을 완성시키고 싶다.
“영어를 열심히 했더라면 더 넓은 세상을 만났을 것”
심재철 국회의원(한나라당 안양시 동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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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과거로 여행해 내 삶의 궤적을 바꿔놓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영어 공부에 매달리고 싶다. 대학입시 때까지 내가 배운 영어는 성문종합영어를 통해서 배웠던 ‘문법(文法)의 영어’였고 영어 글자일 따름이었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외국인과 영어로 의사소통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영어시험 점수를 따기 위해서였으니 영어로 얘기하는 수준이야 뻔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당시에도 대학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외국과 교류하는 일 등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될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하긴 대학생이 되던 그때까지 비행기 타고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던 촌뜨기였으니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미래가 어찌 변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아, 지금이 대학 2학년 때라면 나는 미친 듯이 영어공부에 매달리고 싶다.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기 위해 만사 제쳐놓고 영어에 푹 빠지고 싶다. 내가 만일 지금과 같은 기초적인 생활영어 수준을 넘어 영어를 능숙하게 잘 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능숙한 영어 덕분에 지금보다는 훨씬 더 외국인을 자유자재로 만나 훨씬 더 세계화된 시각에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몽상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로 하고 싶은 것은 색소폰을 배우는 것이다. 지금처럼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고서야 색소폰을 배우느라 끙끙댔던 것보다는 대학생 때 배우기 시작했더라면 훨씬 더 습득이 빠르지 않았을까. 대학 2학년 때쯤 배우기 시작했더라면 군대 가서는 군악대에서 색소폰을 연주했었을 것이고, 군기 세기로 유명한 군악대에서 ‘뺑뺑이’ 돌면서 혹독하게 연습했을 것 아니겠는가. 아, 만일 그랬다면 지금쯤 내 색소폰 소리는 케니 지에 버금가지 않았을까….
참으로 유쾌한 상상이다. 영어를 외국인처럼 능숙하게 구사하고 색소폰도 감미롭게 연주할 수 있다면. 아마 내가 가지 않았던 길로 내 인생은 펼쳐졌을 게다. 다른 길을 걸었을 때의 내 인생이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시인 프로스트가 쓴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詩)는 그래서 늘 마음에 여운을 남겨준다.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보장된 삶보다 내가 사랑하는 성악의 길을”
김유경 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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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스무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좀더 깨끗하고 싶다. 그리고 불의에 당당히 부딪치는 용기 있는 젊음이고 싶다. 좀더 드러나게 시대를 논하고 싶고 문학적인 청년이 되어 오염된 세속을 질타하고 싶다. 하나님이 나더러 “스무 살로 젊어지라”고 하신다면 화려한 미래를 꿈꾸기보다 많은 영혼을 구원할 배고픈 영적 지도자가 되고 싶다. 영적 소명을 상업적인 기반으로 삼지않고 고통과 시련 속에 사는 사람들의 위로가 되고 싶다. 아마 지금 나는 너무 반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만약 나에게 지금 진정으로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글쎄요” 라고 얘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인생여정이 너무 피로하기도 하거니와 그래도 내가 선 이 자리에서 가장 충직한 인생의 지킴이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인생은 선택… 후회하지 않게 더 열심히”
최삼영 가와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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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나이엔 내가 뭘 했던가? 많은 친구들이 대학 배지를 달고 미팅 등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낼 때 나는 화사하게 핀 개나리꽃을 즐길 겨를도 없이 방황했던 재수생이었다. 일곱 남매 중 다섯 번째란 위치가 대입재수가 쉬 허용되지 않았으며 형과 어머니의 묵인하에 집에서 기르던 소 한 마리를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대책도 없이 촌놈생활을 접고 생면부지의 객지 서울에서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낮엔 단과반 학원에서 몇 과목을 들었고 저녁엔 대학생인 척하고 중학생을 서너 명 모아 어색한 표준말로 과외지도를 하며 근근이 끼니를 때우며 살아야 했다.
실패로 끝난 재수생활을 뒤로 하고 군대에 들어갔다. 군대를 마치고 돌아온 서울은 전두환 정권의 과외금지 정책으로 그나마의 호구지책도 끊겼고 ‘삼수(三修) 감점제’란 코미디 같은 입시제도를 경험하며 낙향(落鄕)하여 지방 국립대로 진학해야 했다.
원래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늦깎이 대학생의 전공 선택은 건축공학이었다. 건축가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나는 건축공부란 것이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을 익히는 곳으로만 알았으나 공부를 하면서 점차 이 분야가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곳이란 것을 깨달았다. 서울올림픽을 3년 앞둔 1985년 김수근 선생이 만든 ‘공간’에 들어가 건축이 기술과 예술을 아우르는 생활예술인 것을 인식하며 점차 설계하는 재미에 빠져들게 되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밤낮 없이 일한 10여년 뒤에 조그맣게 개인사무실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10년이 흘러서는 꽤 야무진 건축가 집단으로 인정받는 사무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면 ‘힘들었다’는 생각보다는 ‘아쉽다’는 생각으로 자주 머리를 젓게 만든다.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등.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후회는 최소화해야 한다. 부지런히 달려온 지나온 시간들 속의 많은 선택 중에 우연한 선택의 줄이었지만 오늘 내가 서 있는 건축가의 줄에 내 아이들 넷 중 누구든 하나쯤은 그 줄에 세우고 싶다.
만약 내가 스무 살의 나이에, 5년 일찍 건축가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혹 그때 좀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혹 유학이라도 다녀왔더라면 오늘날 내가 만든 집들의 모습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지나온 길이라고 해서 다 알 수 있다고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단지 앞으로 10년 또는 20년 후쯤에 지금의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오늘부터라도 내 인생의 방향키를 단단히 잡고 앞으로의 삶을 항해해야 할 것이다.
“세계최초 인상학 박사 위해 영어에 올인할 것”
주선희 인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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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어 처음 맞는 방학이었다. 친구들은 서울 토박이라 “부산바다를 보겠다”며 날 따라 내려갔었다. 날씨가 맑으면 일본 대마도까지 보인다는 용두산에서 바다구경은커녕 용두파출소와 첫 대면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벌금도 문제지만 부모님께도 연락이 갈 것이다. 어린 마음이 심란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경범죄로 조서를 꾸미려고 경찰아저씨와 마주 앉았다.
“어! 아저씨 지금 이사하시려는데 돈이 조금 부족하신가 봐요. 아님, 식중독이든지요.” “학생이 그걸 어떻게 알지? 어제부터 탈이 나서 계속 고생하고 있는데 이사도 해야 하고.” “얘는 관상, 수상 다 잘 봐요.” 옆에 있던 친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때부터 우리의 대화는 상(相)을 보는 쪽으로 흘렀다. “나도 좀 봐달라”며 노랗고 큰 주전자에 얼음과 음료수를 넣어 우리를 접대했던 용두파출소 아저씨들. 조서를 꾸미기는커녕 “서울 갈 때 쓰라”며 차비까지 받아 나왔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상을 보는 공부를 자연스럽게 했고 동서양의 인상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상학 1호 박사가 되었다. 2003년 박사과정 당시만 해도 어떻게 알았는지 독일의 사회학자인 랑게 교수가 공동연구를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1998년 나스닥에서도 좋은 조건으로 나를 영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학실력이 부족해서 스스로 거절하였다. 한국말로 한국사람을 카운셀링하는 데도 언어의 한계를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지금의 짧은 어학실력으로는 통역이 있어도 곤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재 원광디지털대학교의 얼굴경영학과 학과장으로 있지만 스무 살 때부터 외국어를 꾸준히 했더라면 아마 나는 세계 최초의 인상학 1호 박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내가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죽으라고 어학과 씨름해볼 일이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듯 원어민 같은 어학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 나는 며칠에 한번쯤은 딸아이에게 잔소리를 한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한 후 인상학 2호 박사가 되어 하버드에 서라!”
“내 영혼을 불태울 수 있는 꿈을 찾아 부딪쳐 보겠다”
김진철 21세기북스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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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는 내 꿈이나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한 채 근 50년을 살아왔다. 지금은 딱 맞아 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것은 찾은 것 같다. 너무 늦어서 대가도 크고 결과도 초라하지만 적어도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만약 스무살이라면 나는 먼저 내 꿈이 무엇인지를 찾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내 인생을 어떻게 가꾸고 싶은지를 먼저 찾겠다. 후회하고 나중에 딴 길을 찾을지라도 분열 없이 내 영혼을 태울 수 있는 그런 일을 찾아서 피 끓는 청춘을 불사르겠다. 그래서 저질러보거나 도전해보지도 못하고 지레 움츠러드는 못난이가 되기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저질러보는 도전자가 되고 싶다.
두 번째로 내가 만약 스무살이라면 피 끓는 힘으로 세상읽기에 도전해보고 싶다. 독서를 원 없이 해보고 싶다. 변명 같지만 지금은 시력도 나빠지고 힘도 없어서 그러고 싶어도 잘 안되고 짊어진 짐도 만만치 않아 몰입이 어렵다. 부족한 재주에 적당히 먹고 살 수 없으니 할 일이 많다. 게다가 읽어도 목적에 맞게 정보만 취해지니 한계가 많다. 그래서 더욱 인생의 짐이 적은 청춘 시절에 원 없이 책을 읽어 온몸에 지식을 가득 채워보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라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다가 혹시 멋진 작품이라도 하나 탄생할지 누가 알겠는가.
세 번째로 내가 만약 스무 살이라면 작은 일상사에서 내 자신의 정신을 키울 수 있는 ‘도전하기’에 힘쓰겠다. 그래서 마음을 크게 밝게 쓰고 소아에 사로잡히지 않는 호연지기를 키워보고 싶다. 비록 영웅은 아니더라도 잔머리 쓰지 않고 세상을 살 수 있는 그런 멋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한번 되고 싶다.
“인생 밖에 또 다른 인생이 있음을 그때 알았다면…”
이형석 비즈니스유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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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나는 노래가사처럼 그렇게 정향(定向)을 찾지 못해 방황과 번민을 거듭하며, 홀로서기에 지쳐 극한 외로움을 달래려고 그렇게 노래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한 지 만 3년째. 중학교 때까지 줄곧 법학도가 되겠다는 꿈은 4개월 동안 온몸을 던져 공부한 끝에 검정고시를 거쳐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합격을 했지만 등록을 하지 못해 포기해야 했던 아픔이 있다. 극히 짧은 기간 동안의 학습 성과를 보고 당시 검정고시 학원장은 “비행기표는 끊어줄 테니 호주의 자매학교 장학생으로 갈 생각이 없느냐”고 권유했지만 “내 힘으로 당당하게 일어서겠노라”고 거절했다.
또 누나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지원해 주는 학비가 부담스러워 몰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택한 아쉬움이 있다. 비록 최근에야 원하는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차라리 다소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유학의 길을 택했거나 학연의 끈을 이어갔다면 좀더 순탄한 길을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나간 얘기지만 정규 코스를 밟아 올라왔다면 지금쯤 국회의원이나 장관은 하지 않았을까 싶다. 몇 차례의 비교적 확실한 기회가 있었기에….
스무 살의 내 별명은 ‘영감’이었다. 생각의 골이 깊어 늘 친구들의 카운슬러였고, 비가 와도 뛰지 않았으며 화를 낼 줄 모르고 늘 웃기만 해서 붙여졌다. 그로 인해 그 시절에 느끼고 싶은 것들을 잃어버린 안타까움이 있다. “여행은 가진 자들만의 여유”라고 생각했고, “미팅은 철부지들의 시간 때우기”로 매도했으며 “디스코장 출입은 탈선한 이들의 몸부림”이라 여겼다. “만화는 불량학생들의 장난감이고, 술을 마시는 것은 비행 청소년들의 추태이며, 연애는 비뚤어진 학생들의 탈선”이라 몰아세운 것도 그 즈음이다. 그야말로 도덕책을 철저하게 신봉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 시절에 꼭 경험해야 했던 것 같다. 유일한 ‘탈선’이었던 장발 경험은 경찰에 쫓기며 뒷골목으로 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40대인 지금, 같은 경험을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증명해준다. 특히 만화는 상상력과 순발력을 키우는 데 유효한 방법이며 풋풋한 이성교제 경험은 결혼생활에 확실한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죽도록 사랑해 본 경험을 가진 자가 부러운 요즘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과 스무 살의 나이를 바꾸자고 해도 나는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 지독하게 외롭고 힘들었던 그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고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정 원했으나 가지 못했던 영화에 다시 도전”
정창석 LG필립스 LCD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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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중년 세대가 느끼곤 하는, 자신도 모르게 내부로부터 터져나오는, 뭔가 새로워지고 싶고 지금의 틀에 박힌 생활에서 일탈하고 싶은 충동을 나도 가끔은 느낀다. 결국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어쩌면 진정 내가 원했으나 가지 못했던 그 길, 그 삶을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중반에는 미국, 중국, 프랑스 영화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른바 방화(邦畵)라고 불리는 국산영화 중에도 좋은 영화가 꽤나 있었지만 이들 외국 영화의 위세에 눌려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하도 영화를 좋아해서 여기 저기서 돈을 구해다가 매월 평균 두세 편의 영화는 본 것 같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에서 상당한 호사였지만 영화를 통한 내 안의 여러 자아에 대한 간접 실현은 나에게는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극장에 갈 기회도 많이 없지만 아직도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뜨겁다.
그냥 밥 먹고 살기 쉬울 것 같아 경영대로 진학을 했었던, 진심으로 원치 않았을지도 모를 그 길을 선택했던 1976년 그때. 내가 스무 살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영화에 관련된 공부를 택하겠다. 그래서 영화감독으로서 훌륭한 연기자와 멋있는 작품으로 함께 작업하면서 세상에 길이 기억될 만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특히 보통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수묵화(水墨畵)처럼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삶을 산다는 것이 정말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두가 함께 느끼는 그런 사실적인 영화를 말이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유분방한 삶이나 생활은 아예 생각조차 못해 보았던 것 같다. 물론 그 시대에는 집안에 관계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자유롭게 청춘을 열어 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곳을 보고 느끼면서 마음과 생각을 키우고 그래서 무엇에든지 관대하고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면서 사랑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젊음의 시작인 스무 살이고 싶다. 그런 스무 살로 자라서 삶이란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내가 만든 영화를 통해서 모든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