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작가는 먼 길을 걷는다. 그대 걸음보다 빠른 교통수단을 멀리하라. 오래 길을 걸으며 생명, 사물, 현상을 묵상하라. 어둠 속에 잠긴 산길을 걸을 때, 산등성이로 다가온 별빛은 그대의 지도이다. 한적한 시골길, 불어오는 바람이 그대의 양식이다. 가로등 도열한 도심 길, 소음과 매연이 그대를 채찍질 할 것이다. 오랜 여행으로 지친 그대의 영혼이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 곳에서 그대는 오랫동안 탐색하던 그대만의 글을 발견하고 피곤함을 씻을 것이다. 그것을 나팔 삼아 그대는 또 다른 이를 먼 길 위로 이끌어 낼 것이다.
걷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밝은 영혼이 그의 것이다.
— Fibb Lickleyhood, {The Wild Path to a Serious Writer}, Volume I, Unpublished, p.94
최근 나는 체중감량에 돌입했다. 그 일환으로, 걷는다. 밤 열시 반쯤 사무실을 나서서 내키는 대로 방향을 잡는다. 신촌로터리, 연대 정문 앞을 지나 이대 후문까지 걸어가서,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은 버스로 지난 뒤, 사직공원 앞에서 인왕산길을 오르기도 한다. 이 경로를 이용하면 사무실에서 집까지 가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짧아서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인왕산길 따라 일부러 부암동 고개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기도 한다. 주로 이용하는 길은 사무실에서 이대 입구, 아현동, 충정로, 광화문을 지나 인왕산길에 이르는 길이다. 광화문 구세군 회관 옆에서 사직공원으로 빠지는 샛길로 가기도 하지만, 세종문화회관 뒷길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한시간 반 정도 걸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 정신이거나 취했거나, 걷는다.
이렇게 걸어서 귀가하는 것 만으로도 시작한지 이틀 만에 몸이 한결 가벼워 졌다. 사실, 그 먼 길을 어찌 걸어 갈까 싶어 끔찍하기도 했었다. 사오년 전에는 홍대 앞이나 신촌 인근에서 집까지 밥 먹듯 걸어 다니곤 했다. 지금보다 체중이 15Kg나 가벼웠던, 날씬하던 시절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몸이 급격히 불었다. 배도 많이 나왔다. 더구나 음주와 흡연을 주업 삼으며 운동을 게을리하다 보니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내 키는 179센티미터, 몸무게는 87킬로그램이다. 체중을 고백하면 그렇게 까지는 안 돼 보인다며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몸무게 잴 때마다 놀라곤 한다. 평생 이처럼 무거운 적이 없었다. 몸이 가뿐하다면 체중이 얼마든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다. 그러나, 몸이 무겁다는 느낌이 자주 들면서 마음마저 우울해 지곤 한다. 바지도 새로 사야 하고, 마라톤 대회에 나갈 수도 없다. 42.195Km는 고사하고, 하프를 완주한다고 해도 몸이 지금보다 10킬로그램 정도는 가벼워야 한다. 가까운 선배 하나가 내게 곧잘 하던 말이 있다. “배때기에 기름이 차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김밥 한 줄이나 바나나, 오렌지로 저녁을 대신하고, 퇴근길에는 무조건 걷기로 작정 했던 것이다.
걷고 뛰는 것 만큼 좋은 운동이 없다지만, 체중 감량의 가장 큰 적은 술이다. 소주 한잔엔 밥 한 공기만큼의 칼로리가 들어있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 앉아 한 시간동안 소주 두병을 비운다고 치자. 소주 한 병에 일곱 잔, 두병이면 열 네 잔, 한 시간 동안 열 네 개의 밥공기를 해치우는 것과 같다. 한 시간 동안 열 네 공기의 밥을 먹어 치운다면 배가 터져 버릴 것이다. 요행히 배가 터지지 않는다 해도,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이라면 체중 감량은 멀고 멀다. 바나나, 오렌지로 저녁 때우고 밤 마다 한시간 반씩 걷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체중 감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금주가 관건이다. 때문에 나는 당분간 술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금주를 결심하긴 했으나 십 수 년을 밥 먹듯 먹던 술인지라 유혹의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치기가 보통 쉽지 않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 간만에 만난 친구가 생맥주 다섯 잔을 비우는 사이에도 물만 마시며 꿋꿋이 버티다가 ‘내가 양주를 사도 안 마실테냐’는 말에 넘어가 딤플 반 병을 마셔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날 밤에는 부천시향의 말러 연주회 보고 나서 품평회 한답시고 친구들과 어울려 음주하며 떠들다가 결국은 새벽 별을 보고 말았다. 금주 결심을 하고서도 계속 마시고 있으니, 나의 결심은 별 의미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나의 무의미한 금주 결심과는 관계 없이, 나는 어쨌든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마시고 싶어도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월요일 밤, 걸어서 귀가하던 길에 광화문에서 만난 사나이 때문이다.
* * *
어찌 된 영문인지, 술 끊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내 인기는 급상승 했다. 전화 한번 없던 인간들한테서 술 마시자는 전화가 연일 이어졌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는, 얼굴 본 지 육년이 지난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금주를 결심했기 때문에, 라기보다는 숙취 때문에, 전날 마신 술로 몸이 안 좋다 둘러대고 나중을 기약 했다. 일요일 저녁엔 K 선배가 전화를 했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순간, ‘배때기에 기름이 차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선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전화기를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 놓았다. 틀림없이 술이다 싶었다.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술 끊기로 결심했으니 하는 수 없었다.
월요일에는 친구 M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친구와 통화하면서 나는, 지인들을 만나 녹차나 마시며 얘기 나누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역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다. 술을 끊으려면 아예 술자리에 피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간 쌓아온 친분 관계 태반을 날려 버려야 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술을 끊고 사교계를 떠나느냐, 계속 마시면서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느냐, 둘 중 하나다.’ 술을 계속 마실 것이냐 사교계를 떠날 것이냐, 술을 마시느냐 사교계를 떠나느냐, 술이나 사교계냐—내내 고민만 할 수는 없었다.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M에게 말했다. “신촌 지하철역 입구, 6시 반.” 많이 마시지나 말자.
삼겹살에 소주 세 잔, 과일 안주에 생맥주 500cc 세 잔. 지난 월요일 저녁, 내가 마신 술 전부다. 이 정도면 거의 안마신 것과 다름 없는, 자제력이 빛을 발한 선방이기도 했다. 사실은 24시간 넘도록 30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졸리고 피곤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10시 반쯤 호프집을 나왔다. 친구 M은 지하철 타러 가고, 나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연대 정문쪽으로 갈까 하다가, 삼겹살 저녁에 고 칼로리 생맥주를 세 잔이나 마셨으니 광화문 쪽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신촌 로터리를 출발해 언덕을 따라 이대 입구에 이르자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숨 들이마시며 왼발, 내 쉬면서 다시 왼발—호흡과 발걸음에 리듬이 실리며 속도가 붙었다. 아현동 결혼예복 거리, 가구 거리를 지났다. 친구 M을 두 달 넘게 괴롭히고 있다는 사건의 내막, 마무리 지어야 할 일거리들, 쓰기 시작했지만 영 풀리지 않는 소설, 쓰다만 글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꼬리를 물었다.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경기대 입구, 서대문 로터리를 지날 때, 머리 속 생각들은 비로소 꼬리를 내렸다. 머리 속은 아무 생각 없음 상태로 접어 들었다. 적십자 병원, 정일학원을 지나 완만한 언덕을 오를 즈음, 온몸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엉킨 생각의 타래들이 땀에 씻겨 사라졌다. 머리 속은 텅 비어 갔다. 강북삼성병원 앞에 이르러 신호등을 건널 때, 병원 쪽으로부터 광화문 방면으로 걸어 나오는 남자, 그 사나이를 보았다.
마른 체격에 170cm쯤 돼 보이는 스포츠 머리의 사나이로, 빨간색 Be the Reds 셔츠, 청색 반바지 차림에 하얀 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언뜻 보기에 몸이 가벼워 보였다. 정동극장 쪽으로 건너가는 신호등 앞에서 나는 앞지르기 위해 그의 오른편으로 나섰다. 앞서 나가려 할 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순간, 작은 팽이가 머리 속에서 두세 바퀴 핑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기증인가 싶었으나 어지럽진 않았다. 단지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핑!’ 나는 잠시 속도를 늦추었다. 숨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인도를 오가는 몇몇 사람들, 도로를 지나는 차량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짧은 순간 머리 속에서 울리던 소리는 별다른 여운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술 때문인가? 아니, 잠을 못 자서 그렇겠지.’ 빨간 셔츠 사나이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속도를 높이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와의 간격을 20m쯤 유지하며 뒤따라 걸었다. 역사박물과 앞을 지나면서 그의 뒷모습이 뭔가 좀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면 그 빛은 사라졌다. 그가 어두운 곳에 이르면 빛이 되살아 나곤 했다. 그의 몸 전체에 희미한 얼룩이 진 것 같았다. 잠을 못자서 눈까지 침침해 진 것인가, 생각했다. ‘하룻밤 못 잤다고 이명에 헛것이 보이다니, 나도 예전 같지 않은가?’ 짧은 순간, 낯선 기분,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착시라고 하기에는 그의 몸이 발하는 빛, 비록 희미하기는 했으나, 그 빛은 생생했다. 오가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오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 일뿐, 사나이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이는 없었다. 편치 않은 마음 한편, 저 자가 마술을 부리는 겐가 하는 호기심도 일었다. 간격을 유지하며 줄곧 따라 걸으며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광화문 육교를 막 지난 곳에 십 여명 남녀 일군이 길을 막고 있었다. 삼차를 외치는 목소리, 작별을 고하는 소리, 커다란 웃음 소리들이 뒤섞였다. 근처 회사의 부서 회식쯤 돼 보였다. 앞서 걷던 사나이는, 마치 그 사이에 통로가 열려 있기라도 한 듯, 사람들 틈 사이를 거침없이 빠져 나갔다. 나는 속도를 줄이며 사람들을 피해 인도 바깥쪽으로 돌아 나갔다. 사나이는 우리은행 앞에서 인도를 벗어나 길을 건너고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 쪽으로 향할 듯 하던 그는, 생각을 바꿨는지 갑자기 왼쪽 세종문화회관 뒷편 길로 방향을 고쳐 잡았다. 왼편 샛길로 따라 들어서자, 미니 스커트 정장 차림의 젊은 여자 두 명이 길가에서 양복 차림 남자들을 상대로 호객을 하고 있었다. 왼쪽 건물 일층을 뒤덮은 네온사인 불빛은 그들의 얼굴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였다. 세종문화회관 뒷편 사거리를 지날 때 인도를 가로막은 취객들을 피해 나는 도로 위로 내려갔다. 전방을 살피자 광화문 지하철역 입구를 지나는 사나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사거리를 지나 우측 인도 위로 올라섰다. 사나이는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작은 공원 쪽으로 들어갔다. 세종문화회관 건물 시계는 11시 2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쫓아 공원으로 들어갔다.
주차장 입구를 가로질러 공원의 작은 계단에 이를 때까지 사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는 순간, ‘SEJONG CENTER’라고 쓰여진 오른편 안내판 뒤에서 그가 뛰쳐나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나는 쓰러질 듯 멈춰 섰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놀랄 것 없소.”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머리 속에서 다시 ‘핑!’ 소리가 울렸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 것은 단발로 끝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 속 팽이가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피이~윙!’ 그의 말소리 또한 머리 속 한 켠 울림으로 전해져 오는 왔다. 나는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팽이 돌아가는 소리와 한데 섞인, 머리 안쪽 진동으로 ‘느낄 수’ 있는 소리였다. ‘놀랄 것, 위잉, 없소. 핑위위윙.’
한시간 가까운 속보로 몸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마주한 순간, 날카로운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훑어 내렸다. ‘피해!’ 마음 한 구석에 경고등이 들어오는 듯 했다. 하지만 ‘놀랄 것 없다’는 그의 말에는 명령과도 같은 권위가 담겨 있었다. 그 권위는 묘하게도,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머리 속에서 핑핑 돌아가는 팽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렇다, 놀랄 것 없어.’ 그의 말대로였다.
사나이의 몸으로부터 퍼져 나오던 희미한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꽤 오랫동안 자르지 않은 듯, 덥수룩한 수염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수염 때문에 이목구비를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내 뒷편 전체를 한꺼번에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주 바라보기 거북했다. 그의 얼굴 아래로 나는 시선을 내렸다. ‘Be the Reds,’ 짙은 청색 면 반바지, 맨발에 하얀 운동화. 그 순간 나는, 그의 몸이 차츰 투명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몸을 관통해 어둠 속에 잠긴 분수대, 벤치,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괴이함이나 불안함 대신, 안도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아니었어.’
이윽고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 알코올 중독인가?”
역시 ‘들리는’ 소리가 아닌, 내 머리 안쪽을 ‘울리는’ 소리였다. 팽이가 돌아가는 듯한 소음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그 이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 귀가 먹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알코올 중독인가, 당신?”
그제서야 나는 그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내가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요? 알코올 중독이라니?”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만 내 목소리 역시 입 밖으로 나가는 못한 채 머리 안쪽에서 울릴 뿐이었다.
판결을 내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마침내 내 머리 안을 세차게 흔들었다. “당신은 알코올 중독이야.”
소리와 함께 그가 내게 다가왔다. 갑자기 내 머리 안쪽에서 울리던 소음의 피치가 급격히 높아졌다. 내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발, 두발, 세발—그의 온몸이 내게로 부딪쳐 들어왔다. 정신이 아득했다. 나는 비틀거렸다. 비틀거리며, 가까이 있던 벤치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벤치 위에 간신히 몸을 누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낯익은 냄새가 내 코와 입안으로 확 퍼지며 머리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병원 냄새였다. 순간 머리 속을 세차게 흔드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다.” 소리의 여운이 가라앉기 전에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 눈 앞에 커다란 화면들이, 슬라이드 화면처럼, 떠오르며 서로 교차했다. 첫 화면은 응급차 한대가 병원 정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화면 왼편, 불 밝힌 간판 위에 쓰여진 글자가 보였다. ‘강북삼성병원.’ (DISSOLVE TO:) 병원 응급진료센터 앞. 병원 사람들이 응급차 뒷문을 열고 바퀴 달린 들것을 꺼내고 있다. (DISSOLVE TO:) 들것 위에 누운 남자의 전신. 얼굴에 수염을 기른, 빨간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스포츠 머리 사나이다. (DISSOLVE TO:)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응급센터 입구와 통로를 따라 들것이 움직인다. (DISSOLVE TO:) 사나이의 얼굴, 초점 없는 눈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CUT TO:) 흰색 시트가 사나이의 셔츠, (CUT TO:) 목, (CUT TO:) 턱, (CUT TO:) 입술과 코, (CUT TO:) 눈과 이마, (CUT TO:) 머리를 차례로 덮어가는 장면들이 탁탁 끊어지듯 이어진다. 시트가 사나이의 머리를 완전히 덮으며 화면 전체가 하얗게 되었을 때, 내 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떴다. 나는 가방을 머리에 베고 벤치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몹시 추웠다.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분수대 건너편 벤치에 중년 남녀 한 쌍이 맥주병과 안주거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중앙 화단 오른편, 신문지를 뒤집어 쓴 한 노숙자가 느긋한 손길로 휴지통 위에 수북이 쌓인 쓰레기들을 뒤적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한기를 쫓기 위해 목을 돌리며 양손으로 어깨와 다리를 세게 문질렀다. 벤치에서 일어나 다리를 쭉 펴고 손바닥이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힌 채 호흡에 맞춰 50까지 세었다. 서서히 한기가 물러났다. 허리를 펴고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11시 30분. 나는 다시 벤치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몇 차례 담배 연기를 내 품는 사이,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주변 풍경들이 점차 익숙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주자창 바깥 길을 오가는 행인들과 승용차들, 택시기사를 향해 목적지를 외치는 취객들, 건너편 중년 남녀의 모습과 간간히 들려오는 그들의 얘기 소리—모든 것이 그저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었다. 단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11시 21분을 가리키고 있던 세종문화회관 전자시계 숫자들,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벤치에 몸을 눕힐 때 전해오던 딱딱한 차가움, 들것 위에 늘어진 빨간 셔츠 사나이의 전신, 그의 가슴에 새겨진 ‘Be the Reds,’ 흰색 시트 아래로 사라지는 그의 두 눈. 일순 강렬한 병원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담배를 밟아 끄고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려다가 나는 그 자리에 다시 주저 앉고 말았다. 갑작스레, 나는 지독한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광화문 텅 빈 밤거리에 혼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 아주 비좁은 통로를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한없이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려 보았다. “이상한 꿈을 꾸었어.”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는 것, 나는 알고 있었다.
다음 날 화요일,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종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빨간 셔츠 사나이의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그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들것에 실려 응급실로 향하는 빨간 셔츠 사나이의 모습, 하얀 시트 안으로 사라지는 초점 없는 두 눈이 보이는 듯 했다. 낯선 곳—어둠 속 비좁은 통로, 희미한 붉은색의 바위 벽,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담배갑에 손이 갔다. 담배에 불을 붙여 두세 모금 빨고 나서 종이컵에 쑤셔 넣고는 잠시 후 다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후 네 시쯤, 창가에 담배를 물고 서서 구름이 낮게 깔린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K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별일 없으면 소주나 한잔 하자는 선배의 제안이었다. 홍대 앞 시장통, 장충족발, 8시. 금주 결심, 나는 이미 잊고 있었다. 아니, 잊고 싶었다. 술이라도 한잔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K 선배라면 전날밤의 체험담을 털어 놓아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리라 믿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사진기를 챙겼다. 빨간 셔츠 사나이를 떠 올리며 책상 앞에 앉아 있기가 견디기 어려웠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쓸쓸한 기분, 밖으로 나가 사진이라도 찍어대다 보면 떨쳐낼 수 있을까 싶었다. 사무실을 나섰다. 교정 곳곳, 신촌 일대를 돌아다니며 실컷 사진기 셔터를 눌러 댔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어둠이 내렸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K 선배는 구석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오이를 꽂은 소주잔에 술을 채워 놓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선배를 마주보고 앉았다. 식당 아주머니가 소주잔을 가져왔다. 따라주는 소주를 받아 입술에 한번 대고 내려 놓으며 선배의 근황을 물었다. 한달 전쯤 직장을 그만두고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는 그였다. 마포도서관에 가서 하루종일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다가 나온 길이라고 했다. 나 또한 소주잔에 오이를 꽂았다.
선배는 그날 읽었다는 {그리스 로마신화} 한 부분을 얘기 하면서, 따라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순수한 창작이라 볼 수 없을 수도 있는데 어째서 자기는 그렇다는 얘기를 여태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지 의아해 했다. 이어서 그는, 최근에 제주도 고향 친구로부터 영어학원을 인수하라는 제안을 받고 고민에 빠져 있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우리회사 망하면 제주도 내려가서 영어학원 강사나 하면 되겠군. 슬슬 책이나 읽으면서, 고기나 낚으면서 말야.”
“어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난 섭하지.” 그가 말했다. “내일모레 대박 터진대도 모자란 판에 회사 말아먹고 제주도에 내려오겠다니, 그럼 난 심히 섭하지.” 선배는 우리회사 주주였다.
“그렇다면 대박을 터뜨린 다음 내려가야 겠군.”
아주머니가 족발이 수북이 담긴 접시를 내왔을 때, 테이블 위에 두었던 K 선배의 전화가 진동했다. 선배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래. . .지금 어딘데?. . .아직도 사무실이나?. . .빨리 온나게, 족발 다 먹어 분다. . .이제 출발해? 택시타고 온나게. . .그래.”
대학동기 Y와의 통화였다. 선배는 잔에 남아있던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선배가 서너 잔을 비우는 사이, 나는 한잔을 비웠다. 잔에 오이를 꽂아두면 술에서 오이 맛이 날 줄 알았지만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이 조각을 먹어 치우고 이번엔 마늘조각을 꽂았다. 선배가 내 잔을 채웠다. 마늘 조각 주변에 작은 거품이 맺혔다.
‘핑! 피이이잉!’ 두 번째 잔을 반쯤 비웠을 때, 다시 팽이 돌아가는 소리가 머리 속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코와 입에 일순 병원 냄새가 퍼졌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선배를 쳐다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선배가 나를 향해 뭔가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눈빛, 입술 움직임만으로 그가 내게 묻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나는 선배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말은 음절을 이루지 못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보낼 수 없었다. 두꺼운 자갈을 물고 듯한 느낌, 혀끝에 거친 물체가 와 닿은 느낌이 들었다. 입을 여는 순간, 대신 머리 속에서 팽이 돌아가는 소음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진동하는 또 다른 소리를 ‘느낄’ 뿐이었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다!”
K 선배는 놀란 눈으로 내게 뭔가를 되묻고 있었다.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머리 안쪽에서 조그만 금속의 팽이가 맹렬히 돌아가는 듯한 소음을 동반한, 요란한 침묵이었다. 차가운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관자놀이가 빠른 속도로 욱신거리며 통증이 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더니, 딸꾹질이 터지 듯 머리 안쪽에서 그 소리가 다시 진동했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다.”
K 선배는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좁은 실내, 건너편 테이블에 한 쌍의 남녀가 마주앉아 있었고, 반대편 구석, 네 명의 남녀가 서로 술잔을 권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방 입구에 나란히 앉은 식당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텔레비전 화면을 얌전히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내 머리 속을 울리는 소음 외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얼마간 마음의 진정을 찾았다. 선배에게 뭐든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과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딸꾹질이 터지듯, 비슷한 시간 간격을 두고 내 머리 안쪽을 진동하는 그 소리만 선명했다.
“피잉—나는—피이잉—알코올 중독—핑이위윙—이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빈 곳을 펼쳐 떨리는 손으로 적었다. ‘이상해. 갑자기 머리가 아파.’ K 선배에게 내밀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려다 보았다. 그 밑에 그가 적었다. ‘왜 그래?’
‘머리가 아파. 말을 할 수가 없어. 나 이상한가? 귀가 먹통이야. 소리도 안 들려.’
‘이상해. 정신 나간 것 같아.’ 선배를 노트를 들어 내게 보이더니 다시 적었다. ‘조금 전에 한 말은 뭐야?’
‘무슨 말을 했어 내가?’ 내가 적었다.
‘무슨 외국어 같아. 이상해.’
‘외국어? 내가 무슨 말을 했어?’
‘몰라. 말을 하긴 했어. 방언 같아.’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그는 내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어떤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내가 다시 적었다.
‘미안. 나 가야겠어.’
선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노트를 가방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 나왔다.
홍대 앞 시장통에서 ‘걷고싶은 거리’ 쪽으로 길을 건너 걸었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다’—심한 딸꾹질처럼 머리 속에서 그 소리가 진동할 때 마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동교동 삼거리 근처 놀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인적과 떨어진 벤치를 골라 앉았다. ‘핑’ 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거의 엇비슷한 간격을 두고 ‘나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소리의 진동이 이어졌다. 코와 입에 아직도 병원냄새가 남아있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생각을 모으려 애 썼다. 담배를 찾아 주머니와 가방을 뒤졌지만, 식당 테이블 위에 두고 왔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노트를 꺼내 K 선배와 주고받은 메모들을 다시 읽으려 하는 순간, 빨간 셔츠 사나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북삼성병원 정문을 통과하는 응급차, 들것을 꺼내는 사람들, 들것 위에 누운 사나이의 모습, 허공을 응시하는 눈, 하얀 시트의 장면이 눈 앞을 스쳐갔다. 희미한 불빛, 끝이 보이지 않는 비좁은 통로와 돌계단이 연이어 떠올랐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다”—다시 한번 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깨달았다. ‘빨간 셔츠, 그 사나이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그가 내 안에 있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굳어버린 듯 한동안 벤치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기분 나쁜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직도 악몽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 삼십 분쯤 그 곳에 앉아 있었을까, 머리 속에서 울리던 소리가 문득 사라졌다. 코와 입에 남아있던 병원 냄새도 없었다. 반복해서 떠오르던 빨간 셔츠 사나이, 병원, 응급차, 좁은 통로와 돌계단의 영상도 어느덧 사라졌다. 놀이터 안은 고요했다. 인근 도로에서 들려오는 차량의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9시 15분.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몸을 일으켜 걸었다. 큰길로 나갔다. 한 동안 걷다가 편의점에 들어가 시나브로 한 갑과 라이터를 샀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신촌 로터리를 향해 걸으며 K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은지 선배가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나중에 상세히 얘기하겠노라고 했다. Y랑 같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선배는 괜찮다면 다시 오라고 했다. 나는 그냥 집에 가겠다고 했다. 전화기를 가방에 넣고, 담배 연기를 뿜으며, 걸었다. 신촌 그랜드 백화점 앞에서 두 개의 건널목을 건너 이대 입구로 향하는 언덕을 올랐다. 호흡과 발걸음에 리듬이 실리기 시작했다. 몸에 땀이 나며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적개심이 자리 잡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혼자 버려진 듯한 쓸쓸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나는 뛰는 듯, 있는 힘을 다해 빠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이대 입구 사거리를 지나 건널목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길을 건너 반대편 인도로 가기 위해 신호가 바뀌기를 잠시 기다리다가, 생각을 바꿔 그대로 직진했다. 아현 시장 입구, 아현동 로터리, 가구 거리를 지나 충정로 입구 종근당 빌딩 앞에서 우회전, 서소문 쪽으로 향했다. 광화문 방면으로 가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인적이 드문 고가도로 아래 인도를 따라 걸으며 오직 호흡과 팔다리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몸에 열이 나고 땀이 흐를 수록 머리 속의 소음과 병원 냄새, 악몽 같은 기억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림 공원, 호암아트홀을 지나 대한항공 빌딩 앞 건널목을 지났다. 서소문에서 시청 광장으로 나가기 전, 효성빌딩 앞을 지날 때, 건물 입구 오른편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가까이 지나며 곁눈질 했다. 남루한 차림, 노숙자였다.
사내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음식물 쓰레기 더미를 오줌에 담갔다가 꺼내 한 달쯤 썩힌 듯한 냄새였다. 얼굴을 찌푸리며 지나치려는 순간 내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있었다. 병원냄새 였다.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다. 걸음을 멈추고 건물 벽으로 다가가 몸을 숨기고서 노숙자 사내의 모습을 살폈다. 반팔 남방에 양복바지 차림이었다. 아니, 그렇게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것은 옷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곳곳이 뜯어져 나가 너덜거리고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이 온통 검정 떼가 묻어 헤질대로 헤져 있었다. 사내의 가는 팔과 목덜미, 마치 죽은 나무에 매달린 나뭇가지 같았다. 사내는 언뜻 40대 초반쯤으로 보였지만, 50대 혹은 60대로 보이기도 했다. 그의 차림새와 냄새는 그에게 ‘노숙자’라는 딱지 이외에 어떠한 다른 정체도 부여하지 않는 듯 했다.
사내는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입고 있던 체크무늬 긴 팔 남방을 벗었다. 비록 땀에 젖어 있었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옷가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숨을 멈춘 채 다가가 그의 어깨에 남방을 둘러 주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듯 하더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렸지만 사내는 곁눈으로 내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사내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지갑을 열어 만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냈다. 지폐를 내밀자, 사내는 내가 둘러준 남방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했다.
“받으세요.”
사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얼굴에서 하얀 빛이 번쩍였다. 사내의 왼쪽 눈, 눈동자가 없었다. 구멍처럼, 흰자위가 번쩍일 뿐이었다. 나는 멈칫했다. 내민 손이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대로 그냥 가버릴까 하는 순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다.”
나는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시의회 건물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쫓아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숨을 몰아 쉬며 구역실이 솟을 때까지 뛰었다. 조선일보사 앞을 지나 국제빌딩 앞 좌석버스정류장에 이르렀다. 뛰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쫓기는 듯한 기분 뿐, 실제로 누군가 내 뒤를 밟고 있는 낌새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버스정류장 부근 빈 벤치를 골라 주저 앉았다. 숨을 고르며 뛰어온 방향을 살폈다. 거리 풍경은 평상의 표정 그대로 였다. 고개를 숙였을 때 나는 만원짜리 지폐를 그대로 손에 쥔 채 달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지폐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서 벤치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광화문 사거리 건널목을 건너 세종문화회관 뒷편 샛길로 들어섰다. 걸음을 빨리 했지만, 쫓기고 있는 듯한 기분, 떨쳐낼 수 없었다. 다시 뛰었다.
세종문화회관 뒤편을 지날 때, 심한 갈증을 느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뛰었다. 캔맥주 생각이 났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직공원에 이르렀다. 약수터에 들러 실컷 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인왕산길에 올랐다. 계속해서 뭔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언덕을 오르며 수시로 뒤를 살폈다. 중턱 공터 안으로 들어가 길 쪽을 마주보며 벤치에 앉았다. 잠시 땀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시원한 맥주 생각이 다시 났다. 캔맥주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곧바로 머리 속을 울리는 소리들, 병원 냄새, 빨간 셔츠 사나이의 모습을 떠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보았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다.” 노숙자 사내의 눈, 눈동자 없는 날카로운 흰색의 공포가 엄습했다.
그 곳 벤치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다.’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어둠 속에 잠긴 숲, 무성한 풀과 나무들, 가로등 불빛, 밤공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담배연기처럼, 나는 그것을 하나의 엄연한 사실로 나는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난 십 수년간 이틀이 멀다 하고 마신 술이었다. 그렇게 마시고도 여태 사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술에 취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술에 취해 스스로를 학대하고, 술에 취해 마주해야 할 것들을 외면하고, 술에 취해 소중한 것들을 망쳐버리고 말았다는 각성이 찾아왔다. 지어야 할 짐으로부터 달아나, 취기를 빌어, 숙취의 고통을 빌어 방기와 폐기의 날을 살아오고 말았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맺혀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팔과 다리에 머리를 묻고 나는 울었다.
빨간 셔츠 사나이,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왜 하필 나를 택했을까—마음 한편 원망스러웠지만, 체념하는 마음과 더불어, 더 늦기 전에 그가 나를 찾아준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내게 찾아온 천사일지도 몰랐다. 더 이상 취하지 말라는, 취하고 망가지며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라는 감시자의 역을 맡겨 내가 일부러 그를 안에 불러 들인 것이라고 믿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 뒤를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또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내 뒤를 밟고 있는 자가 누구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땀방울이 맺힌 이마, 눈물에 젖은 뺨이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