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프리다 칼로'와 '루피노 따마요'... 그들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멕시코적인 것에 서로 애정을 기울였던 공통점을 가진 반면 서로 다른 영역을 추구했던 화가들이기도 하다.
프리다 칼로는 루피노 따마요에 비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의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기교적인 것이 아닌 솔직한 자아 표현에서 출발한 그녀는 힘있고 영감에 찬 작품들을 통하여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신만의 단어와 문장으로 된 작품 언어를 개인적으로 발전시켰다. 칼로에게 있어서 그림은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시작되었고, 주변의 사물들을 자신과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의 근원은 끊임없는 자기 분석을 통한 고통받는 자아의
탐색과 함께 멕시코 혁명(1910∼21)후 식민지 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 멕시코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회복하여 그들 나름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데에
있다.
그녀는 멕시코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드러내며 작품의 형식적 틀을 아즈텍(Aztec)미술로 대표되는 Pre-Columbian시기의 조각품이나 식민지 시대의 토착문명과 결합된 미술, 그리고 대중 미술을 근거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미술은 이처럼 기본적으로는 멕시코 전통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대의 국제적 미술운동인 초현실주의 미술과 많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혁명
뒤에 수반되는 가치들을 새롭게 구성하는 멕시코의 화가로 그녀 자신을 그렸으며, 따라서 민족 정체성의 구현을 그림을 통해 실현시킨 화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독립적인 멕시코 문화의 강한 표현은 Pre-Columbian과
Hispanic 혈통을 아울러 작품 전체에 반영되었다.
<멕시코와 미국의 전쟁 앞에 선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30×34cm 1932
2. 프리다 칼로의 성장 과정
프리다 칼로 칼데론(Frida Kalho Calderon)은 1907년 7월 6일에 멕시코 교외의 꼬요아깐에서 마띨드 칼데론과 곤살로 기예르모 칼로의 사이에서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난다. 멕시코의 식민지 시대가 지나고 30년의 디아스 장군의 독재정치가 이루어졌고, 혁명(1910~21)은 멕시코의 각 사회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일어났으며, 미래에 대해서 유토피아적인 시각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
프리다 칼로는 그녀와 새로운 멕시코가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그녀는 혁명보다 3년 먼저 태어났지만, 그녀의 멕시코 혁명에 대한
감정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는 자신의 출생 년을 항상 1910년으로 할 정도였다.
헝가리계 독일인인 아버지와 인디오와 스페인 혈통의 메스티소(Mestizo)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이중적 혈통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관심은 1936년에 그린 <나의 조부모, 나의
부모와 나>에서 그녀가 태어난 집과 가족의 계보를 그리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도표처럼 도식화시킨 일종의 그룹 초상화이다. 그녀의 외조부모들의
모습은 육지의 형상으로 상징화했으며, 반면 친 조부모들의 모습은 대양의
형상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칼로의 두텁고 모아진 인상의 눈썹은 그녀의 친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로의 이런 혈통에 대한 관심은 일생 동안 다루어지는 작품에 계속 영향을
주게 되고, 1950년대 초에 죽음을 앞 둔 그녀는 마치 강박관념처럼 이 주제를 다시 다루게 된다.
사진 작가였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고고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칼로와 함께 나누었으며, 사진기 다루는 방법 등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꼼꼼함과 세밀한 방식은 후에 그녀의 사실적인 화법에 영향을 주게되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아버지의 초상>에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1913년 6살 때 그녀는 소아마비에 걸려서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 쇠약해진 다리는 평생동안 이어진 고통과 강박 관념의 원천이 되었다. 그녀는
멕시코 독일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922년에 국립 예비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국립대학예비학교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혁명 이
후 진정한 Mexicanism으로써의 열망이 가득한 교육의 현장이었으며, 칼로는
총 2000명의 학생 중 처음 들어간 35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의대에 들어가기 위한 연구 과정을 선택하였으며, 그림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1925년까지 그녀의 예술적 격려는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그림을 배운 일 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뛰어난 재능에 감탄했으나, 그때의 칼로는
예술가란 직업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너무나 큰 계기로 인하여 곧 바뀌게 된다.
1925년 9월 17일 그녀의 남자친구 고메스 아리아스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고 가던 버스와 전차가 부딪치는 사고가 나는데 이 때 그녀가
입은 골반과 척추의 부상은 일생동안 그녀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1년 후에
연필로 스케치한 작품 <사고>는 그녀의 일생을 변화하게 한 치명적인 사건에 대한 회고를 그린 것으로 이 드로잉은 칼로가 사고에 대한 시각적인 증언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며 그녀의 작품에 있어 그 주제는 단 하번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다루어지지 않게 된다.
사고 후 아버지의 따뜻한 격려로 병원 침대에 거울을 달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칼로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볼 수 있었고, 스스로가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칼로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시초이다. 그녀의 첫 번째 자화상인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과 그녀의 초기의 친구들과 여동생의 초상화들은 19세기에 유럽화의 영향을 받은 멕시코의 화풍에 그 기원을
둔다.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은 남자친구인 아리아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하여 그려진 것으로 그녀의 우아한 귀족적 자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작품들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1928년과 29년 사이에
제작된 <내 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과는 많이 다르다. 후자에서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영향을 받은 듯한 양식과 주제성이 엄격하고 딱딱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통적으로 이 시기의 작품들은 멕시코주의로
대표되는 후기작들과 상당히 다른 경향을 띠고 있다.
칼로는 1928년 이태리계 미국인 사진작가이자 좌익계 활동가였던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에 입당한다. 여기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되는데
사실 1922년에 국립예비 대학교에서 이미 디에고 리베라가 벽화 제작할 때
만 난적이 있다. 리베라는 칼로가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예술에 대한 의지를 강화시켰다. 리베라의 관념적인 영향은 그녀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고 1929년 8월 21일에 프리다 칼로는 그녀보다 21살 연상인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칼로의 1929년 작 자화상
칼로는 이상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웅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리베라와는 달리 주변의 세계에서 소재를 취했다. 그녀의 이미지들은 항상 현실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어 생생한 경험의 직접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버스에서>는 사회계층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멕시코 사회의 전형적인 사회 계층들이 버스 안의 옆자리에 서로 앉아 있다. 이 작품은
사회적인 계층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프리다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디에고의 잦은 외도와 허약한 몸으로
괴로워하다가 두 사람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이혼을 한다. 그러나 프리다는 리베라와 헤어져서는 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괴로워하다가 결별한지 1년도 채 못되어 다시 재결합을 하게 된다. 그러나 리베라는 여전히 불성실한 남편이었고, 이후에도 그는 칼로의 정신적 고뇌의 주된 원인의 제공자였다.
1943년의 <테후아나 의상을 걸친 자화상>에서 테후아나 지방의 전통의상을
착용한 칼로가 이마에는 리베라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는 이미 소유 불가능한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보인다. 칼로의 고뇌는 <디에고와 나(1949)>에서 절정을 이룬다. 항상 정성스럽게 빗은 후 머리 장식용 멕시코 전통 액세서리로 단장한 그녀의 머리는 드물게도 자신의 목을 휘감아 교살하려는 듯
풀어헤치고 있고, 그녀의 당황한 얼굴에서는 눈물 방울이 보이고 있다. 대체적으로 리베라와 재결합을 한 1940년 이후의 자화상에서는 이전에 보이던
불성실한 남편에 대한 분노와 도전의 이미지가, 체념과 모성적 관대함으로
대체되어 순화되어 있어 칼로의 심리변화를 엿볼 수가 있다.
프리다 칼로 에게 1950∼51년은 잔인했다. 오른쪽 발의 회저병 초기 증세
때문에 발가락 절단 수술을 해야 했다. 영국 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다가
세균이 감염되어 6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고통을 위로하며 리베라가 옆에서 지켜주었지만 프리다는 지쳤다. 이때부터는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대한 탐구가 자화상의 일괄된 주제가 된다. 그녀의 그림은 육체적
고통을 이기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53년 초 칼로가 너무 쇠약해져서 디에고는 서둘러 미술협회가 주관하기로 한 그녀의
회고 전을 앞당기고 프리다를 위한 축제를 열어주기로 결심한다. 1953년 4월에 프리다가 너무 쇠약해져서 전시회를 취소하려고도 했으나 병원차를 타고 전시회에 참가를 하여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1954년에는 프리다의 건강도 잠깐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이때 보편적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해 디에고와 함께 투쟁하여 새로운 미술 세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듯 보였다. 이때 그녀는 마르크스와 스탈린 이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그녀 작품으로 유일하게 혁명적인 작품을 그린다. 6월 2일 그녀는
집회에 디에고와 집을 나섰다가 소나기를 맞아 아직 완치되지 않은 폐렴이
재발했고, 프리다는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프리다는 6월 13일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디에고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3. 프리다 칼로의 회화적 특성
'나는 항상 혼자였고,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인 자화상을 그린다'라고 프리다 칼로가 말했듯이 그녀는 병원에 있는 동안 거울을 통하여
심도 있는 자기 분석을 할 수가 있었다.
칼로의 그림은 그녀가 죽기 바로 전에 주로 그려진 몇 점의 정물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이며,
이중에서도 전 작품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55점 정도의 그림이 자화상으로
되어 있다.
칼로 <디에고와 나> 나무에 유채 29.5×22.4cm 1949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로 여기서 투영되는
육체적인 자아와 정신적인 자아를 동시에 표현한다. 구체적으로 칼로는 자신의 자화상에서 하나로 고정된 자아가 아닌 여러 층의 자아의 모습을 탐색하며 20초반 멕시코 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여성으로서 부딪쳐야 되는 현실을 고백한다. 한편 그녀는 당시 혼동과 더불어 희망으로 가득차 있던 멕시코 사회에서 의식 있는 지식인으로서, 멕시코의 역사를 그녀 특유의 개인적인 방법으로 그린다.
주제적 측면에서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의 작품의 일관된 중심적 개념은 고통이다. 수많은 자화상들은
그녀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녀가 선택한 도구였고, 따라서 근본적인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작품 제작의 일차적 이유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기록이다.
칼로는 어렸을 때부터 혼혈 혈통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고, 이것은 그녀가
죽는 해인 1854년까지 자화상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나의 조부모와
부모와 나>에서 그녀는 자기네 집 정원에 서있는 발가벗은 조그만 소녀로
표현되어 있고, 칼로의 오른 손에 있는 빨간 리본의 이미지는 이후에도 자신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것으로 유대감의 시각적 표현으로 보인다. 이런
자신의 혈통과 뿌리에 대한 관심은 1932년에 그린 <나의 출생>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충격적인 대담함을 보인다. 그림 속의 어린아이는 안으로 모아진 두터운 눈썹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칼로 자신임을 알게 해준다. 벽에는 비탄에 잠긴 어머니, 즉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흐느끼는 슬픔에 찬 마리아 상이 걸려있다. 한편 우아하고 담백한 색조와 벽과 베개의 핑크빛 레이스는 화면 전체의 긴장된 분위기와는 다르다. 사실 이 그림을 그릴 즘에
어머니가 죽었고, 결국 칼로 자신의 탄생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태어나지도 못한 그녀의 아기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또 <유모와 나>는 연이어 태어난 동생으로 인해 유모의 젖을 먹고 커야 했던 그녀의 기억을 묘사하고 있다. 칼로는 성인의 얼굴에 어린 소녀의 몸을
하고 마치 마른 대지에 내리는 비처럼 젖을 먹고 있다. 결국 칼로는 멕시코의 대지의 여신을 상징하는 인디오 유모에 의하여 양육되어진 것이다.
1943년의 작품 <뿌리>는 <유모와 나>와는 달리 표현되고 있다. 전자에서는
자연에 양분을 제공하는 사람이 프리다라면 후자에서는 대지의 어머니 같이
생긴 식물의 가슴에 안겨 양분을 제공받는 사람이 프리다이다.
<뿌리 혹은 거친 땅> 금속에 유채 30.5×49.9cm 1943 <클릭~>
<헨리포드 병원>은 1932년 디트로이트에서 그린 것으로 피투성이 자화상 시리즈 중의 첫 번째 작품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이 작품에 대하여 '미술사상
전례 없는 일련이 걸작들로 여성의 가치를 질적으로 고양시켰다.'고 언급했다. 이 그림에는 고독감과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표현을 수평선
쪽의 산업 사회의 풍경에 의하여 나타내고 있다. 칼로가 쥐고 있는 리본의
끈은 유산할 당시 그녀의 감정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물들로서
달팽이는 임신에 실패하게 되는 긴 유산의 과정의 상징이다. 또한 배경이
공장지대는 기술적인 진보의 상징으로서 화가 자신의 인간적인 운명과의 대조적인 특성을 표출하고 있다. 비록 그림에서 개인체험들이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생활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는 칼로 에게 있어서
생동감 있는 사진과 같은 정확성보다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칼로의 '고통'은 평생 그녀 작품의 주제가
되어 그녀의 작품은 미술세계에서 다소 동떨어진 세계를 보이기도 한다.
40년대 이후로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주위를 많은 애완 동물이 나타나게
된다. 그 해에 같은 주제의 그림들이 다수인 것으로 보아 그녀가 다시 유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 <조그만 원숭이가 있는
자화상>등에서 그녀와 연결된 실크 리본을 감은 애완 동물들이 나타나는데,
매우 절망적으로 보인다. 칼로의 원숭이는 포기한 아이들 역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프리다 칼로의 말년에는 절망적 내면을 일련의 정물화 작업으로 표현되게
된다. 일종의 결혼 초상화인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구성은 전통적인 것에서의 차용이었는데, 그 기원은 18세기와 19세기의 멕시코 초상화들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이 그림은 그들 결혼 기념 사진에서 기초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부부가 과장된 표현으로 높이에서 차이가 나서 칼로는
바닥에 채 닿지 못하고 떠있는 모습이다. 리베라는 화가로서 드러나 보이지만 칼로는 뛰어난 화가의 평범한 부인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리베라의
결혼 전부터 계속되는 여성 편력은 결국 그의 벽화 모델이었던 칼로의 여동생과의 불륜으로 발전되고 칼로의 작품에는 변화된 자신을 표현되게 한다.
1935년에 그린 <곱슬머리의 자화상>에는 이전의 부드럽게 빗어 넘겼던 머리는 짧게 말아 올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고 있으며 <작은 자상들 (A Few
Little Pricks)>에서는 부분적으로 선혈이 낭자한 본질로써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질투의 결과로 인하여 한 여인이 살해당한 신문기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런 무시무시한
실상의 표현까지도 그녀 자신의 개인적 상황의 견지에서 인식되어야만 한다.
<나의 탄생>, <작은 잔상들>같은 초기 작품에서는 그녀가 실질적인 고통이나 죽음을 표현한 반면에 <기억(memory)>에서는 정신적 고통의 상징으로서
육체적 상처들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 그림에서 칼로는 멕시코 전통의상이 아닌 그녀가 실제로 가지고 있던 옷을 입고 짧은 머리로 오른발을 해변에 왼발을 바다에 두고 서있다. 칼로의 상처받은 발치의 거대한 심장은 샘처럼 피의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를 향해 계속 흐르고 있다.
1938년 미국의 화랑에서 첫 외국 전시회 이후 성공적인 전시회의 호평은 그녀에게 경제적 독립을 줄 수 있게 되며, 그 다음해에 그려진 <두 명의 프리다>는 두 가지 상반된 개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작품은 이혼한 바로 직후에 완성된다. 두 모습 중에서 실제의 프리다의 모습은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후아나를 입고 있고 그녀 옆에서 그녀 자신의 분신으로 유럽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들 두 연인이 드러내놓고 있는 심장은 하나의 혈관으로써
연결되어 있고 혈관의 끝은 분리되어 유럽인 칼로의 드레스에는 피가 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그녀가 환상과 꿈의 세계에서 살면 이 세계에서 자신을 빼닮은 이중인물을 설정함으로써 고독에 대한 보상을 찾는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의 자화상들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차이점들은
단지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나 소재에서만 구별되어지며 멕시코 대중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테후아나 의상을 입은 자화상>에서 칼로는 소유할 수 없는 리베라에 대한
자신의 강박관념 같은 집착으로 인해, 마치 덫과도 같이 그 이미지를 '생각'이라는 형태로 이마에 새겨 놓았고 1949년의 <디에고와 나>에서 그녀의
긴 머리는 저절로 목 부분으로 감아져 있으며 , 그녀를 목을 졸라 죽일 정도로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 earth, Myself, diego and senor Xolotl>에서는 그 이전까지의 절망적 심정을 소유가 아닌 모성의 관대함으로 순화된 칼로의 심리변화를 볼 수 있다.
이 작품 이후의 그림부터 칼로는 가장 고통스러워 보이는 자화상에서조차
결코 감상적이거나 나기 연민에 빠진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금욕적이고 냉정한 표정 속에서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묵묵한 결의가 뚜렷이 보인다. 그녀의 자화상들이 강인한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솔직함과 기교가 한데 어울러져 있기 때문이다.
칼로의 이런 모습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은 <부러진 척추>이다. 그녀는
나체로 꼿꼿이 서 있으며 코르셋이 그녀의 몸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몸은 척추에 의해 커다란 틈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다. 뒷배경의 황폐한
풍경은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을 상징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40년대가 끝날 무렵 그녀의 건강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조금 회복되었을 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정물화들은 정치적인 견해로써 읽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적 표현은 그녀가 1948년에 멕시코 공산주의
연합에 가입한 이래로 그녀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국기가 이 시기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
상태는 표현력까지도 방해하고 있어서 그림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거친 필치로 표현되고 있다.
1951년 작 이후로 정물에서의 색채와 리얼리즘은 그녀의 건강 악화로 인하여 극도로 쇠퇴해지면서
소재도 정물화가 많아지게 된다.
형식적 측면에서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는 당시 멕시코의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는 과격한 입장을 취했으며, 이러한 자신의 사회, 정치, 역사적 신념체계에 의한
독창적 미학을 추구한 정열적인 국수주의자였다. 이런 점은 자신의 조국인
멕시코와 멕시코 사람들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면 특히 작품 제작에 있어서는 형식이나 내용의 차용에서 잘 보여진다.
혁명 후 많은 멕시코 미술가들이 그들의 미술을 좀 더 멕시코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그 시대의 벽화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멕시코적인 뿌리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프리다 칼로는 진정한 멕시코적인 화가이다. 칼로의 그림에서 주된 멕시코적인 뿌리의 기초는 주로 토착문명들과 독립된 문명이었던 아즈텍 시기의 미술이 그녀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디에고 리베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칼로의 작품을 가장 강력하며 현대 멕시코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나 역시 전적으로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프리다 칼로는 민족 미술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예술은 그 자체를 위한 것, 대중적인 미술로서의 순수함을 위한 미술이다.'
그녀는 정복이전의 원주민문화로부터 상상력을 끌었고, 자신만의 것을 얻었다. 그녀의 자화상에서 그녀는 소박하며, 인디안 풍의 의상을 입고 있으며,
토착민들의 정체성을 표출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칼로가 1937에 그린 <유모와 나>에서 유모는 가슴을 드러낸 채 벗고 있고,
콜롬비아 전기의 Teotihuancan 돌 가면을 얼굴 대신에 쓰고 있다. 유모의
모습은 토착적인 모신(母神)의 재현을 회상케 한다. 그리고 유모는 작가 자신의 멕시코 혼혈의 원류의 상징이다.
아즈텍 미술에서 중심이 되는 제사 의식에서 인신공양의 의미로 쓰이는 심장과 해골의 형상이 칼로의 작품 속에서 상징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죽음은 더 큰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칼로의 작품에서 핏빛 자화상의 심장의 이미지는 고통을 의미한다. <회상>에서 심장이 찢겨 있는 것은
고통의 강렬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다 작품 중에서 고대 멕시코의 신화가 특별히 정확하게 보여지는 작품은 Senar Xototl>이다. 여기서는 음과 양이 경계를 갖고있는 모습으로 그녀의
이중적 원칙을 묘사하고 있다. 낮과 밤이 서로 스며들며 음기와 가벼운 물질, 태양과 달, 우주의 원자형태가 어두운 지구를 그 강력한 팔로 끌어안는다. 대지의 여신은 자궁으로부터 생명을 낳고 있다. 또한 여신은 <나의 보모와 나>에서의 유모와 달리 칼로를 무릎으로 안고 있다.
1940년 미술평론가 마이어 사피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진정한
독창성을 지닌 뛰어난 화가이고, 필자가 알고있는 멕시코 미술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작품은 오로스꼬(Orozco)와 리베라와
견줄만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더 멕시코 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처럼 그녀의 작품에는 멕시코적인 민속 문화의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4. 칼로 자화상의 미술사적 의의
초현실주의적 요소
1920년대에 서구사회의 기존 가치체계에 도전하여 일어난 초현실주의 운동은 무의식의 세계 및 꿈의 세계를 표출해 보임으로써 정신적 해방을 이루어
참된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초현실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이 처음으로 칼로의 작품을 본 것은 1938년이었다. 그는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으로 보았고,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들이 창안한 여성의 구체화로 보았다. 브르통에게 있어 칼로가 여성
초현실주의자의 전형이 된 이유는 그녀가 재현한 작품 속에서 그녀의 환상적 분위기와 모델의 정신에까지 바친 그녀의 헌신이다. 관능성은 거의 섬뜩할 정도이고 평범함 위에 예술 작가의 꿈과 매력으로 치장된 유머와 잔인함은 작품의 구조를 형성한다.
비록 앙드레 브르통이 그녀를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했으나,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방법들로 형성된 양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상징들과 철학들을 즉 순수 초현실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을 그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냈다. 초현실주의가 대부분 꿈의
상태, 악몽, 그리고 정신적인 것들의 상징들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칼로의 작품은 위트와 유머로 되어있다
어쨌든 1938년에 있었던 초현실주의와의 직접적인 접촉 이후에 그녀의 작품에는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는 칼로가
처음 1931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을 때 그려졌는데, 칼로는 초현실주의는 삶이 항상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여 그린 것이었다. 또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꿈의 주제는 에서 보여지고 있고,
여기서 보여지는 해골의 이미지 또한 그녀가 꾸는 꿈이 죽음이라는 멕시코的 초현실주의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Thinking About Death (1943)
칼로의 자화상을 보면 고통스런 모습 위에 초현실주의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고, 에로시티즘이 억압된 내면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칼로가 자주
사용하던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있거나, 상부가 열린 모습들은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의 작품의
여성적인 사고와 감정은 초현실주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를
보면, 그녀는 독특한 개인적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을
갈망하는 칼로의 현실이었다. 그녀의 초현실주의적인 화상은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한 방법이었지,
리얼리티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하던 유머도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궤변적인 유머와는 달리 세속적인 냉소를 지닌 그녀의 유머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조롱이었다.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가 자신이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하기도
했고 일부 작품은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초현실주의의 범주에 포함되는 이유는 그녀가 초현실주의자들과
직접 교류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시회에도 참가하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작품이 공상이나 환상, 꿈 등의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내용이 심리적이며 상징성과 신비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분류되는 것이다.
그리고 멕시코 예술의 환상이 풍부한 것은 초현실주의보다는 더욱 오래된
멕시코의 전통에 의한 것이었다. 칼로의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는 그녀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여성주의(Feminism)적 요소
페미니즘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여성주의 미술이 출현한 것은 서구에서는 1970년대이다. 칼로가 죽은 뒤에 미술사적 위치가 재조명된 시기도 이때이다. 칼로의 작품은 1954년에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외부세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1970년 초반이 되서야 일반대중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여성 해방론자들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칼로가 비극적인
한 여성 해방론자이며, 제 3세계의 여성들에게 칼로는 위대한 본보기였다.
그녀의 그림이 여성이 지니는 고유한 현실과 이에 대한 체험을 그 누구보다도 포괄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The Broken Column (1944)
oil on masonite, 40x31.1cm, Dolores Olmedo Foundation, Mexico City
사실 칼로는 아주 이상적인 페미니스트 화가라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심각하게는 생각했지만, 화가로서 철저한 직업의식을
느낀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자신이 필요로 할 때 그림을 그렸으며, 그녀의 그림을 칭찬하고 창작활동을 격려했던 사람은 항상 리베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로가 영웅적인 페미니스트 화가가 된 이유는 그녀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신랄한 여성 이미지가 많은 여성들, 특히 여성 화가들의 커다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칼로의 자화상에서 그려진 여성은 남성의 시각적 만족을 위한 수동적 오브제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존재의 깊은 층을
탐구하는 능동적인 관찰자인 것이다.
4. 결 론
칼로의 미술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우선, 그녀가 남긴
미술 작품 자체보다도 그것의 주제가 되었던 그녀의 불운하고 극적인 생애와 이에 맞선 강한 삶의 방법이 '칼로 신화'를 만드는데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불의의 사고가 가져온 육체적인 불구, 이로 인한 평생의 고통, 그리고 불성실한 남편과의 결혼생활과 가질 수 없는 아이에 대한
강박 관념적인 집착 등, 특이한 인생의 여러 단면들을 바탕으로 하는 그녀의 작품들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고백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고통'에 대한
인류 보편적인 존재적 물음을 던지고 있지만, 이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 항로는 칼로의 미술을 부수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서 작품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평가에 있어 장애가 되어왔다.
한 개인으로, 예술가, 혁명가로서 프리다 칼로의 생애는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여성 편력이 심한
남편 디에고 리베라로부터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운명적으로 겪게 되는 고뇌와 자기 파괴적인 기질에 대해서 작품 속에서 실험적으로 다루며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의 절규가 들리는 듯한 그녀의 작품들은 평생 짊어져야 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피
흘리고 처참하게 찢겨진 상처투성이의 강렬한 자화상의 이미지를 통하여 여성 특유의 체험적 고통과 현실 속에 가려진 섬뜩한 진실을 보여주었다.
고통은 미술사에 있어서 그녀의 주된 주제였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극히 개인적이고 자연스러움을 지닌 칼로의 작품 세계는 여성주의 작가들의 계보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 그녀의 현실은 대부분 리베라와 결속되어
있지만, 그녀는 리베라와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리베라의 벽화가 보다
이론적이고 진보적인 세계를 웅대하게 표현한데 비하여 칼로의 조그마한 작품들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서 개인적 삶을 포착하려고 노력하였다. 혁명
후 부각된 민족의 정체성을 작품의 기초로 한 그녀는 멕시코의 전통에 근거해서 아즈텍 미술로 상징되는 선 콜롬비아시기의 미술품들, 토착문명과 결합된 기독교 미술과 대중미술에서 형식적 틀을 빌어 작품 전체에서 주된 테마를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있어 화면의 크기에 상관없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생전에 단 2번밖에 개인전을 갖지 못했던 칼로 이지만 그녀 생애 동안에는 초현실주의의 찬사를 받았고, 사후에는 페미니즘 운동의 부각으로 인하여 빛을 보게된 그녀는 다른 작가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옮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