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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川閑談
술잔치
디오니소스(Dionysos)는 제우스의 애인인 세멜레(Semele)가 낳은 아들이다.
제우스의 마누라인 헤라의 미움을 받아 어머니가 죽자 세계를 유랑하다 포도재배법과 양조법(釀造法)을 익혀 술을 만들어 새로운 종교를 일으켰다.
일컬어 주교(酒敎)라고 하는 종교의 주신(酒神)이 되었다지? 일설에는 디오니소스가 그리스도의 원형(原形)이라는 주장도 한다지만 그것은 그의 종교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명과 평화를 주었고 그 힘의 원천(源泉)은 술로부터 나오는 사교력(社交力), 친화력(親和力)이요,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선심(慈善心)이었기 때문이라나?
“그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신도들이
손에 심벌과 플루트와 주신장(酒神杖:thyrses)을 들고
포도밭에서 미친 듯이 술잔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왕들은 이 새로운 종교가 이 세상을 무질서하고 광란(狂亂)케 만들어 세상의 권세(權勢)를 잃을까 봐 디오니소스를 두려워하고 배척했다. 사실 때로 술독에 빠져 빨간 피 대신 붉은 알코올이 흐르게 된 “주(酒)라큘라”라고 불리는 광신도(狂信徒)들이 일으키는 공포스런 테러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1.궤변(詭辯)에도 미학(美學)있다
나는 술을 늦게 배웠다. 대학 신입생환영회 때 막걸리를 마시고 어깨동무로 노래하며 가는 사진이 있는데 아마 그때가 술을 제대로 접하게 된 때였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전혀 마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술에 관해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그때만 해도 쌀 생산량이 부족해서 고구마로 막걸리를 빚었고 게다가 발효를 빠르게 한다고 카바이드(carbide)를 사용하여 막걸리를 숙성(熟成)시킨 것이 많아 마셨다 하면 골이 지끈거렸지만 값이 싸니까 대체로 막걸리를 많이 애용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선배는 위장약을 꺼내 술판에 탁 올려놓고는 사발접시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키면서 “잘 봤지? 술 못 마신다니 뭐니 그딴 소리 하지마.” 하여 어느 누구 깩도 못하고 꼴깍꼴깍 들이켰다.
3선 개헌반대 때문이었나 자주 데모가 있어 학교에 가도 반은 놀고 반은 데모하는 그런 하 시끌시끌하던 시절, 그날도 데모한다고 운동장에 어수선하게 모여들었다. 우리는 데모야 일락배락하든 상관않고 대충 수업이 안될 듯하면 슬그머니 남산으로 올라가 때아닌 일락(逸樂)을 즐기는 것이 순서였는데 과대표(科代表)할 때 학생회에서 좀 알고 지내던 운동권 선배가 매양 뒷걸음치던 나를 붙들고는 “오늘은 나하고 좀 놀아보자”하곤 무작정 끌고 갔다.
“오늘은 말이다, 맨 선두에 서서 그 느낌이 어떤지 한번 알아봐라.”라고 하며 뒤에서만 어정뜨다 물러나던 나를 잡아 끌고 맨 앞줄에 섰다. 벌써 교문 밖 저 멀리에는 전경들이 로마병정처럼 방패를 앞세우고 도열해있었다. 속으로 “아이고, 오늘 잘못 걸렸구나.”하며 머리 속에서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재들하고 부딪쳐 방패로, 곤봉으로 맞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쭈그리고 앉은 그림이 좍 떠오르며 참으로 긴 하루가 되겠구나 싶었다.
“시작해볼까?”하듯 옆에서 팔꿈치를 툭 치며 나를 바라보는 선배의 얼굴은 내가 머쓱할 정도로 산보 가듯 평온했다. 어찔하게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서 앞달리는데 최루탄이 여기저기 탁탁 터지며 안개 숲처럼 퍼져 서로 얼굴도 잘 안보일 정도였다. 드디어 전경들이 군화소리를 탁탁내며 앞으로 전진하자 그 둔탁한 소리에 가슴이 밟히는 듯 두려워하며 캑캑거리던 그때 선배가 내 어깨를 끌었다. 선배가 매캐한 연기 사이로 얼핏 히쭉하더니 “자, 옆으로 빠지자”하며 뛰었다. 나야 “얼씨구나, 나 살려라”하며 사정없이 뒤따라 쫓아갔다.
숨을 헐떡이며 산으로 올라가 자리 잡으니 눈물 콧물이 사정없이 터져 나왔다. 선배가 “들이켜라, 최루탄에 직방이다”라며 사주는 막걸리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시니 이보다 시원한 맛이 또 있을까 싶었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코는 안 삐뚤어졌나 싶도록 뱃속에 가득 막걸리를 채우며 보니 남산은 제 혼자 빙글빙글 돌고 있고 전경과 시위대가 벌써 몇 번 충돌했을 교문 앞에는 최루탄 연기가 바람에 날리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이 그저 생생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속으로 저기에서 빠지지 않고 앞장서야 할 것 같은 이 형이 왜 슬그머니 여기 빠져 나와 술을 마시는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어째 내 속을 알았는지 한마디 던졌다.
“혁명은 말이야,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오랜 시간 땀과 피와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지. 3선 반대한다고 지금 3선개헌 안 하겠냐? 하지만 우리가 조금씩 전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끝에 이르겠지. 그때가 되면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변해버린 듯해도 실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蓄積)된 것이란 말이지. 그러니 때때로 잠시 뒤로 물러나 관조(觀照)하며 음미(吟味)하는 것도 필요하지. 음, 에너지를 모은다고나 할까?” 하며 하하 웃었다.
내 생각엔 어쩌면 궤변 같기도 했지만 어떤 일이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과 때로 중심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언저리에서 객(客)이 되어 되돌아보는 것은 들어둘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진퇴進退)의 가늠을 어느 만큼 해야 주역(主役) 자리를 붙잡고 있을까를 어떻게 깨닫느냐가 관건(關鍵)일 듯한데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인지 그나저나 그 선배는 죽백(竹帛)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일찌감치 정치생활을 마감하였다고 하니 과연 그의 이론이 잘못된 것인지 혹은 잘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2.만용(蠻勇)에 뒤끝 있다
대학 3학년 때든가 가깝게 지내던 종희가 해병대에 지원했는데 나 혼자만의 독단(獨斷)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 대학생으로서 해병대를 지원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는 않았는가 싶다. 하여튼 그 녀석이 오랜만에 휴가를 나와 만나게 되었는데 서대문 어디에선가 기억도 희미한 술집에서 그와 함께 휴가 나온 동기(同期) 두엇과 나를 포함해 넷이서 함께 술판을 벌였다.
주머니 사정이 든든한 것도 아니어서 닭 한 마리 백숙을 안주로 하여 재탕(再湯)을 거듭하며 박스 채로 소주를 가져다 질펀하게 퍼 마셨다. 그때 한 박스에 몇 병이 들었던가? 20병, 혹은 30병이었을까?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이들이 박스 채 마시는 것을 보고는 기가 질려서 일찌감치 나오고 말았는데 나중에 종희가 전하는 말로는 밤새우고도 해 뜰 때까지 마셨다나?
그 일을 K에게 했더니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하더니 무작정 소주를 박스 채로 시키는 것이었다. 이 녀석이야 말술도 사양 않는 술꾼이라서 괜히 경쟁심이 작용했겠지만 내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 고 하는 수 없이 나도 한숨을 푹푹 쉬다간 작정하고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말로만 듣던(?) 그야말로 술이 나를 마시는 경지(境地)까지에 이르렀나 보다. 진짜 거짓말처럼 박스에 가득하던 소주병이 몽땅 사라졌다. 아니, 글쎄, 나야 그렇게 보았다지만 사실 그랬을지 혹 착각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에 “자, 이걸로 끝이다”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잔을 들어 “부라보!”했던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나중에 들어본 바로는 딱 일어섰다가 그대로 술판으로 엎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나를 술집주인이 집까지 들쳐업어 데려다 주었고 K도 인사불성(人事不省) 직전이라 간신히 그를 우리 집까지 안내했다고 했다.
집이 가까웠기 망정이지 하여튼 함께 내 방에 꺼꾸러졌는데 밤 사이에 둘이서 오바이트하고 대 난리가 났었고 어떻게 K는 재빨리 새벽같이 몰래 도망가버렸지만 나는 거의 혼수상태(昏睡狀態)로 일주일을 누워있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무리 야단쳐도 쇠귀에 경읽기였을 뿐이다. 그때가 마침 저나 나나 둘이 CPA 시험 치는 때였었는데 그냥 날샌 거지 뭐.
일주일 만에 겨우 정신차리고 일어나 부서질 듯한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본즉 이건 도저히 내가 할 짓이 아니어서
3.비겁이란 짐을 지다
대체로 방학 때면 고향에 다녀오곤 하였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 흐느적대도록 술판을 벌이고는 밤늦게 완행열차를 타고 올라왔다. 밤차라는 것이 괜스레 낭만에 푹 젖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어 뭐 급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부러 밤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다. 여기에 옆자리에 예쁜 아가씨가 함께 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련만, “제발” 하고 아무리 기원해보았어도 지금까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술에 취한 탓인가 아무 볼거리도 없는 어둠에 싸인 창 밖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졸았는데 잠결에 얼핏 정신이 들어 옆을 보니 한 녀석이 나를 보고 웃는 듯했다. 헌데 어째 잠결에 이 녀석을 만났나 어쨌나 싶을 정도로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아마 졸고 있는 동안 내 옆에 있던 아줌마가 내리고 그 녀석이 앉게 되었는가 보았다. 동배(同輩)이기도 했지만 워낙 녀석이 붙임성이 좋았는가 술을 사다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로 끝이 나지 않았다. 홀짝홀짝 마시다 몽롱(朦朧)해진 가운데 그래도 기억이 나는 것은 이 친구가 수배(手配) 중이라서 학교에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나와는 정치적 이념이 달라선가 민감(敏感)한 시국(時局)에 대한 견해는 많이 엇갈려 께끔하긴 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분위기에 취했는지 하여튼 “나의 진정한 친구”라며 포옹하기도 하고 손도장도 찍고 그랬다.
차장이 차표검사를 시작하자 그가 자리를 피하려다 내 옆에 기대 술 취해 잠든 척했다. 친구가 술이 취해 자고 있으니 나중에 검사해도 되겠느냐고 말했는데 차장은 무표정하게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척한 그를 힐끗 보면서 그냥 지나갔다.
뭐 내가 연기를 잘해서는 아닐 것 같고 그저 운 때문일지 또 다른 이유일지는 몰라도 하여튼 함께 무사히 가게 된 것만으로도 서로 기뻐했다. 그는 영등포역에 내리면서 나에게 전화하기로 하였고 나도 “네가 전화하면 뭐든지 도와줄께” 라고 허랑(虛浪)하게 큰소리쳤다.
그러고 좀 지난 졸업반 가을께 갑자기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잘 있었니,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하루 이틀쯤 재워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전화를 받는 순간 그 녀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속이 꽁꽁 얼어붙듯 온몸이 딱 굳어버려 그가 말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한마디 던진 것이 “전화 잘못 거신 것 아닌가요” 라는 말이었다. 아주 잠시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있더니 전화를 끊었다.
바로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아니, 이건 아냐” 라며 나도 모르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잠시의 침묵은 그가 나에게 “비겁한 놈”이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손가락질하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한다는 것을 나는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있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생각만 하면 얼굴이 뻘개지는 옛일이 “나는 비겁자(卑怯者)다” 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 이후로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절대 뒷일을 알 수 없는 어려운 약속은 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수칙(守則) 제1조에 놓기로 했는데 막상 술에 취했을 때에 그 수칙을 떠올렸을까는 의문이긴 한데 글쎄 그 후로 그런 류의 일은 없었으니 어쩌면 나도 모르게 수칙을 잘 지켜서였을까?
4.몽환(夢幻) 속에 엎어지다
73년 봄쯤인가 내가 겨우 바닥 졸병 딱지를 떼고 군 생활에 조금 익숙해져 갈 때 나보다 뒤늦게 입대했던 K에게서 전화가 왔다. 특가(特暇)를 받아 나왔다가 그냥 전화를 해보았다는데 그때 마침 나도 정기휴가 즈음이었기에 어찌어찌 꼭 맞아떨어진 듯 조우(遭遇)하게 된 것이다.
어찌나 반갑던지 바로 애저녁부터 술집에서 만났다. 몇 년 전이었던가 그야말로 코가 삐뚤어지게 술 마시고 꼬꾸라졌던
K는 산꼭대기에 있는 레이다 기지로 배치되었다 했고 나는 병참부대여서 딴 세상 이야기인지라 재미나고 신기해서 서로 얘기를 주고 받느라 정말 계집아이들처럼 조잘대었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로 봇물 터지듯 하였는데 술 따르던 아직 아이 티도 못 벗은 듯이 애리애리한 여자가 생글거리며 거들다가 아예 K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K는 내일 귀대해야 한다고 하며 여관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다. 그 이유야 뻔한 것이 저들 둘이 짝자꿍이 맞았기 때문이라 나는야 밤도 늦고 해서 계산해주고는 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에 귀대(歸隊)하던 K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그 내용이 괴상했다. 어제 밤 여관에 가기는 했는데 그녀가 사라지는 바람에 닭 쫓던 개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네게 인계해줄 테니 네가 대신 깃발을 꼽아라”는 것이었다.
허, 참 별일이야. 여관에 가지 않았으면 우리 집으로 오면 될 터인데 도대체 무슨 사단(事端) 때문인가 싶었다. 하여튼 새벽같이 전화해서는 자다가 무슨 봉창 두들기는 헛소리까지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꼭 알아야 될 일도 아니고 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며칠 지나 대학 상경학회 후배들과 모임을 갖고 술 몇 잔에 거나해져 째질듯한 기분으로 고성방가(高聲放歌)에 가까운 되도 않는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벌써 통금시간에 가까운 시간이어서 막상 큰 길이라 해도 차량통행도 뜸해졌고 어두운 길에 행인도 별로 없어 가로등만이 외롭게 밝혀주고 있었다.
마침
아마 오늘따라 손님들이 모두 일찍 갔는지 아무도 없어 고즈넉한 술청을 며칠 전 K와 합석했던 그 여자가 거의 맨 살을 드러내다시피 하곤 홀로 닦고 있어 처음 보았을 때의 앳된 느낌보다 훨씬 에로틱하게 보여서 그랬는가 모르겠다.
그녀도 어쩌다 들여다보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언뜻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왠지 나도 모르게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고는 손으로 잔을 들어 마시는 모양을 해 보였다. 지금 술 마시러 들어가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아주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라는 몸짓을 했다.
그렇게 되어 통금시간도 되었겠다 문을 닫아걸고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속으로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K, 그 녀석이 “대신 깃발을 꽂아다오” 라고 했던 말을 되새기게 되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술집을 들여다 보았을 때부터 그 생각이 있었는지도 몰라.
결국 둘 다 취해서 그냥 대충 술상을 걷고는 서로 허리를 감고 이리 저리 뒤뚝거리며 달리 말을 맞추지 않았어도 스스럼없이 골목 안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에 들자 며칠 전 K의 일이 궁금해서 K와 함께 여관에 가지 않았느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슬그머니 물었다.
그랬더니 갓 낳은 애가 있다던 민자(사실 이름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들은 손님 따라 순식간에 이름을 지어내기도 하니까, 본명일지 아닐지는 걔 자신만은 알겠지?)가 고개를 뒤로 꺾듯 젖히며 깰깰 웃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날밤 여관에 들긴 했었는데 막상 K가 아무리 주머니를 까뒤집어도 숙박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 외상으로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다 급기야 군화를 맡기면 안되겠느냐며 떼거리까지 부리며 실랑이질을 해대는 바람에 그녀는 도로 제 술집으로 가서 잤다는 것이다.
나도 따라 한참 웃다가 문득 그러면 도대체 잠은 어디서 자고 귀대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K와는 제대할 때까지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까마득히 잊었고 아직도 의문이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알면 뭐해?
5. 힘들기는 다 똑같다
도대체 술이란 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세상살이에 필요한 윤활유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게는 언제나 지긋지긋하게 생각되던 것이기도 하다.
81년 겨울 우리회사는 신제품을 필요로 했고 신제품을 개발했던 K그룹 사는 우리를 통해 매출확대를 필요로 했다. 나는 부장과 과장을 모시고 회의에 참석했고 저쪽도 개발, 영업과장에 역시 나와 같은 실무자가 나왔었다. 회의 끝에 술자리까지 이어지는 이런 정도의 일이야 직장생활에서 매우 흔한 이야기인고로 사실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는다.
접대하는 쪽이 있으면 받는 쪽이 있을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어느 쪽이 접대하는 쪽이고 받는 쪽이다 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여러 차례 만나면서 번갈아 가며 술자리를 같이했다. 나는 그저 잡다한 준비와 뒷 처리만 잘 하면 되지만 그에 앞서 나만큼 술이 약한 부장이 실수하면 안 된다 싶어 이를 테면 술 상무 역할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점잔 빼는 것도 탁 놓아버리고 너도나도 서로 좋아하는 척 뱅글뱅글 돌며 신나게 놀지만 그것이야 잠시 그럴 뿐 몸은 괴롭고 머리는 지끈거리는 것이 정해진 순서다.
그렇지만 저쪽 실무자는 언제 봐도 쌩쌩한 얼굴로 빈틈없어 보였고 게다가 경비가 넉넉해서였는지 모르지만 K그룹임을 과시하는 것처럼 술판이 끝날 때면 언제 준비했는지 이것저것 선물까지 챙겨주었다. 난 죽을 지경인데 그런 꼴을 보노라면 배알이 배배 꼴리고 정말 얄밉기만 했다.
서로가 적당히 잘 협의가 되어서 말하자면 윈-윈의 결과를 이루어낸 마지막 날엔 기분 좋은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제 그 동안의 긴장을 탁 풀어놓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자리잡으니 양주 병이 도대체 몇 병이 들어오는 건지 셀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쓰러지면 안된다며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던 나는 취해 쓰러질 것 같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이런 때는 달리 방법이 없어 그저 어떻게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서라도 강제로 오바이트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 한참 꺽 꺽 대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옆을 돌아보았더니 얼씨구, 바로 K그룹의 실무자 A였다. 순간 그도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잠자코 둘이 어색하고 어설픈 미소를 지었는데 그러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갑자기 웃음보가 터졌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다가 어깨를 두들기며 눈물이 날 정도로 한참 웃었다. “아, 참, 그렇게 쌩쌩하던 저 친구도 나나 다름없이 이렇게 하고 있었구나” 라는 것은 저나 나나 서로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말이었다나?
웃음을 그친 A가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죠, 뭐”했는데 살다 보니 맞는 말이기는 하였다. 그 후 그와는 가끔 만나다가 해외지사로 발령이 나고 이별주를 마신 후부터는 소식이 끊어졌다.
6.흑기사에 흑심(黑心)있다
무역을 담당하였을 때는 수입이 주 업무였기에 하역(荷役)이나 통관업무가 지연될 때면 부두로, 세관으로 출장을 다녔다. 대개 우리 제품도 그렇고 수입자재도 용적(容積)이 꽤 많이 나가는 물품이라 운송계약을 따내려고 들이대는 운수회사가 많았지만 대체로 사장과 친분이 있는 H운수가 대부분의 물량을 가져갔다.
본사가 부산에 있었던 그 회사와는 운송업무 뿐 아니라 하역업무도 협조 받기도 하였고 게다가 우리 부서에도 적지않이 비자금을 넣어주고 있었다. 그래 그 회사와는 매일 업무연락을 하다시피 하였는데 그 업무를 전담하던 여직원이 J양이었다. 일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데다 전화로 들리는 목소리가 물기가 촉촉한 듯 착착 감겨 들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다른 운송회사로부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그 회사 사장의 정부(情婦)라는 것이다. “그 사장은 나이가 환갑도 지났는데 무슨 소리야”하며경쟁업체의 헐뜯기로 치부(置簿)하면서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일도 세상사에 허다한 것이 아닌가 싶어 한편으로 어쩜 꽤 예쁠 것 같은 그녀를 생각할 때 내 것(?)도 아니면서 손해 본 듯 아까운 느낌이었다.
하여튼 그 회사로는 굳이 찾아갈 일도 없고 대부분 전화로 일 처리가 되는 것이라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요상한 소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단한 요부(妖婦)라고 하니 당사자야 천리밖에 있어 “어, 참 되게 궁금하네, 한번 어찌 생겼는지 보고 싶네” 농담하곤 했지만 그런 말 속에는 대체로 시커먼 꿍꿍이도 들어있는 것이 아니겠나?
그 해 여름에 어쩌면 속으로 기대하던 일이 벌어졌다. 가끔씩 H사장이 올라와 사장에게 적당히 로비하고 돌아가곤 했는데 그 해 따라 운송사고가 빈발(頻發)해서 생산에 차질(蹉跌)이 생기자 평소 때는 그저 점심 정도로 때웠던 것과는 달리 저녁에 한 번 만나자는 것이다.
게다가 놀랄만한 것이 전화로만 알고 지냈던 J양도 함께 올라왔던 것이어서 비로소 함께 어울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어딘지 가냘프게 보이기는 했어도 전화 목소리로 느꼈던 진한 글래머의 이미지와 거리감이 있을 만큼 다르지는 않았다. 겉보기보단 속이 차있다고 해야 하나?
업무로 자주 통화하였기 때문인지 별달리 서먹서먹하지도 않고 오히려 오래 전부터 함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지는데다 동향(同鄕)이어선지 서로 살갑고 다정스러웠다.
“부산으로 출장을 내려오면 꼭 전화하세요” 라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저 늙은 사장의 정부란 말이지 라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어 그게 꼭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술자리를 파하고 떠나게 되었는데 물론 말로는 H사장은 호텔로, 그녀는 친척집으로 간다고 에둘러 말하였지만 이 늦은 시간에 내려갈 것은 아니겠고 “아마, 역시?“ 하고 생각하니 어째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선가 “다음에 또 뵐께요” 하며 돌아서는 그녀의 눈이 어째 조금 촉촉해 보였던 것은 그저 내 기분 탓이었을까?
그런 만남이야 업무상 적잖이 있는지라 바쁜 일상에 그저 머리 속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기억이 되었지만 가을께 급히 하역업무를 독려하려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이번에 그녀를 한번 만나봐야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려가자 마자 그녀의 회사로 전화하였는데 의외로 뛸 듯이 반가워해서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 하여튼 일단 바쁜 일이 처리되면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해두었고 그예 다음 날 저녁 다방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역시 기분이 묘했다.
사실은 뭐 그냥 한번 업무상 파트너하고 만나는 것으로 보면 굳이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허나 요상한 소문의 주인공과 둘이 만난다 싶으니 어째 은밀한 느낌이 드는 것이 나도 모르게 이래도 되는가 싶기도 하고 괜한 헛기침도 나오기도 하였다. 또 솔직하게 말하자면 속으로 좀 지저분한 꿍꿍이셈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가 훨씬 얘기가 많았고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때 우연히 귓가에 흐르던 노래가 전 해인 83년도에 발표되었던
그러고는 “여기서는 제가 대접할래요” 하며 끌 듯 내 소매를 잡고 나섰다. 근처 횟집에서 한 잔 두 잔 하던 술이 어느새 한 병 두 병 늘어났다. 보기와 달리 그녀의 주량도 상당해서 내가 먼저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업무적인 관계에서 더도 덜도 아닌 사이로 알게 된 나에게 어느 틈에선가 제 속사정을 달달 털어놓게 되었는지 도저히 그 연유(緣由)를 알 수 없어 참으로 궁금했지만 아마 취해서 그런가 보다 라고 밖에 달리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아버지의 병원비에 동동거리다가 사장이 도와주어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결국 그것을 빌미로 사장과 그런 사이가 되었고 지금도 아버지 병원비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골자(骨子)였던 듯 한데 나로서는 세상에 그리 드물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하소연쯤으로 들어줄 수 밖에는 없는지라 글쎄 내가 어떻게 해줄 일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고 그저 안아주고 보듬어 내 가슴에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담게 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래선가 꽤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나는 술이 깨어가고 그녀는 한껏 취해버렸다. 집으로 안 가겠다고 버티는 그녀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함께 택시를 타고 가서 그녀를 집으로 들여 보내주고 혼자 근처 여관에 들어가고 말았다.
술이 한가득 취했는가 싶었는데 어둔 밤 촛불 하나 켜놓은 듯 취해서 몽롱했어도 머리 속 한쪽에서 어째선지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또렷했다. 왜냐면? 내 어깨에 기대어 눈물 섞인 하소연일까 원망일까를 누군가에게 쏟는 듯한 그녀의 슬픔을 겉으로는 토닥거리면서 살을 섞는 듯 그녀의 살내를 느꼈고 속으로는 “아유, 만리장성이고 뭐고 성 쌓기는 틀렸구나” 하고 아쉬워하고 있던 속마음도 분명히 있었으니 그렇게 본다면 H사장이나 나나 뭐가 다른가 싶어 일말(一抹)의 부끄러움도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업무연락 끝에 감기 걸린 듯 좀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저, 죄송했어요” 하며 짧게 말했다. 그 짧은 말 속에 그날 일었던 갖가지 감정이 함축(含蓄)된 것 같아 그녀에게 연민(憐憫)이 느껴졌다.
어찌됐던 괜히 H사장에게 부아가 나서 조그만 트러블만 나도 그것을 트집 삼아 운송물량을 슬슬 다른 회사로 옮겨버렸다. 그랬더니 H사장이 바르르 올라오더니 사장실에서 숙덕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에이, 잘 좀 봐줘” 하고는 큰 소리로 “저녁에 술 한 잔 합시다” 했다. 나중에 사장이 부르더니 “H운수 말이야, 별 일 없지? 계속 좀 밀어주게나”하고 딱 못 박았다. 에이, 그래서 그녀를 위한 조그만 복수(과연?)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다음 해 내가 특수사업팀장으로 가는 어수선함 속에 그녀에 대한 생각은 갑자기 사라졌다. 아주 나중에 들려온 소식으로는 H사장은 여전히 건재하고 J양은 퇴직했다고 했다. 내 느낌만일지는 몰라도 그녀는 H사장과의 관계만 좀 걸릴까 몸매든 품성이든 빠지는 구석이 없어 어디에서든 잘 지내리라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글쎄 어째 그녀가 심청이라면 H사장은 인당수(印塘水)였을까 싶으니 그 옳고 그름을 잘 모르겠다.
7. 환락에 비애(悲哀)있다
갑자기 호출 받아 사장실로 들어갔더니 사장이 대뜸 남산에 있는 하이야트 호텔로 가보라는 것이다. “예?”하고 눈이 동그래져 되물으니 공문서를 던져주었다.
사무실에서 들쳐보니 노드롭(Northrop) 사의 안내공문이었다. 자기네들의 화학제품을 한국에서 팔아줄 제휴회사, 그러니까 대리점이 되어달라는 것으로 그 일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면 인터뷰에 응해달라는 것이다. 아마 사장은 그들이 우리 같은 소규모 회사에 관심을 보여준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던가 혹은 특수사업팀까지 꾸려서 신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마당에 혹시 그럴 듯한 아이템이 있을까 해서였던가 어쨌든 한번 가보라는 것이었겠지.
그렇지만 노드롭이라는 미국의 거대기업과 우리가 연결될 끈이란 것이 별로 있을 법 하지도 않고 그런 공문을 우리에게만 보냈을 리는 그야말로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 신바람 날일은 아니었고 단지 바쁜 일도 없으니 그 덕에 남산이나 한 바퀴 돌며 놀다 오자 라는 그런 심산(心算)이었다.
남산에서 콧바람을 좀 쐬고 그들이 지정한 시간에 호텔에 들어가니 객실에 인터뷰 실을 꾸며놓았다. 난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죤 웨인처럼 생긴 미국친구가 나를 맞았다.
여기서부터 내 상상이 완전히 어그러져버렸다. 이놈들이 한국에 와서 파트너를 구한다면 우선은 한국인이나 교포가 맞아 사전 서베이(survey)부터 하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딱 맞부딪쳤으니 다른 건 몰라도 회화라고는 여전히 “아 엠 어 보이”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내게는 완전히 고생문을 연 셈이 되었다.
어쨌든 생고생 끝에 20여분쯤 걸린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이 친구가 노드롭 비행기 모형을 하나 주었다.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장난감으로 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브로셔(brochure)도 한아름 안고 선남선녀들이 데이트하는 것이나 구경하며 맥주 한 병 꼴깍하고는 그냥 그대로 집으로 직행해버렸다.
브로셔를 다 훑었어도 우리와는 정말 연결될 만한 것이 없는지라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황사장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인터뷰 결과 우리와 새로운 사업을 협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혀 일 거리가 없는데 웬 소리야 싶었다.
회사에 방문 온 그는 자기를 재미교포라고 소개했는데 글쎄 내가 보기에는 국내에서 무역관계 일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리잡은 사람으로 보였다. 하여튼 그가 가지고 온 아이템은 우리회사 업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보안(保安)관련 사업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보안아이템을 가져왔는지 알 수가 없어 이리저리 탐색을 해보니 아마 내 수준 이하의 영어실력이 원인이었던가 보다.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아마 가든(guarden)사업에 관심있다고 한 것을 혹 가드(guard) 쯤으로 오해했나 싶었다. 설마 그럴리야?
지금이야 대형 보안업체도, 보안장비 업체도 많지만 그때만 해도 보안이라고 해봐야 꽤 생소(生疎)했다. 그래도 “앞으로 획기적인 사업이 될 것이요”하며 황사장이 헛바람을 막 쑤셔 넣었고 보안시스템 자료를 번역하며 따져보니 공장 짓는 일도 아니고 해서 괜찮게 보였다.
그렇지만 역시 사장은 전혀 생소(生疎)한 업종이어서인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차일피일 하던 어느 날 황사장이 좋은 곳에 가서 접대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가 초대한 곳이 삼청동 어딘가의 요정(料亭)이었다.
그런 곳에 갈만한 일이 있을 턱이 없었으니 지금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하여튼 중역 몇분을 모시고 가니 황사장과 그쪽 에이젼트(그가 교포3세로 노드롭 측 담당자였나?)가 맞았는데 여기가 흔히 정치 쇼도 벌어지곤 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곳인가 싶었다.
솔직히 속으로 생각하니 사업이 결정된다 해도 뭐가 남는다고 이런 접대를 하는가 싶어 점잔빼며 이런저런 담소하던 1부쇼(?)를 거쳐 넥타이 풀고 놀기 시작할 때 휴게실에서 황사장에게 슬쩍 물었더니 그는 히죽 웃으면서 “뭐 이런 조그만 일 하나 보고 이러는 것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언중(言中) 간간히 알아챈 것이 실상 그는 무기중개를 꿈으로 하는 큰 그림 속에 인맥을 쌓아가는 과정으로 우리는 그저 일종의 들러리요, 일종의 여흥에 불과하지 않은가 싶었고 그래서 혹시 일본종합상사와 연(緣)이 깊은 사장이나 기협(企協) 출신 부사장의 인맥(人脈) 때문인가도 싶었다. 뭔가 깊은 속셈이 있을 터이나 아무리 보아도 이 일은 일과성(一過性)에 불과한 듯싶어 그 이상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옆에도 당연 예쁜 아가씨가 앉았는데 어째 이런 자리에 나온 아가씨로는 어째 순진하게 보이는데도 나긋나긋이 착 달라붙어 이상했다. 아가씨들이 허슬(hustle)춤에 캉캉까지 흉내 내며 놀아주니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던가?
내가 가장 젊어서(?) 그런가 내게 술을 밀어붙이니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묘한 것이 내 짝이 된 아가씨가 어디쯤에서부터인가 내 술잔을 제 앞으로 가져가 홀짝 마시고는 빈 잔을 슬그머니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러고는 내 귀에 입술로 빨듯 가까이 하고는 “오빠, 마음 놓고 노세요, 오빠 술은 제가 마실께요” 라고 하였다. 오, 마이 갓, 세상에 이런 기특한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어 그녀의 입술을 쪽하고 빨아주었다.
아무튼 내 앞으로 온 술은 거지반 그녀가 마신 셈이었다. 함께 어울려 춤추며 취해 돌아가는 짬짬이 슬쩍 곁눈질로 보아하니 그러다 정말 취해버렸는지 그녀는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쓰러질 듯 건들거려 다른 아가씨들이 “얘가 오늘 왜 이러냐” 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녀에게 오늘은 술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길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싶었다.
거의 업혀가듯 하던 그녀가 “제 집이 근처예요” 하면서 가리키는 방향대로 그녀를 끌고 하숙인지, 자취방인지 뭔지 모를 그녀의 방에 간신히 들어가기는 했다. 그녀는 취해 흐느적대면서 이불이고 뭐고 던지듯이 펼치고는 “오빠, 안녕”하고는 바로 꼬꾸라졌다.
간간히 그녀들이 책망하듯 하던 말 중에 “얘가 지 애인하고 헤어지더니 이 모양이 되었네” 라고도 했고 또 슬쩍 나에게는 “얘가 지 애인하고 아저씨하고 닮았다 네요” 라고도 했다. 에이, 그런 판박이 대사는 술집에 가면 열이면 열 듣게 되는 믿거나 말거나 소리 중의 하나가 아닌가?
바로 옆에서 자는 그녀가 그림의 떡은 아닌지라 별생각을 다하다 통나무처럼 쓰러져 있는 그녀와 무슨 화촉동방(華燭洞房)이냐 싶어 속으로 “그래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잡놈 대하느라 얼마나 고단한 인생이냐, 너는 홍도 해라, 오빠가 너를 지켜주마” 라며 스스로 핑계 삼고 단단한 몽둥이를 딱 거머쥐고 겨우 잠을 청했다.
깜빡 눈이 떠졌는데 비몽사몽(非夢似夢) 혼몽(昏懜) 중에 잠시 멍했다가 드디어 어제 일이 생각났는데 그녀는 어디에? 하며 둘러보았더니 그녀가 들어오며 좀 쑥스러운듯 조신(操身)한 모양새로 “오늘 출근하시나요?”하고 묻고 나서는 우유랑, 빵이랑, 과일이랑 담은 쟁반을 내왔다.
“저, 아침은 잘 해먹지 않아서요” 하며 배시시 웃고는 새치름히 고개를 살포시 숙이고 단정히 앉았기는 한데 깊숙이 패인 가슴 골이랑 여기저기 누르면 튈 듯 탱탱한 알몸이 은근히 비치는 것이 딱 처분을 기다리는 몸짓이라 내눈도 정신도 아릿아릿 혼미(昏迷)해졌다.
그녀를 쓰러뜨리고 이층집을 지을까 콧김을 내뿜으며 들소처럼 달려들까 하는 중에 마침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부서지며 하얗게 흩어지는 것이 꼭
물총 한 방에 무얼 그리 대수롭게 따지겠냐마는 어쨌거나 한번 어긋난 기회를 억지로 잡으려 들어야만 하나 라는 등 잠시 생각하다 보니 뜨겁게 달구어지던 열기가 돌연 확 사그라져버렸다.
구두끈을 매며 나서는 나에게 그녀가 “또 만날 수 있을까요”하고 나직하게 물었다. 그때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제법 격이 다른 이런 고급요정에 나가는 여자를 만나서 어쩌겠나도 싶고 또 황사장과의 일이야 성사되기는 어렵다고 보았으니 다시 들를 일도 없을 것이어서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며 씁쓸한 미소만 보였다.
그때 보이던 그녀의 눈망울에 그저 내 느낌일 뿐이었겠지만 전에 마장동 도축장(屠畜場)에서 보았던 왠지 곧 눈물을 쏟을 것 같던 소들의 슬퍼 보였던 눈이 그녀의 눈에 오버랩 되던 것은 어쩐 일일까?
그래 더 그녀를 보지 못하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가 잠깐 돌아보니 대문 사이 빠끔히 열려진 방문으로 단정하게 고인 무릎에 턱을 고이고서 떠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흘끗 보였다. 그런 그녀가 왜 그리도 슬퍼 보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눈에 안개가 낀 듯 축축해지며 무슨 애연(哀然)한 생각 덩어리 같은 것이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예상대로 사장은 새로운 업종에는 몸을 사렸고 나도 영어가 짧은지라 다리를 놓는 황사장을 제치고 직접 콘택하기에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어영부영하다가 끝냈으니 이름도 모를 그녀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종친 것이다.
8. 술 한잔에 살랑대 본다
알렉산더는 정복자이면서도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켜 실현해보려 했던 그다지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위대한 왕이요, 군인이었지만 그런 그에게 약점이 있었다면 술에 취하면 급격히 돌변하여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자기통제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가 만취하여 그의 친구이자 생명의 은인이었던 클레이투스와 언쟁을 벌이다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 최악의 음주사고(飮酒事故)라 하겠다. 그는 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고는 경악(驚愕)하여 며칠을 굶으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알렉산더가 만취했다는 것은 과장(誇張)된 기록이라고 부정하는 사가(史家)도 있으니 만약 그렇다면 알렉산더는 술을 핑계삼아 맨 정신으로는 제거할 수 없었던 친구를 죽인 셈이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와 페르샤의 상이(相異)한 동서 두 문명권을 하나로 포용(包容)하여 범세계적인 새로운 문화를 이루려고 하였는데 클레이투스와 같은 그리스, 특히 마케도니아 중심적인 정신세계를 고수하려던 인물들은 알렉산더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을 법하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알렉산더 군단(軍團)의 주축(主軸)인 클레이투스를 위해(危害)할 명분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 때 페르샤 정복을 끝내고 벌인 향연(饗宴)에서 독한 토속주(土俗酒)에 모두 취했을 때 알렉산더에게 찬물을 끼얹는 언행(言行)을 그치지 않았던 취중의 클레이투스를 술의 힘을 빌어 제거하였다는 것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함께 만취상태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엉켜 있을 때는 실수나 우연이 아니고서야 누가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말하기로 한 잔의 술로도 낙원(樂園)을 찾을 수도 있고 사람까지도 죽이는 최악의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역시 술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술로 정신이 혼미(昏迷)해져 일어난다기보다는 억누르고 있던 의도를 술을 빙자하여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동서고금에 걸쳐 술과 관련된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고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겠지만 술에 약한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항상 쾌락의 크기보다는 고통의 크기가 훨씬 커서 태반은 술과의 싸움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래 항상 내일 해 뜰 때까지는 어떻게든 괴로운 몸을 되살리고 정신차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술을 마셨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선가 때로 술기운을 빌어 일상에서의 일탈(逸脫)을 꿈꾸며 대취(大醉)해본들 몸만 괴로울 뿐 그 놈의 이성(理性)이란 놈은 또박대며 끝까지 거꾸러지지 않으려 하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사람마다 주량(酒量)이란 것이 있다. 예전에 술을 한 모금도 못 마신다는 동료에게 맥주도 아닌 보리음료수를 주었더니 그냥 만취한 것처럼 나자빠졌다. 모두다 장난인줄 알았다. 그런데 일종의 알코올 알레르기라는 것도 있다나? 그런 사람에게는 소주 한잔이라도 맹독(猛毒)이 될 것이고 말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소주 한잔 주고 됐냐?고 한다면 장난하냐 하며 주먹이 날라올지도 몰라?
사실 제 주량 따라 마시면 나름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몇 개라도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술의 권세(權勢)다. 그런데 거기! 거기쯤에서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대부분 조금 조금만 더 하다가 드디어는 흐느적대다 이리저리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타게 마련이다. 자기통제력이 있으면 음주사고라는 것이 일어날 이치가 없겠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지라 부처님이 술을 금하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나?
다행히도 쫓기듯이 마시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술의 흥취(興趣)를 조금은 느끼기도 한다. “좋은 술에는 간판이 없다”(Good wine needs no bush)라고 하지만 그것도 달리 보면 제 자리에 맞는 술이 좋은 술이다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무슨 술이면 어때, 적당히 취하면 그만이지. 취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면 곧 바른 직선도 부드럽게 휘어져 보이고 쭉 벋은 가로수가 어느새 살랑살랑 춤을 추기도 한다. 거나해진 기분에 걸음도 살랑살랑, 요새 CF에 살랑댄스라고 나오잖아. 주교(酒敎)에 푹 빠진 광신도만 되지 않는다면야 한 잔 술에 부라보!
정치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나는 흰 갈매기를 보며 “나도 마음을 씻어 간교함을 잊고 너를 따라 놀리(吾亦洗心 忘機從爾遊)”라 읊고 술과 벗삼아 지낸 시선(詩仙)이자 주선(酒仙) 이백(李白)은 양자강 유역에서 유랑하다 죽었는데 병사했는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술에 취해 강물에 비추인 달을 붙들려다 빠졌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지만 뛰어난 그의 시 세계에서는 술을 벗하는 시도 많은 몫을 차지한다.
달밤에 홀로 쓸쓸하게 술 마시고 있다가 달과 달빛에 비추인 내 그림자를 초대하여 함께 술을 마시니까 어째 떠들썩한 분위기가 되어 즐겁구나 하며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자.
“내 노래에 달도 서성이고 내 춤에 그림자도 일렁인다
깨어있을 때 함께 즐기다 취해서는 각기 흩어진다
우리의 만남 영원히 이어져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리”
(我家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游 相期邈雲漢)**
그러니 어떠리,
“내 취하고 그대 또한 즐거우니 취흥에 함께 세상사를 잊으리”(我醉君復樂 陶然共忘機)라 노래하며 한바탕 웃어보는 것은?
*롱펠로우의 술잔치노래(drinking song)의 일부
**이백의 月下獨酌 중 일부[문이재 출판사의 이백시선(李白詩選)에서]
~이 모든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겨우 삼할(三割)의 사실에다 덕지덕지 덧칠하여 꾸민 것이니 심각하게 생각지 마시기 바람
(양천서창에서
첫댓글 세상만사가 술 속에 다 들어있네그려
너무 솔직한, 실감나는 소설이네
술 잘 못하는 내가 어찌 그 경지를 알까마는
잘 마시면 보약이고 윤활유같은 술... 잘 하면 낭만이고 아름다움이며 행복이니
백방으로 해결 안되던 일도 해결해 주고 심각한 문제도 쉽게 풀어주는 요술,마술같은 술
술에 얽힌 각각의 경우를 잘 표현해 놓았네 그려. 말짱한 정신으로만 이 세상을 샇 수 있을가? 육체도 정신도 가끔은 느그지게 풀어져 흐느적거릴 때,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돌아 왔을 때 한층 더 부드러운 곳으로 온 그 기분을 느길 수 있겠지. 술의 묘미?
1년 365일 음주하던 내가 교통사고 이후에는 주량이 급격히 줄어서 집에서 혼자서는 안 마시고 밖에서 어쩌다 마실 기회가 있어도 예전 주량의 반의반도 안되어서 서글프기 짝이 없다네. 아직도 나를 술꾼으로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내가 몸을 사리는 줄 아니 그것도 민망스럽다네. 필력이 정말 대단하네. 본격적인 애정 소설을 써보시면 어떨까?
실수(real)+허수(image)가 있지. 그게 현실과 판타지의 공식이라 볼 수있지 아마? 어릴때는 환상을 쫓고 커서는 현실에 얽매이고. 그런데 이제는 어느쪽도 아니게 되었나봐. '익숙함'때문인가? 젊을때는 설사 괴롭고 슬플때도 희망과동경이란 빛을 찾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무엇이 빛이 되어줄까? ㅎㅎ 생각만 많아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