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회한
文 熙 鳳
파란 하늘은 아직도 맑고 높은데 세차게 부는 바람 따라 이리 저리 뒹구는 낙엽을 보니 가을은 깊어 가나 보다. 마음을 비워 겸손의 자리로 희생의 거름으로 탄생되는 사랑 안에서 이웃과 나누며 삶 안에 비움을 일깨어 주고 다독여 주던 가을이 저물어 간다. 서글픈 그리움과 아쉬움만 남겨둔 채 말이다.
정처 없이 이 구석 저 구석 하염없이 떠도는 쓸쓸한 낙엽을 보면서 때가 되면 본질로 돌아가는 인생을 생각한다. 다시 돋아날 새싹을 위해 자리를 비켜 온몸을 벗고 후손의 거름이 되어주는 것이리라. 낙엽을 바라보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잘못된 습관과 욕심들을.
사랑은 신의 영역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자 명령이다. 사람끼리 주고 받는 것이지만 그 사랑은 신이 내린 선물이다. 그래서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는다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가을의 소원이 있다. 이유 없이 걷고 싶은 것, 햇볕이 순산해 놓은 나락 냄새를 맡아보는 것, 가끔 소낙비를 흠뻑 맞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등이다. 가을은 가을대로 맞이할 일이다. 여름을 그리워할 일이 아니다. 이 가을에 지난 여름의 그리움을 몽땅 태워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오늘 산수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노파가 폐휴지를 주워 모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허리가 많이 굽어 걸음걸이도 자유롭지 못했다. 자식들이 없을까. 아니 자식들도 형편이 어려운가 보다. 늦가을 황량한 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거리를 허름하게 차려 입었다. 피부도 많이 거칠고. 참 안 됐다 싶다. 자식들은 없고 손주들만 몇 있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은 그 사람의 역사이고, 살아가는 현장이며, 그 사람의 풍경이라고 최인호는 ‘산중일기’에서 말하고 있다. 그 노파의 얼굴은 삶에 찌들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해 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오늘 형편은 어떤지, 내일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가 한눈에 드러난다. 그 노파의 얼굴 풍경이 곧 그의 인생 풍경이겠다. 그것은 오로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며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풍경을 바꿀 수는 없다. 나는 그런 얼굴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나이 들어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결코 진부한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용기다. 실패 때문에 용기를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용기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인생이고 행복이다. 그 노파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도 용기를 낸다.
저물어가는 가을만큼이나 펵 쓸쓸하게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생각해 본다. 어떤 이는 ‘백만, 천만’이란 단위도 별 것 아니게 생각하는데 저 노파에게는 아무리 올려다 보아도 셈이 안 되는 숫자일 것만 같다. 저렇게 주어다가 사글세집 추녀 밑에 쌓아놓고, 쌓아놓고, 그리고 얼마 후에 고물상으로 가지고 가겠지. 그리고 지폐 몇 장 받아 치맛속 주머니 속에 꼭꼭 찔러 넣겠지.
그 가치 있는 돈으로 손주들은 세상의 어려움도 모른 채 희희락락 살아가겠다. 아니면 그 어렵게 모은 돈을 더 가치 있게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여유 있고 풍족하더라도 그 삶에 만족할 줄 모르고, 더한 욕심을 내는 사람을 과연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로또복권 당첨 확률이 8,200,000분의 1이라고 한다. 그러니 모래밭에서 동전 줍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그 동전을 줍기 위해 오늘도 거액을 투자하는 사람을 그 노파는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조금 부족하고 힘들어도 지금의 삶에 감사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멋진 삶이겠다. 포기하는 순간 절망은 시작된다. 누군가를 원망할 시간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해보는 것이 좋은 삶이다.
세상에는 많은 울타리가 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지켜주는 어른이란 이름의 울타리가 있어 아이들은 바람을 이겨내며 살아간다.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든 험한 세상,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기에 아이들은 힘이 되고 그래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