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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98
12월8일[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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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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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3L29Rjo0NQ
[한국 순교복자성직수도회 지민준 베드로 카니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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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특강]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사람, 하느님께서 떠나시는 사람...
그 삶의 징후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최황진 라파엘 신부
https://youtu.be/fIPt4y2mY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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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탄생하실 자리인 성모님의 태중은 품위 있고, 고귀하고, 정결해야 마땅합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지만, 큼직한 다이아몬드나 루비가 박힌 반지, 두툼한 금목걸이나 팔찌 같은 귀금속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관할까요?
걸레에 둘둘 말아 창고나 마루 밑에 던져놓지 않을 것입니다. 값나가고 귀한 물건이기에 시건 장치가 잘 되어 있는 보석함 속에 고이 보관할 것입니다. 무겁고 튼튼한 금고 속에 넣어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값나가는 보물도 그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는데,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님께서 열 달 남짓 거처하실 귀한 자리인 성모님은 보석함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품위 있고, 고귀하고, 정결해야 마땅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실 사다리로서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존재,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신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가장 탁월한 선택이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죄와는 전혀 상관없으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잉태되실 가장 적합한 자리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태중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의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 왔고,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음 주에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아니면 존경하는 총장 신부님께서 저희 수도회를 방문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디에다 모실 것입니까?
그 특별한 손님들을 아무 방에나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특실, 가장 넓고 쾌적한 방에 모실 것입니다. 물론 몇 사람이 며칠간 달라붙어 침실이며 화장실이며, 번쩍번쩍 광채가 날 정도로 깨끗이 청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특별한 손님들에 대한 합당한 예우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바라보니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교황님이나 총장님을 위한 거처 마련에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거처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의 합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구원계획의 성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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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LeaLQdkJ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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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게 해 주는 원죄>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인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에 다 들어있습니다.
은총은 죄로 끊깁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바치지 않으려 하는 이에게 은총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를 거절하셨습니다.
어떤 아들이 부모가 주는 돈으로 향락과 도박을 즐기는데 부모를 위해 감사의 선물을 할 수 있을까요? 이미 자아가 커져서 그것밖에 안 주는 부모를 원망합니다. 부모를 살해한 박한상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에게 부모가 준 돈은 은총이 아니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은총 중의 은총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시려면 그에 합당한 그릇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신비로운 그릇이 성모 마리아셨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처럼 뱀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라야 그 은총이 독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죄에 물든 인간에게는 아드님을 주실 수 없으셨고 오직 성모 마리아께만 아드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미리 성모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러나 합당하지 않은 이에게 특은을 주는 경우가 있을까요? 하느님은 정의이십니다. 선물을 받을만한 이에게 그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께서 아무런 공로 없이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 또한 하느님을 공의롭지 못한 분으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성모님은 절대 뱀과 대화하여 자신을 그의 비서가 되게 하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성모님은 뱀을 밟고 하느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성모님을 닮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도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는 안드레아 ‘앤디’ 삭스를 중심으로 한 영화입니다. 앤디는 언론인이 되고자 최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녀는 권위 있는 패션 잡지 ‘런웨이’의 강력하고 까다로운 편집장인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보조 비서로 취직합니다. 미란다의 정식 비서는 에밀리입니다. 그녀는 촌스러운 앤디를 비웃습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앤디는 다소 순진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성으로 묘사되며, 고급 패션 세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저널리즘 산업에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미란다 프리스틀리 밑에서 일을 맡습니다. 처음에 앤디는 까다롭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미란다의 작업과 기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앤디는 자신의 역할에 적응합니다. 그녀는 더욱 멋지게 옷을 입기 시작하고 자신의 직업에서 겪는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자신감을 얻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노력은 미란다의 존경을 얻지만 이러한 변화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앤디의 개인적인 관계는 특히 그녀의 직업이 그녀의 삶을 소모함에 따라 그녀의 남자친구, 친구, 가족과의 관계가 틀어집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파리 패션 위크에서 일어납니다. 비서 에밀리는 파리 패션 위크에서 미란다를 보조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에밀리 대신 보조 비서인 앤디를 선택합니다. 앤디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에밀리가 그렇게 소원하던 파리 패션 위크를 따라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앤디는 미란다를 편집장에서 교체하려는 음모에 대해 알게 됩니다. 긴장된 관계에도 불구하고 앤디는 미란다에게 경고합니다.
미란다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동료인 나이젤을 희생시킵니다. 이러한 배신행위와 자신의 직업이 그녀를 미란다와 닮아가게 만들고 있다는 깨달음은 그녀가 자신의 가치와 야망을 재평가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미란다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앤디도 에밀리에게 그렇게 한 것을 들먹이며 그녀가 자신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앤디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란다는 결국 누구나 다 자신과 같은 지위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앤디는 직장을 그만두고 미란다와 ‘런웨이’의 세계를 떠납니다. 그녀는 저널리즘의 뿌리로 돌아가 신문사에 지원하고 일자리를 얻습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친구들, 가족들과의 관계가 다시 정상화됩니다.
아른힐 레우뱅은 자신의 책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비서’입니다. 자아거나 하느님입니다. 자아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라고 하고 하느님은 이웃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 선택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성모님은 단 한 번도 자아의 비서가 된 일이 없으시고 그러지도 않을 분이십니다. 이것을 아시고 처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누구의 비서가 되어 ‘순종’하느냐만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알려주고 계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해 ‘의미 있는 일’을 시키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돈을 내어줘야 하고, 육체를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져야 합니다. 자아와 반대 일을 시키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원죄를 없애기 위해 의미 있는 일을 시키셨습니다.(루카 5,1-11 참조)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크게 반대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며 자기 뜻을 접었습니다. 자기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승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원죄가 사라지자 은총이 들어옵니다. 수많은 물고기가 잡히자 베드로는 겁을 집어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결국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실 때, 깊은 데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에고(자아: ego)의 생각을 수장시키는 곳입니다.
자아는 하느님의 말씀, 곧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명할 때 수장당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사시게 됩니다. 원죄를 없애는 방법은 이웃사랑의 계명에 순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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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부로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갈 때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으로 매일 강론을 준비하고, 복음묵상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음악을 듣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이 충격에 약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노트북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닙니다. 8년 동안 노트북을 잘 보관하던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습니다. 가방 자체는 제가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트북을 위해서는 8년 동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노트북 가방을 정리하고, 새로이 노트북 가방을 마련했습니다. 넷플렉스에서 ‘신앙의 표징’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유럽의 교회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성물(聖物)’을 보호하는 성당이 더러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관은 아름답게 금으로 장식된 보관함에 있었습니다. 금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보관함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관’을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보물’인 가시관이 사라질 뻔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19년 4월 15일에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있었습니다. 이때 ‘가시관’도 화재로 사라질 뻔 했는데 소방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노트북 가방과 가시관 보관함은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노트북과 가시관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기도에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성모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어린 아기 예수님을 기르셨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을 위한 노트북 가방처럼, 가시관을 위한 보관함처럼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거처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깨끗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모님이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범일까요? 우리는 오늘 그것을 복음에서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비록 그것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을지라도, 비록 그것 때문에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모님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래서 성모님을 자모이신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우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전구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는 과달루페에서, 루르드에서, 파티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자주 성체를 모시라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정성껏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깨끗한 몸과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었던 참된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참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티 없고 흠 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의 시작을 알려 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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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6-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해 주셨다.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리아의 고백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우리도 구체적인 삶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고,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성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 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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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네 복음서에 나오는 성모님 관련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어린 시절의 성모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먼저 평범하여 보이는 그의 신상을 소개합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에 사는 여인으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였던 마리아,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의 등장으로 그의 특별한 신원이 밝혀집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그리스 말로 ‘케카리토메네’)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이미 그것을 충만히 누리는 상태임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표현도, “너는 하느님의 총애(그리스 말로 ‘카리스’)를 받았다.”라는 표현도 모두 그가 주님의 특별한 보호와 도움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한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곧 성자 강생의 놀라운 신비가 이루어지리라고 천사는 예고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대면하고서야 비로소 특별한 은총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그것을 누리던 여인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는 오늘 대축일로 기념하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사건과도 연결 지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자의 강생을 합당하게 준비하도록 하는 첫 번째 사건으로, 그분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특별한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이 특은은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드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시고 그 구원의 첫 열매가 되신 분께서는, 같은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의 원형이시요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특별한 은총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도 하느님께 나아가기에 합당한 사람, 곧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대축일 미사 ‘본기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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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도 성모님처럼>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라는 교리의 출발점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즉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고, 하느님이셨던 분인데(요한 1,1),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요한 1,14)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한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인류 구원 사업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그 ‘길’이 되실 분을, 또는 ‘통로’가 되실 분을 미리 선택하시고 뽑으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창조 이전의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 그대로 ‘예수님을 위한 길’을, 또는 ‘통로’를 하느님께서 마련하셨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도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가운데 일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와서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할 때 했던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하신 그 일들을 확인해 준 증언이기도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0-32)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말은, 성모님께서 처음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상태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음을 나타내는데,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셨기 때문에 당연히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라는 말은,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말과 뜻은 같고 표현만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성모님 쪽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그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는가?”, 또는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바로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을 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18) 이 말은, “저와 제 아내는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또는,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의 경우를 보면, 첫 질문이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입니다.(루카 1,34)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즈카르야가 한 말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뜻이 다릅니다. 이 말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동정녀인 제가 아기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뜻이고, 지금 요셉과 약혼 중이기 때문에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천사가 아기 잉태 과정을 설명하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35-37)>
성모님은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왜 내가 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같은 의문은 모두 건너뛰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하는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또 그 일들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이미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성모님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단순하게 믿는 믿음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성모님의 질문과 천사의 답변 다음에 ‘위대한 응답과 순종의 말씀’이 나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은, 이해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마치 종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믿고 순종하겠다는 응답입니다. 이 응답으로 온 인류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그 일의 완성은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한평생 흔들림 없이 ‘응답과 순종의 삶’을 사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과 실행이 성모님 한 분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일도 ‘한처음’부터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입니다. 그 선택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모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끝까지 충실하게 ‘응답과 순종의 삶’을 살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 되어서,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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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대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와 그녀를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만, 두 인물의 대화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관하여는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대축일에 선포되는 복음은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와 어떻게 연결 지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여인으로 소개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그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또는 ‘은총을 받은 이’)는 마리아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여기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그가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 주셨으며, 이러한 하느님의 보호로 마리아께서는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시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본기도, 예물 기도, 감사송 ‘마리아와 교회의 신비’ 참조)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깨끗한 마리아를 선택하셨고 성령을 파견하시어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그 은총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마리아 또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은총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성찰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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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아담과 하와는 죄 없는 상태로 창조되어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죄가 없는 순진무구의 상태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죄의 상처를 입은 채로 새로운 구원을 간절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때가 되자 하느님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어,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뱀의 간계가 있지만 그런데도 철회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흠 없이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를 선택하십니다. 성령께서 마리아를 감싸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게 하십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종’으로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셨습니다. 하와가 죄를 지어 은총의 지위를 잃어 버렸지만, 성모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일치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고,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처럼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티와 흠이 없는 은총의 지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세례 때 받은 그 은총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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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은, 마리아께서 세상에 존재하시는 순간부터 죄에 물들지 않는 특전을 지니셨다는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이시며 임금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열 달 동안 품고 계실 분이시기 때문에, 탄생은 물론이고 잉태되실 때에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깨끗한 몸이셨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를 깨우쳐 줍니다. 제1독서는 사람이 뱀의 유혹에 빠져 원죄를 지었다고 알려 주며,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구세주 잉태 소식을 전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자비가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구원 계획을 펼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미리 우리를 뽑으셨다는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찬미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자비’와 ‘모태’를 뜻하는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곧 구약 성경에서는 배 속의 아이를 품듯이 하느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위를 ‘자비’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오늘 제1독서 마지막에 ‘하와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다.’라는 것과,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우리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에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강론 마지막에 남기신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우리의 온 삶이 하느님께 ‘예.’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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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성모님은 바로 모든 인간의 어제(=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모습이자 내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성모 승천) 모델이며 본본기입니다. 성모님은 지금은 잃어버린 본래의 인간 그리고 내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누릴 상태를 앞당겨 비추어 줍니다. 그렇게 본래 면목을 회복하고 되어야 할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이라는 현재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비춰 보여 주시는 분이 바로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이보다 더 완전하고 투명한 거울이 없습니다. 1854년 비오 9세 교종께서 회칙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셨다.』(DS 2803)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악마의 유혹에 굴복했던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손상하였으며 오염되었습니다. 반대로 마리아는 악마를 통해서도, 세속을 통해서도, 자기 자신을 통해서도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그녀의 순수성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모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무염시태)이라고 선언할 때 말하는 의미입니다. 즉 성모님은 우리의 과거의 모습,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신 분이시며, 성모를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무죄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과 같은 아주 특별한 은총을 잉태되는 순간 누리지 못하지만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고 성사 생활을 충실히 살아갈 때 우리 또한 흠 없는 영혼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교부들은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선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마리아의 탁월한 신앙과 성덕을 인식하였습니다. 유스티노 성인은 하와의 불순명과 마리아의 순명을 대조하면서 마리아의 순명과 믿음이 이루어 낸 구원 업적을 인식하였으며, 이레네오 성인은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여 마리아를 그리스도 구원의 협력자로 찬양하였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제자들이 모두 도망친 것에 비해 십자가 곁에 남아 계셨던 마리아에게서 신앙의 용기를 보았으며, 마리아의 노래(=성모의 노래)에서 드러난 겸손, 가난, 신앙의 충만함, 영적 인식, 하느님의 신비적 계시를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자세 등의 덕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원죄 없으신 잉태교리를 확인하듯 루르드의 성모 발현이 1858년 일어났었습니다.
사실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분명 성모님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미 마리아를 당신 아드님께서 잉태할 어머니로 택하셨을지 모르지만, 마리아 본인도 처음에는 천사의 인사말과 잉태 예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님 뜻에 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께서는 이런 놀라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기꺼이 신앙의 순종과 겸손으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1,38)고 수용하셨습니다. 사실 어머니 마리아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구라는 행성에 그것도 분단된 대한민국에, 예전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 태어난 것도 우리의 뜻이 아니었으며, 다른 부모가 아닌 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어찌 우리의 뜻이었을까요. 사실 지금보다 좀 더 잘 생기고 똑똑한 제가 아니라 지금의 저로 태어난 것이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넓고 깊은 면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어머니 마리아처럼 다 하느님 뜻이었고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원죄라는 인류 공동체의 가족이 함께 공유할 유산을 함께 짊어지고 태어났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물과 성령의 세례를 받고’, 어머니 마리아처럼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영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 에페소서는 이렇게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1,4~5)
오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어머니 마리아의 축일을 지내면서,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맙시다. 물론 원죄없이 잉태되신 것은 어머니 마리아께서 받으신 특은特恩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예수의 어머니로서 살아야 할 하느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즉 원죄 없이 잉태되신 어머니께서는 당신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순간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신 순간까지 모든 삶의 모든 면을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시면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라는 말씀을 실천하셨고, 이런 삶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며 사셨던 것입니다. 특별한 은총에 상응한 존재와 삶을 살아가시기 위해서 어머니께서는 남보다 더한 고통과 고난의 여정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시기 위해서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신 처음 순간부터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에 보물을 담듯이 예수를 받아 담으셨고 예수의 어머니가 되셨고, 어머니 마리아는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길을 함께 가셨습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머니 마리아처럼 원죄의 물듦에서 벗어난 은총을 받고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 마리아처럼 아주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처럼 자기 삶의 여정을 통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하고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각자의 몫이지만 받은 은총에 상응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자신의 영혼이 어머니 마리아처럼 원죄에 물들지 않은 영혼이 되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고, ‘말씀’과 하나 되는 존재가 되리라 봅니다. 오늘도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복음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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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들고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을 생각하며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하느님께 한 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오늘은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겸손과 순명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 나아가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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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님께서 쓰신 책에서 동창 신부님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동창 신부님께서는 아주 젊은 나이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판정을 받고 큰 충격을 입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고 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가! 앞으로 할 일이 창창한데!”
이런 말을 자주 내뱉으면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힘든 투병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계룡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자칭 도사를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어떤 말기 암도 완치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으신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곳에 몇 달 머물면서 암이 더 심해져서 다시 치료받던 병원으로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도사는 죽음의 문턱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사람을 현혹하여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무모한 집착으로 무속인에 빠진 것을 자책하고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절박함에서 우리는 판단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잊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만을 사랑하겠다면서 사제가 된 분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우리 인간은 모두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참된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절박한 순간이 참 많으셨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도 그러했습니다.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기를 가졌다고 하면, 약혼자였던 요셉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절박한 순간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시기에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런 상황이라면 주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저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내일 다시 찾아오세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아셨던 성모님이셨지요.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절박할 수 있는 순간을 은총의 순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모님과 같은 믿음을 갖추고 있을까요? 절박함이 또 하나의 희망이 순간일 수 있음을 믿음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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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우리는 할 수 있으니>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믿을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믿을 수 있으니
우리는 믿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희망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희망할 수 있으니
우리는 희망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사랑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니
우리는 사랑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일어설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일어설 수 있으니
우리는 일어섭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나아갈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나아갈 수 있으니
우리는 나아갑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품을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품을 수 있으니
우리는 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베풀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베풀 수 있으니
우리는 베풉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함께할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함께할 수 있으니
우리는 함께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어울릴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어울릴 수 있으니
우리는 어울립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이제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어
살릴 수 없는 때와 곳에서조차
우리는 살릴 수 있으니
우리는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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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철수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 예찬>
-지혜, 찬미, 순종-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드려라. 묘한 일들 당신이 하시었도다.“(시편98,1ㄱㄴ)
오늘 성모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고 은혜롭습니다. 하루종일 끊임없이 부르고 싶습니다.
“알마 레뎀토리 마텔, 꽤 펠비아 챌리 폴타 마네스, 엩 스텔라 마리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토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까지 잠자리에 들기전 끝기도후 부르는 라틴어로 시작되는 성모 찬송가로 마감하는 행복한 하루입니다. 이어 이른 밤 잠깨면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후 집무실에 들어와 부르는 만세육창의 평화의 기도가 또 행복한 하루를 엽니다. 늘 외쳐도 늘 좋고 새로운 만세육창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오늘은 정말 반갑고 기쁜, 사랑하올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 대축일입니다. 어제 대축일을 앞둔 12월7일 성 암브로시오 기념일에 저희 수도형제 3명은 참 좋은 선물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오창선 고백신부님의 사제수품 50주년 행사에 영광스럽게 초대되어 지극한 환대와 선물도 가득 받았습니다. 정말 이런 환대와 선물은 생전 처음입니다.
말그대로 오창선 신부님을 통해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는 성모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참으로 치밀하고 섬세한 배려의 사랑에 감격했습니다. 이런 초대는 저희 수도승들에게는 생전 처음이고, 명동 파밀리아채플에서도 미사도 처음이요, 명동 프란치스코홀에서의 축하연도 처음이었습니다.
미사끝무렵에 참석한 내빈 사제들의 소개가 있었고 사제중 저는 연령상 위에 속한 까닭인즉 일찍 제 이름을 불렀고 좌석 뒤쪽에 두 수도형제와 함께 있던 저는 벌떡 일어나 “저, 여기 있습니다!”하여 우레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뒤늦게라도 “저와 함께 온 안마르꼬 수사님과 백요셉 수사님입니다!” 용기를 내어 소개하지 못했음이 내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떠날 무렵 오창선 시몬 신부님께 감사인사를 전했습니다.
“신부님, 잔치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삼 초대가 은총의 선물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오고 싶어도 초대해 주셨기에 올 수 있었지 초대받지 못했으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과연 초대받은 손님답게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사 전례에 참석하는지 반성했습니다. 며칠전 교황님은 주요 추기경 9인 회의에서 교회의 여성적 차원에 대한 나눔이 있었고 교황님의 모두 발언에서 크게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교회는 여자입니다(The Church is woman). 만일 우리가 여자가 무엇인지, ‘여성임의 신학(the theology of womanhood)’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의 남성화는 해결되어야할 큰 죄입니다.
세계적 신학자 예수회원인 한스 우르스 폰 발다살 말처럼 교회는 베드로적 또는 성직자 차원과 마리아적 또는 신비적 차원으로 두 차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적인 요소가 베드로적인 요소보다 더 중요합니다. 남성다움이 없는 신부인 교회, 여성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여자입니다.”
정말 교회에 대한 참 심오하고 아름다운 정의입니다. 여자가 없다면 교회도 수도원도 존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원만 봐도 봉사자들 미사봉헌자들 예물 봉헌자들 대부분 여자들이지 남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제 집무실을 찾는 경우도 남자들은 거의가 빈손이지만 여자들 손에는 꼭 선물이 있습니다. 새삼 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님들 얼굴에서 저는 성모님 얼굴을 봅니다.
제대보 레이스에 보면 십자가가 열넷입니다. 레이스를 봉헌한 루시아 자매님의 설명에 감동했습니다. “수사님들 현재 열셋이기에 한분 더 오라고 열넷 십자가를 수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는 수도성소를 지망하는 네레오 형제가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이또한 대축일을 앞둔 성모님의 선물로 생각되었고 좋은 수도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 듬직해 보이네요!” 덕담도 했습니다. 참 성모님의 은혜가 고마워 자주 부르는 어머님 은혜라는 노래도 성모님 은혜로 바꿔 2절까지 만세육창후 불렀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 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 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말그대로 성모님 대축일 불러 드리는 축가요 오늘 자주 부르려 합니다. 성모님 선물에 대한 자랑이,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받고 싶은 성모님 덕을 나눕니다.
첫째, 지혜입니다.
지혜의 성모님, 동정 마리아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참으로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면 저절로 지혜도 따릅니다. 오늘 창세기 하와느 이점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부족했기에 뱀의 유혹에 빠졌고 이어 아담도 죄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너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숨어버린 아담입니다. “왜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 책임을 추궁할 때 이들의 변명과 핑계가 가관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하느님과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이요 신뢰 관계는 무너졌습니다. 무지의 악이 정말 무섭고 두렵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지혜의 결핍이 이런 관계 파괴의 죄를 짓게 했습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
하와 역시 똑같이 무책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없으면 탐욕과 교만앞에 속수무책입니다.
하와의 무지를 일거에 만회한 새 하와인 성모님이 참 고맙습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겸손과 지혜뿐임을 깨닫습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 지혜요, 끊임없는 참된 회개를 통해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할수록 우리는 성모님처럼 겸손과 분별의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둘째, 찬미입니다.
찬미의 성모님, 동정 마리아입니다. 제2독서 에페소서 찬미가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대로 성모님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 그리고 우리의 심정을 반영하는,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또 우리의 복된 신원을 확인 하는, 그리하여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월요일 저녁기도때 마다 바치는 찬미감사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성모님 마음에 꼭 들으셨을 찬미감사가입니다. 아, 우리는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이미 세상 창조이전에 하느님께 선택된, 불림 받은 성소자임을 깨닫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성인성녀들, 형제자매들과 함께 끊임없이 바쳐야 할 하느님 찬미찬양의 감사가입니다.
도대체 이런 찬미찬양의 기쁨과 행복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 찬미찬양의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여기서 샘솟는 사랑과 지혜요, 무지에 대한 궁극적 처방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평생 저녁성무일도 끝무렵에 성모님과 함께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의 성모님, 동정 마리아입니다. 순종에 앞서 거룩한 사랑의 침묵이요 경청이요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대로 감지되는 성모님 모습입니다. 참으로 눈밝으신 하느님은 겸손히 당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시골 나자렛에 숨겨진 삶을 살고 있는 침묵과 경청, 겸손의 동정 마리아 성모님을 찾아나섭니다.
“은총이 가득한 마리아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얼마나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인지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속내의 비밀을 다 털어놓습니다. 이런 성모님이 계시기에 하느님도 참 행복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일방적으로는 일하시지 못합니다. 전능의 무능이라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어떻게? 묻는 마리아에게 소상히 설명하십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정말 거룩한 사랑의 침묵, 경청, 겸손의 동정 마리아를 선택하신 하느님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이어지는 동정 마리아 성모님의 응답에 하느님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성모님의 믿음은 이런 순종을 통해 절정에 도달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이 나오기전 온 세상이 쥐죽은 듯 깊은 정적의 침묵에 싸여있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비롯하여 모든 천사들,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참으로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에 인류의 구원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리아를 떠나니 하느님은 기뻐 춤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동정 마리아 성모님을 닮아 날로 지혜와 찬미, 순종의 사람이 되어 성령충만, 사랑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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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창조의 완성인 구원>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구원까지 하신다는 말이고, 인간을 창조만 하고 인간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탁란하는 뻐꾸기 같은 새가 있고, 애를 낳고 돌보지 않는 못된 엄마가 혹 있기는 하지만 모든 동물과 모든 엄마는 낳기만 하고 키우지 않는 못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죽게 되기를 바라거나 불행하도록 자녀를 낳는 어미는 없다는 얘기이고, 살게 되기를 바라고 행복하도록 낳는다는 말이며, 사랑의 창조요 사랑의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피조물이 이러할진대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더 그러시겠지요.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으며, 무작정 인류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자유의지로 죄를 지은 그 원죄 이래로 원죄에 물든 우리 인간을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실 구원 계획은 원죄 이후의 계획이 아니라 세상 창조 이전의 계획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담과 하와가 인류에게 죄를 가져왔다면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고, 마리아는 하와의 죄를 없애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원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원죄 이전에는 없었는데 원죄로 인해 생긴 계획이 아니라는 말이며, 인류의 원죄를 내다보고 세상 창조 이전에 세우신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도 하와의 죄에 물듦이 없도록 미리 계획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흠 없는 여인이었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도록 하느님께서 흠 없는 여인으로 마리아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리아론이기도 하지만 구원론이며 구원론이기도 하지만 창조론이기도 하고, 사랑으로 비롯된 창조가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구원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려운 신학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사랑으로 미리 선택하시고,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만 이해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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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1,28)
<마리아의 Fiat(순명)>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주님의 특별한 보호(특별한 은총) 아래에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혹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 그녀에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엄청난 소식을 전합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5.36)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의 이 결정적 Fiat(피앗), 곧 순명으로 인해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시고, 우리를 위한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으로 정해지십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받으신 특별한 은총을 기억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이 큰 축일은 성모님께서 잉태의 첫 순간부터 원죄의 모든 흔적을 받지 않았다는 교리이고, '1854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믿을 교리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858년 3월25일(목), 성모님께서 프랑스 루르드의 시골 처녀 베르나데트(벨라뎃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이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1858년 2월11일(목) 첫 발현을 시작으로 7월16일까지 열여덟 번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셨는데, 열여섯 번째 발현인 3월25일에 당신의 이름을 묻는 베르나데트에게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루르드 성모님 발현의 외침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회개하여라."입니다.
깨끗한 영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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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Xg5LGDSM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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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 28)
우리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탄생시킬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과
이미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잉태되시는
모든 섭리가
특별하며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가득한
은총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일이십니다.
우리모두를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길이며
하느님 나라를
만드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언제나
거룩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품위로
우리를
올려주십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모든 것을
풀어내는
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명은
미리 준비하시는
사랑과
은총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전에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가
있었습니다.
구원의 은총
구원의 열매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가
되십니다.
탁월하고
특별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의
길을 만납니다.
은총 가득한
구원의 길을
성모님과 함께
걸어가고
준비하는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은 준비이며
준비는 은총이며
은총은 돌보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믿고 기쁘게
따라 나서는
은총 가득한
대축일의
아침입니다.
오늘은
가장 맑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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