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가 『방랑자들』을 발표한 지 일 년 만에 내놓은 범죄 스릴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일명 ‘별자리 소설’로서 곱씹어 읽어야 비로소 촘촘히 배치된 연결 고리가 보이는 『방랑자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단숨에 읽힌다. 범인이 누군지, 그 동기가 무엇인지 대단원에서야 밝혀지는 스릴러 형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형적인 추리 소설물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스릴러의 경우 마지막에 드러나는 범인의 정체를 핵심 반전으로 설정하고 누가 범인인지를 밝혀내는 데 무게중심이 쏠려 있지만, 이 작품은 사회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하찮은 인물이 공감과 연대를 통해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를 지켜 내려고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제목을 비롯하여 각 장 도입부에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인용되어 있고, 본문에서도 그의 시구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점, 열네 점의 흑백 도판이 삽입되어 있다는 점도 여느 범죄 스릴러와 다르게 느껴지는 특징이다. 판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체는 생계를 위해 판각사로 일해야 했던 블레이크의 생애와 연결된다. 삽화를 그린 작가는 체코의 일러스트레이터인 야로미르 슈베이지크. 간결하고 단순한 터치로 대상의 특징을 절묘하게 묘사하는 그의 화풍에 매료된 토카르추크가 작업을 직접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폴란드와 체코 국경이라는 점, 폴란드 작가가 체코 화가에게 협업을 제안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가 매년 여름마다 머무는 집필 공간인 노바루다가 폴란드와 체코의 국경 지대인 점도 무관치 않다.(노바루다는 작가의 다른 작품 『낮의 집 밤의 집』의 배경이기도 하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통해서 토카르추크는 ‘단편이나 조각 글에서 진가를 드러내는 작가’라는 선입견을 탈피하고, 긴 호흡의 장편에서도 탁월한 문학성을 보여 주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채식주의, 생태주의, 동물권 수호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 온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이 오롯이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폴란드 출신 거장 아그니에슈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 감독의 영화 「흔적(pokot)」의 원작이기도 하다. 토카르추크가 홀란드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집필하여 화제가 된 「흔적」은 201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고, 2018년 52회 전미 비평가 협회로부터 특별상을 받았다. 이 책은 2009년 폴란드의 문학상인 실롱스키 바브진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8월에 출간된 영어 번역본(Drive your plow over the bones of the dead)이 맨부커 인터내셔널 최종 리스트에 선정되었다.
■ 윌리엄 블레이크의 전승자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폴란드 외딴 고원에서 한때 교사로 근무하다 지금은 별장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두셰이코. 그와 유일하게 친분을 나누는 이웃은 괴짜와 중고 옷가게 점원 ‘기쁜 소식’,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옛 제자 디오니시오스뿐이다. 어느 날 왕발의 기이한 죽음을 시작으로 마을에서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 이어진다. 피해자들은 모두 동물 사냥과 연관되어 있고, 시신의 주변에는 어김없이 사슴 발자국들이 찍혀 있다. 점성학 애호가인 두셰이코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의미심장한 문구를 읊조리며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는데…….
이웃에 사는 왕발이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살해된다는 섬뜩한 도입부로 시작되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이 소설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0~1793) 중 「지옥의 격언」(1793)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다소 긴 이 작품 제목은 폴란드 출판사 편집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올가 토카르추크가 끝까지 고수한 제목이라고 한다. 이유가 뭘까. 작가는 이 책의 출간 기념 언론 인터뷰(2009. 11. 5)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너무 아름다운 시구(詩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한 줄의 문장이 바로 작품의 모토이자 메시지이고, 상징이자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경험한 뒤 당대 정치, 사회, 문화에 얽힌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자신의 시를 통해 예언자적 전망을 피력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했고, 자연에 대한 통합적 사고를 시도한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린다. 인간을 자연 생태계의 일부로 보고 생명의 존엄을 강조한 토카르추크가 블레이크의 시를 소설에 인용한 것은 필연적인 이유였을 듯하다. 토카르추크는 주인공 두셰이코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도 생전 예술가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간 노년의 블레이크 이미지를 참조했다고 한다. 주인공 두셰이코는 ‘모든 성인의 날’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초 블레이크의 시구를 쓸쓸히 읊조린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317쪽) 이 문장은 옮긴이의 말처럼 “다가오는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다독이는 한 인간의 고독한 독백이자 피폐해진 생의 한가운데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안간힘”으로 읽힌다.
■ 작품 해독의 또 다른 열쇠는 점성학
강조된 어휘를 통해 드러내는 절박한 외침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서 점성학은 작품을 해독하는 또 하나의 열쇠다. 점성학은 주인공 두셰이코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자 말과 행동의 원동력이며, 등장인물의 성격과 운명을 부연 설명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두셰이코는 ‘사냥 달력’을 발행해 특정한 시기에 특정 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마을 사람들, 동물 사냥을 옹호하는 가톡릭교회, 권위적인 지방 경찰서, 모피를 불법으로 거래하는 농장 등 불의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세력과 맞서며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두셰이코에게 점성학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 질서 및 종교에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자 신앙이 된다. 두셰이코는 점성학에 블레이크 철학을 연계하여 자신만의 가치를 완성시켜 나간다.
그 순간 진정한 분노, 감히 말하건대 신성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분노가 내 안에서 솟구쳤다. 펄펄 끓는 듯한 충격이 내 몸 어딘가에서 치밀어 올랐다. (……) 내 몸의 우주에서 작은 대폭발이 일어났고, 마치 중성자별처럼 내 안에서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95-96쪽)
아울러 독자는 소설 속에서 특정 단어들이 고딕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인간, 동물, 식물, 밤, 땅거미, 고원, 분노 등과 같은 고딕체 어휘는 폴란드어 원문에서는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토카르추크에 따르면, 이 표기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두셰이코의 언어를 다른 등장인물들의 언어로부터 분리시키고 차별화시키기 위한 장치다. 주인공이 자신만의 언어 공간 속에서 파토스를 수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주인공은 강조된 어위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도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한다. 특히 두셰이코는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모두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세 단어 역시 강조되어 표현된다.
■ “문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공감과 유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문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문학은 사람과 사람을 소통하게 만드는 가장 정제되고 정교한 형식입니다. 타인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잠시나마 자아를 벗어던진 채, 또 다른 ‘나’의 모습인 타자의 세계로 위대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 인간은 실은 서로가 서로를 놀랍도록 닮은 존재라는 사실을 문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쓰고 또 읽는 한 우리는 함께입니다.
― 올가 토카르추크 기고문 「두려워하지 마세요」(2016. 4. 23) 중에서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는 채식주의, 생태주의, 동물권 수호 등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토카르추크는 평소 여성이나 성 소수자의 인권, 난민 문제, 환경 오염, 동물 학살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작가는 그 상의 상금 일부로 브로츠와프에 ‘토카르추크 재단’을 설립했다. 폴란드의 문화와 예술을 홍보하고, 자연에 대한 범세계적 인식을 제고하며, 동물권 보장에 앞장서는 환경 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다. 토카르추크는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기조 강연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끝없는 분쟁, 책임 의식의 부재가 세상을 분열시켰고, 함부로 남용했고, 파괴했다. (……)
세상이 죽어 가고 있는데, 우리는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다.
토카르추크는 세상을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단일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작지만 강력한 그 단일체의 일부이며, 생태계에서 인간은 동등한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인간과 동물의 상호 의존적인 공생 관계를 강조하는 작가는 문학이 인류가 처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메시지가 될 수 있고,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역대 수상자보다 젊은 나이인 쉰일곱 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카르추크는 수상 소감에서도 당당히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기에 젊은 수상자라는 사실이 더욱 기쁘다.”라고 밝힐 만큼 사회 운동가적 면모를 지닌 작가다. 그러한 작가의 신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문제작이 바로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다. 토카르추크의 작품들을 사랑하는 이들,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 우주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이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이들께 이 책을 권한다!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수밖에 없는 파격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가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은 것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존재가 자신보다 더 힘없고 연약한 존재의 불행을 아파하고, 그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굳게 믿는 토카르추크는 단호하게 말한다. “세상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거대한 그물망이며,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와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고 있다.”라고.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