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조각글이 주는 선물
2023년 9월 6일
17세 이은현
팡세는 조각글이지만 그 속에는 꽉 찬 과일처럼 풍성한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조각글 이여서 그런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다른 동화들은 결말도 있고 내용이 쭉 연결 되서 이해하기가 쉽게 되어 있지만 팡세는 파스칼이 메모한 조각글이기 때문에 내용이 연결이 안 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파스칼이 글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으면 그의 글에는 결말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내용도 이어져서 더 이해가 잘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팡세는 그냥 재미없고 지루한 글이기만 한 것인가? 이에 대한 질문에 파스칼의 대답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파스칼은 또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네가 궁금해 하는 것도 다 내 메모를 통해 조금 그 궁금증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라고 말이다.
내가 팡세를 읽고 풀렸던 궁금증 중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믿지 않는 마음’ 이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파스칼 자신의 질문과 나의 질문이 같았기 때문에 너무 신기 했다. 1장 10번에서 말하길 ‘만일에 그것이 그렇게도 분명하게 유대인들에게 예언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 이들이 그를 믿지 않을 수 있었을까? 또는 어떻게 해서 이들이 그렇게도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저항 할 수가 있었을까? 라고 파스칼도 질문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질문도 찾았으니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찾아보았다.
팡세 1장 10번에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첫째로 그것은 예언이 되었다.(앞 내용 생략) 이들의 예언이 의심 받지 않고 보존되어야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답하고 있다. 나는 이 답을 보고 궁금증이 조금 풀어 질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궁금증도 생겼다. 나는 삶을 살면서 ‘성경 말고도 자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정 자유를 넘어서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 던질 때가 있었다. 파스칼은 팡세를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너무나 자유로운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4장 90번) 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 까지는 어기라고 하시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적정량의 자유를 넘긴 상태에서 주면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팡세의 대답을 통해 다시 알게 되었다.
파스칼의 팡세는 나에게 대답을 주고 파스칼 자신의 질문도 던지면서 글을 쓰는 나도 파스칼의 질문에 대해 생각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는 고마운 책이다. 질문도 해보고 대답도 들어 보니까 마치 파스칼과 내가 대화를 하는 것 같아 흥미로웠고 신기했다.
파스칼의 팡세의 장점은 이처럼 질문이 들면 질문도 해보고 그의 대한 대답도 들어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팡세가 완성된 글이 아니라 조각글을 모아서 책으로 낸 글이라는 것이 아쉬웠다. 상상해 보자면 팡세가 파스칼 자신이 완성해서 낸 책이라면 그 책을 읽고 내 생각도 써 보고 싶고 질문도 해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팡세를 표현해 보고 싶다. 비유를 하자면 팡세는 나에게 과일 나무와 무화과나무다. 과일 나무라고 함은 과일 나무의 열매는 끝없는 노력과 땀 흘림이 있어야지 얻는 결과인 것 같이 팡세도 끝까지 읽고 생각하면 (중간에 포기하지 않기) 풍성한 생각의 결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무화과나무로 비유한 이유는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햇빛도 피하고 공부도 하며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주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팡세를 통해 죄를 빨리 버리는 것이 훌륭한 결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햇빛도 피하고 공부도 하는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무화과나무처럼 팡세도 팡세를 읽기 싫은 마음을 팡세를 읽음으로써 그 마음을 피할 수 있었다. 또 팡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공부를 하듯이 편하고 든든한 무화과나무처럼 팡세를 통해 편하게 생각도 할 수 있었다.
팡세는 조각글 이지만 잠자리의 겹눈처럼 수많은 선물을 제공해주는 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