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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이 호 철
새벽녘에는 빗방울이 들었으나 어느새 구름으로 꽉 덮였던 하늘의 이 구석 저 구석이 뚫리며 비도 멎고 스름스름 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쨍하게 맑은 날씨로 활짝 개어오른 것은 아니고 적당히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며 꾸물거리는 변덕스러운 날씨로 변했다. 해가 떠오르자 비 갠 끝의 습기를 바람이 몰아가고 거무튀튀한 떼구름이 온 하늘을 와당탕 소리를 내듯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햇덩이는 그 희고 짙은 모습을 잠시 나타냈다가는 검은 구름 속에 묻혀 눈이 시지 않고도 바라볼 수 있게 귀여운 모습의 또렷한 윤곽이 되기도 하고 육중한 떼구름에 횝싸여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함석지붕들이 새 말갛게 반짝이는가 하면 어느새 그늘에 덮여 둔탁해지기도 하였다. 볕과 그늘이 뒤바뀌고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 거리는 수선스럽게 들떠 보였다.
정각 여덟시에 버스는 조선호텔 앞을 떠났다. 금방 서울을 빠져나오자 추수가 끝난 황량한 들판을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내처 달렸다.
진수(鎭守)는 초행길이었다.
“내일 판문점 구경 가게 됐어요.”
하고 어제 초저녁 형님에게 말하자,
“뭐, 판문점? 글쎄, 가는 것은 좋다만 조심해라.”
형님은 이렇게 긴치 않게 받았다.
“을씨년스럽지 무슨 구경이 되겠어요. 끔찍스러워.”
하고 급하게 웃저고리를 걸치고 난 형수가 형님을 흘끗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웃저고리를 갈아입은 형수에게서는 방 전체에 떠도는 화장품 냄새와 더불어 약간 야한 냄새가 났다. 필요 이상으로 도사연해서 앉아있는 형님에게서도 비슷하게 역겨운 것이 풍겼다.
“끔찍스럽긴 무엇이 끔찍스러.”
형님이 형수를 향해 괜히 눈을 부릅뜬다.
‘옳지, 저렇게 위엄을 부리는구나. 좀 전에 굉장히 사랑을 했는가보군. 괜히 쓰윽, 내가 있으니까.’
진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웃었다. 형수는 한순간 약간 풀이 죽은 낯색이 되었다가 곧 되살아났다.
“무슨 별 준빈 없어두 되나?”
형님 들으라는 말이 분명하여 진수는 형님이 대답하거니 알고 그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형님은 석간을 들여다보면서 형수 말을 묵살하였다.
그제야 진수가 다급하게 대답하였다.
“무슨 준비가 필요해요, 필요 없어요.”
형님은 다시 온전하게 따스한 낯색이지만 근친다운 우려도 약간 깃들인 투로 말하였다.
“하여튼 조심해라.”
“네.”
더블베드에 눕힐 법도 한데 더블베드는 비어 있고 조카아이는 바닥에 눕혔다. 라디오에서는 가느다란 음악이 흘러나왔다. 형수가 그것을 껐다. 형수의 조심스럽게 핥는 듯한 눈길이 잠시 형님의 몸 둘레를 감돌았다. 형님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냥 신문만 들여다보았다. 다시 형수는 진수를 건너다보며 조금 미안한 얼굴을 하였다. 형님을 바라보다가 진수에게로 돌리는 그 표정의 변화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몇 시간이나 걸려요?”
형수가 또 물었다.
“한 두어 시간 걸린다더군요.”
“아이, 좀 지루하겠군.”
하고 형님 쪽을 또 쳐다보면서 하는 형수의 말은 ‘안 그렇소, 여보’하고 형님의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 잡자는 속셈 같았다.
형님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완연하게 그냥저냥 신문에만 두 눈을 꼬나 박고 있었다.
마침 조카아이가 깨어 칭얼거렸다. 형수가,
“응, 응, 잘 잤니, 푸욱 잤어? 어이쿠, 기지개를 다 켜구, 어이쿠 됐다아.”
‘이것 좀 봐요. 여보, 애 기지개 켜는 것 좀 봐요. 좀 보래두.’
이렇게 또 형수는 형님을 쳐다보다가 제 김에 조금 뾰로통해지는 듯했으나, 진수 편을 힐끗 보고는 다시 차악 가라앉아졌다.
젖을 물렸다.
문득 형수는 진수를 향해 괜스레 두 눈을 끔쩍끔쩍하고는 다시 애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종혁아, 아재 어딨니?”
진수는 별 뜻도 없이 히죽 웃었다. ·
조카아이는 젖을 문 채 한 팔을 뒤로 돌리며 진수 편을 가리켰다.
“응, 거겄어?”
“또 아빠는?”
조카는 다시 같은 몸놀림으로 형님 쪽을 가리켰다.
“응, 아빠는 거기 있군.”
하고 형수는 통째로 깨물어 먹고 싶은 듯이 와락 조카를 끌어안았다.
비로소 형님이 눈길을 들었다. 순간 형수의 눈빛이 반짝했으나 형이 형수나 조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을 알자 다소곳이 머리를 수그리며 조심스럽게 애를 들여다보았다.
“몇 시에 떠나니?”
형님이 진수를 향해 조금 단호한 억양으로 물었다.
“여덟 시에 조선호텔 앞에서 떠나요.”
이젠 나가라는 신호인 듯해서 진수는 부스스 일어서 형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기가 나왔으니까 형님과 조카의 사이는 온전하게 그들대로의 분위기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형님은 와락 다가앉으며 형수의 엉덩이를 한번 꼬집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 왜 이래요오. 주책없이.” 형수는 이렇게 소곤대는 목소리로 눈을 흘길 것이다. “안방에서 들어요. 이러지 말아요. 글쎄, 주책없이.” 그러나―형수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만의 자리가 됐으니까 이러는 것을. 으레 딴 사람이 있으면 사또님이나 된 것처럼 근엄하게 도사리고 있는 남편을. 자연스럽고도 능청맞게 오므라졌다, 펴졌다 하는 남편의 그 융통성에 속으로는 감탄할는지도 모른다. 정작 그들만의 분위기가 되면 형님은 애송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도리어 형수가 조금 전의 형님 같은 표정이 될지도 모른다. 형님이 애걸조가 되고 형수가 비싸게 굴지도 모른다. 여자란 은근히 이런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형님에겐 치사한 구석이 있다. 형수와 조카는 끔찍이 사랑하고, 어머니나 자기를 두고는 집안에서의 제 처신, 마땅히 해야 할 제 도리 같은 것만 우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처신이나 도리는 적당히 작위적인 진지성을 수반하기가 일쑤이다.
‘어머님이 원래 동태찌개를 좋아하시는데, 저녁엔 그것 좀 하지 그랬어. 그러구 어머님이 늙으시구 쓸쓸하시어서 이것저것 잔소리가 심할 테지만 그런 걸 고깝게 여기면 못쓰니까 조심 하구, 겸상으로 밥을 먹을 때도 진수는 내 밥그릇과 제 밥그릇을 은근히 살피고 있어. 그런 건 아무리 소탈한 사람이라도 미묘하계 작용하는 법이니까 당신이 자상히 신경을 써야 돼. 진국(鎭國)이한테서 어제 기별이 온 모양인데, 돈을 좀 부쳐달라는가봐. I need money. 마지 막에 조섬스럽게 이렇게 썼더라잖아. 진수 얘긴 농담 비슷했지만 아무래도 좀 부쳐줘야 할까봐. 지금 얼마 남아 있어? 그쪽 돈은 말구, 종혁이 이름으로 된 통장 있잖아. 거기서 좀 떼보지그래.’ 설령 그들만이 됐을 때 이렇게 제 아내에게 차근차근 말을 한다 해도 그러는 표정에는 작위적인 것이 번뜩일 것이다. 비록 형수가 이런 설교를 들으며 순순히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지나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고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다. 형님은 더욱 치근덕거리며 형수에게로 다가앉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집에서조차 느껴지는 이역감,* 일정한 상거*가 이즈음 와서 진수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여자라는 것,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전에 형님이 “가는 것도 좋지만 조심해라” 하던 그 근친다운 우려의 눈길은 진수로서 그렇지 않아도 외포*가 곁들인 판문점행을 더욱 꺼림칙하게 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간밤 내내 판문점이라는 곳이 풍겨주는 이역감은 니깃니깃한 기름기로서 소용돌이쳤다. 판문점이 중유 같은 물큰물큰한 액쳇더미가 되어 우르르 자갈 소리를 내면서 몰려오기도 하고, 우둘투둘한 바윗덩어리로서 우당탕거리며 달아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판문점 이 상투를 한 험상궂은 노인이기도 했다. 시뻘건 두루마기를 입고 가로 버티고 서서 이놈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호되게 매를 맞은 일이 있는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이기도 했다. 밤새 판문점에서 쫓겨 다니는 꿈을 꾸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조심해라, 또 덤벙대지 말구.”
“네.”
어머니의 그 자애로운 눈길을 쳐다보며 진수는 ‘어머니가 역시 제일 좋군. 혼자 늙어지면 참 삭막할 거라’ 하고 조금 쓸쓸한 생각을 했다.
한 시간 남짓 달린 버스 속은 외국인 기자들의 웃음소리와 잡담으로 하여 또 다른 이역의 분위기로 무르익어 있었다. 그것은 집에서처럼 섬세하게 느껴지는 미묘한 이역감이 아니라 뚜렷한 이역감이었다.
서양 사람들이란 한 사람 한 사람 따로따로 보면 별로 구별이 없는 듯하지만, 몇 사람을 한데 놓고 차근차근 뜯어보면 제각기의 특색을 특색대로 찾아낼 수가 있다.
대개 머리통이 크고 머리칼은 샛노랗기도 하고 짙은 다갈색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신비스럽도록 보얀 은실빛이기도 하고 눈알빛 또한 가지각색이다. 꼭 장난질로 물감 칠을 한 유리알을 박아놓은 듯이 영롱하게 새파란 눈, 보랏빛 눈, 혹은 회색빛이 도는 눈, 게다가 육중한 코, 전체로서 꽤나 입체적으로 음영이 짙으면서도 어느 구석인가 잔뜩 입김을 불어넣어서 풍선처럼 부풀게 한 것 같은 멀렁한 얼굴, 팔, 다리, 손 등 할 것 없이 부성부성하게 노르께한 솜털……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고 괴이한 짐승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표정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노는 짓들은 순진성과 간교성을 범벅으로 지니고 있고, 우리네보다 훨씬 낙천적인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노는 짓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제각기 그 성격의 윤곽들도 금방 짚이는 것이다. 맨 앞쪽에 몸을 쉴 사이 없이 움직이며 웃음거리나 없나 해서 잔뜩 기갈이 들린 좀 주책없어 보이는 사람, 원체 앞자리가 멀어서 말은 못 알아듣겠지만 그 과장이 섞인 손놀림과 요란스러운 뒷모습, 얘기를 듣는 사람들의 심드렁한 표정 등으로 미루어 별로 우습지도 않은 얘기를 애써 우습게 얘기하려는 것 이 완연하였다. 한 대목이 끝나면 이따금 그 주위에서 한가한 웃음이 터지곤 하지만 어쩐지 보기에도 딱했다. 정말 우스운 것이라면 이 정도로 떨어진 자리에서도 그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전염되어 웃음이 비어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터지는 그쪽의 한가한 웃음은 이 버스칸 전체의 메마름을 차라리 의식하게 해주고, 그럴수록 진수에겐 생소한 이역감만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더더구나 그 작자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은 자못 호인풍이어서, 그 작자에게서 좀 놓여나고 싶은 모양이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꾹 참고 견디는 얼굴이 이쯤에서 보는 사람조차 슬그머니 조바심이 나고 안타까워졌다. 드디어는 하품이 나오자 힐끗 그 앞사람 표정을 살피고는 반쯤 입을 벌리는 듯하다가 어물어물 다시 다물어버린다. 순간 그 작자도 잠시 그쳤다가 염치없이 다시 얘기를 잇는다.
진수는 뒤쪽에 앉아 혼자 히죽이 웃었다. 순간 공교롭게도 그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조금 창피한 듯 히죽 웃고는 외면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란 참 묘해. 이렇게 멀리 앉아 있어도 어떤 순간, 한눈에 완벽한 교류가 가능해지니 말야.’
바로 그때 진수 뒤에서 우렁우렁 한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영어였다.
“‘헤이, 캐나리, 무얼 그리 또 짖어대구 있어?”
‘아이쿠, 시원해라. 나 말구두 또 있었구먼.’
진수는 번쩍 정신이 들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버스 속이 술렁 대었다.
“뭐라구?”
앞쪽 당사자가 휘딱 돌아보며 받았다.
“보아하니, 그닥 재미가 없는 얘기 같은데, 대관절 무손 얘길 혼자서만 신바람이 나서 그 야단이야? 보고 있자니 딴 사람들이 딱하지 않나. 난 미리 피해서 여기 와 앉았지만.”
‘어이쿠, 시원해라. 저런 것이 사람을 죽이지, 죽여. 그자도 기가 꺾일걸.’
순간 온 버스칸이 들썩이도록 웃음이 터졌다. 누구나가 그 작자가 빚어내는 버스 안의 탁한 분위기를 똑같이 역겹게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키나와 얘기야.”
그 작자가 받았다.
“오키나와가 어쨌기?”
뒷사람이 다시 질러댔다.
“오키나와 풍속 얘기.”
이번엔 그 작자 앞의, 조금 전에 하품을 하던 자가 받았다.
“다 아는 얘길 뭘 지껄여.”
“오키나와 여잔 맨발로 다닌대나.”
“별 신통한 얘기도 아니군그래.”
맨 뒷자리에 앉았던 또 다른 녀석 하나가 이렇게 가시 돋친 소리로 톡 쏘았다.
순간 버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모두가 어느 맨바닥으로 풀썩 주저 앉은 표정으로 제각기 손목시계들을 보았다. 새삼스럽게 버스 엔진 소리가 와랑와랑 부풀어 오르고 누구인가가 한국말로 “아직 멀었나?” 하고 지껄이고 있었다.
문득 진수의 눈엔 건너편 자리에서 투박한 남색 코트 차림인 늙수그레한 여기자 하나가 주위의 이런 동정에는 아랑곳없이 소곤소곤 열심히 재잘거리고 있는 것이 돋보였다. 그 옆의 남자는 남편이라는 것이어서 부부동반으로 나와 있는 기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역시 말하는 표정에 집안 얘기다운 자상하고도 따뜻한 구석이 느껴진다. 남편은 홈스펀* 웃저고리에 코르덴* 바지의 수수한 차림이고 두툼한 고불통*을 물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들이빠는 기척이 없다. 이제나이제나 하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이나 전혀 들이빨지는 않는다. 저런 망할 자식이, 드디어 진수는 이렇게 악을 쓰듯이 속을 뇌까렸다. 아내 쪽은 보지 않고 똑바로 제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엊저녁의 형님처럼 그런대로 남편다운 위험이 늠름하다. 한참 만에야 드디어 뻑뻑 힘을 주어 고불통을 빨다가 얌전한 손놀림으로 고불통 끝을 만져보고, 불이 꺼진 것을 알아차리고도 전혀 표정이 없이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당겼다. 잠시 말을 끊고 이러는 남편을 아내가 차근히 지켜본다. 둘 사이의 더께가 앉을 정도의 때묻은 익숙함이 단려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단려한 냄새도 역시 어딘가 서양풍의 이역 냄새였다. 둘이 다 팔자 좋게 곱게 걸어온 그들 인생의 편린이 번뜩였다. 드디어 남편의 담뱃불이 당겨지고 푸른 연기가 고불통에서 피어나자, 아내의 얼굴에도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다시 좀 전의 얘기를 계속한다.
하버드(대학)에 다니는 큰아이는 위가 약해서 탈이야요. 어제 편지에도 그저 위 타령이군요. 참, 내 정신 좀 봐, 깜박 잊었었네. 후리맨한테서도 편지가 왔어요. 왜 있잖아요. 좀 덤벙대는 애, 큰애 친구, 농구인가 한다는 애 말예요. 별소린 없구, 그저 안부 편지이긴 하지만 우스운 소리를 썼어요. 요새두 당신하고 꼭 붙어만 다니느냐구. 늙어서까지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남편이 공처가로 보이는 법이니까 조심하라구. 나 같으면 아마 죽을 지경일 거라구. 우서 죽겠어…… 그렇게도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남편의 표정에 미소가 어리는 것이 이런 얘기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의 얘기는 그냥 계속된다. 작은애의 서독 여행은 괜찮았나보죠.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희랍*까지 돌았다지만 돈이 모자라서 북구라파엔 못 갔던 것을 아쉬워하더군요. 이렇게 썼어요. 마마, 파파, 돈 좀 더 버세요. 다음 방학 때는 기어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엽서를 뭉텅이로 마마, 파파에게 보낼 수 있도록. 알프스는 확실히 멋있어요. 희랍의 인상도, 꽤나 큰 것이었지요. 나는 거기서 비로소 미국이라는 나라는 덩어리만 컸지 뿌리는 얕다고 실감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그것만도 큰 수확이 없지요. 미국은 어떤지 아세요? 좀 떠 있고 허황하고 알이 찬 맛이었어요. 역시 몇천 년의 전통을 지닌 나라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부피가 있고 이편을 압도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들의 교양도, 우선 그런 것에 밑받쳐져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겉만 핥지 말고 부박하지* 말아야지요. 이번에 참 많이 배웠어요. 이렇게 제멋대로 응석을 부려두 큰애보다는 자주성이 있고 단단하고 활달해서 사회에 나가더라도 빨리 익숙해질 것 같긴 해요. 아는 것도 빠르구.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은? ……참, 어제 대사 부인을 만났어요. 당신 안부를 묻더군요. 여전히 무뚝뚝하냐구, 무슨 멋으로 붙어다니느냐구. 그래서 여전히 무뚝뚝하다고 대답해 줬지요. 그 부인의 조크는 좀 고급이야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며칠 전에 왜 파티가 있었잖아요. ICA의 그 누구인가 한 사람이 주관헌…… 그 사람 이름이 뭐랬더라? 그 사람 좀 지저분하답디다. 엉큼한 사람이라고 말들이 많더군요.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어떻든 말이 많아요. 당신도 조심하세요. 올가미에 걸려들지 말구…… 그녀의 얘기는 그냥 계속되는데 이런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수는 입에 단침*이 괴어와, 창문을 조금 열면서 뒤에 앉은 외국인 기자에게 열어도 괜찮겠느냐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어느새 졸고 있다가 화닥닥 상체를 일으키더니 덮어놓고 오라잇 오라잇, 털이 부숭부숭한 손까지 내흔들면서 좋다고 하였다.
진수는 조심스럽게 괸 침을 창밖에다 뱉어냈다.
순간 버스는 임진강을 넘어서고 있었다. 와당탕와당탕거리며 다리를 건너는데, 처참하게 비틀어진 쇠기둥이 강으로 곤두박질을 하고 있고, 동강 난 철판때기가 뼈뚜름히 걸려 있기도 하여, 비로소 판문점행이라는 처절하고도 뚜렷한 의식과 결부가 되어서 웬 노여움 같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버스 안에서는 그렇게도 돋보이던 외국인들이었지만 정작 판문점에 이르자, 그 냄새와 단려한 기운이 푸석푸석 무너져 보였다. 누구나가 회 범벅 같은 얼굴로 꽤나 생소한 듯이 어리둥절해서 판문점 둘레를 돌기만 했다. 이것저것 덮어놓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버스 안에서 주책없이 지껄여대던 그 작자가 북쪽 경비병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가, 순간 저쪽에서 와락 눈을 부릅뜨면서 돌아서니까 싱긋이 웃고는 그도 그냥 돌아섰다. 제 동료한테로 가서 턱으로 그 경비병을 가리키며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 사람 화났어.”
“누구?”
“저 죄끄만 경비병 말이야.”
그들은 잠시 한가하게 웃었다.
남편과 쉴 사이 없이 재잘거리던 그 늙은 여기자가 진수에게로 다가오더니 차이니즈는 어느 편에 앉았느냐고 물었다. 아마 저 안쪽에 앉은 세 사람일 것이라고 하니까, 겁겁하게 그편을 흘끗거리곤 생큐하고 호들갑스럽게 지껄였다.
어느새 북쪽 기자들이 나와 있었다.
이편 사람들이거니만 여겼는데,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어 찬찬히 살펴보니 나팔바지에 붉은 완장을 찼다. 피식피식들 웃으면서 우르르 어울려들었다. 서로 낯이 익어진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는가보았다.
“오래간만입니다.”
땅딸막한 사람 하나가 이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우, 나왔어?”
인사를 받은 이편 사람이 더 익숙한 투를 내며 반말지거리로 받았다.
허풍이 섞인 우월감과 상대편에 대한 은근한 비아냥거림이 범벅이 된, 언뜻 보기에도 조금 냉랭했다.
“담배 피우기요?”
저편에서 나온 사람이 담배를 권하자,
“또 공세로군.”
하고 이편 사람이 받았다. 그러면서도 권하는 대로 담배 한 대를 뽑았다.
“당신들은 그, 무슨 소리요? 공세 공세 하는데, 대체 알아듣지 못할 소릴 헌단 말야.”
저편 사람이 또 이렇게 말했다.
“이러지 말어. 괜히 능청 떨지 말구. 솔직히 탁 터놓구 말해.”
이편 사람이 받았다.
“그 좋은 소리군. 그래, 솔직히 터놓구 말합시다.”
저편 사람이 또 이렇게 말했다.
진수는 혼자 히죽이 웃었다.
‘재미있군.’
그 광경을 멍청히 건너다보고 있던 외국인 여기자가 옆에서 귓속말로 물었다.
“저 사람 지금 뭐라고 말해요?”
“미국 사람들은 다 나가라고 그러는군요.”
“오우, 그래요? 무서워라.”
그녀는 놀라운 듯이 중얼거렸다. 잠시 동안 그쪽을 뚫어지게 건너다보다가 뒤 어깨가 조금 밑으로 처져서 남편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남편에게 가서 그쪽을 가리키며 무엇이라고 중얼대자, 남편은 여전히 표정이 없이 그편을 흘끗 한 번 쳐다볼 뿐 그냥 외면을 하였다.
“누님 나오셋소? 우리 누님 나오셋군. 오랜만이외다. 어떻게, 장산 잘되우?”
씽씽 바람이 이는 듯이 휘익 들어와, 허옇게 살이 찌고 굵은 검은 테 안경을 낀 사람 하나가 북쪽에서 나온 서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조금 덕성스럽게 평퍼짐하게 생긴 여기자에게 이렇게 기차 바퀴 지나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어서 이편 여자인 줄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붉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이 감겨지게 웃으면서 반색을 했다.
“어이구, 여전하시구려. 로동자 농민들 피땀을 빨아서 피둥피둥해지셨군. 더 뻔뻔해지구.”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악수를 청하였다.
“허, 이거 왜 이래. 만나자마자 또 공세문 곤란한데. 장산 좀 뒀다 하구 우선 인사나 하고 봅시다레.”
손을 잡으면서 안경잡이가 말했다.
“공센 무슨 공세라고 그래. 공세 혼살이 났는지 원, 지레 벌벌 떨기부터 하니 지은 죄가 단단히 있나보군.”
주위 사람들은 히죽히죽 웃었다. 외국 기자들도 그 오고 가는 표정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우리 매부께서도 안녕하시구, 조카아이들도 다아 잘 있구요? 참, 시아버지 모시기 고생되지 않소? 무척 고생이 될 텐데. 난 누님 고생을 생각하문 밤잠도 제대로 못 자지 않수.”
안경잡이가 또 말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허풍이 심하오? 배운 건 허풍만 배웠소?”
조금 전의 그 땅딸막한 사람이 그 사이로 비집고 끼어들었다.
“그래, 난 허풍만 배웠다. 당신은 실속만 차려서 그렇게 쬐끄매졌군. 딱하다 딱해. 이런 젠장, 누님하고 마음대로 인사도 못하겠군.”
이편에서 간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자, 그 땅딸막한 사람도 조금 쓰겁게* 웃으면서 말했다.
“영 안 통하는군. 아주 썩어 문드러졌군. 정말 딱하오.”
“정말 딱하우. 이런 것이 왈 유머라는 거야. 유머라는 말 배워줘? 모르지? 거기선 모를 거야. 설명 해줘?”
마침 안에서 마악 회담이 시작되고 있어, 잠시 조용했다.
진수는 창턱에 두 팔을 걸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초면이신 것 같은데, 처음 나오셨지요? 안녕하세요?”
등 뒤에 상냥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빵긋 웃는 낯빛이다. 눈알이 투명하게 샛노랗고 얼굴이 납작하고 기미가 끼고 그런 대로 깜찍하게 생겨 있었다. 남색 원피스에 붉은 완장을 찼다. 예사 처녀가 예사 총각에게 흔히 하듯, 수줍음이 어린 웃음을 띠었다.
‘야, 요것 봐라’ 하고 진수는 생각하면서도,
“네, 안녕하세요.”
하고 받았다.
아리랑 담배를 피워 물면서 비스듬히 그녀 편으로 돌아섰다.
“저, 서울에도 간밤에 비 많이 왔지요?”
그녀가 또 이렇게 물었다. ‘어렵쇼, 금니까지 하고.’
“네? 비 많이 왔지요?”
다시 그녀가 재우쳐* 물었다.
“네.”
“저, 어디 기자세요?”
“광명 통신요.”
“네에, 그래요?”
진수는 가슴이 조금 후들거렸다.
마침 저편에서 조금 전의 그 안경잡이가 다시 큰 소리로 악악거렸다.
“이를테면 유머라는 것은 말이야, 당신들에게서는 백번 죽었다가 깨도 알 수 없는 것, 사람이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해서 얼마 쯤 더 있다가야 서서히 알아지는 거란 말야, 알아? 알아듣겠어? 이렇게만 말해선 거긴 잘 모를 거야.”
“여보, 지껄여도 침이나 튀지 않게 좀 지껄여.”
“이런 젠장, 월사금을 받아두 시원치 않겠는데, 간섭이 왜 이리 심해. 이건 중요하니까 배워둬요. 손해는 절대로 없을 테니까.”
진수는 발작적으로 폭소가 터져 나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들키들*었다. 무언가 대번에 수월해지는 느낌이었다.
“참, 저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물었다.
“네?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사람 재미있지 않소.”
진수는 그녀를 건너다보며 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녀도 조금 웃는 듯하더니 일순 싸악 웃음이 벗겨지며 말했다.
“무엇이 덕지덕지 껴묻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실속 없이 곡예사 같은 몸짓만. 저런 걸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이를테면 타락의 징조야요. 이럭저럭 와랑와랑한 소음으로 속임수를 쓰는 거, 솔직하지가 못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법 지껄이는데.’
진수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곧장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말요, 곡예사 같은 몸짓, 타락의 징조 운운하는데, 그것이 벌써 당신 머릿속의 어느 함정을 뜻하는 거죠. 당신들은 어떤 개개의 양상을 객관적인 큰 기준과의 관련 속에서만 포착하지만, 우리네에선 그렇지가 않아요. 저런 것이 비록 당신 말대로 속임수라고 쳐도 속임수치고는 즐겁고 순진한 것이라 그런 말이지요. 타락의 징조라는 것도 명확한 개념으로 간단히 처리될 성질은 아니지요. 어떤 분위기가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서 익어 터질 때, 이를테면 타락의 징조라는 게 나타나는데요. 전체적으로 포착하면 피상적으로 명료하지만, 그것만 고집하는 건 무리지요. 그런 방법은 유형을 가르기만 하는 데는 필요해도, 어떤 경우의 섬세한 진실은 포착 못해요. 감은 더운물에 넣어야 떫은맛이 없어지지 않아요? 너무 오래 데우면 껍질이 벗겨지고 물큰물큰해지지요. 요컨대 타락의 징조라는 것도 당사자의 경우에선 적당히 감미롭고 졸음이 오듯이 고소하고 팔다리를 주욱 펴고 있는 것같이 그래요.”
“그건 비겁한 짓이야요. 그런 썩은 개인의 경우를 문제 삼을 수는 없어요. 감은 익어서 먹으면 될 뿐이야요. 익는 과정을 운운하는 건 쓸데없는 사변이지요. 어떤 큰 가능성에 대한 큰 지향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찌뿌드드하게 졸음이 오는 감미에서 헤어나지 못해요. 사변에 매달리고 섬세한 경우에 매달리고 그러면 아무것도 못해요. 큰 결론만이 필요하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현실의 정곡이야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 않으세요? 참, 저 서울은 어때요?”
진수는 그녀의 현실 운운하는 말을 받으려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딴소리에 멈칫 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문젠 알았어요.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은 제가끔 얻으면 되잖아요? 제가 옳아요. 얘기도 효율적으로 속도 있게 합시다. 서울은 어때요?”
“……”
“네? 어때요?”
“평양은 어때요?”
“근사해요. 아주 굉장해요.”
“서울두 근사하죠. 아주 굉장하구.”
그녀가 피 하고 웃자, 진수도 피 하고 웃었다. 다음 순간 둘이 다 키들키들거렸다.
“가족이 전부 서울에 계시겠군요?”
그녀가 물었다.
“네.”
진수가 대답했다.
“결혼은 하셨어요? 실례지만.”
그녀가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또 이렇게 물었다.
“아뇨.”
진수는 문득 엊저녁 형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웃저고리를 갈아입던 형수에게서 야한 냄새가 나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조금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참, 저 남북 교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또 이렇게 물었다.
“네? 교류요? 글쎄·…… 결국 이렇죠. 지금 당신하구 나하구 교류가 가능해지지 않았습니까? 참 간단하게…… 그러나 이런 걸 빗대어서 모든 것이 다 이런 투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처지로서는 너무 소박하구 낙천적인 생각 같군요. 우리 남북 관계는 원체 착잡해요. 6·25 이전부터의 그 끔찍끔찍한…… 이 리얼리티를 리얼리티대로 포착하는 것이, 참 리얼리티라는 말은 모르겠군.”
진수는 얘기가 신명이 나지 않아, 뜨적뜨적 이렇게 말하고는 씽긋 웃었다.
“사실주의의 그, 그것 말이지요?” ‥
“네, 네, 그런 거요. 그런 것과 관련이 있는 문제거든요. 민족의 양식이라는 것도 현실적인 조건 앞에서는 당장 먹혀들 여지가 없어요. 현실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되어 있지 않아우?”
그녀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렇지가 않아요. 조금도 복잡하지도 착잡하지도 않아요. 지극히 간단하지요. 당신도 자기 운명을 자기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렇지 않으세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간단하지요. 패배의식과 우유부단은 못써요. 문제는 간단한 걸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려고 해요. 교류를 하면 교류가 되는 거야요.”
“그러나 피차 타산이 있지요. 그런 본질론이 통하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는 건 당신들의 상투적인 경우이고, 이편 경우는 또 이편 경우거든요. 이편 경우의 내력이 또 있어요. 철저한 현실주의가 작용하는 거지요. 막 하는 말로,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측면 말이지요. 우리, 조금 더 얘기가 솔직해져야 하겠군요.”
그러나 그녀는 두 눈을 깜짝깜짝했다.
“누가 먹고 누가 먹히나요? 그 발상법부터가 비뚤어진 생각이야요. 요컨대 피할 까닭은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치의 표준이란 걸 어디다가 두고 계시나요? 어느 특정된 개인의, 혹은 집단의, 감정적인 장애라든가, 타성에서 오는 고집이라든가, 우선 그런 건 제거되어야 하지 않아요? 선택할 권리는 묻혀서 사는 일반에게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선택할 기회와 자유를 주어야 해요.”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좀 강렬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진수가 응했다.
“그렇지요. 선택할 자유를 주어야지요. 아무렴요. 당신들은 줍니까? 당신들 세계에서 자유라는 건 어떤 모습을 지니는가요? 자유조차 혹시 강제당하는 건 아닌지요? 설령 그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선택된 몇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정한 역사적 전망에 안받침된 옳은 강제라고 가정하더라도 말이지요. 어때요. 거기서 견딜 만해요? 솔직히 말하세요.”
진수는 조금 신랄한 데를 찌른 듯하여 씽긋 웃었다.
순간 그녀는 발끈했다.
“신념이 문제지요. 자유는 허풍선과 같은 허황한 것일 수가 없어요. 자유의 진가는 그 사회 나름의 일정한 도덕적 규범과 인간적 품위와 결부가 되어서 비로소 제대로 설 수 있는 거지요. 자유 이전에 정의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유는 이용만 당해요. 빛 좋은 개살구지요. 우리 모랄의 기본이 뭣인지 아세요? 우리 민족의 나갈 바 큰 방향이야요. 개인은 거기 제대로 째어들어 있어야만 해요. 그 속에서 자유야요. 결국 이념이 문제겠군요. 당신의 생각은 나태 그것이야요. 타락되고 싶다는 말밖에, 놀고 싶다는 말밖에 아니야요. 자유에 대한 옳은 인식도 없고, 일정한 이념도 없고, 있는 것은 그날그날의 동물적인 희뿌연 자기밖에 없어요. 비트적거리고 주저앉고 싶은 자기……”
“그럼 자기를 팽개치고 무엇이 남아요. 놀고 싶고 적당히 나쁜 짓하고 싶은 자유란 최고급이지요.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어요. 그것을 크나큰 관용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있어요. 부피와 융통이 있는. 그런 것이 적당히 용서가 되면서도 전체로 균형이 잡혀 있는. 참, 어느 것이 허풍선이냐 따질까요? 자기조차 팽개쳐버린 이념 덩이가 허풍선이냐, 그렇지 않으면 적당히 자기를…….”
“천만에, 자기가 없이 어떻게 이념이 있을 수 있어요. 자기를 왜 팽개쳐요. 완벽하고 명료한 자기는 이념 에 밑받침되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는 흐늘흐늘하고 비트적거리는 자기의 검불만 남아요. 당신의 자유에 대한 견해는 썩어빠진 거야요. 한마디로 썩어빠진 거야요. 쉰 냄새가 나요. 곰팡이 냄새가…… 어마아, 그런 논리가 어디 있어요?”
“있지요, 있구말구.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의 부피와 깊이는 한이 없어요. 당신들은 사람도 어떤 효율의 데이터로만 간주하고 있어요. 당신들 사회에서 옳다 그르다 하는 그 기준이 대개 짐작이 되는데, 일면적인 거지요.”
“아니야요. 다만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다급해 있다 뿐이지요. 원인은 그것 이야요.”
“참 도스토예프스키나 셰익스피어를 아시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알아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약간 자신을 희화화하여놓고 필요 이상으로 비장한 몸짓을 하는 도시 소시민의 사변철학이고, 셰익스피어는…… 시민사회가 싹트기 시작하는 사회의 여러 모를 부피 있게 부각시켰어요.”
“무서운 추상이로군.”
“아니야요, 본질이 그래요. 세부에 구애되지 말고 큰 윤곽으로 포착해야 해요.”
마침 좀 전의 외국인 여기자가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오우, 원더풀.’ 히죽 웃으면서 이런 표정을 했다.
그리하여 잠시 얘기가 끊겼다. 조금 뜸하다 했더니, 조금 전에 요란스럽게 지껄이던 안경 잡이와 그 ‘누님’께서는 같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둘 다 키들키들 웃고 있었다. 회담 장소 건너편 쪽 처마 밑에서는 양쪽 사람들 대여섯 명 이 우르르 붙어서 실랑이질을 하고 있었다. 들여다보이는 회담장은 바야흐로 서릿바람의 도가니였다. 납치한 어부들을 당장 송환하라는 것이었다. 기본 내용을 알아서 그런지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저 스피커 소리가 귀에 윙윙하기만 했다. 저편은 울부짖고 이편은 전혀 무관심의 표정이고, 이편이 울부짖으면 저편 얼굴에 하나같이 비아냥거림이 어리고, 드디어 저편에서 책상을 두드리고, 순간 맞은편에 앉은 이편 사람은 시끄럽구먼 왜 이리 야단이여, 이쯤 조금 어리둥절한 낯색을 하고, 비로소 스프링 달린 쇠붙이 의자를 한 번 들썩이고 헛기침을 하고, 똑똑히 들으란 말이여, 별로 쓸모 있는 소리는 아니지만, 이렇게 미리 다지기라도 하듯이 상대편을 일순간 맞바로 쏘아보고, 내리읽고…… 이번엔 스피커에서 영어가 울리고 서릿바람이 일고…… 이런 연속이다.
“인도적인 원칙으로서도 돌려보내줘야지.”
잠시 말없이 안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진수 들우라는 듯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지금, 몇 살이오?”
진수가 조금 전의 억양과는 달리 단호하게 물었다. 여자가 너무 까불면 못써, 제법 이런 눈짓으로 숙성한 남자의 그 위엄을 드러내면서 .
“스물넷요.”
그녀는 약간 놀라면서 진수를 쳐다보곤 조금 당황해하며 겁에 질린 듯이 대답했다.
‘다섯 살 차이라…….’ 진수는 익살을 부리듯 이렇게 생각하며,
“조금 수월해집시다. 피곤해질 소리만 하지 말구. 언어는 언어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거든. 우리들의 현실이 바로 그거란 말요. 비겁한 도피의식이라고 해도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피차 타산이 앞선 거래가 아닙니까. 좋은 소리 해보아야 믿을 사람도 없구. 이쯤 되지 않았소? 비극이랄밖에요.”
하자,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낯색으로 다시 이 말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진수가 그녀를 막았다.
“이를테면 말요, 내가 남편이고 당신이 아내라고 칩시다. 그럴듯한 놀음이 제법 될 것 같지 않소? 이편에서 위엄을 부리는 것과 그편에서 아양을 떠는 것이 제법 썩 들어맞을 것도 같은데. 이편에서 눈을 부라리면 제법 수그러들 줄도 알긴 알 것 같고, 이편에서 술이나 마시고 조금 흐트러진 표정으로 우자우자하면 그쪽에서는 제법 기승을 세울 줄도 알긴 알 것 같고, 이편에서 노래를 부르면 시늉으로라도 반주쯤도 하겠고, 양말짝이나 기저귀 빠는 것도 못할 일 아니겠고, 애에게 젖 물리는 것도 제격이겠고, 어떻소? 헌데 스물넷이면 노처녀군.”
대뜸 물 쏟아버리듯이 진수가 말하자, 어머나아 하듯 그녀는 입을 조금 혜벌린 채 멀거니 진수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들키들 웃었다.
“천만의 말씀이요. 스물넷이 뭣이 노처녀예요?”
하고 익살을 섞으며 그녀도 받았다. ‘어렵쇼’ 하고 진수는.
“여자 스물넷이면 노처녀야. 알아둬. 거기서는 버릇이 그런가. 버릇치고는 못됐군. 스물넷에 시집도 못 가면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거야 알아둬.”
하자,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조금 새침해졌다. 순간 주위를 휘딱 살폈다. 누가 들으면 이건 좀 창피하군, 약간 난처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받았다.
“말솜씨가 역시 망종* 냄새가 나요. 거기선 남자 구실을 하려면 그래야 되나요?”
“망종이라니, 무슨 소리야? 못 알아들을 소린데.”
“망할 종자, 이를테면 망나니, 어깨, 깡패…….”
“그럼 꽁생원만 사낸가, 거기선?”
“천만에 .”
“그럼 됐어.”
‘정말 그럼 됐어.’ 진수는 속으로 뇌까리면서 되씹었다. ‘그럼 됐어. 힘들 것 없어.’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어두워졌다. 내다보이는 좁은 들판으로 소나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먼지 없는 바람이 일었다. 먹구름 틈 사이로 삐져서 내리붓는 흰 햇살이 빛기둥이 되어 동편 산 틈바구니로 곤두서 있었다. 그곳만 무지갯빛으로 환했다., 그 아롱아롱한 빛 무더기가 간접으로 엇비치어 판문점 둘레는 마치 새벽녘 같아졌다. 그것이 무척 신선하면서도 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사람들은 어느 틈 사이로 빛줄이 새어 들어오는 어두운 움 속에라도 들어있는 것 같은 무르익음에 잠겨 있었다. 제각기 무엇인가에 취해 있는 느낌이었다. 환한 날빛* 밑에서는 웅성대는 소리가 밝은 기운을 띠었었으나 하늘이 꽉 막히자 그 소리들은 한데 엉겨 안으로만 덩어리가 되어 달려들었다. 드디어는 그것이 홍건하게 익 어 독을 뿜었다.
“비가 오려나보다, 비가.”
누군가 이렇게 혼잣소리로 지껄였다. 북쪽 사람인지 남쪽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소리쯤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다.
“오우, 원더풀.”
어느 구석에서 이런 소리가 또 들렸다.
동편 쪽에 세로 섰던 빛기둥도 어느새 사라지고 더욱 어두워졌다. 비로소 사람들은 조용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혹은 들판을 내다보았다. 그러면서 갑자기 수선대었다.
드디어 빗방울이 들더니* 금방 연이어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 작했다.
함석지붕이 와당와당 와라랑 하자 울부짖던 스피커 소리가 멀어졌다. 대뜸 땅 위엔 보얀 빗물 안개가 서리고 하늘과 땅이 그대로 굵은 물줄기로 이어졌다. 순간 회담 장소 안에 앉은 사람들도 일제히 밖을 내다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굉장한 소나기군, 모두 이렇게라도 생각하는가보았다. 그 놀랍게도 일률적인 표정이 기묘한 역설을 느끼게 했다. 늘어선 경비병들이 처마 밑으로 피해 서고, 둘레에 서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이리저리 엇갈리며 괴이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막사로 뛰기 시작하였다. 그 필사적인 분위기가 전염이 되어 모두가 와르르 혜헤지는 속에 진수도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화닥닥 놀라 손을 잡힌 채 같이 뛰었다. 앞에 지프차가 가로서 있었다. 진수는 그 문을 열고 먼저 그녀를 올려 앉혔다. 그녀도 같이 뛰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딱히 모르고 덮어놓고 올라탔다. 진수는 지프차에 올라타자 문을 닫고 문고리를 잠갔다. 순간 그녀는 문을 열고 와락 나가려고 하였으나, 진수가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녀는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며 사무친 애걸조로 진수를 바라보았다.
“안심해, 그편 차니까.”
진수가 말했다.
그녀는 무슨 암시나 받은 것처럼 일순 활짝 피어나듯이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진수도 아직 어느 쪽 차인지 알지 못했다.
“이봐.”
진수가 불렀다.
“……”
그녀는 조마조마해하였고,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북 가시죠? 네? 이북 가시죠?”
“이봐, 금니 어디서 했어?”
“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금니 어디서 했어?”
눈을 부릅뜨며 진수가 다시 물었다.
“평양에서요.”
“입 벌려봐.”
“싫어요.”
“가족이 몇이야?”
“일곱요.”
“누가 벌어먹여?”
그녀는 비로소 키들거리듯이 웃었다.
“그렇게 물으문 곤란해요. 우리에게선 벌어먹구 자시구가 없어요.”
“참 그렇겠군.”
그녀가 비에 젖은 머리를 쥐어짰다. 신 살구알 냄새가 났다.
“살구알 냄새가 난다.”
“네?”
그녀가 짜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살구알 냄새가 나, 네 머리에서.”
“이북 가시죠? 네?”
거친 숨소리로 또 물었다.
“데리구 가봐.”
그녀는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줄기차게 퍼붓는 빗속에 밖은 칠흑의 어둠 같은 무색의 공간으로 차 있을 뿐이었다.
“데리고 가봐.”
진수가 또 말했다.
“답답하군요, 답답해요.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이런 경우엔 순서가…… 아이, 빈 왜 이리 쏟아질까. 보세요. 용기를 내세요, 네? 용기를 내요.”
“이봐.”
“……”
“이봐.”
“아이, 이러지 말아요. 이러문 못써요.”
“남자 여자가 이렇게 아무도 없이 단둘이 마주 앉아 있으면 어떤지 알지? 그런 그리움을 그리워해보았나?”
“아이, 이러문 못써요.”
그녀는 와들와들 떨며,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겁에 질린 두 눈이 뚫려 있었다.
“이것 보세요.”
그녀가 마지막 안간힘을 쓰듯이 불렀다.
“왜?”
“전 지금 할 일이 있어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네? 이건 분명히 우리 차지요. 그렇죠? 작정하세요. 어떻게 하실래요? 난 설득을 해야 해요. 어떻게 하실래요?”
“그래, 설득시켜봐라. 어서 설득시켜봐.”
“우선 본인이 결정 하세요. 그게 선차예요.”
“지금 넌 놓여난 기분을 느끼지 않나?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놓여난 기분을 느껴야 돼.”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요, 지금은.”
“이런 것이 우리 경우에서의 자유라는 거다, 겨우 이런 것이. 무엇인가, 고삐를 풀어 팽개친 연후에 겨우 남는 것이 이런 거야. 그렇게 느끼지 않나? 이런 말은 여전히 썩은 소리라고만 생각하나?”
“이건 썩은 냄새야요. 분명히 썩은 냄새야요. 이런 건 끝까지 경계해야 해요. 전 그래야 해요.”
그녀는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발작이나 하듯이 울기 시작했다.
형님 방으로 들어섰다. 형님은 더블베드에 벌렁 누웠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불빛이 환하다.
형수는 잠든 조카를 안은 채 필요 이상으로 표정을 과장하면서 웃었는데, 어디가 어떻다고 쏘옥 집어낼 수는 없이 또 불결한 냄새가 났다.
“어때? 재미있었니?”
하고 형님이 물었다.
“끔찍스럽지 않았어요? 하긴 마찬가지 조선 사람이긴 했겠지만.”
형수도 이렇게 곁다리 끼듯이 말했다. 진수는 멋쩍게 조금 웃었다.
“괜찮더군요. 구경할만하더군요.”
“사람들은 어떻든?”
형님이 또 물었다.
“뭐 그저…….”
대답하기가 힘들어 우물쭈물 넘겼다.
형님은 조금 비아냥거리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었다. 하긴 아랫사람 앞에서 저런 종류의 조금 얕보는 듯한 웃음을 웃는 것은 권위의 담을 쌓는데 도움이 되기는 할 거라 하고 진수는 생각하는데, 어느새 형님은 딴청을 부리며 형수에게 물었다.
“와이셔츠 대려 왔나?”
“네, 십 분이나 기다렸대나봐요. 세탁소가 어찌나 봄비는지. 기집애(식모아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안됐으면 좀 있다가 갈 것이지 잔뜩 늘어붙어 앉아서. 덕분에 찾아오긴 했지만.”
하고 형수는 진수를 건너다보면서 약간 이죽대었다.
“낼 전무가 미국 가. 비행장까지 나가봐줘야지. 당신은 어떡할라우? 나가보는 것이 좋겠는데.”
형님이 또 말하였다. 형수는 얼굴빛이 대뜸 상기되면서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표정이 되었다.
“얼마 동안이나 가 있을라는지, 그 언니 또 속깨나 타겠군. 혼자선 못 견뎌하는걸. 그 언니 참 요새 다이아 반지를 스리맞았답디다. 원 반지두 스리를 당하나. 그 언닌 원체 정신이 산만해서. 헌데 참 몇 시에 떠나우? 언니두 며칠 못 만났는데 마침 잘됐수.”
그러나 형님은 다시 딴청을 피우며 가볍게 하품을 하고는,
“종혁이는 자나?”
뻔히 눈앞에 자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형수는 무엇이 그다지도 즐겁고 흐뭇한지 싱글벙글했다.
“네, 벌써 두어 시간 잤는데, 그냥 자는군요. 아까 낮에 기집애가 업구 나가더니 서너 시간 밖에서 잘 놀았어요. 노곤해졌나부지.”
“날씨가 이젠 차지는데 조심해요. 감기나 들지 않게.”
“네.”
형수는 공손하게 받았다.
다시 형님은 진수 쪽으로 돌아앉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 그 판문점이라나 하는 덴 어떻든?”
‘굉장히 두텁군, 낯가죽이.”
진수는 이렇게 생각하며,
“네, 그저 뭐.”
하고 또 우물쭈물하였다.:
일순 형수도 비로소 이 집 맏며느리답게 여유 있는 웃음을 웃으며 진수를 쳐다보았다.
“무섭지 않습디까? 우린, 생각만 해두 을씨년스럽기만 허지 원.”
“……”
진수는 할 말이 없어 대꾸를 않는데, 형수가 갑자기 문을 열며,
“얘얘, 순아.”
하고 은근자중한 목소리로 부엌 쪽에다 대고 불렀다. 대답하는 기척이 없었으나 형수는 그냥 나직하게 말했다.
“상 채려 들여라아. 찌개 냄비는 대강 끓으면 내놓구, 할머니 상부터 어서 채려라.”
부엌에서 그냥저냥 대답이 없자, 형수는 발끈했다.
“얘애, 순아, 기집 애가 귀가 처먹었나.”
비로소 부엌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이 새어 나왔다.
“어서, 상 채려. 할머님 상부터 채리구, 동태 냄빈 내놓구.”
시원시원히 소리를 지르고는 형님을 흘끗 쳐다보며 사뭇 상냥스러운 낯색이 되었다.
“저 동태찌갤 꿇였거든요. 어머님이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그러나 형님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이 다시 진수를 보며 딴소리를 꺼냈다.
“진국이가 돈을 좀 부쳐달란다지?”
“네에.”
“얼마나 부치면 좋을까?”
또 이렇게 혼잣소리 반, 진수에게 반, 뜨악하게 물었다.
“글쎄요.”
마침 어머님이 들어오셨다. 그러자 형님은 덮어놓고 골치가 아픈 낯색부터 하였다.
형수는 자는 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앉음새를 바로 하는 시늉을 했다.
“앤 자니?”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네에.”
형수가 금세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는 흘낏흘낏 형님을 건너다보며 잠시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한참 만에야 진수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어딘가 갔다 온다더니 무사했니?”
“네.”
“그럼 무사하지, 무슨 일이 있겠어요. 어머닌 괜히 걱정이시어.”
하고 형님이 괜스레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니는 조금 무안을 당하는 낯색으로 잠시 말이 없다가 진수에게 조심조심 또 물었다.
“또 쌈이나 안 나겠더냐? 난리 말이다, 난리.”
“네.”
형님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에이 참, 쓸데없는 챙견을 하셔, 어머님은.”
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홱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의 눈이 쓸쓸하게 형님의 그 뒷모습을 치어다보았다.
“괜히들 그러는구나. 무슨 말을 원, 얼씬 못하겠구나, 쯔쯔쯔.”
형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난감하고도 미안한 표정을 하며 더욱 머리를 수그리고 자는 애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한시가 지나서야 진수는 자리에 누웠다. 종일 버스 속에서 시달린 데다가 바싹 긴장을 했던 탓인가, 온몸이 노곤하였으나 정작 쉬이 잠은 오지 않았다.
폭이 넓은 푸른 강물이 급하게 흘러가고 푸른 옷을 입은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서 그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강둑에 선 그를 올려다보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속에서 손을 빼내어 흔들었다. 소곤대는 목소리로 급하게 조잘대었다.
들키지는 않았어요. 당신은 오른편으로 나가고 난 왼편으로 나가기를 잘했어요. 나는 정말 와들와들 떨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 현실이야요. 너무 통달한 체하지 마세요. 비가 지나가자 눈부시게 활짝 개었잖아요. 가을 햇빛이 정말 눈부시더군요. 빗물이 수증기가 되어 소리를 지르면서 올라가고, 그러나 하늘은 훔뻑 그것을 빨아들여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었잖아요. 언제쯤 우리에게도 그렇게 사악 구름이 가실 때가 오려는지요. 당신은 지프차에서 나와선 시큰둥하게 우울한 낯색이시더군요. 막사에선 동료들이 한참을 찾았대나봐요. 그 소린 날 뭉클하게 했어요. 난 거짓말을 했죠. 그냥 서 있던 자리에 있었다구. 괜찮더라구. 그러자 그 땅딸막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김 동무는 역시 단단하거든 하고. 어쨌든 감사해요. 물큰물큰한 그 이역의 짙은 냄새에 잠시나마 홍건히 취할 수 있었어요. 난 원래 초행길이 아니야요. 단골이지요. 이를테면 당신 말대로, 졸음이 오는 듯한 그 남쪽 분위기, 기지개를 켜는 듯한 감미한 맛, 적당하게만 퇴폐적인 것이 풍기는 그 완숙한 냄새, 조금쯤 무리를 해도 용서가 될 듯싶은 펑퍼짐한 언덕 같은 관용, 조금쯤 쓸쓸하고 괴괴한 분위기가, 때에 따라서는 애교에 넘친 적당한 허풍, 당신들이 자유라고 일컫는 그 권태가 섞인 분위기는 확실히 짙은 냄새로 흽싸아요. 반드시 악착같이 정연한 논리로 쓸모 있게 사느니보다, 여유 있게 자기를 누리는 맛, 누리는 것은 거드럭거리는 거지요. 곧 진력이 나고 권태가 오고, 그렇지만 사는 맛치고는 최고급일 거야요. 약간은 그렇게 살 만도 할 것 같긴 해요. 돋아오르는 아침만 맛이 아니라 해가 기우는 저녁녘도 맛은 맛일 테지요. 야심에 찬 어린 치기(稚氣)도 치기지만, 길가의 늙수그레한 노인이 누리는 적당한 무위와 적당한 권태도 맛은 맛일 테지요. 그러나 그런 분위기도, 전 이미 익숙해버리고 쉬이 졸업 해 버리고 말았어요. 다만 판문점으로 오는 날은 기분이 좋아요. 무작정 냄새가 좋아요. 하지만 자기의 분수, 스스로 지녀야 할 태세를 추호도 잃지는 않아요. 남쪽에서 오신 풋내기 손님도 대뜸 알아볼 줄 알아요. 무척 순진하시네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이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아요. 이러다가 혼살이 나게 걸렸었지요. 당신은 무서운 구석이 있어요. 물론 신사적 이었고 피차 연민으로 헤어지긴 했지만, 날 흔들어놓으려구 해요. 어느 깊숙한 독(毒)의 도가니로 떨어뜨리려고 해요. 그런 건 못써요. 밝고 긍정적인 색채만 중요해요. 비록 지나치게 상식적이고 조악하다고 하더라도 차츰 성숙되게 마련이야요. 지금 중요한 건 거칠게 터전을 닦는 일이야요. 안녕, 빠이빠이. 불쌍해요. 당신이 불쌍해요. 착찹한 혼탁 속에서 주리를 틀고 계시지요. 그 범상한 속물적인 일상에 진력이 나셨지요? 지금 당신의 형님 방에선 바야흐로 사랑이 들끓고 있어요. 그런 것은 확실히 멋있을 거야요. 어디서나 멋있을 거야요. 이런 그리움을 그리워해보았느냐고 물으셨죠. 우스워라.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그런 이야길 마음대로 못해요. 그런 점은 어느 세상에서나 마찬가지지요. 너무 솔직해지는 것도 병이야요. 당신은 분명 그런 병이 있어요. 와작와작 자신을 깨물어 먹고 싶어하는 병이. 당신이 불쌍해요. 빠이ㅂ바이. 우리, 어디서나 만나질까우. 어느 언덕에서나 만나질까요. 당신이 선 언덕에 해가 지고 있어요. 산그늘이 내려와요. 어머나아, 당신도 잠기시는군요. 안타까워라. 어둡기 전에 어저 돌아가세요. 문을 잠그고 그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세요. 기도를 드리세요. 유구한 생각에 잠기세요. 쓸모없는 당신의 그 사변에 마음껏 황홀하세요. 빠이빠이, 안녕. 내 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비밀은 약간은 무게를 지녔어요. 이런 것 좋을까요? 그러나 안심하세요, 불원간 부숴낼 거야요. 안녕, 빠이빠이. 그녀는 쨍한 햇볕 밑을 급하게 흘러 내려갔다……
이백 년쯤 뒤 판문점이란 고어로 ‘板門店’이 될 것이다(비몽사몽간에 진수의 생각은 또 비약했다). 그때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쓰일 것이다. 1956년에 생겼다가 19×× 년에 없어졌다. 지금의 개성시의 남단 문화회관이 바로 그 자리다. 원래 점(店), 혹은 점포라는 말은 ‘상점’ 이라든가 ‘가게’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다. 이 어휘의 시초는 역사의 단계에 있어 초기 수공업 시대에까지 소급되어야 한다. 이미 고전경제학에 속하는 문제지만 자유기업이 성행하면서 이른바 소상인이 대두됨과 더불어 인류 역사의 각광을 받은 어휘이다. 그러나 이 판문점의 경우는 그런 전통적인 뜻의 점포가 아니라 희한한 점포였다. 이 점포의 특수한 성격을 밝히자면 당시의 세계정세, 그 당시 세계의 하늘을 뒤덮었던 냉전기류를 비롯하여 그 밖에도 6·25라는 동족상잔을 설명해야 하고, 그것은 적지 않게 거창하고도 구구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일언이 폐지하여, 회담장소였다. 휴전 회담이라는 것을 비롯해서 군사정전 회담이라는 것이 무려 오백여 회에 걸쳐 있었다. ‘휴전 회담’이라든가 ‘군사정전 회담’ 이라는 말도 긴 설명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역시 생략하기로 한다. 그 회담 기록이 적힌 거창한 문건이 지금 인류 역사의 기념비적인 익살로서 개성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얼마 전, 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한 역사학자가 이 문건들을 전부 통독해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을 전부 통독해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그에게 문화공로훈장을 수여한 바 있지만, 그때에도 일부에서는 여론이 분분했다시피 약간 쓸개 빠진 짓이라는 느낌이었었다. 그러나 흑인종의 그 가상할 만한 끈질긴 정력과 참을성에는 누구나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것을 통독해낸 그 흑인 박사의 결론은 이렇다. “이것은 걸작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하여튼 걸작이다.” 일부에서는 이 결론이 야유 겸 스스로의 도로에 그친 노고에 대한 자위였을 거라고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성실성 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어이없는 데 소모될 수도 있다는 데 대한 경탄일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 판문점은 분명 ‘板門店’ 이었고, 이 나라 북위 38도선상 근처에 있었던 해괴망측한 잡물이었다. 일테면 사람으로 치면 가슴패기에 난 부스럼같은 거였다. 부스럼은 부스럼인데 별로 아프지 않은 부스럼 이다. 아프지 않은 원인은 부스럼을 지닌 사람이 좀 덜됐다, 불감증이다, 어수룩하다는 데에 있다. 한데 그 부스럼은 그 사람으로서도 딱하게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어쩐단 도리가 없다. 그 부스럼을 지닌 사람은 그 부스럼을 모든 사람과 더불어 공동책임을 지고 싶어하고, 그 당대를 살펴보면 사실 그럴 만한 객관적인 내력도 어느 정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 공동 책임이 도시*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그 당자는 덜 됐다고 해도 할 수 없고, 불감증이라고 해도 할 수 없고, 어수룩하다고 들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정작 당사자도 부스럼 여부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멀쩡한 정상인의 행세를 시작했다. 어떻소, 이 부스럼, 신기하죠, 이쯤 내휘두르기도 했다. 제법 좀 사려 있답신 사람들이 구경을 오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딱하게 여기는 얼굴을 하기도 하고 진단을 내리고 처방전을 만들어 책임의 소재를 규명하기도 했으나, 당자는 그저 웃어넘기거나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결국 사려 있답신 사람들도 그 선의의 사려를 팽개치곤 하였다. 왜냐하면 역시 자기 분수는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되씹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그 부스럼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그 절체절명의 중량을 지니게 되어, 심지어 관광 유람지 구실까지 하였다. 판문점이란 이러한 세계 유일의 점포로서 문자 그대로 남북으로 난 두 개의 문이 판자문으로 되어 있어, 그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쾅 닫아도 한참을 흔들흔들했다. 천장이 낮은 길쭉한 단층집으로 휑하게 큼직한, 흡사 이 세기 전 국민학교 교실 같은 마루방인데, 신을 신은 채 드나들어도 괜찮게 되어 있었다. 문은 북문하고 남문이 있었다. 이를 테면 그 문이 판자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문을 두고 제법 근엄한(적당히 우울한 표정쯤 하고 맺은) 묵계가 있었다. 남문 사용자는 남문만 사용할 것, 북문 사용자는 북문만 사용할 것. 그리고 그 방 한 가운데엔 가로줄이 쳐 있었고 그 줄을 사이에 두고 마주 무쇠 테이블이 놓여 있다. 각각 세 개씩 여섯 개의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 뒤로 무쇠 의자와 작은 테이블과 또 다른 의자들과 마이크와 스피커가 우글우글 놓여 있다. 한 달에 한 두세 번 그 판자문이 사용된다. 열시 가까이 되면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자동차와 버스가 굴러온다. 살기가 등등해서들 서성댄다. 북문과 남문이 쿵쾅쿵쾅 열리면서 남문 사용자들과 북문 사용자들이 용건을 떠메고 우르르 들어선다. 후덕후덕들 자리를 차지해서 앉는다. 연필과 백지를 꺼내고 더러 저희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드디어 남문 사용자들의 거두가 들어선다. 훤칠하게 키가 큰 미국 사람이다. 남문으로 들어선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예를 표한다. 쇠붙이 의자의 마루에 부딪는 소리가 시끄럽다. 이어 북문 사용자의 거두가 들어선다. 역시 북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예를 표한다. 드디어 양편이 다 자리가 잡히고 잠시 그럴듯한 침묵이 흐른다. 이렇게 되면 그 테이블 한가운데로 가로지른 흰 줄이 제법 경계선다운 육중함을 지니고 부각된다. 객관적인 당위성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소위 회담이 시작된다. 한국말과 미국말과 중국말이 교차된다.
판문점 근처에 이렇다 할 집이라고는 없고, 부속 건물들만이 몇 채 띄엄띄엄 서 있었다. 판문점 앞은 들판이었고 뒤는 펑퍼짐한 언덕이었다. 지금의 개성시 통문로 거리가 앞에 해당되고, 문화회관 별관이 이 뒤편에 해당된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었고 민족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좀먹는 일이었던가. 통탄, 통탄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때 그 시절에 그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상상해보라. 더구나 외국 사람까지 주역으로 끌어들여서 말이다. 근엄하게 우울한 표정으로 그 문을 드나들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것이 그때에는 상식으로 통했을는지 모르지만, 이런 놈의 상식이 어찌 통할 수가 있었더란 말인가. 바로 한가운데 가로지른 선이 지금 문화회관의 변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고증학자 설 교수의 설에 의하면 변소 속의 변기가 바로 경계였다니 더구나 익살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문화회관에서 일을 보시는 분들은 쭈그리고 앉아 심심하거든 이 점을 한번 음미해보시도록. 최근 설 교수의 그 설을 둘러싸고 분분한 논쟁이 있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선은 변소의 변기가 아니라 지금의 변소 문에 해당된다는 이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참 유쾌한 논전이어서 우리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었는데, 이 논전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상할* 만한 큰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기 전에는 이러한 종류의 논쟁이란 쓸개 빠진 어처구니없는 회화에 속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여건이 해결되지 않았던 조건하에서의 정신 상태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이것은 퍽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최근에 와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가의 이용과 자극의 발견, 경이의 창안이다. 최근에 와서 우리들의 취미가 굉장히 미세해지고 세분화된 사실을 새삼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해가 뜨고 지고, 뜨고 지고, 서울은 이리저리 뒤채면서 들끓었다. 바야흐로 장면(張勉) 정부는 정국 안정의 사명을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신민당의 분열이 신문 지상에 클로즈업 되고, 개각을 둘러싼 여론이 분분했다. 정부는 온 신경을 국회의 의원 분포에 소모했다. 정치자금의 염출*로 민주당과 신민당의 실업계를 위요한* 이면공작이 불을 뿜었다. 이 틈서리로 혁신계가 머리를 내밀었으나 그것도 벌써 이리저리 갈라졌다 붙었다 요동질을 할 뿐이었다.
진수는 취직 건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녔다. 사흘쯤 희소식이다가도 닷새쯤 무소식이고, 이런 연속이었다. 이 다방 저 다방 들러 커피를 사고 혹은 얻어 마시고 매일 대여섯 잔씩이나 마셨다. 그사이 어머니가 급하게 돌아가셔서 사나흘쯤 북새를 치렀다. 조카아이의 네돌 생일날에는 집에서 조촐한 파티가 있었다. 짝짝끼리 춤을 추기 전에 마루에 밀가루를 뿌리고 전축을 틀었다. 형수는 그 조금 큰 체대에 평퍼짐한 한복 차림으로 형님의 어깨를 잡고 돌아갔고, 형님도 형님대로 어깨가 꾸부정해서 두 사람 다 삐딱한 모습으로 스텝을 밟았다. 미국으로 갔던 전무와 형수의 그 에스 언니도 초대되었다. 그들도 둘이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진수는 한구석에서 웬일인지 부끄럽고 쑥스럽고 자꾸 두 볼이 근질근질했다. 한순간 문득 전등이 꺼졌다. 동시에 전축도 멎었다. 마루에 치마 끌리는 소리와 잠시 수런거리는 소리가 일더니 소파에들 앉았다. 식모아이가 급하게 초를 켜 와 이 구석 저 구석에 세워놓았다. 담소가 시작되었다.
“참 야단이야, 전기 사정이 이래 놓으니!”
누군가가 이렇게 투덜거렸다. 형수는 주인으로서 제 책임이기나 한 것처럼 미안해하였다. 부엌 쪽을 향해 한껏 우아한 목소리로,
“얘야, 순아아, 초 몇 자루 더 켜 오나아.”
했다.
“하긴 전등불보다도 초를 켜는 것도 멋이야요. 분위기가 더 좋아요. 안온하구 쉬이 분위기가 익어요.”
처녀인지 부인인지 분간이 안 가게 양장을 한 여인이 말했다.
“하긴 옛적 서양 귀족들은 초를 배치하는 것도 격조에 속했답디다. 그 집의 품격을 알려면 초의 배치 여하를 본다더군요. 사모님께서도 한번 솜씨를 보이시지.”
하고 그 옆에 앉았던 혈색 좋은 사내가 말했다.
“제가 원체 격조가 있어야죠. 막 굴러먹었는걸.”
형수가 이렇게 받고는 무엇이 우스운지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 전혀 받아 웃지 않는 것을 알자, 약간 무안해 하며 필요 이상으로 침착한 표정이다가,
“참, 김 전무님, 미국 가셨던 얘기나 하시지요.”
하고 조심조심 말했다.
“……”
그 전무께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하였다. 순간 전무의 부인이 입을 실쭉하고는 이편을 얕잡아 보듯이 말했다.
“통 얘길 안해요. 처음 갔을 때나 신기하지, 이젠 하도 가봐서 그저 그런 가봅디다.”
“그렇겠죠.”
하고 형수가 받았다. 비로소 당사자인 그 전무가 말했다.
“더더구나 이번엔 일이 좀 바빴어요. 서구라파 쪽으로나 갔으면 억지로라도 틈을 내어 재미를 보았겠지만, 미국은 이젠 하도 다녀와서 뭐 그리 심드렁하더군요. 하와이에서 며칠 더 묵을까 했는데, 정작 이틀쯤 있으니까 또 조바심이 납디다. 역시 집이 제일 좋아요.”
“언니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렇죠.”
좀 전의 양장한 여인이 받았다.
“아끼긴요, 기념품 하나두 안 사왔습디다.”
전무의 부인은 또 실쭉해지면서 받았다.
“그야 믿는 사이니까 그렇지 .”
전무가 말하자,
“믿는 나무에 곰팡이 핀답니다, 흥.”
하고 대번에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저 작자 꿈쩍 못하는군. 영 형편없군.’
진수는 한구석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 전무 부인의 어딘가 횡포에 가까운 신경질적인 몸짓과 말투는 자리의 분위기를 싸늘한 것으로, 힘든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물론이려니와 모두가 그녀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곤 했다. 열시가 넘어 전깃불이 들어오자, 촛불 밑에선 어지간히 익어보이던 분위기였으나 다시 생소해졌다.
“여보, 이젠 갑시다.”
“그래, 슬슬 돌아가볼까.”
전무라는 자가 이렇게 뭣인가 까무플라주하듯* 어름어름 받았다. 모두 후덕후덕 일어나서 귀가 인사를 했다.
눈이 왔다.
눈에 묻힌 판문점은 장난감처럼 동그만하고 납작해 보였다. 휑한 언덕에 선명히 돋보였다.
진수는 그날도 광명통신 기자 이름을 빌려서 갔다.
그녀를 만나자 말했다.
“눈이 왔어요.”
“네.”
그녀는 어느 구석 여운이 담긴 웃음을 웃으며 한순 얼굴을 붉혔다.
“처음 만난 거나 마찬가지군요. 다시 힘들어졌군요.”
진수가 말했다.
“……”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인정 같은 것에만 매달리지 마세요.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헐벗고 있는 것을 생각하세요.”
그녀는 또 그 투의 약간 준엄한 표정이 되며 말했다.
진수는 씽긋이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 내 주변은 풍부해요. 도리어 너무 풍부하고 무거워서 탈이지요. 덕지덕지한 것이 참 많이 들끓고 있어요. 몇 겹으로 더께가 앉아 있지요. 도리어 헐벗은 것은 당신이지요. 당신은 새빨간 몸뚱이만 남았어요. 모두 털어버리고 너무너무 알맹이 알몸뚱이만 남아 있어요.”
그녀는 피이 하듯이 웃고 말했다.
“아주 벽창호군요.”
저편엔 외국인 부부 기자가 여전히 가지런히 붙어 서 있었다. 남편은 역시 고불통을 물었으나 둘이빠는 기척이 없고, 아내는 그 남편을 따뜻하게 정이 담긴 눈길로 건너다보고 있었다. 어느 안방에 단둘이 마주 앉아 있기나 한 것처럼.
안경잡이와 그 ‘누님’ 께서는 오늘은 다소곳하게 머리를 맞대고 정말 오랜만에 만난 오랍누이*이기나 한 것처럼 수군대고 있었다. 스피커 소리가 왕왕 울렸다. 그녀는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여기서 만날 때 으레 짓는 그 경계와 방어 태세가 껴묻은 표정으로 피해서 갔다. 그 뒷모습을 건너다보면서 진수는 생각했다.
‘기집애, 조만하면 쓸 만한데, 쓸 만해.’
혼자 쓸쓸하게 웃었다.
『사상계』 92호(1961. 3): 『이호철 중·단편소설』(새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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