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길태미와 이방지의 두 검객은 신출귀몰한 검술로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인다. 두 검객은 땅을 차고 올라 공중을 날기도 하고 부딪치는 칼에서 불꽃이 튕기게도 하는데, 결국 삼한 제일검이라는 길태미가 치명상을 입는다.
“개자식아! 천벌을 받을 놈아!”
길태미가 주저앉는 것을 보자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퍼붓는 욕설이다.
이에 처참한 몰골이 된 길태미가 응수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어?”
그런 그를 향해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가 말한다.
“네 이놈, 네놈은 평생 약한 자들을 짓밟고 빼앗았어.”
이때 길태미가 뱉어내는 말들은 그야말로 명대사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야, 하하하… 그럼 약한 자를 짓밟지 강한 자를 짓밟냐? 약한 자한테 빼앗지 강한 자한테 빼앗냐? 어? … 세상이 생겨난 이래 약자는 언제나 강자한테 짓밟히는 거야. …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약자는 강자한테 빼앗기는 거라고. …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강자는 약자를 병탄(倂呑, 빼앗아 삼킴)한다. … 강자는 약자를 인탄(躪呑, 짓밟고 빼앗음)한다. … 이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야. … 그러니까 빨랑 승부를 내자.”
이리하여 해보나마나한 승부가 다시 벌어진다. 승부라기보다 길태미의 죽음을 향한 몸짓의 시작이다.
길태미는 결국 이방지의 칼을 맞아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린다.
이방지가 쌓였던 원한을 토해내듯 신음 같은 말을 뱉어낸다.
“강자는 약자를 병탄하지, 이렇게!”
길태미가 죽어 가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한다.
“네 이름이 뭐냐? 누구한테 죽었는지 알고 가야 할 거 아냐?”
이방지가 포효한다.
“나, 난 삼한 제일검 이방지…”
“이방지…”
이방지의 포효에 길태미는 꺼져 가는 소리로 신음처럼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밀어내고는 숨을 거둔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길태미가 죽었다. 길태미가 죽었다. 수호무사가 길태미를 죽였다.”
사람들 틈에 숨어 보고 있던 길태미의 쌍둥이 형 길선미가 사라져 가며 혼잣말처럼 던진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잘 말해 준다.
“아우님, 그리 가셨는가? 그래도 다행히 죽음의 순간만큼은 탐관오리가 아니라 검객이셨네, 그려. 부디 이제 편히 쉬시게.”
길태미의 말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하나를 빼면 틀리다 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러하다. 강자는 언제나 약자를 짓밟고 약자한테 빼앗는다. 강자한테는 그리하지 않는다. 아니 그리할 수 없다. 천 년 전에도 약자는 강자한테 빼앗겼으며, 강자는 약자를 병탄하고 인탄했다. 천 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그의 말 맞다나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진리는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더더욱 아니다.
길태미, 그는 탐관오리가 되어 악명 높은 삶을 살았으나, 죽음에서만은 훌륭한 검객으로서의 길로 갔다. 드라마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설정된 장면이라 하더라도 그는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았다. “누구한테 죽었는지 알고 가야 할 거 아냐?”라며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의 이름을 묻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쯤해서 끝내야 할 이야기지만, 죽음이라는 것에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 사족을 붙이고자 한다.
필자보다 열 살쯤 연상인 장로님이 한 분 계셨다. 말이 장로이지 하는 짓은 개차반이어서 교인들이 경원시하는 일이 많은 분이셨다. 그런데 노년이 되어 암에 걸리셨다. 노년이라고는 해도 70을 갓 넘긴 나이었으니 마음의 충격이 크셨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님은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으셨다. 가족들이 수술을 권했으나 듣지 않으셨다. 약물치료를 열심히 받으며 남은 날들을 살다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수술이 무서워서도, 투병의 의지가 없어서도, 또 다른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살만큼 살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산다 해도 무슨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니 이대로 자연스럽게 하늘나라로 가는 게 순리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장로님은 몇 년을 더 사시다가 당신의 말씀대도 자연스럽게 숨을 거두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필자도 그분을 좋게 여긴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도 의연할 수 있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져 늙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진다. 필자라고 다를 리 없다. 70대도 중반에 들어서고 보니 날이 갈수록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다.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보다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무슨 일이 됐건 마무리가 중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잘 살았다 해도 죽음이 지저분하면 생애 전체를 망치는 꼴이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준비하고, 맞고 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남은 기간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 여생을 보람 있게 사는 것이고, 보람 있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보시고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나날, 시간 시간을 엮어 가는 것이다.
검객은 검객답게 죽어야 하듯이 크리스천은 크리스천답게 죽어야 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의 길태미는 검객답게 죽었지만 검객답게 살지는 못했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고 인탄하는 것이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검객인 그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검객이면 검객답게 살아야지 탐관오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답게 죽으려면 크리스천답게 살아야 한다. 앞에 든 장로님은 크리스천답게 죽었으나 크리스천답게 살지는 못했다. 그러니 죽음 또한 아쉽게도 온전히 크리스천다웠다고는 할 수 없다.
크리스천의 삶은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고 인탄하는 것을 저지하며, 강자가 약자와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도록 하는 데에 힘을 보태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무리 기도하며 애를 쓴다 해도 이 지상에 온전한 천국이 건설되는 것은 아니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약자에게서 빼앗는 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나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도래하게 된다. 그렇게 할 때 이 세상에서의 내 마음에도 하늘나라의 따스한 행복이 깃들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