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두고 지어진 속집과 겉집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 앞에 예불을 올리기 위해 마련한 전각을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다섯 곳의 적멸보궁이 알려져 있는데, 양산 통도사, 영월 법 흥사, 정선 정암사, 양양 봉정암, 그리고 오대산 중대이다. 적멸보궁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비워두는 방식은 다섯 곳 모두 같지만,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만은 윤선거가 적은 대로 건물 벽이 속집과 겉집 두 겹이란 점이 색다르다.
오대산 중대에 사리를 안치한 것은 신라시대 자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시작된 오대산의 사리신앙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오대산사적』에는 태종이 사자암을 원찰(願刹)로 삼고 건물을 중창했다고 하며, 불심 이 남달리 깊었던 세조는 상원사에 들렀다가 보궁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사료로 미뤄 속 집은 늦어도 세조 이전에는 건립되지 않았을까 한다.
오대산 적멸보궁 건물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속집과 겉집이란 독특함 못지않게 속집이 조선 초기의 건축 세부를 지니고 있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속집의 공포1)는 15세기 이전의 시대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그 형태는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봉정사 대웅전이나 개심사 대웅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겉집은 속집을 보호할 목적으로 나중에 덧붙여진 점은 분명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윤선거가 보궁을 찾은 17세기 이전에 이미 겉집이 마련된 사실은 분명하다. 비바람에 노출된 겉집은 자주 수리해야 했고 현재의 겉집은 익공식 공포2) 형상으로 미루어 19세기에 다시 지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오대산의 웅장한 산세를 품은 적멸보궁
왜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은 속집과 겉집의 이중 벽체를 갖추었을까? 속 시원하게 이유를 밝혀놓은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 답은 적멸보궁이 서 있는 중대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면 저절로 나올 듯하다. 보궁 터는 손꼽히는 명당으로 전하는데, 주변 산등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 위다. 강원도의 산간은 겨울이면 한길이 넘게 눈이 오고 시도 때도 없이 비바람이 내려치기로 유명하며, 오대산 중턱은 그중에도 추위와 바람이 남다른 곳이다. 처음 여기에 보궁을 지을 때는 미처 기후 여건을 고려하지 못하다가 후대에 가서 어쩔 수 없이 마련한 대책이 속집을 그대로 두고 겉집으로 감싸는 조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조선 초기 다포식 공포3)를 간직한 건물은 한손에 꼽을 정도인데 국보인 서울 숭례문과 안동 봉정사 대웅전, 보물인 여주 신륵사 조사당과 서산 개심사 대웅전이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2018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리신앙의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 벽체를 두 겹으로 꾸민 독특한 구조에 조선 초기의 세부 기법을 지닌 점이 높게 평가된 결과였다. 윤선거가 적멸보궁을 다녀간 이후에도 이름난 선비들 이 중대를 오르고 적멸보궁을 방문하여 행적을 글로 남겼다. 어떤 이는 보궁 주변의 멋진 경관을 시로 읊고, 어떤 이는 사리를 봉안한 둔덕을 유심히 살폈지만 두 겹으로 된 건물 구조의 색다른 점을 글로 남긴 이는 윤선거가 유일하다.
그의 남다른 관찰력 덕분에 이 집의 특색이 드러났고, 최근 조사를 통해 조선 초기 다포식 건물로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예나 지금이나 적멸보궁에 오르려면 적지 않은 땀을 흘려야 한다. 하지만 한번쯤 올라서 사리를 봉안한 웅장한 오대산의 산세와 예불하는 건축이 지닌 감동을 느껴볼 가치는 충분하다.
1) 공포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2) 익공식 공포 : 창방(昌枋)과 직교하여 보방향으로 새 날개 모양의 익공이라는 부재가 결구되어 만들어진 공포유형
3) 다포식 공포 :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건축양식. 이때 기둥 위에 올라간 공포를 주상포(柱上包), 기둥 사이에 놓인 포를 간포(間包) 라고 함
글, 사진. 김동욱(경기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2-5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