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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의 중요성
이 글은 지난 번 전신련 연합수련회 둘째 날 오후에(2007년 6월 21일, 원주 명성교회 수양관) 본 필자가 위의 제목으로 행한 특강 내용을 다시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성경관(the view of the Bible)이란 문자 그대로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성경이 무엇이며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느냐의 문제까지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성경관의 문제는 그러므로 상당히 방대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된다. 현 서울신대의 목창균 총장은, “20세기 개신교신학의 최대 전쟁터는 성경관이었으며, 논쟁의 핵심주제는 성경의 권위문제였다.”라고 올바로 지적하였다(목창균, 현대복음주의, 황금부엉이, 2005, 162쪽). 21세기에도 성경관의 논쟁은 계속될 전망이며, 모든 신학의 입장과 방법론은 여전히 성경관에 의해 그 성격과 색갈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특강에서는 성경관의 제반 문제를 다 취급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관의 핵심 내용인 성경의 권위와 관련하여 성경의 소위 오류와 모순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 해석의 문제를 짚어보고, 성경의 오류와 모순주장에 대항하여 보다 바람직한 성경관의 입장을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성경의 권위를 말할 때 그 핵심적인 관심사는 성경은 누가 하는 말인가, 또 그 말하는 내용은 믿을만한 사실인가, 즉 진실한가 하는 물음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die Aufkraerung, the Enlightenment) 사상이 신학에도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한 이후로, 성경도 다른 고대 (종교)문서들과 같은 기준에서 해석해야 하며, 성경에도 꼭 같은 오류와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인 내용들은 사실로 일어난 사건에 관한 기록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며 상징적이고 신앙고백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경은 “신앙 고백적인 그리스도”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예수”에 관해서는 거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관이나 성경해석은 오늘도 교회의 신앙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으며, 신앙과 신학의 심각한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분석적으로 보면, 성경의 권위(authority)는 계시(revelation)와 영감(inspiration)으로 구성된다. 성경을 우리가 믿을 수 있고 그 권위에 순종하는 이유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계시라고 믿기 때문이다. 계시는 간단히 말해서 초월적인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이나 뜻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나타내보이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행위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여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할 때 인간 기자가 실수하여 그 뜻을 잘못 전하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하나님은 그 기록과정에서 인간 기록자의 사상과 특히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셨다고 본다. 이것이 영감이며, 이것이 성경관에서 말하는 “언어 영감설(the verbal inspiration)”이다.
그동안 우리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러한 언어영감의 내용을 성명할 때 “축자 영감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축자영감설이라는 용어는 번역상의 잘못이며, 기계적 영감설이나 받아쓰기 영감설과 혼동되기 쉬운 약점이 있다. 의미상 결정적인 차이나 영향을 주지 않는 글자의 한 획, 글자 한자 한자 까지 모두 영감되었으며, 교정 가능한 기록자의 실수까지도 완전히 배제한다는 의미에서 “축자영감설”은 신학적 근본주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문자 그대로 “축자영감(逐字靈感)”을 주장하려면, 영어로는 “verbal"이 아니라 ”verbatim"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the verbatim inspiration). 성경의 영감은 기계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유기적이며, 불완전하거나 부분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충분 또는 완전하다는 것이며, 일점일획이 중요하지만 글자 한 자 한 자가 영감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그 의미 단위 내지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언어가 영감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영감설의 내용을 개혁교회 복음주의 관점에서 정리해보면, “유기적-완전-언어” 영감설(Organic-Plenary-Verbal inspir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현재 우리는 성경의 어떤 원본(autograph)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작은 조각 단편까지 다 포함하여, 구약이 약 3 천 개의 사본, 신약은 약 5 천 개의 사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계로 복사한 것과 같이 꼭 같은 사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문비평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대 번역본 성경들은 본문전승 과정에서 본래 원본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해주고 있다는 데는 크게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다시 우리의 주 관심사로 돌아가 보면, 현실적으로 성경관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성경에도 오류나 모순이 있느냐라는 물음이다. 성경에 오류나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결코 전통적인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없고, 적어도 신정통주의 입장이거나, 자유주의 입장이다. 신정통주의는 분명히 자유주의와 같지 않으며 차별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신학(新神學)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교계나 신학계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신정통주의 성경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신정통주의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참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 기자들의 “증언”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어디까지나 이러한 인간들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적이며 역사적인 오류와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정통주의는 결국 성경 유오설을 가르치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아류로 취급받고 있으며, 교회의 신앙에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영감에서도 신정통주의는 주목할 만한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신정통주의는 개혁신학의 전통적인 영감설인 “언어영감”을 수정하여 “실제(또는 사건)영감”설을 주장한다. 성경은 이를테면 존재론적으로 영감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성령의 조명과 감동하심으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생생하게 부딪쳐 올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무오(無誤, inerrancy)하지는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데는 불오(不誤, infallibility)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경관의 이중성 때문에 신정통주의는 회색신학이라는 비난도 받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계와 신학계의 혼선과 혼란은 지난 1953년에 신정통주의를 표방하는 기장과 보수주의를 고수하는 예장이 분열한 이래로 여전히 신정통주의 성경관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장이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한 이래로, 그 신학적인 차이는 총신측이 축자영감설을 앞세운 근본주의 노선으로 드러났고, 통합 측은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통합 교단과 장신대의 신학노선이 신정통주의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예장 통합 교단 제 64회 총회에서는 당시 장신대 이종성 학장에게 이 문제를 물어서 명확하게 정리한 바가 있다( 제 64회 총회 회의록, 1979, 101-108쪽. 이 자료에 의하면 예장 통합 총회는 당시 장신대 이종성 학장에게 “귀하는 신정통주의를 장로회신학대학의 신학노선으로 삼겠다는 뜻입니까?”라고 물었고,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닙니다... 본 대학의 신학노선과 방향은 본 교단의 노선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에큐메니칼 운동노선에 근거하여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을 영위해 나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작금에 장신대의 신학 정체성을 논하는 장에서 소위 “통전적 신학”을 말하고 있는데, 그 “통전적”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의 방법론을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때도 그러므로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성경에도 오류와 모순이 있다는 주장에 응전하려는 것도, 이러한 신정통주의로 인한 신학의 혼선과 혼란을 극복하여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경 오류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쟁점들과 그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대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창2:19.
이 구절에서 보면,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 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미 창1:20 이하에 보면, 창조 다섯 째 날에 하나님은 공중의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또 여섯째 날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땅의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그렇다면 창2:19 에서는 창1장의 순서와 비교해 볼 때 창조순서상 모순이 있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2:19 에서는 아담이 각종 들짐승이나 각종 새 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비평적 방법을 사용하는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에서는 이 문제를 모순으로 규정하고 소위 5경의 문서가설로 설명하고 있다. 창1장의 창조이야기는 바벨론 포로기에 제사장들에 의해 작성된 소위 P 문서이며, 창2:4 하반절 이하의 창조이야기는 아마도 솔로몬 시대로부터 유래한 소위 J 창조이야기로서, 이 두 창조이야기는 구전으로 시작하여 그 출처, 연대, 삶의 자리가 각각 다른 문서로 전해지다가 후대에 한 문맥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 또는 오류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상의 모순은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한 구원사에서 볼 때,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고 있다고 신학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창조이야기는 창조의 과학적인 방법이나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보수적인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창1장과 2장의 창조이야기의 내용이 통일성을 가지며,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 기록으로 보려고 한다. 위에서 제기된 창조 순서의 모순 내지 오류 문제도 창2:19의 “지으시고(바이채르)” 라는 동사의 시제를 문법적으로 문맥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번역하면, 해결이 된다고 본다. 이 히브리어 동사의 용법은 이 문맥에서 “연속의 와우 미완료”인데, 여기서는 과거완료 시제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사를 “지으셨었고(had formed)”라고 이해하면, 창조순서상의 모순은 금방 해결된다. 현대 영어성경 번역본 NIV가 대표적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ESV도 창2:19 각주에서 과거완료시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2. 수10:13.
이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다”는 내용인데, 이것은 과학적인 오류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적인 상식으로 볼 때.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이 일시 멈추거나 그 속도가 느려졌다고 생각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하여 왕하20:11이나 사38:8에서도 당시 해시계의 해 그림자가 십 도 뒤로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대하32:31 참조).
그러나 복음주의 입장에서의 이해는 그것을 단순한 과학적인 오류로 설명하기보다는,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의 시적인 상상력과 숙어적인 표현 가능성에 주목한다. 복음주의적인 이해는 여기서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이 일시 멈추거나 후퇴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극단적인 근본주의적인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 한국어에서도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표현을 천체 과학 지식과는 상관없이 사용하는 것과 같이, 이 문맥에서는 여호수아 군이 가나안의 적군과 싸울 때, 대낮에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를 식혀주는 날씨의 변화와 함께, 태양의 특별한 굴절 현상으로 낮과 같이 밝은 현상이 계속되어 싸움에 승리하는데 유리하게 되었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 그림자가 해시계에서 뒤로 물러갔다는 현상도 그 지역에 국한 된 특이한 현상(일종의 기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과학적인 난제들을 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난제들은 성급하게 과학적인 오류라고 속단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난제로서, 성경에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지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난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복음주의 해석의 입장이다.
3. 대하22:2.
이 구절에서 보면, 유다의 왕 여호람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 나이가 42세라고 했다. 그런데 왕하8:26의 평행구절이서는 같은 인물인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 나이가 22세로 나온다. 그렇다면 어느 한 쪽은 맞고 어느 한 쪽은 틀렸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경우조차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말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아하시야의 즉위 시 나이는 22세가 맞다고 여겨진다. 그러면 42세라고 기록된 맛소라 본문은 오류인가? BHS 본문 비평장치에서는 이 42세라는 개소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어떤 칠십인역 사본과 시리아어역본, 그리고 아랍어 역본이 22세로 되어있다는 것을 대조하여, 왕하8:26에 따라 22세로 고쳐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경우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대체로 사본 필사자의 오류(scribal error)를 인정한다. 이것은 성경의 친필 원본이나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본 필사자의 오류라고 보는 것이다.
4. 렘52:12-13과 왕하25:8-9.
이 두 본문은 유다 왕국이 신흥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의 침공을 받아 결국 예루살렘 성과 왕궁과 성전이 불타는 동일한 사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두 본문이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서는 느부갓네살이 즉위한 지 제19년 제 5월 10일이라고 했고, 열왕기하에서는 역시 느부갓네살 왕의 제 19년 제5월 7일이라고 했다. 이 날자는 오늘 우리가 쓰는 양력으로 볼 때 주전 586년 8월 14일 전후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7일과 10일이라는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역시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인가?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경우 성경의 오류라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관점의 차이로 설명한다. 탈무드에도 이러한 날짜의 차이에 관한 좋은 설명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바벨론 왕의 군대 사령관인 느부사라단이 군대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며 방화하고 파괴하기 시작한 날짜를 7일로 볼 수 있다면, 결국 10일에는 모든 것이 불에 타고 파괴된 날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결코 성경의 오류라고 볼 것이 아니라 차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기록자와 그 기록 시기와 관점에 따라 차이점들이 있다(대상21:1과 삼하24:1 비교).
5. 마27:44; 막15:32과 눅23:39-43.
이제 신약 본문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자. 위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서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우에서 역시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들은 모두 예수를 욕하면서 회개하지 않고 죽은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서에서는 그 두 행악자 중에 하나가 예수를 비방하는 다른 한 사람을 꾸짖으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말을 했고 구원을 받았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느 한 쪽의 오류가 분명하며, 성경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이 경우도 섣불리 성경의 오류라고 단정하면서,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사건의 전후 맥락을 본문에서 잘 살펴보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은 당시 시간으로 제 3시(즉 오늘의 시간으로는 오전 9시)에 시작되었고, 제 6시 (정오 12시)에 어둠이 덮혔으며, 제 9시(오후 3시)에 예수께서 운명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시기 까지 6시간이 지속되었고, 그 현장은 일상의 경험과는 매우 다른 극적인 상황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는 이 6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사건과 주고받은 말들을 모두 다큐멘터리와 같이 기록하지 않았다. 분명히 기록 된 것 보다 더 많은 자세한 일들과 더 많은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을 것이다(요21:25 참조).
그렇다면, 두 행악자들이 처음에는 다 같이 비방을 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행악자는 결국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차이가 복음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만약에 공관복음서가 복사한 것과 같이 서로 꼭 같다면 오히려 위조한 문서로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서가 동일한 사건에 대한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결코 오류가 아니라, 이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6. 마27:9-10.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 말로 인용된 말씀은 사실 스가랴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으로 알려져 있다(슥11:12-13).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한 성경의 오류가 아닌가? 그러나 이 경우도 쉽게 오류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먼저 예레미야서 본문에는 토기장이와 연관된 본문들이 나오고 있으며(렙18:1 이하; 19:1 이하; 32:6-15 참조), 신약 당시에 예레미야에 관한 전승에서 이러한 내용이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구약 예언서의 첫 책은 예레미야서였다는 학자들의 주장을 따르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스가랴서를 포함하여 예언서의 대표자격인 예레미야의 이름을 인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Ryrie Study Bible, Expanded edition, Moody Press, 1994년 판, 1474 쪽 마27:9 각주 참조).
7. 마14:16-21; 요2:11; 요11: 17 이하 등등.
여기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소생한 기적 등, 과학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기록되어있다. 그래서 서구 계몽주의 사상이 대두된 이래 성서비평학을 사용하는 신학자들은 이러한 성경의 기적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야기가 아니며, 예수의 신성을 고양하기 위해 초대 교회가 지어낸 일종의 신화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과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기적들은 성경의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러한 기적 사건들을 보고 경험한 의심 많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는 것을 거듭 말씀하고 있다.
오늘 21세기 현대과학은 과거 뉴턴의 기계론 적이며 3차원의 지구 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였으며, 상대성의 이론과 양자물리학의 불확정성 이론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서 공히 적용이 가능함을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종래에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내용들이 이제는 과학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과학의 세계는 결코 닫혀진 세계가 아니고 열려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아닌 비과학자로서 신학자들이 앞장서서 성경의 기적 사건들이 과학적인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비유컨대 하늘 보고 침 뱉은 격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상에서 논의한 바를 정리해 보면,
성경에 모순이나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확증된 오류나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어느 학문 분야에서나 발견되는 난제들이며, 성경시대와 오늘 우리시대의 역사적인 간격과 인간의 실존과 이해의 한계성에서 기인하는 차이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좀 더 신앙 논리의 일관성을 세워 나아가야 한다.
사도신경의 첫 신앙고백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능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성경에서 하신 말씀이나 기적 사건들을 오류나 모순이나 믿지 못할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씀하였다(요일1:1).
베드로 사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했다(벧후1:16).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할,”고 권면하였다(딤후4:7).
사랑하는 신학도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이 바른 성경관을 가지고 성경중심의 신앙과 성경중심의 신학을 확립하는 공부에 힘쓰기를 권면합니다.
장신대 김중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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