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군가의 빚을 끝까지 가지고 있지 않길 원하셨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정말 갚을 능력이 없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의 소유는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몫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갚지 못해 자기의 기업(소유)을 빼앗기게 되고, 자기의 몸이 평생토록 종이 되게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7년마다 그 빚을 면제(免除)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7년마다 면제하는 해를 안식년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면제년(免除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면제는 히브리어로 쉐밋타(שְׁמִטָּה)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빚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쉐밋타는 솨마트(שָׁמַט)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솨마트는 “쉬게 하다”, “자유롭게 하다”, “떨어뜨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안식년에 대한 규정은 출애굽기 23:10, 11과 레위기 25:1~7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 성경본문들에서는 땅에 대한 안식년 규정만 나오고, 빚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빚에 대한 것은 신명기에서만 나오는 부분입니다. 이 빚의 탕감(蕩減)에 대한 내용은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땅에 대해 6년 후 7년째에는 경작을 멈추고 쉬게 해주었던 것처럼, 빚에 대해서도 7년째에는 독촉을 하지 말고 가만히 두었다가 7년째 해가 지나면 다시 독촉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7년째 되는 해에 모든 빚을 탕감하여 더 이상 빚을 갚지 않아도 되게 한다는 견해입니다. 성경학자마다 각기 그 중 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지만, 첫 번째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안식년, 면제년의 진정한 의미를 살린다면 그 빚을 완전히 탕감하여 더 이상 빚을 갚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지 한 해 동안만 빚을 탕감해주면, 그 해에는 땅도 안식년이라서 농사도 지을 수 없는데, 그 빚으로 말미암은 가난과 어려움은 그 다음해에 다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아주 큰 의미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담당하셔서 죄의 빚을 지신 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면, 면제년의 빚 탕감도 영원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방인에게는 독촉해도 되지만, 형제가 진 빚에 대해서는 면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3절). 면제가 “떨어뜨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손에서 그 빚에 대해 완전히 털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안식년, 면제년의 규정을 잘 지키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공동체 안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고, 꾸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축복하십니다(6절). 빚을 움켜쥐고 아등바등 받아내려고 하기보다는 때가 되었을 때 너그럽게 놓아주는 것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물론 이로 인해 많은 손해를 입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안식년이 가까워 오면 곧 다가올 안식년에 빚을 탕감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빌려주지 않으려는 인색함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9절). 이 구절을 보아도 안식년만 빚 독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이 되면 영원히 그 빚을 탕감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합니다. 아무튼 누가 어려움에 처해 돈이나 양식 등을 빌리러 왔는데 안식년이 곧 다가오기에 못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 빌려주려는 인색함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9절). 누군가 가난한 자들이 있다면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7절~11절). 이 땅에는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에게 늘 손을 펴서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안식년의 면제는 단순히 의례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웃을 진정한 마음으로 배려하고 베풀며 사는 태도를 갖고 살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을 헤아려 너그럽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넉넉히 꾸어 주는 삶,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12절부터 1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 누군가가 종으로 팔렸을 경우에도 일곱 째 해에는 자유롭게 놓아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만약 일곱째 해에만 자유롭게 해주었다가 그 해가 지나면 다시 종이 되지 않는 것처럼 빚에 대해서도 영원히 탕감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봅니다. 종으로 팔려 온 이스라엘 사람이 있다면 칠 년째에는 자유롭게 내보낼 뿐만 아니라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넉넉히 주어서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13절, 14절). 억지로 내보는 것이 아니라, 흔쾌한 마음으로 어느 정도의 필요까지 채워서 내보내라는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종으로 묶어 둘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속량(贖良)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15절).
그런데 예외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 되었던 자가 그 주인되었던 사람과 그 가정을 너무 사랑하여 영원히 함께 머물며 계속 종으로 지내겠다고 할 경우에는(16절) 송곳으로 종이 되겠다는 사람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 영원히 종이 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6절, 17절). 이를 “사랑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발적으로 그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귀 뚫은 종은 자발적으로 영원한 종이 되길 원한 사람의 표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드려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기로 결심하고 주님께 사랑의 종이 된 자들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하나님의 것이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19절, 20절).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애굽(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에서 애굽에 거하는 모든 장자(長子)와 짐승 중 첫 번째 태어나는 것을 모두 죽이시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인방(引枋)에 바른 집의 장자나 처음 난 것을 그 죽음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처음 태어난 장자와 짐승이 죽어야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을 기억하며 처음 난 것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처음 난 것은 성막으로 나아가 제물로 드리고, 그것은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드리는 제물은 무흠(無欠)한 것으로 드려야 하고, 만약 그 처음 난 것이 흠이 있는 것이라면 잡아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22절). 다른 짐승을 잡아 먹을 때처럼 이때에도 그 짐승의 피는 먹지 말고 땅에 쏟으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를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빚을 면제해 주는 일, 누군가를 나에게 매여있게 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주는 일,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주님 앞에 처음 것들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기쁨으로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꺼이 우리의 삶을 드리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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