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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과 대화(1)
심재룡 교수(서울대, 철학과)
현대 한국 및 동아시아에 살아있는 불교 전통을 선불교 또는 그냥 선이라 부르고 있다. 선의 특수한 수행 방법 가운데 화두(話頭) 잡기 또는 공안(公案) 공부라고 부르는 특이한 대화의 기법(技法)이 있다. 대화는 주로 큰 스님과 제자 사이에 오가는 치열한 구도(求道)의 열정을 담은 질 의응답(質疑應答)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선문답 또는 그냥 문답(問答)이라 부르기도한다.
그런데 이런 선문답을 일상인들은 동문서답(東問西答)식의 엉뚱한 대화쯤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런 오해에도 물론 당연한 이유가 있다. 그런 오해를 이해하는 글을 써보자. 선문답식 대화의 선 불교 철학적 기초를 따져보아 선문답이 대화 속에 자리하는 값을 매겨보자.
목차 :
1. 머릿말
2.禪問答의 의미(意味)와 무의미( 無意味)
2.1. 선문답의 事例 - 무자공안(無字公案) -
2.2. 경전(經典)과 어록(語錄)
2.3. 선문답의 의미와 무의미
2.4. 깨달음과 의사 표현의 절대 자유
2.5. 선문답식 대화의 유사(類似)-문제적 성격
3. 맺음말: 선문답과 대화의 철학
1. 머릿말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무(無)"
누군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물었다. 대답은 "무(無)"였다.
개한테는 불성이 없다는 말인가? 불성이 무와 같다는 말인가? 그저 '무'라는 무의미한 소리를 냈을 뿐인가? 도무지 종잡을 길이 없다.
조주 종심 (趙州 從 言念 Chao-chou Ts'ung-shen 778-897) 스님의 이 기상천외한 대답은 선객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 사이에도 선문답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된다. 무라는 말에 사로잡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흔히 무의 철학 또는 동양적 허무주의라는 표현이 특히 요지음 일부 일본 철학자들 사이에 회자(膾炙)된다. (이는 본래 중국인들이 변조한 지극히 중국적인 불교 즉 선불교의 독특한 철학적 성격을 무시하고, 엉뚱하게 헤겔류의 독일 관념론 아니면 하이데거류의 실존주의적 틀을 드리대어 둥근 구멍에 네모난 막대를 끼우려는 짓이다.) 또는 새로운 논리 아니면 동양적 변증법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는 철학을 논리적 사유 한 가지로만 보는 지독히 꼭 막힌 편견의 반영이다.)
정작 선불교를 수지신봉(受持信奉)하는 선객(禪客) 즉 선을 수행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역설을 통한 해탈의 길로서 선문답을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이치에 닿는 합리적, 논리적 이야기(대화)는 전혀 인생의 길을 논하는데는 아무 관계가 없고, 허튼 소리를 마음대로 지꺼려도 좋고, 바로 그래야 깨친 자라는 식이다. 자칫 미치광이 광선(狂禪)자나 어리석은 치선(痴禪)자로 몰릴 지경이다. 선불교의 무자공안(無字公案)을 두고 이제까지 이렇게 끊임없이 여러가지 해석들이 난무한다.
선불교 자체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도 만만치 않다.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anti-intellectualism)다. 싸구려 마구잡이 직관주의(直觀主義 cheap intuitionism)다. 또는 선악판별(善惡判別)을 무시하고 동물처럼 자연이 만든대로 살자는 (animal-like spontaneity)것이다. 이 따위 오해에 곁들여 당연히 선 수행의 독특한 방법인 선문답/공안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겠다. 그러려면 조근조근 한참 이야기를 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정작 선문답을 활용하는 선승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저 선승들의 방법은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설명하는 수순을 밟지 않는다.
논주는 선승이 아니므로 이제부터 자못 논리적으로 선문답/공안에서 대화의 철학을 찾아보겠다.
이제 논주는 이 글에서 하나의 엉뚱한 시도를 하려 한다. 대화의 철학을 선문답에서 찾아 본다. 선불교 전통 속에 숨어 있는 대화의 정신은 무엇일까? 우선 이해를 돕는 배경적 설명을 곁드린다. 선문답의 여러가지 사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하여 선이 노리는 구극의 경지를 대자재(大自在) 또는 해탈(解脫)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대화가 노리는 막힘없는 의사 소통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본 기획 즉 대화의 정신을 발양하려는 이 기획에, 한 가닥 도움이 되기를 빈다.
애시당초 선문답은 철학자들의 이론 구성을 돕기 위한 한가한 말놀음이 아니다. 그런데 대화의 철학이라는 틀에 끼여들어 이같은 말놀음을 동원하는 일견 모순된 작업을 수행하려 한다. 말은 여러가지로 인간에게 놀이를 제공한다. 어차피 정신적 훈련을 통한 인격의 완성 또는 그 구체적 표현의 하나인 자유로움의 추구는 인체의 어느 한 부분 또는 전신을 동원하는 육체적 훈련과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한다. 말을 통해서 인격을 완성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이런 큰 물음에 답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다만 여기에 선문답이라는 말놀이의 특이성이, 자유와 해탈이라는 구극의 목표를 향한 불교 전통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핌으로써 혹시 대화의 철학이라는 이론적 대화의 마당에 선문답의 기여도를 가늠할 수 있지않을까 어설픈 추측을 해보는 것이다.
몇해 전에 말의 해방적 기능에 대한 논주의 미완고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다. 이제 그 말꼬리를 잡아 이 논의의 시발점을 삼으려한다.
"선불교는 흔히 언어의 해방적 기능보다 그 구속적 기능에 우리의 눈을 돌려 그 언어의 굴레로 부터 벗어나는 길이 좌선 내지 화두 공부라고 가르치는 듯하다. 그러나 지눌은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가 땅으로 인해 일어나는 (因地而倒,因地而起)'묘수를 곧바로 언어 생활에 적용하는 듯하다. 언어가 인간의 굴래라면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해방을 찾아야한다. 인생 유희는 언어 유희다. 인생의 굴레는 언어의 굴레다. 인생의 해방을 찾으려 하느냐? 언어로 부터의 해방을 찾으려 하느냐? 언어를' 뛰어 넘는 기상천외의 방법이 따로 있다더냐?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은 여기에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우리는 언어 속에서 곧 바로 벗어나는 인간 해방의 길을 찾는다. 깨친 자의 오도송(悟道頌)은 그 해방의 기쁨을 노 래한 것이다."
자 도대체 그렇다면 선객들의 말놀이로 지칭되는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선문답이 비록 오도송은 아닐 지언정, 선문답을 통해서 대자재 해탈을 얻게 되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분명 선무답은 단순한 언어적 표현의 습득 내지 숙달을 노리는 훈련이 아니다. 독특한 체험에 딱 들어맞는 새로운 말을 찾거나 있는 말을 달리 꾸며보는 수사학도 아니다. 선문답은 불교적 수행의 한 방편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행해지는 질의응답(質疑應答)이다. 내용은 당연히 불교의 진리와 그 진리를 증득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질의응답의 과정에서 그 밑바닥에 놓고 나가는 것들은 모두 불교의 기본적 교리와 불교적 삶의 태도이다. 특히 이와 같은 질의응답이 선불교의 경전화(經典化) 작업을 통하여 공안이라는 이름으로 화석화(化石化)된 채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가 하면, 또 그 화석을 뒤집어내어 살아있는 훈련의 밑자료로 오늘도 사제지간(師弟之間) 또는 학인(學人)들 사이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제 그 구조를 분 석하고 과연 대화의 철학에 값하는 무슨 유용성이 있는지를 따져 볼 차례다. 선가(禪家) 학인들 사이에 유용성이 있다면 대화의 철학에도 무슨 쓸모가 있음직하다.
2. 禪問答의 의미(意味)와 (무의미 )無意味
2.1. 선문답의 사례(事例) -무자 공안(無字公案) -
아무래도 구체적으로 선문답으로 행해지는 대화의 사례를 들지 않고서는 논의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위 일천칠백 공안을 모아 놓은 「선문염송 禪門拈頌」을 모조리 훑어 본다해도, 그 독파는 선의 관문을 뚫는 것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의 화두라도 제대로 꿰둠으면 나머지 모두를 한번에 답할 수 있다 하니 우리는 서너개의 사례로 족할 것이다.
사례 1:
객승(客僧): "개한테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큰 스님: "물론 있지."
객승: "그럼 스님한테는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큰 스님: "난 없네."
객승: "경(經)에는 온갖 유정중생(有情衆生)이 불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오직 스님만 어째 불성이 없다 하십니까?"
큰 스님: "내가 온갖 유정중생은 아니니까."
객승: "아니? 스님께서 유정중생이 아니시라고요? 그럼 스님께선 부처님이란 말씀인지요?"
큰 스님: "부처님도 아닐세."
객승: "그럼 결국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큰 스님 " 그 무엇도 아닐세."
객승: "그 걸 볼 수 있읍니까? 도대체 알 수 있는 무엇인지요?"
큰 스님:"생각해도 잡을 수 없고, 따져 봐도 얻을 수 없네. 그러니까 생각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것일세."
사례 2: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는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조주 스님: "없어."
먼저 스님: "경에는 유정 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했는데요. 어째 개에게 불성이 갖추어지지 않았겠읍니까?"
조주 스님: "왜냐하면 개는 그 개의 업으로 인해 존재하니까."
다른 판본 {조주어록}에 따르면, 잇대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또 한 스님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조주 대답해 가로대, "'있다"
그 스님이 말하기를, "있다면, 어째서 저 (개)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읍니까?"
조주 대답하되, "알고도 나쁜 짓을 일부러 범했으니까."
사례 3:
물음: "개에게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대답: "집집마다 문전에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네."
사례 4:
어느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읍니까? 없습니까?"
조주께서 대답하되: "無"
공안(公案), 화두(話頭), 문답(問答)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우는 선가 특유의 대화는 본시 선사들의 행장과 말씀을 기록한 어록(語錄) 가운데 들어있다. 처음부터 보통 사람들이 못알아들을 문답이 아니었음이 위의 사례들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으리라 믿는다. 즉 사례 1과 2는 설명을 곁드린 대화였음에 반해, 사례 3과 4는 도무지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종잡을 길이 없다. 대부분의 선문답이 사례 3과 4와 같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사례 1과 2를 보이면 선사들도 저렇게 친절하게 사리분별을 따져서 질문자를 지도하는구나 생각이 들 법하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조주 스님이 한 때는 이렇게 또 한 때는 저렇게 대답을 했다는 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2.2. 불경(佛經)과 어록(語錄)
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안의 발전 역사를 소상히 알수 있으려니와, 여기서는 천년이 넘게 지속된 선종사를 인물별로 종파별로 나열 서술할 수 없다. 다만 그 특징적 면모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불경과 어록의 차이를 알아보자. 소대승의 경전들이 모두 부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그 권위에 따라 말씀의 진리성을 확보하는 데 반해, 어록은 주로 8- 9 세기에활동한 조사들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조사님들의 말씀이다.
둘째, 어록은 보통 인물 특히 유가(儒家)의 행장(일생의 언행을 기록한 일종의 傳記)과도 다르다. 보통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단순한 행장(行狀)이 아니다.
셋째, 어록의 핵심은 사제 간에 오고 간 구체적 문답을 기록해 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경전의 일부를 인용하기도하고, 스승의 정식 설법인 상당(上堂) 법문등을 적어놓기도 하지만, 선문답의 묘미는 역시 거두절미(去頭切尾)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지는 이야기 곧 화두(話頭 여기서 頭는 아무 의미도 없는 접미어다. 혹시 머리 두자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여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등 그럴듯한 해설은 속류 해설가의 지나친 말장난이다)에 있다.
넷째, 그 구조적 특성은, 위의 사례 4가 보여주듯, 한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있을 뿐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모든 대화는 마치 사무라이들의 칼싸움처럼 전격적이다. 플라톤의 대화처럼 주어진 주제를 둘러싸고 끝없이 소위 변증법적 단계를 거치는 게 아니다. 선문답적 대화를 칼싸움에 비길 수 있다. 칼을 뽑았다 하면 한쪽은 베어지고, 한쪽에선 이미 칼을 칼집에 넣는 형국이다. 간략하고 압축된 대화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오간다. 왜냐하면 선문답의 목적은 순간적인 문답/말싸움/대화를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초긴장 상태에서, 가장 구체적이고도 일회적인 상황에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파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따라서 그 문답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바깥 사람들이 글자로 기록된 어록을 보았을 적에 그 대화는 (실제 상황을 재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전혀 무의미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었다. 진리는 순간적으로 환히 드러났다. 무의미한 대화 속에 유의미한 진리가 드러났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정, 이런 소식을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같고도 다른 이이불이(二而不二)적 관계라 칭한다. 다시 말하면, 세속인들의 이야기인 속제의 차원에서는 보통 사람들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의미가 있으나, 진제의 차원에서는 보통 사람은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선객들에게만은 유의미한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2.3.禪問答의 意味와 無意味
선객이 아닌 논주는 그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들며 제삼의 차원을 제공하려한다. 그것이 대화가 노리는 의미의 의사소통이다. 선객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설 것이다. 저들은 이치를 따져 선문답의 의미를 캐는 작업을 의리선(義理禪)이라해서 극히 타기하는 바이다. 그러나 논주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의미의 차원과 무의미의 차원은 그 각각에 따로 유의미한 별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론이 존재함을 밝히는 것이다. 그 이론은 또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선객의 의미와 보통 사람들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조사선(祖師禪)의 길은 여래선(如來禪)과 다르다고 배척만 해서는 양쪽의 의미를 모두 잃고만다.
논주가 보는 바로는 선객이 주장하는 대로 선문답의 무의미는 보통 사람들 즉 선객이 아닌 사람 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쏘쉬르(Saussure)가 이른바 이야기(parole)의 기본 구조라 할 수 있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구별이 선문답에는 없다. 말하는 이가 없는데 말만 튀어나와서 전광석화처럼 빛나다가 곧장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고 비유해야 할까? 아무튼 이야기는 있는데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없다면 이런 이야기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는 이야기 본래의 의미를 결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아마도 선문답의 대표적 특징의 하나는 거기에 사용되는 말도 말의 가장 기본적 기능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즉 말은 실재를 의미론적으로 분명하게 지시하는(semantic articulation of reality) 기능을 상실한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분명 무슨 뜻깊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 같으나, 선의 견지 즉 진제(眞諦)의 견지로서는 소위 의미론적 분절(分節)작용은 완전히 투명해진다. 보통 말 예컨데 여기 이 '책상'은 거의 고정불변의 '책상'을 지시하는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 것 '책상'이 '책상'인 까닭은 그 것이 '책상 아닌 것'과 구별되는 한에서 '책상'이기를 확보한다고 본다.
그런데 선불교에 몸을 담은 선객들 편에서는,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일반불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의미론적 분절작용은 무한대로 투명해서 '책상'이라는 말이 전혀 아무런 저항감을 갖지 않고 본래의 비분절적 상태 (original inarticulate state) 즉 대승 불교의 문자를 쓰면 진여 (眞如 / tathata)의 상태와 호환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책상'이라고 분절적으로 지시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처럼 무한대로 천변만화하기 이전의 원초적 실재가 그대로 '책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상'은 진여의 한갖 하나의 상징이기를 멈추고, 바로 그 진여라는 것이다.
셋째, 말이 모여 어느 명제가 이루어져도 그것마져 의미의 독립된 단위일 수가 없다. "하늘은 푸르다"라는 명제는 '하늘'하고도 '푸름'하고도 아무런 의미 상관을 지니지 않은채 그냥 입에서 뱉어진다. 그 명제는 오직 진여가 드러나는 구체적 사례일 뿐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 명제가 나의 주관적 감상을 표현하는 것이거나, 객관적 하늘의 묘사에 틀림없을 터이지만, 선객에게는 그 아무 것도 아니다. 말의 사태 지시성을 무시하는 위의 두번째 특징에서 자연 도출되는 이 세번째 특징은 따라서 선문답 전체의 일반적 무의미성을 가장 포괄적으로 나타낸다. 여기에 선문답이 보통 상식인에게 기상천외의 말놀이로 비치는 소이가 있다.
요컨데 선문답은 상식적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의 대화가 아니다. 비록 그 형식은 대화의 모습을 갖추었을지언정. 그렇다고 우리는 대번에 선문답의 무용성을 말해 버릴 수가 없다. 선문답이 상식을 벗어나 그런 말놀이를 하는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론적 체계를 갖추지 않고 결론부터 간단히 말해 버리는 중국인 특유의 간명직절성 뒤에는, 수백년 동안 대승불교 철학자가 쌓아올린 그나름의 형이상학적 이론의 토대가 있다.
위에서 제시한 선문답의 무의미성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대승불교 일반의 언어 및 실재관이다. 우리는 여기서 용수(龍樹 Nagarjuna)와 세친(世親 Vasubandhu)의 난삽한 언어 이론을 체계적으로 고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용수로 대표되는 중관(中觀)불교와 세친으로 대표되는 유식(唯識)불교를 마치 모순 대립되는양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똑같이 두 대승불교 철학체계 모두 동일한 언어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두 체계는 또같이 언어가 실재를 반영 내지 지시한다는 언어 실재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것이다.
흔히 인도 철학 전통 가운데 나야 및 바이셰시카 학교로 대변되는 언어 실재론에 따르면 "소가 희다"라는 명제는 '소'라는 실재하는 실체 - 이 실체는 더 근본적인 원자로 구성되어있다는 소박 실재론을 깔고 있다-와 '희다'는 성질이 결합하여 실재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용수나 세친은 본래 실재는 무(無)나 공(空) 아니면 무한한 의식의 흐름뿐이다. 언어로 그려내기 이전의 그 '무엇'이 인간이 관행으로 쓰는 언어적 개념화에 이끌려 마치 "소가 희다"는 사실이 실재하는 양 잘못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가 희다"는 편리한 의사소통 수단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명제는 인간의 실제 생활에 유용한 만큼의 가치를 지닐 뿐 궁극적 가치는없다.
필자소개
沈在龍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대학원에서 철학 석사학위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사 기자와 미국 하와이대학 강사를 거쳐 현재 서울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선불교의 철학적 기초』(태학사),『끈기와 슬기의 사람들』(계몽사), 『한국의 전통사상』 (박영사), 『현대사회와윤리』(공저, 박영사)『현대사회와 평화』(공저, 서광사),『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공저, 집문당), 『동양의 지혜와 선』 (세계사), 『부처님이 올 수 없는 땅』 (세계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아흡 마당으로 풀어 쓴 선』 (스즈끼 지음, 현음사) 『연꽃속의 보석
이여-티베트 불교 길잡이』(베러 엮음, 불일 출판사),『있는 그대로의 자유』(앨런 왓츠 지음, 세계사) 『유배된자유 달라이 라마 자서전』 (정신세계사)등이 있다.
199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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