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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7장 3-10절 뉘우친 자의 죽음
여러분은 뉘우침과 회개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누군가에게 한 잘못 때문에 일평생 마음 아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자식을 먼저 앞서 보낸 부모님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럴 때 더 잘해줄걸, 그때 뭘 먹고 싶다고 하는데 그게 뭐라고 안사줬나 몰라‘하면서 후회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한 연예인 남자분이 연로하신 아버지가 계셨는데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냉면을 드시고 싶다고 하시는데 ”안돼요“하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로인해 그 일이 평생 마음의 한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날 밤에 돌아가실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노인인 아버지가 냉면을 드시면 소화에 지장을 줘서 안된다고 생각해서 못드시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죽기 전에 냉면을 한 번 먹고 싶어서 아들에게 말한 건데 단 번에 거절당해서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아예 그 묘지 가까운 곳에 컨테이너 하나 갔다 놓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앞일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은 그 당시에 최선이라고 하는 어떤 것 때문에 후에 그것을 뉘우치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살면서 뉘우칠만한 일들을 저지른 적은 없으십니까? “내가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라” 이것이 지나온 세월 가운데 잘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뉘우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뒤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시간은 항상 앞으로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역시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회개할 것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공감을 통해 나오는 불쌍히 여기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생각하면서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보고 나서 가지게 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용서하실 때 바로 그 마음으로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뉘우치기는 해도 회개하기는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한 행동을 자기 자신도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합니다. 성격이 완벽주의의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돈받고 팔아 먹은 후에 뉘우치는 마음은 가졌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뉘우친 이유가 이 3절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유다가 왜 뉘우쳤다고 합니까? 그의 정죄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정죄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옆에서 보니까 없는 말들을 꾸며내면서 하지 않으실 일들로 인해 정죄를 당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보면서 자신의 불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가지고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되며 그로 인해 뉘우침을 갖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뉘우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기서 끝납니다.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뉘우친다고 해서 그 죄가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바로 그 뉘우침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정죄하는 사탄의 활동은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마귀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은 해도 양심을 통해 죄가 죄된 것을 일깨우지는 않습니다. 마귀는 악한 자이기 때문에 죄인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줄 모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가 지옥으로 가는줄도 모르면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이 사람들에게 주신 양심을 통해 죄를 일깨우십니다. 그 죄를 각성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도록 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양심의 증거를 받고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지만 사람들 앞에서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것을 감추고자 합니다. 그리고 헤롯이 침례 요한의 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이 잠깐동안 찔렸던 것처럼 찔림은 받지만 다른 것에 더 집중함으로써 그 죄를 잊고자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분주한 이유중 하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세상에는 그들의 마음을 빼앗을 만한 것이 바닷물의 양만큼이나 많습니다. 세상에 널려있는 수많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세상의 것을 가지기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룟 유다처럼 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될 때가 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위해 예수님을 팔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에 대한 혐오감과 그런 세상에 예수님을 판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뉘우침은 더욱 자신을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그의 마음을 더 궁지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받은 은을 준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무심한 표정을 하면서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하고 대답했습니다. 자기들은 줄 돈을 주고 예수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미 거래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장로들을 찾아간 이 시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 부르짖음도 허공을 울리는 한순간의 의미없는 울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지는 양심의 소리에 견디다 못해 산 위 벼랑이 있는 곳으로 가서 목 매달아 죽고 맙니다. 하지만 줄이 끊어져서 땅에 추락하게 되고 배가 터져서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비참한 상태가 됩니다. 사도행전에 가면 베드로가 교회 앞에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8절입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참 인생이 허무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룟 유다를 정죄하면서도 자신 안에 또 다른 가룟 유다가 숨어 있을지에 대하여는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교회의 공금이나 회사의 공금이나 어떤 단체의 돈을 관리하면서 그 돈을 자기를 위해 조금씩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죄는 마음 속에서 점점 커져서 어느 때인가는 더 결정적인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돈받고 팔아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를 감추기 위해 또다른 무죄한 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로 인해 발생하는 의로운 의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미 올가미에 걸린 시람들이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외쳐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난 후에 끊임없이 그의 양심은 그를 향해 외칩니다. ”너는 그때 너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웠잖아!“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면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러분들은 언제나 마음에 선을 행하여 선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품고 선한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설사 살면서 실수로 죄를 범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죄를 계획하고 그것을 행하는 일은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만일 죄를 알면서도 그 죄에 빠져들어가면 그 사람은 거대한 늪에 빠지는 것과 같아서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외치지만 아무도 꺼내줄 수 없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버리고 떠나자 그 은을 거두면서 ’이것은 피값이니까 성전고에 넣어두는 것은 옮지 않아 그러니 이 돈을 어디에 써야 좋을까?‘하고 묻자 여러 의견이 나온 끝에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기로 결정하고 실행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세 가지의 상징물이 나옵니다. 첫째는 베드로를 일깨웠던 닭울음입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닭이 우는 것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항상 겸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워낙 크게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공동묘지입니다. 가룟 유다가 성전에 집어던진 그 돈으로 산 그 밭을 연고없이 죽은 나그네들을 묻는 공동묘지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피밭“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미리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9-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가룟 유다에 의해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릴 것이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완전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해 극악한 죄인들이 달려죽던 상징인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십자가 종탑이 세워집니다. 세상이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배당 건물 안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배당 밖에 세워진 십자가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하며 세상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반면에 예배당 안에 있는 십자가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한 사건 속에 이렇게 닭울음과 공동묘지와 십자가가 드러나 인류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줍니다.
여러분 죄를 뉘우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끝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조차 용서를 거부하시는 죄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16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대부분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범죄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범죄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회개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차라리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를 마귀로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가 자기 죄를 회개할 수 없는 것처럼 가룟 유다 역시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죄인들은 회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도 때때로 뉘우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자신도 역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는 그렇게 예수님을 팔았던 것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나무에 줄을 매고 목을 매달았을 때 나무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줄이 끊어졌는지는 몰라고 떨어져 배가 터지면서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하실 만한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비십시오.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십시오. 긍휼이 많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이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는 복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