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경이원지(敬而遠之)
우리가 알고 있는 고사성어중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말이 있지요.
이는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하라는 뜻이 숨어있어요.
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말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 때 일어났던
예화에서 인용된 것인데
마지막 승자가 된 월나라 왕
구천(句踐)에게는 두 명의 충직한 신하가 있었지요.
그 신하의 이름은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이었어요.
당시 월왕 구천(句踐)은 경솔하게
오나라를 침략했다가
대패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지요.
그러나 월왕 구천(句踐)은 문종과
범려라는 인재를 얻어
힘을 비축한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월나라를 구할 수 있었어요.
월왕 구천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두
신하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지혜를 모았지요.
한마디로 월나라의 왕이었지만
두 스승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어요.
왕과 신하의 위계를 떠나 파격적으로
사제지간의 도리를 다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월나라가 오나라를 이기고
강성해 졌을 때
범려는 문종(文種)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무릇 월왕 구천(句踐)이라는 사람은
목이 길고 입이 튀어 나와
매의 눈초리에 이리의 걸음을 하는
상이오,
이 같은 상을 한 사람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
즉 어려움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만일 그대가 그를 떠나지 않으면 그는
장차 그대를 죽이고 말 것이오.
그러니 어서 이 왕궁을 떠나 그대의
살길을 도모 하시오"
그러나 문종은 범려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범려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문종(文種)을 버려두고 혼자서만 월왕을 떠났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범려가 예언하듯
월왕 구천(句踐)은 문종(文種)에게
"그대가 내놓은 비밀스런 계책으로
오나라를 전복하고 전국을 취할 수 있었소.
그대가 말한 9가지의 계책 중
지금까지 겨우 3가지만을 사용하였는데도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소.
나머지 6가지는 아직 그대가
구사하지도 않고 있소.
남은 여섯 가지 계책 중에는 나를
토살하여 왕위를 찬탈하는 계책도 있을 수 있으니
바라건대 나머지 계책은 나를 위해
죽어
지하에서 오나라를 도모하는데 써주기
바라오."
하면서 월왕 구천은 문종(文種)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지요.
한마디로 문종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이지요.
그때서야 범려의 말을 듣지 않은
문종(文種)은
때늦은 후회를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지요.
그는 죽으며 이런 말을
남겼어요.
"남영 출신 재상이 오히려 월왕의
포로가 되었구나.
이후 멸망하는 나라의 충신들은 반드시
나를 들먹일 것이다."
범려(范蠡)가 살아남은 것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지요.
월왕이 어려울 때는
불가근(不可近)하고,
월왕이 뜻을 이루고 나서는
불가원(不可遠)한 것이지요.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는 말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
가운데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
Dilemma)라는 것이 있어요.
고슴도치들은 날이 추워지면 추위를
막기 위해
서로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요.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려
화들짝 놀래며 서로 멀리 떨어지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곧 추위를 느끼고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만
이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금 떨어지고 말아요.
그들은 추위와 아픔 사이를 왕복하다가
마침내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지요.
결국 두 마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찾아내
가장 평안하면서도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에서는 고슴도치들은 결국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서로간의 ‘적절한 거리’를 찾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내용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고 있어요.
유대계 종교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인간의 본질은
‘나와 너’의 만남 속의 ‘사이의
존재’라고 했어요.
개인주의적 인간학에 대항하는 부버는
‘참된 인간은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서로를 동등한 대화의 주체로 바라보는
사람’임을 강조한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사이가
좋다’는 말이 있어요.
인간관계 일반에서 ‘관계가 좋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 ‘사이가 좋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이’라는 것을 한자어로 말하면
"사이 간(間)"을 이름이지요.
그러니까 ‘사이가 좋다’는 것은
서로가 빈틈없이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적절한 거리
즉 간(間)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우리의 통상적 개념으로는
‘찰떡궁합’과 같은 것을
이상적인 관계로 생각하고 있는데
추호의 빈틈이나 거리가 없이 딱 붙어
다니는 것을
‘사이가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사이가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치밀한 물질의 분자구조라
하더라도 반드시 틈새는
있어요.
이 세상에 딱 붙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우주의 별들도 그렇지요. 붙어 있는
별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요.
태양계의 경우 태양과 달과 지구가
각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태양계가 성립되는 것이지요.
만약 서로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지구와 달은 태양에 잡아먹히거나
아니면 우주 허공으로 각기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우주만물이 그럴진대 하물며 인간사는
어떠할까요?
사랑도 마찬가지 이지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적당한 인격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함께 어울리다 보면 친밀한 것 같은데
결국은 상처를 주고받게 되지요.
그러므로 인간(人間)과도,
자연(自然)과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
불행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행복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관계란 멀리 하면 서운한
감정을 가진 채 소원해지고
너무 가까이 하다 보면 하루아침에
실망하여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게 오해든, 배신이든,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실망은 더 큰
법이지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의
이치도
흔히 하는 말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알맞은 상태가 바로
"적당함"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옛 선인들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즉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 역시 적당함의 덕목과 상통하는
말이 아닐 수 없어요.
아름다운 관계의 비결은 바로
‘사이’에 있어요.
이 점을 우리가 거듭 음미해야
하지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간에
적절한 거리를 항상 유지해야
하지요.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적당한 것이 가장 현명(賢明)한 것으로 보았지요.
그래서 용기(勇氣)란 무모하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는 상태라 했고
절제(節制)란 방종도 아니요
무감각하지도 않은 상태라 했어요.
그리고 관대(寬大)함이란 낭비도
인색도 아닌 상태이며
긍지(矜指)란 오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했지요.
또 티베트의 존경 받는
수도승(修道僧) ‘아나가리카 고빈다’ 는
"산(山)의 위대함은 거리를 두어야
보인다.
산(山)의 모습은 직접 돌아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하였지요.
이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서 직접 보면
실망을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풍경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 감동의 마음을 품었던 일 또한
가까이 가서 두루 헤아려 보면 멀리서
볼 때와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사회학자 "에드워드 홀"은 사람과
사람간의 거리를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했어요.
첫 번 째는 45㎝ 이내의 아주
가까운 ‘밀접 거리' 이지요.
부모와 자식 간이나 연인사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밀착된 그런 마음의 거리를 말하고
있어요.
두 번째는 ‘개인 거리'이지요.
45㎝-120㎝ 정도의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이지요.
소위 말하는 ‘사적인 공간’의
범주이지요.
이는 친구나 가깝게 아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유지하는 거리라 하네요.
세번째는 120-360㎝ 정도의
‘사교 거리'이지요.
이는 사회적인 영역이지요.
인터뷰 등 공식적인 상호작용을 할 때
필요한 간격이라 하네요.
네 번째는 360㎝를 넘어서는
‘공중(公衆)의 거리'이지요.
무대 위의 공연자와 관객처럼 떨어져
앉아 있는,
그래서 서로 알지 못하는
거리이지요.
그래서 ‘사이(거리)’는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사이’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살고 있지요.
적절한 ‘사이’를 유지한다는 것을
보고
두 사람 사이에 묶여 있는 고무줄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두 사람 사이의 고무줄은 어느 정도
팽팽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최적의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만약 어느 한 쪽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고무줄은 느슨해지고
관계에 빨간불이
켜지지요.
그때는 다른 쪽이 약간 더 멀어지면서
팽팽함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하지요.
반대로 한 쪽이 너무 멀리 간다면
고무줄은 끊어질 정도로 팽팽해지지요.
이 또한 관계의 적신호가 들어오게
되고
다른 쪽은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관계를 정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좋은 인간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즉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원칙을 행할 때 비로소 좋은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산(山)의 위대함은 거리를 두고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또 경이원지(敬而遠之)란 말도
있어요.
이는 상대방을 공경하되 일정한 거리를
두라는 의미이지요.
<논어>에서 이르기를
공자의 수레를 모는 마부이자 제자였던
번지(樊遲)라는 사람이 어느 날
공자에게 물었어요.
"지혜로운 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요?"
그러자 공자는
말하기를
"경이원지(敬而遠之) 즉 백성들이
원하는 정치를 하고,
백성들이 믿는 귀신을 공경하되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운 지도자의 모습이다"
라고 대답했지요.
그래서 경이원지(敬而遠之)는 지혜로운
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어요.
그래요, 가까우면서도 먼 사람,
멀면서도 가까운 사람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며
경이원지(敬而遠之)가
아닐런지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대하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거사:조동렬(일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