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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십이 지파 이야기 (2)
창세기 30: 1~8
○ 빌하를 첩으로 준 라헬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삼상1:5
3.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창50:23
4.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 야곱의 자식들
5.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창49:16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마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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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고, 열두 지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요한계시록의 이십사 장로와 연결이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어떻게 열두 아들을 축복과 약속의 열두 지파로 만드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대신 하여 피를 들고 지성소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제사장의 두 어깨와 가슴 한복판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보석이 있었습니다.
열 두개의 보석은 이름도 가치도 달랐습니다. 가슴에 있는 열두 개의 보석은 네 줄로 질서정연하게 박혀서 이스라엘 지파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두 어깨와 가슴에 여러분과 저의 이름이 새겨져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석처럼 생각하셔서 가슴에 안고 다니십니다. ‘너는 보석보다 더 귀한 존재이다.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내 가슴에 안고 다닌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사랑
그러나 대제사장이 가슴에 열두 보석으로 박고 다닐만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허물많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열두 지파의 시조인 야곱의 열두 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과거와 허물을 보지 않고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겨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과거를 돌이켜보면 사랑받을만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태초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여겨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 째로 야곱의 열두 자녀를 낳은 그 어머니들이 별로 적절하지 못한 신분을 가진 여자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첫째 부인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둘째 부인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임신하지 못했고,
☛셋째 부인 실바는 레아의 몸종이고,
☛넷째 부인 빌하는 라헬의 몸종입니다.
네 사람 모두가 적절하지 못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축복의 조상’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깨닫게 되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조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학벌, 가문 자랑은 인간의 추악한 죄악을 덮는 위선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으로 계보에 오른 다섯명의 여자 중 네명은 기생이거나, 이방인, 또는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진 여자였거나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환경이나 불행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해서 모든 것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불행한 가정에서의 출생이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고 복을 가로막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약속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강간 당한 여자에게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어난 사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눈동자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야곱의 열두 아들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발견합니다.
다음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하여 배우는 사실은 열두 아들이 모두가 똑똑하고 훌륭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 르우벤이라는 첫째 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첫째 아들이였지만 서모인 빌하와 간통을 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비록 장자권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 지파의 이름은 대제사장의 가슴에 하나의 보석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실수가 곧 실패는 아닙니다. 비록 과거에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제사장의 가슴에 박힌 보석으로 귀하게 여겨주셔서 축복의 조상의 지류를 만드셨습니다.
다른 아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의 둘째아들은 시므온, 셋째는 레위입니다. 이들의 이름에는 한이 서려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가 기도하여 하나님께 얻은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하는데 이 예언은 그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5∼7절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를 함께 묶어서 말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시므온과 레위를 향한 이 예언은 심상치가 않고 살벌한 느낌을 줍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잔해하는 기계’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어렵고 고통스러운 예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예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창세기 34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고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딸 디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어느날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하몰이라는 이방인 남자한테 강간을 당하는 수치를 겪습니다. 그리고 하몰은 디나를 자기한테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이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합니다.
이때 디나의 두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기 누이한테 수치를 주었던 하몰을 향한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하몰에게 결혼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신 할례를 받으라는 조건을 내겁니다. 하몰은 디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부족원들 모두 할례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할례받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시므온과 레위는 하몰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부족을 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잔인했던 시므온과 레위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잔해하는 기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과거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가슴에 품은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시므온은 열두 지파에 들어갔고 레위는 열두 지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레위를 버린 것이 아니라 레위 지파에게는 더 놀라운 직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특별한 직무를 갖는 지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라헬
이제 네 번 째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유다입니다.
창세기 49장 8∼12절을 보십시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예언입니다. 유다는 형제의 찬송이 되고, 그에게 모든 사람들이 순종하게 되고, 강하게 될 것이며 통치자가 되며 포도주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지고, 이는 우유로 희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는 어디다 내놓기에 부끄러운 아들들이었지만 이 네째 아들은 귀한 아들입니다. 유다지파가 귀한 이유는 먼 훗날 메시아가 유다지파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이 박힐 자리에 유다지파가 대신 자리하게 됩니다. 이제 다른 두 아들이 더 태어납니다.
30장 1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이제 레아는 단산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아들을 야곱에게 또 주시는데 이들은 라헬의 몸종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라헬의 몸종에게서 두 지파가 태어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아가 아들을 계속해서 4명씩이나 낳으니까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임신을 하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니 레아를 질투합니다. 그녀는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야곱에게 자기로 아이를 낳게 하지 못하면 죽겠다고 말합니다. 난감해질 대로 난감해진 사람은 야곱입니다. 그는 라헬의 요구가 자기 능력밖의 일이었기에 얼쩔줄을 몰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라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화를 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여러분, 부인에게 화내지 마십시오.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됩니다. 라헬은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불신앙과 인간적 생각의 비극
라헬은 남편에게 혼이나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려야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루어지는데 라헬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내 몸종을 통해서라도 아이를 낳자’라고 결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오기와 자존심으로 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헬은 자기의 몸종 빌하를 남편한테 첩으로 주어서라도 레아를 이기고 싶었습니다. 라헬은 몸종을 통하여 아기를 낳으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투심 때문에,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한 여자를 씨받이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 일을 라헬은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하지만 더 나쁜 사람은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잘못된 제안에 대해서 아무런 갈등없이 비판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야곱은 화를 내고 강샘하는 부인을 이해하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하나님이 아이를 주지 않으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다려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야곱은 라헬의 생각을 덜컥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지만 결과는 비참합니다. 그 결과로 우리들의 가정이 복잡해지고 갈등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신앙과 인간적인 생각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야곱은 라헬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고 라헬은 아무리 속상해도 인간적인 혈기로 그런 제안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또 다른 두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단이라는 아이가 태어난 동기는 질투입니다. 부모의 축복 속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넷씩이나 낳은 언니에 대한 질투와 억울함을 참지 못해서 태어나게 된 아이가 단이었습니다.
창세기 49장 16∼18절을 보십시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 단은 독사와 뱀같아서 다른 지파를 공격하는 싸움꾼 같은 지파로 변합니다. 싸움꾼은 편한 날이 없습니다. 단지파에서 태어난 유명한 사람이 삼손입니다. 그리고 단지파는 훗날 우상숭배를 합니다.
또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명 중 단지파가 빠져있습니다.
단 지파는 이런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런 단지파도 제사장의 가슴에 보석 중에 하나로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위나 지나온 과거로 보면 축복받을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보석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단이 태어났지만 라헬의 분노와 질투심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라헬은 또 아이를 낳도록 몸종과 야곱을 부추깁니다.
7, 8절을 보십시오.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라헬이 여전히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몸종이 낳은 아이가 납달리입니다.
라헬은 ‘아이가 태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형을 이겼다’라고 합니다. 라헬은 한이 맺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납달리였지만 단과 달리 복을 받습니다.
감싸주시는 예수님
저는 하나님의 복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21절에 납달리를 위한 축복의 표현이 나타납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매우 시적인 표현입니다. 납달리는 암사슴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에 갇힌 암사슴은 슬픈 짐승이지만 우리에서 풀린 암사슴은 산을 뛰어노는 자유로운 짐승입니다. 납달리는 들에서 뛰노는 자유로운 암 사슴같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33장 23절에서 납달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예언을 합니다.
“납달리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방과 남방을 얻을찌로다”
납달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지파입니다. 축복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납달리가 거하던 땅이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이었습니다. 나사렛 서편에는 지중해가 있고 남쪽에는 갈릴리 바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푸셨던 수많은 기적과 설교가 바로 암사슴이 뛰어노는 것같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것같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였고 여호와의 복이 쏟아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이라는 개념에 혼동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권선징악입니다. 착한 사람은 상받고 나쁜 사람은 벌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은 행한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념은 다릅니다. 우리가 행한대로 하나님이 갚으시면 우리는 모두 죽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자격이 있어서 주는 은혜가 아니며, 우리가 복받을만한 행동을 해서 받는 복도 아닙니다. 물론 복받을만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잘 봐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나쁜 짓하고 망나니 짓하는 것이 싫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는 자식을 좋게 생각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려서는 이렇지 않았다’라든가 ‘원래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자꾸 좋게 생각하려고 하고, 잘못을 감춰주려고 하고, 나쁜 동기로 행동했어도 좋은 동기로 생각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맞아 싸다’라고 생각 합니다. ‘저들이 나쁜 짓한 것은 매맞아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버려 둡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잘못 했을 때는 누군가 용서해주고 감춰줘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을 저지른 이가 살아납니다. ‘너는 행한대로 다 받아라’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누구든지 다 죽습니다. 지상에는 떳떳한 인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보호해주고 변명해 주고 감싸주지 않으면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 앞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성이나 학벌, 가문 같은 것으로 자기를 감싸고 있지만 우리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숨겨주시고, 우리 죄를 눈과 같이 씻겨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못본척 하셔서 희망을 주시고 축복의 자녀로 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심장의 한 복판에는 여러분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다시 용기를 가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저자| 하용조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