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손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그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켜켜이 쌓인 시간과 조우하며 매번 새로운 위로와 질문을 건넨다는 사실이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대지를 감싸던 날, 언제나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며 세상을 아름답게 조형해 주는 오랜 벗, 카메라를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마음의 결이 통하는 사총사 벗들과 함께 오르는 여정은 언제나 그렇듯 발걸음마다 설렘이 묻어난다. 이번에 우리의 시선이 머문 곳은 한반도의 가장 동쪽 끝, 붉은 해가 가장 먼저 솟아오른다는 포항 호미곶이다.
푸른 바다의 비릿한 내음을 채 맡기도 전, 우리를 먼저 반긴 것은 대지를 융단처럼 덮어버린 샛노란 유채꽃과 곁을 지키는 보랏빛 들꽃들의 찬란한 향연이었다. 일렁이는 꽃의 바다는 퍽이나 눈부셨고, 그 맹렬한 생명력 앞에 서니 세월의 무게마저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하얀 셔츠 위에 데님 조끼를 걸치고,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꽃밭 한가운데 섰다. 카메라 렌즈를 향해 망설임 없이 브이(V) 자를 그려보는 마음은 이토록 화사한 봄날의 들꽃을 닮아 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의 깊이만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깊어졌으나,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고 환하게 미소 짓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이십 대의 청춘이다. 자연이 값없이 내어주는 그 생기로운 위로에 흠뻑 젖어 든 시간이었다.
꽃무더기를 뒤로하고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들어서니,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거대한 청동 조형물이 시선을 압도한다. 바로 육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상생의 손’ 왼손이다. 하늘을 향해 다부지게 펼쳐진 거대한 손바닥과 굵은 주름이 새겨진 손가락을 마주하고 섰다. 그 거대한 존재감 앞에 서면 인간이란 존재가, 그리고 우리가 아등바등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작고 유한한 것인지 새삼 반추하게 된다.
광장 한편, 푸른 바다를 닮은 익살스러운 파란 문어 조각상에 기대앉아 잠시 다리 품을 쉬어갔다. 구불구불한 문어 다리 위에 걸터앉아 있노라니, 마치 동화 속 바다 왕국에 온 듯한 유쾌함에 절로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장 산책을 이어가다 고개를 돌리면,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단정하게 우뚝 솟은 호미곶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 벽돌과 하얀 칠이 어우러진 팔각형의 그 숭고한 자태는 백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말없이 거친 바다의 뱃길을 밝혀왔다. 비바람과 태풍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빛을 뿜어냈을 그 묵묵함은, 인생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내면서도 결국 의연함을 잃지 않은 우리네 노년의 삶과 무척이나 닮아 있어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등대의 정적인 고요함과는 대조적으로, 광장 끝에서 마주한 동해의 푸른 물결은 몹시도 역동적이었다. 일렁이는 짙은 푸른빛의 바다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가르며 거침없이 질주하는 제트스키 한 대가 시원한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춤추듯 바다 위를 비상하는 저 젊고 거침없는 에너지를 카메라 렌즈 너머로 응시한다.
그 찰나의 역동성을 포착하는 순간, 내 안에 아직 식지 않고 끓어오르는 창작의 열정을 마주한다. 세상의 경이로움을 렌즈에 담아 한 편의 글로 엮어내는 일, 그것은 내가 세상과 호흡하는 나만의 방식이자, 나이 듦을 또 다른 축복으로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일이다.
이윽고 걸음을 바다 쪽으로 바짝 붙여, 호미곶의 진정한 백미인 바다 한가운데 솟아오른 ‘상생의 손’ 오른손을 마주한다. 육지의 왼손과 먼발치서 마주 보며 서 있는 그 거대한 손등 위로 짭조름한 파도가 쉼 없이 부딪히고 산산이 부서진다. 수많은 인파가 갯바위에 서서 저마다의 시선으로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지의 손과 바다의 손, 두 손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나 분명 하나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다와 대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너와 나.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지기 쉬운 세상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자는 ‘상생(相生)’의 강렬한 메시지가 파도 소리를 타고 가슴 깊은 곳까지 훅 밀려 들어온다.
상생, 함께 기대어 살아간다는 것. 팔십 년 가까운 세월의 강을 건너오며 수많은 인연을 맺고 또 떠나보냈지만, 결국 흔들리는 삶을 굳건히 지탱해 준 힘은 서로가 서로에게 묵묵히 내밀어 준 따뜻한 손길들에 있었다.
육지의 손과 바다의 손이 천년의 세월을 향해 손을 맞잡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듯, 곁에서 늘 웃음과 위로가 되어주는 사총사 친구들, 그리고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이 조그만 카메라가 바로 내 삶을 하는 상생의 증거다. 바다 위에 홀로 서서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견뎌내는 굳건한 오른손을 바라보며 나직이 소망해 본다. 앞으로 내게 허락된 남은 생의 시간 동안, 나 역시 누군가에게 기꺼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넉넉하고 푸른 바다 같은 사람이고 싶다고.
호미곶의 눈부신 봄 햇살과 생동하는 바다, 조화로운 상생의 메시지, 그리고 이 길을 함께 걸어준 아름다운 동행의 순간들을 나의 렌즈와 가슴 속에 빈틈없이 채워 넣는다. 한결 가벼워지고 동시에 충만해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대지와 바다가 건넨 이 찬란한 풍경이 있는 한, 나의 발걸음과 펜 끝은 내일도 쉬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