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지(理智)와 양심 사이에 구별을 두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현인들은 착한 행위는 강한 사색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이 결합한 뗄 수 없는 힘을 떼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그런 생각으로 해서 우리는 스스로 천성을 상처 입게 한다. 도덕에서 사상을 제거해 보라. 무엇이 남는가? 생각하는 힘이 없이는 우리의 양심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환상이나 과장, 허위나 위선의 잉여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짓은 언제나 양심이란 이름 밑에서 행해져 왔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름도 찬란한 ‘양심의 명령’이라든가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로 편을 가르고 서로 미워하며 정치를 판다.
그 양심의 모양새는 어떠한가? 법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 들고 있는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와 법은 공정하지 못하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약속한다.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매표하기 위해 정의를 말한다. 실제 정치인들은 선거 공약을 내세울 때마다 약속을 들먹인다. ‘우리 모두를 위해 평등과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날이 바뀌고, 정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정의의 부재는 계속된다. 간혹 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도 있는 듯하다. 법 제도 역시 ‘국민은 정의 구현을 요구한다’라면서 정의를 약속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실체는 안 보인다. 불공평 역시 변하지 않는다. 인정하든 않든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들은 대개 태산명동 서일필이었다. 여전히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감옥과 친하지 않다. 그들은 명백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도 사면되거나 깃털같이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법이 어떤 숫자에 반응했기 때문일까? 우리 사회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들, 그 크기에 비해 가벼운 벌만 받는다. 이유야 어쨌든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OO의 절규가 여전히 인구에 회자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가당치도 않은 일부 지도자의 도덕과 양심, 정치인의 정의, 법률가들의 공정이라는 이기심에 가득 찬 위선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법률이라고 불리는 습관 때문에 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특정인, 특정 계층만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최고를 스스로 자임하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적자생존의 정글 법칙에서 적용되고 있는 동물적인 논리로 세상을 재단한다. 그곳에는 대개 권력과 재물이 있다. 이기심과 위선의 전형이다. 법이 숫자에 반응하면 형평성은 무너진다. 제너럴일렉트릭 잭 웰치 회장은 “누구도 가치를 수치화시킬 수는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과 숫자를 어떤 가치로 내세운다. 여전히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를,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배운 자는 못 배운 자를, 자본가는 노동자를 누른다. 그래서 서민들은 먹고살기에 부대끼면 잠복해 있던 이런저런 사회의 불공정 부재와 불만들을, 선거를 통해 한꺼번에 폭발시키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만약 지금 내 생활이 이성이 지시하는 참다운 길에서 멀리 있다고 해도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 것. 타인에 대한 자기의 정의, 우월, 특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유죄 함을 인정할 것”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선한 감정이다.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은 한층 더 아름답고 용기 있는 감정이다. 남이 갖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가진 것만큼 그 사람의 도덕적 완성의 단계를 확실하게 나타내는 것은 없다. 여러 갈래에서 여러 꼴들이 너무 어지럽다. 원칙이 통하지 않은 사회,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이 무능한 정치에 있다면 이 땅은 아직도 많은 숙제를 안고 되어가고 있는 나라지, 된 나라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글 / 사진 : 오을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