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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
영화 <바운틴호의 반란>은 18세기 후반, 남태평양을 항해하던 바운티 호에서 실제 벌어진 반란 사건을 그리고 있다. 오랜 항해와 가혹한 선상 생활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에 찌들은 선원들이 선장의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행위를 참지 못하고 일으키는 반란과 이후 벌어지는 사건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원들의 질서를 책임지는 선장의 권위와 선원들의 인간적인 존엄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던 영화이다.
주인공 역을 맡은 말론 브랜도, 조연을 맡은 선장 역의 트레버 하워드, 선장에게 체벌을 당하는 선원 역에는 젊은 날의 리챠드 해리스 등 쟁쟁한 명우들이 열연을 펼치고 있다. 애초에 선장인 블라이 역에는 잭 호킨스가 물망에 올랐었고 선원인 밀스 역에는 피터 오툴을 점찍었는데 당시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출연 중이라 성사되지 못했다.
감독은 중간에 두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제3의 사나이>를 만든 명장 캐롤 리드 감독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대본에 불만을 느껴 중간에 그만 두었다. 이어서 대타로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만든 루이스 마일스톤이 투입됐는데 그 역시 대본에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나머지 추가 촬영을 거부했다. 최종적으로 <34번가의 기적>의 조지 시튼이 마무리를 지었다.
사진, 주인공 크리스천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주도하는 크리스천 역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젊은 날의 말론 브랜도와 맛이 간 블라이 선장역의 트레버 하워드, 선장에 반항하는 밀스 역에 리차드 해리스의 열연이 볼만하다. 크리스천은 처음엔 선원들과 거리를 두면서 다소 능글맞게 처신하지만 정작 반란의 주모자가 된 후에는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진, 항해중인 바운티호
그는 비록 선장을 쫓아냈지만 이미 정통성을 상실하여 군사재판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는 딱한 입장에 놓인 것이다.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돌아야하는 자신의 기막힌 신세를 비관하며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선원들이 몰래 배를 불살라버리자 배를 구해보려고 동분서주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처절하다.
사진, 선원에게 물을 주는 크리스천을 발로
걷어차는 블라이 선장
<바운티호의 반란>은 여러 번 영화화되었는데, 오리지널은 1935년 프랭크 로이드 연출로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이 주연을 맡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그 다음이 1962년도에 만들어진 이 영화였다. 이후 1984년에 멜 깁슨,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나왔는데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새롭게 조명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진, 보트로 쫓겨난 블라이 선장 일행
영화에서 선장 블라이는 걸핏하면 선원들을 채찍질로 다스리는 난폭한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블라이는 당시의 체벌수준으로는 과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사관들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선원들이 보는 앞에서 밑의 사관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채찍질까지 하는 등 포악함을 드러내곤 했다. 결국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당하던 사관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데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바운티 호 상세한 선상반란 이야기는 당시 승선하고 있던 식물학자 데이비드 넬슨의 기록에 의해 후에 밝혀진 것이다. 그는 귀국하는 항해도중에 사망했다.
II. 할리우드의 원조 반항아, 말론 브랜도
말론 브랜도는 많은 영화인들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20세기 최고의 배우' 중의 한 사람으로 흔히 꼽히는 인물이다. 평생 동안 수많은 명품 연기를 쏟아내며 영화 연기론의 정전(正典)을 다시 쓰게 하고도 남을 대배우였다. 그런 만큼 그가 영화사에 남긴 배우로서의 족적은 뛰어난 것이었다.
브랜도는 1924년 미국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정은 그리 단란치 못했다. 바람기 많은 사업가인 아버지와 여배우이자 극장 관리자인 어머니는 주벽이 심했다. 서로가 원만하지 못했던 부모와 특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차서 보낸 어린 시절이 후일 기성체제에 반항적이 되어버린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가 되자 이전에 아버지가 다녔던 미네소타에 있는 섀턱 사관학교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연극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상관에게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이후 집에서 빈둥거리는 그를 보고 아버지가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보라는 충고를 하게 된다. 이것이 브랜도가 연기에 입문하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 당시 뉴욕에서 그의 누이 둘이 연극과 예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배우 양성가로 유명한 스텔라 애들러의 지도를 받게 된다. 처음부터 브랜도의 재능을 간파한 스텔라는 “브랜도는 따로 뭘 배울 필요도 없는 천부적인 배우”라며 “그가 연기하지 못할 인물은 없다.”고 극찬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46년 비평가들도 "앞으로 이 젊은이 브랜도를 주목하라."라고 앞 다투어 얘기를 했다. 그동안 조용히 브랜도를 지켜본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엘리아 카잔 감독에게 브랜도를 추천했다. 이를 계기로 브랜도는 1947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면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때 자신의 대타 배우였던 잭 팰런스와 복싱을 하다가 코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매부리코가 되는 사고를 당했다. 연기력이 소문난 그를 할리우드가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그가 주역을 맡고 있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안소니 퀸이 브랜도 대신 그의 역을 맡았다.
사진, 영화 <대부>에서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50년대에 들어오면서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혁명아 자파타>·<줄리어스 시저>·<위험한 질주> 등에 출연하면서 그의 진가를 알리기 시작했다. 엘리아 카잔의 52년 작인 멕시코 혁명을 다룬 <혁명가 자파타>를 통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54년에는 <워터 프론트>에서 주인공 테리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특히 이 영화는 흔히 브랜도의 *메소드 연기의 서막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아가씨와 건달들>·<젊은 사자들>·<애꾸눈 잭>·<바운티호의 반란> 등에 출연했다.
* 메소드 연기
그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극사실주의의 연기 방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배역이 간호사라고 한다면 실제로 간호사의 발걸음부터 말투 억양까지 최대한 모방, 거의 간호사가 되다시피 하면서 사실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후 브랜도는 세월이 흘러 70년대에 들어와 활동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의 중년 시절은 운둔으로 일관했다. 연기 스타일도 많이 달라졌다. 젊은 시절 넘치는 에너지를 오토바이·술·여자로 해소하던 모습과는 달리 조용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과 닮은 점이라면 여전히 남의 간섭을 싫어하는 독불장군 같은 모습이었다.
사진, 영화 <워터 프론트>에서
드디어 1972년에 영화사에 길이 남을 브랜도 최고의 작품 <대부>가 탄생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걸작 <대부>에서 대부 콜리오네를 연기한 브랜도의 연기는 영화 백년사를 통틀어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당시 영화를 제작한 파라마운트 제작자 로버트 에반스는 브랜도를 캐스팅할 경우 코폴라 감독까지도 해고할 것이라며 강경하게 그의 캐스팅을 반대했다. 할리우드의 반항아로 이름난 말썽쟁이 브랜도를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었던 것이다.
그러자 코폴라 감독은 브랜도의 머리에 구두약을 칠하고 휴지를 말아서 브랜도의 양쪽 볼에 넣어 볼록하게 만든 후 테스트 촬영을 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테스트 필름을 본 에반스는 “이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야.”를 외쳤다. 그제서야 코폴라는 그 배우가 바로 브랜도였다고 실토했다. 결국 브랜도는 돈 콜리오네 역으로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소 우물거리며 어눌한 말투로 연기를 해야 했던 그는 촬영 내내 마우스피스를 끼고 있어야 했다.
<대부>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 확정되자 그는 미국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차별을 이유로, 대신 인디언출신 여배우 새친 리틀페더를 보내 인디언권익에 대한 연설을 하게 해 수상식장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꾸준히 미국 내에서 차별받는 아메리칸 인디언을 지원해온 그가 할리우드 영화계에 보내는 반항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역시 브랜도다운 돌출 행동이었다고 수군거렸다.
사진, 영화 <애꾸눈 잭>에서
그 해에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마리아 슈나이더와 노골적인 정사씬을 연기하면서 또 한 번 화제를 불러왔다. 이후 죽을 때까지 <슈퍼맨>·<지옥의 묵시록>·<포뮬러> 등 약간은 이상한 영화들에 출연했지만 광기에 휩쓸린 군인 등 배역들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하고 다채로웠다.
브랜도의 여성편력은 다양하기로 소문났었다. 세 번 결혼한 브랜도의 상대는 영화 <산>에 출연한 바 있는 첫 번째 인도계 부인 앤나 캐쉬피, <애꾸눈 잭>에서 공연했던 두 번째 부인인 멕시코 출신 모비타 카스테나다, 세 번째 부인으로는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에서 상대역으로 나온 타히티 원주민 출신 타리타 테리피아였다. 살아생전 “백인, 혼혈인,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 등 여러 인종의 여성을 두루 경험했다.”고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사진, 영화 <젊은 사자들>에서
첫 부인인 웨일즈 출신 여배우 앤나 캐쉬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크리스천은 1990년 배다른 여동생 치옌의 남자친구를 권총으로 쏘아죽인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치옌은 1995년 25살의 나이로 자살하는 등 브랜도 말년의 가족사는 불행으로 점철되었다. 비록 운둔자의 모습을 지속했지만 여전한 악명, 순탄치 않은 가정사, 비만 등 그의 말년도 여전히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2004년에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브랜도는 할리우드 영화의 남자주인공 이미지를 바꾼 인물이다. 매부리코를 한 그는 권투선수 같은 인상에다가 매섭게 쏘아보는 눈빛은 한 마디로 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를 재패한 미국을 상징하는 아메리칸 마초를 상징했다. 브랜도가 연기한 것은 바로 미국의 얼굴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브랜도, 거칠고 섹시한 반항아, 무뚝뚝하고 한없이 건방진 그의 태도는 60년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예술 형식인 로큰롤을 예고했다.”
III. 바운티 호 선상 반란 이야기
사진, 대항해 시대 당시의 범선
바운티 호는 애초엔 군함이 아니었다. 1784년 건조돼 민간 상선으로 쓰이던 선박을 영국 해군이 1787년 매입해서 뜯어고쳤다. 개조의 초점은 화물칸의 확대였다. 선장실조차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온실로 바꿨다. 직사광선이 앞으로 실을 화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유리도 불투명한 간유리로 바꿔 끼웠다. 화물칸의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원시적 장치까지 해 넣었다. 도대체 당국에서는 무엇을 적재하려고 배를 뜯어 고쳤을까.답은 빵나무였다. 항해의 목적은 남태평양 특산물인 ‘빵나무(breadfruit)’ 묘목의 운송에 있었다.
조리하면 빵과 비슷한 맛을 내는 열매를 맺는 빵나무였다. 묘목의 행선지는 서인도제도였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 비싼 곡물 대신 빵나무를 먹여 수익을 늘리겠다는 속셈이었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으로부터 식량 공급이 어려워진 것이다. 사탕수수 재배를 하는 플란테이션 주인들과 무역업자들이 짝짜쿵이 되서 해군 수뇌부를 움직였다. ‘베시아’라는 상선을 사들여 묘목운반선으로 개조키로 한 것이다.
영국 해군은 개조된 상선의 이름을 바운티 호로 바꾸고 선장에 윌리엄 블라이를 앉혔다. 블라이는 누가 보더라도 적임자로 보였다. *제임스 쿡 선장 밑에서 세계를 일주한 경험이 있었다. 블라이도 얼씨구나 하고 반겼다. 블라이는 미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단행된 군비축소의 일환으로 신분이 예비역으로 바뀌어 급여가 절반 이상 깎인 뒤 무역선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현역 복귀는 물론 특별 상여금까지 약속받았다.
* 제임스 쿡
영국의 탐험가이며 대항해가이다. 캡틴 쿡(Captain Cook)으로도 불린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탐험에 이어 북태평양 탐험을 떠나 베링 해협을 지나 북빙양에도 도달했다. 그의 탐험으로 태평양의 많은 섬들이 알려졌고 이름도 정해졌다. 그에 의해 현재와 거의 유사한 태평양지도가 만들어졌다. 1779년 2월 14일 하와이 섬에서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 향년 50세였다.
그러나 선원들에게 바운티 호의 근무 환경은 열악했다. 이런저런 기구를 많이 싣는 통에 선원들의 주거 공간이 좁아지고 장기간의 항해로 스트레스가 점차 쌓여갔다. 더욱이 민간인 생물학자 2명을 포함해 모두 46명인 선원 중에는 질서를 담당하는 해병이 한 명도 없었다. 당시 해병은 선상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경찰 노릇을 했다.
사진, 빵나무 열매
함선의 단독 지휘는 생전 처음이었던 블라이는 경험 많은 항해사가 필요했는데 일등 항해사 프라이어를 못 미더워했다. 그래서 자신과 두 번 항해를 같이 하기도 한 크리스천을 부항해사로 임명하여 태웠다. 크리스천은 보수도 받지 않고 기꺼이 승선할 정도로 두 사람은 무척 친밀한 사이였다.영국에서 타히티로 가는 항로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 동쪽으로 가는 길이 조금 멀지만 안정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채택되는 항로였다. 하지만 블라이는 세계일주를 해보겠다는 개인적인 야심 때문에 거칠기로 유명한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으로 가는 항로를 선택했다.
두 항해사와 선원들이 반대했지만 블라이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악천후 속에 결국에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한 달이라는 시간만 허비하고 남아프리카 항로로 선박을 되돌린다. 이 때 프라이어가 남아메리카 항로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기도 해서 그를 해임하고 대신에 크리스천을 일등 항해사로 임명했다.
선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가득했다. 블라이는 성격이 위압적이고 난폭해서 선원들을 가혹하게 취급했다. 툭하면 채찍으로 때리기가 일수였다. 그동안 선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크리스천도 블라이의 가혹한 선원들 통솔방법에 점차 반감을 갖게 되면서 사사건건 그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타히티 섬은 선원들에게 비할 데 없는 천국이었다. 대대로 서구인들에게 친절히 대해온 섬 주민들은 블라이 일행도 변함없이 열렬히 환영하며 거의 매일 축제를 열어주었다. 요구하는 빵나무 묘목도 주었다. 날씨는 온화했고 짙푸른 해변과 야자열매 등 먹을 것은 넘쳐나는 데다가 원주민 여자들도 친절했다.
사진, 붉은선은 애초 바운티호의 항로 노란선은 나중 바운티호의 항로
초록색선은 블라이 선장 일행의 항로
반 년 가까이 머물면서 원주민 여자들과 가까워진 선원들이 딴 마음을 먹는 것은 당연했다. 여자들과 연애를 하는 선원들이 늘어났다. 특히 크리스천이 원주민 추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 해롱거리자 블라이는 야단을 치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이 때를 계기로 크리스천이 블라이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상당수의 선원들이 마음속으로 타히티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군율은 지엄한 법이다.
탈영한 선원 몇 명을 채찍질로 본때를 보인 후에야 바운티 호는 간신히 본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블라이의 무자비한 통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출발한지 20여일만인 1789년 4월 28일, 크리스천의 주도 하에 선상 반란이 일어난다. 크리스천과 반란 선원들은 블라이와 그의 편에 선 선원 18명을 구명보트에 태워 망망대해로 떠나보내고 자신들은 바운티 호를 몰아 타히티로 돌아갔다.
블라이와 그의 부하들은 40여 일간 태평양 바다 위를 무려 6,000km를 죽을힘을 다해 항해한 끝에 피지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 원주민들한테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다시 우여곡절 끝에 1789년 6월 14일, 티모르의 네덜란드령 항구인 쿠팡에 도착했다. 그 즉시 블라이는 네덜란드 관청에 반란 사건에 대해 보고했고 이 소식은 영국 본국에 전해졌다. 멀고 험한 항해로 체력이 쇠약해진 생존자들은 약 2개월 동안은 쿠팡에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렸다. 이후 다시 항해에 나선 블라이 일행은 1790년 3월 14일 영국에 도착했다.
사진, 영화에서 타이티 섬 추장의 딸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천
1년여 동안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블라이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후 블라이는 태평양에 한 번 더 갔다 와서 기어이 빵나무를 서인도 제도에 운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빵나무는 그곳 원주민들에게 외면을 받으면서 식목에 실패하고 만다. 나중에 블라이는 호주 뉴 사우스 웨일즈 총독을 지내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또 다시 통솔력에 문제가 생겨 사달이 났다. 달달 볶아대는 블라이에 대해서 사관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는 결국 본국에 소환되었다.
영국은 해상 무역이 국가의 근본이었고 그래서 제해권이 가장 우선시 되는 해양 국가였다. 이런 이유로 선상 반란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납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반란자들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잡아낸다는 철칙이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에드워드 선장이 지휘하는 군함 판도라 호를 파견해 반란자 색출에 나섰다. 반란자들의 말로는 불을 보듯 뻔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붙잡힐 운명이었다.
크리스천을 포함한 반란자들은 일단 타히티로 향했다. 그곳에서 일부는 멍청하게도 타히티에 눌러 앉았고, 다른 일부는 영국 해군이 찾을 수 없는 오른편 방향에 있는 무인도인 핏케언 섬에 도착한 다음 바운티 호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고 그 곳에 주저앉았다. 1791년 3월 21일, 판도라 호가 타히티에 도착했다. 승조원들과 해병대가 한 달여간에 걸쳐 섬을 토끼몰이 하듯 샅샅이 수색해서 14명의 반란자들을 잡아들였다.판도라 호는 나머지 반란자들을 잡으려고 사모아·통가 등 남태평양의 섬들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핏케언 섬은 해도에 안 나타 있는 무인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수색대상이 아니었다.
판도라 호는 나머지 반란자 색출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최종적으로 영국에 도착한 10명의 죄수는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4명은 무죄, 6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교수형을 당한 건 3명이었다. 핏케언 섬에 정착한 자들은 오손도손 잘 사나 싶었지만, 같이 간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마구 부려먹다가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대부분은 죽임을 당했다. 이때 크리스천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808년 미국 포경선 토파즈 호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존 아담스라는 이름의 성인 남자 1명과 여자 8명, 어린이 19명만 생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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