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뭘 그렇게 열심히 들어? '' 아.. 같이 들을래? '' 아니..뭐..괜찮아.'' 자- 들어봐.'' .... '' 응? 어서. '' ...... '' 어때, 좋지? '' 어..'' .... '' 좋다.' 부다페스트의 하늘은 1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그 애와 내가 함께 부딪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반이긴 했지만 자인이는 자인이대로 나는 나대로 늘 우리가 어울리는 무리들은 따로 있었고, 식사시간이라든가 교실을 이동해야했던 음악시간에조차도 우리는 함께 어깨를 나란히하고 걷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아주 이따금씩은 신이 우리에게 그 시간을 허락하는 때가 있었는데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경우였다. 나는 체육시간이 몹시도 버거운 학생이였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어느날 갑자기 커져버린 키로 인해 늘 뛰기만 해도 근육 곳곳이 아픈 이상한 병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럴 때면 늘 무리에서 이탈하여 운동장의 사이드 계단이나 빈 교실에 우두커니앉아 음악을 듣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찌는듯한 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헉헉대는 동무들을 3층교실에서 우두커니 내려다보곤 하였다. 맴맴- 교정의 울창한 나무에서 매미소리가 들려올 무렵. 버릇처럼 카세트 테잎을 꺼내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똑똑- 내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자인이가 곁에 와 있는게 아닌가. 한 손엔 양은 물주전자를 들고 붉게 상기된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로 물끄러미 날 내려보던 그애는 딴에는 서둘러 올라왔던지 작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ㅎ.. 귀여워라. '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뭘 그렇게 열심히 들어? " 자인이는 꽤나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들려주었다. 내가 듣고 있던 소리들과 내가 느끼는 마음의 파동들을. 이어폰을 함께 끼고 1분 남짓 함께 음원을 들을 때의 설레임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만큼 굉장한 경험이었는데, 음원을 들을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최대한 음미할 줄 아는 그 애의 진지한 몸짓은 실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때서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 애가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지를. 그 애는 보컬의 목소리뿐 아니라, 베이스의 짙은 무게감, 드럼의 몽환적인 비트까지도 일일이 잡아내어 듣고 또 듣고 분석하고 쪼개어 음원을 듣곤 하였다. 그것은 나같은 사람은 흉내내기 힘든 그 애만의 독특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믿을 수 없게도 우리에겐 색다른 공통점이 하나 생겨버렸다. 그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음원은 반드시 자인이도 좋아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보다 가깝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웃고 소리없이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 체육시간이면 자인이는 주번이 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교실에 들렀고, 물을 채워갔고, 내 책상을 두들겼고 아주 가끔씩은 내 옆자리에 앉아 함께 음악을 듣곤 하였다. 희고 기다란 자인이의 손가락이 책상위에 비트를 가늠하여 두들기는 행위는,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그럴때면 어김없이 자인이는 웃고 있었다. 눈을 감고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앉아 고개를 까닥이며 미소짓는 아이. 누가봐도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한 때를 누리는 사람을 보는 거 같았다. 누구도 모르는 우리들만의 이(異) 공간. 그 순간만큼은 세계는 보다 느리고 이완된 속도로 흐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 너 요즘 쟤랑 친한거 같더라? " 젓가락 사이에 비엔나 소시지를 끼운채로 묘하게 볼멘 소리를 흘리던 효진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꼭꼭 잘도 밥알을 씹고는 있었지만 나를 쳐다보진 않았다. " 누구? " 내가 빤히 저를 쳐다보고 있는데도, 귀찮다는 듯 턱을 슬쩍 들어올리기만 하던 효진이는 이내 자인이가 있는 쪽을 한 번 가리키고는 다시 비엔나소시지를 집어들었다. " 야, 내가 좋아하는 거야. 작작 좀 퍼 먹어. "" 진짜 치사하게, 먹는 거 가지고. " 하던 효진이는 그제서야 나를 빤히 바라보며 몹시 못마땅한 눈짓을 보낸다.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여, 킥킥거렸더니 " 야,내가 진짜 그 날 얼마나 속 상했는 줄 알아?"" 뭔 소리야, 또." 나는 시덥잖은 효진이의 잡담을 언제나처럼 귓등으로 흘려버리며 얼른 비엔나 소시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 그 날 나 혼자 두고 내빼는게 어딨냐고?!"" 그 날이라니?"" 야! " 설마 언제적 이야길 하는 것인가, 아니 그 때가 언젠데 아직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덕분에 둘이서 데이트 잘 했을거 아니야고 했더니 " 아니야. 너 나가고 나서 얼마나 뻘쭘했는데..." 부터 시작하여, 끝없이 궁시렁거리던 효진이의 입은 정녕 한번쯤은 꼬매버리고 싶을 정도로 밉살스러웠지만, " 근데 너 진짜 그 날 갑자기 어디로 튄거냐? "" ...... " 하. 이런 질문엔, 그저 입을 닫고 있을 수 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있어야지. " 어? 그 날 어디로 간거냐고? 너 혹시 .. "" ? " 침이 꼴까닥 - 넘어갈 정도로 일순 긴장도 되었는데 " 너도 혹시 그 오빠 좋아하는거 아냐? "" 뭐?"" 그래서 못 견디고 뛰쳐나간거 아니냐고? 내가 진짜 설마설마해서 못 물어보고 있었는데 너 정말 그런거면.." 하아- 상상력도..상상력도.. 무궁무진한 친구님 되시겠다. 킥- 나는 또 주섬주섬 반찬들을 집어들며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고, 효진이는 계속해서 그런거야? 아니지? 그럼 곤란해..를 연발하며 오만가지 인상을 써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나는 슬핏 고개를 돌려 자인이쪽을 바라보았다. 자인이는 도시락을 먹다 말고 나랑 눈이 마주치자 피하지도 않고 씨익- 한 번 웃어주었다. 그리곤 이내 무리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도 고개를 돌려 먹던 밥을 되도록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 ' 너 요즘 쟤랑 친한 거 같더라? '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래? 그래 보여? 사실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냥 실실 웃음이 나올정도로, 그렇게 너와 친해지고만 싶었던거다. 2 청소가 끝나고 주섬주섬 아이들이 책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서는 시각. 매번 그 일정한 시각이 될 때면 우리 교실의 뒷문은 열리고, 어김없이 그 애가 나타나곤 했다. 그건 누구 한사람 주목하지 않는 너무도 당연한 하루의 일과같은 거였다. 그럼 자인이는 그때서야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교실을 나설 채비를 하는 것이다. 오늘도다르지 않았다. 키가 큰 그 애는 자인이의 곁으로 왔고,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자인이는 책상서랍밑에 넣어둔 책들을 하나하나 책가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를 등지고선 키가 큰 그 애의 얼굴같은 건 보이지 않아 알 수가 없는 것이었지만, 자인이의 얼굴에 슬핏 머물다 떠나는 미소로 보아 둘은 뭔가 즐거운 이야기라도 나눈 듯 싶었다. " ...... " 욱씬. 그렇게 가슴께가 아파왔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왜 오늘따라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괜스레 우울해진 나는 서둘러 그 기분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얼른 가방을 챙겨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속이 있다고 서둘러 하교한 효진이가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가방을 쌌다. 오전에 내렸던 비 때문에 챙겨온 우산은 다음에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 지후야. "" ! " 서둘러 일어서던 내 등뒤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인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는데, " ..... " 나를 부른 자인이보다 더 빨리 내 눈에 들어온 건, 자인이의 뒷 편 책상에 걸터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윗 반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름이...하 엽이라고 했었지. 팔짱을 낀 채 무심히 나를 건너다보는 그 애의 눈빛은 어쩐지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교복치마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절반쯤 벌린 다리를 의자위에 올려놓은 채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그 애의 입매는 야무지게 닫혀 있었다. " 혹시 오늘 약속 있어? "" ..어? 아니. " 자인이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고,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 그럼 나랑 어디 좀 같이 가 줄래? "" 어디..? "" 멀지 않아. " 그리곤 자인이는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던 것이다. 그 때까지도 엽이라는 그 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책상위에 걸터앉은 그대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였다. 반 아이들은 거의 빠져나간 텅 빈 교실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을 어디 다른 곳이라도 돌릴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자인이가 바로 곁에 와 설 때까지 나는 그 애가 보내오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감히 눈길을 돌릴수도 움직일수도 없었다. " 가자. "" ..... " 쭈뼛쭈뼛..내가 그 애를 신경쓰는 듯한 눈치를 읽었던지 자인이는 말했다. " 엽이는 오늘 학원 시간 때문에 좀 있다 갈거래. 가자. " 정작 자인이는 그 애를 신경쓰는 거 같지 않았다. 앉아 있던 그 애를 향해 먼저 갈게, 라고 자인이가 말하자 그 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가 싶더니 한 손 들어 바이바이를 하였다. 그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있었고, 그제야 한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교실의 앞문을 닫아주려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애를 확인했을 땐 놀랍게도 그 애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애는, 언제 가 있었는지 저만치 떨어진 창가에 등을 지고 붙박힌 듯 서 있기만 하였다. " ..... " 오후의 느린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다. 저만치 앞서 걸어가던 자인이가 등을 돌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날이었다. " 점심 뭐 먹을래? "" 왜.....너가 사기라도 하게? "" 어. " 흣흐. 굳이 자인이가 사겠다고 하던 점심을 기대하느라 혼자 남은 그 애의 모습따윈 까맣게 잊어버린 날이었다. 3 울창한 나무들이 길게 일렬로 서 있는 좁은 오솔길 근처 그리 넓지 않은 벤치가 보였다. 그 곳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공원이었다. 앞으론 물기가 거의 없는 작은 분수가 있었고, 인적이 드문 그 곳은 얼마든지 황량해 보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고, 저만치 맨손체조를 하고 계시는 어르신을 등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는 조금 전에 자인이가 사준 샌드위치의 비닐을 벗겨내고 있었다. " 이러니까 꼭 우리 소풍 나온거 같다. "" 맛있는 거 사준대니까.."" 이게 맛있는거잖아. 나 샌드위치 되게 좋아해. " 그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네가 날 데려가고 싶어하는 곳에 오고 싶기도 했다. " 은근히 고집있어. "" 어. 최고집, 강고집 못지않게 정고집도 만만찮은데..사람들이 그걸 모르더라. "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조용하게 웃고 있는 자인이를 보는 게 좋았다. 그 앞으로 샌드위치를 내밀었더니 이내 한입 크게 베어무는 자인이다. 우리는 함께 바람소리를 듣고,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다니는 소리를 듣고,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따듯한 커피면 좋겠는데 그건 살 수 없어서 그냥 빵집에서 사 들고온 우유를 마셨다. 찬 우유가 들어가니 갑자기 학교 예배당 옆의 자판기커피가 생각이 났다. " 아- 자판기 커피 마시고 싶다. "" 사올까? "" 지금? "" 어. "" 아이구 그냥 말이 그렇단 거지. 너도 참.." 하면서도 자인이의 이런면은 자꾸자꾸 이 애를 돌아보게 했다. 누구에게든 이렇게 친절하고 누구에게든 배려가 깊은 아이일까. " 근데 여긴 왜 오자고 한거야 ? "" 아, " 그제야 생각이 난 듯 거의 남지 않은 샌드위치를 입에 문채로 가방을 여는 자인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이 애가 샌드위치를 저리 물고 있다가 목에 걸려 체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바심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너무 지나친 염려지 싶어 이내 도리질을 하고 말았지만. " 저기...음...." 샌드위치를 안전하게 꿀꺽 삼킨 자인이가 못내 뱉기 힘든 말이 있는지 떠듬떠듬 내 눈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 뭔데...뭔데 그래? " 나는 또 그 모습이 되게 재밌기만 해서 막 채근을 했던 거 같다. " 이거 좀 들어보라구. " 자인이가 책가방안에서 꺼낸 건 자그마한 라디오였다. 옆에 조그맣게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갈 수 있는 거였는데, 거기에 자인이는 녹음테이프 같은 걸 넣고는 스위치를 눌렀다. 그건, 익히 들어본 음악이기도 하고.. 또 귀에 전혀 익지 않은 곡이기도 했다. " almaz..? "" 맞아. " 자인이의 눈이 금새 환희로 빛났다. " 어?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잖아, 이건. "" 맞았어. " 그것은 그 자체로 빛나는 하나의 조합이었다. 팝과 가요와 가곡. 그리고 클래식이 보기 좋게 맞물린 기가막힌 변주곡이기도 했다. 몇몇의 귀에 익은 곡들이 새롭게 짜집기 되어 전혀 다른 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나는 너무도 신기하여 잠자코 듣고 또 듣기만 하였다. 바람이 불고, 비가 막 그친 대지의 흙내음이 희미하게 느껴지던 오후. 이어폰이 아닌, 헤드셋이 아닌 그냥 날 것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음원이 좋았다. 체조를 하던 아저씨도 힐끔 우리를 쳐다보던 눈치셨지만 개의치 않으셨고, 아저씨는 저만치 제갈길을 걸어가고 계셨다. " 이거 너무 좋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 나는 흥분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곡이 끝나자 이내 그것들을 서둘로 가방속으로 집어넣으려는 자인이의 손을 붙들며, " 야아~ 안 돼. 한 번만 더 듣자. 응? " 그제서야 쑥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자인이었다. " 마음에 .....들어?"" 응! 완전 맘에 들어. 따봉이야! "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크게 소리쳤다. 그 때...나는 자인이가 치아를 온전히 드러내고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자인이는 희고 고른 치아를 지녔다. 너무도 다행스럽게도 그 애는 그늘없이 환하게 웃을 줄도 알았다. " 가져. 네 거야. " 어째서? 라고는 물을 수 없었다.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 애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어떤 의문의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진중함이 있었다. 가만가만 먹고 남은 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으면서도, 라디오를 다시 가방속에 담으며 그 지퍼를 단단히 여미면서도, 자인이의 입가엔 희미하지만 보기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고, " 온전히 내 힘만은 아니고 엄마가 좀 도와주셨어. 엄마도.. 너처럼 음악을 좋아하시거든. "" ....... "" 알바 하고 받은 돈으로 녹음기 두 개를 사서.. 그 때 너랑 들었던 곡들을 하나하나 녹음해 보다가.. "" ..... "" 이렇게 저렇게 음을 쪼개다보니.. 이런식이어도 좋겠구나...싶더라구. " 나는 가만가만 읊조리는 자인이의 말을 시(詩)인듯 들었다. " 그냥 학교에서 이어폰으로 들려줄수도 있지만..음...""...... "" 소리가 공기중에서 부딪히고 증폭되고 와 닿는 느낌을 ... 꼭 듣게 해주고 싶었어. " 그리곤 자인이는 그 때까지도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성큼 나를 돌아보았다. " 이건, 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 ... " 이건..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벅....차...다. 라는 건, 이런 느낌일까. 띄엄띄엄 낮게 와 닿는 그 애의 말들이 좀처럼 현실감있게 들리질 않았다. 이토록 많은 말을 한꺼번에 늘어놓는 경우도 드물었을 뿐더러 <이건.. 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아무렇게나 쿵쿵거리고 귓볼이 확확 달아오를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 맘에 들어해서 다행이야. 아님 어쩌나...."" ...... "" 하루종일 되게 신경쓰였거든. " 자인이는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저런 말들을 아무렇게나 내뱉고 있는 것이다. 와아.. 이걸 어쩌면 좋지. 내가 이래도 되나. 나는 오늘 생일도 아닌데, 정말 아무날도 아닌데.. 마치 일생일대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은. 확실히 나는 좀 멍해 있었던가 보다. " 괜찮아? " 한동안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저만 쳐다보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지 오히려 내 걱정을 하는 자인이었다. " 어...어.. 나 완전 감격해가지고..." 정말 바보같이 횡설수설하는 내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데 너인들 달랐으랴. 그 날, 억수같이 내리던 비를 맞으며 너를 쫓아갔던 그 때마냥 너는 또 이상하고도 괴이한 장면을 목도한 사람마냥 날 보며 웃었다. 어휴, 이게 다 네 탓이란 말이야. 김자인. " 난 있지.. 음을 다루는 일을 해보고 싶어. " 내 들뜬 마음 같은 건 추호도 알리 없는 자인이는, 어느새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시각이었고, 눈 앞엔 차르르륵- 자전거 한대가 지나갔다. 두 다리를 쭉 뻗은 교복치마아래로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 내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사람이어서 참 다행이단 생각이 들어."" ..그래. " 듣고 있던 나도 괜스레 마음이 차분해져서는, 손에 쥔 녹음 테이프들을 소중하게 감싸쥔 채 자인이와 함께 눈 앞의 풍경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 너희 엄만 네가 좋아하는 걸 지지해주시나봐. 그지? "" 응. 늘 그런 편이시지. "" 그거 너...되게 운 좋은 거다? "" 그런가..?"" 그러엄. 우리 엄만 나 미대 가려는 거 도시락 싸들고 말리시잖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 한다고.."" ㅎ..."" 내가 어떤 재능이 있는지도..모르시면서. 내가 얼마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지 모르시면서..아니, 아예 알려고도 들지 않아. 맨날 맨날 교대, 교대! 여자는 선생이 최고다는둥..그래야 시집을 잘 간다는둥... "" 그래도 엄마잖아. "" 어? " 어딘가 아귀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것만 같은 자인이를 돌아보다, 문득..아차- 싶은 마음이 드는 거다. " 가끔 생각해. 날 낳아주신 분이라면 이렇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셨을까.."" ... "" 지금... 엄마라고 부르고 있는 분이 날 낳아주신 분은 아니거든. "" ....... ""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하게 볼 건 없구. 운 좋게도 고아는 아니니까. " ' 나도 알고 있어.' 라고 말하면 너는 놀랄까. " 미안해. "" ㅎ...뭐가? "" 그냥. 내가 괜한 말을 한 거 같아서.. "" 아니야. 말했잖아.. 고아는 아니라고. 어딘가에 살아계시다는건 아니까 난 그냥 일찍 독립했노라고..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 "" 아, 독립은 아닌가? 아직은 얹혀 살고 있으니.. " 푸석하게 웃으며 바닥을 운동화끝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는 자인이를 바라보자니 괜히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 너 이러는 거 처음 봐. "" 음? " 꼭 다문 입술을 하고 날 바라보는 자인이를 꼭 안아주고도 싶었다. " 네 꿈.. 네 어머니.. 이런 얘기 한 적 없었잖아. "" 음... 그러네. "" 이런 얘기..누구한테 해본적 있어? " 자인이는 고개를 저었다. 엽이한테도? 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 자인아. "" ....응? "" 나..지금, 기분이 엄청 좋아. " 우리는 한동안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와다다닥 뛰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내 마음의 소리를 이 애가 들었는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자인이의 까만 눈이 나를 오롯이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한 치의 흔들림없이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을 뿐. " 이상하게 넌... " 한참을 보다 말고 자인이가 말한다. " 아주 가끔씩.. "" ...... "" .. 날 다 아는 것같은 눈으로 볼 때가 있어. "" 그럼 기분 나쁘지 않아? "" 음...대개는 그렇겠지. 근데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 지금도 그렇고. "" ....... "" 그냥 이런 생각은 들지. "" ...... "" 이 애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겠구나..." " ...... "" 마음이 놓이곤 했어. " 까맣고 선연한 눈동자가 곧 닿을듯 눈앞에 있었다. 누구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이만큼 오래도록 응시해본 적도 없었다. 하물며 자인이라니.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과연 옳았던 것일까. 이대로 있다간 금새라도 내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결국 한 마디를 거들고 마는 나였다. " 바퀴벌레를 보면 놀라곤 하지. "" 뭐? " 그리곤 벌떡 일어나버렸다. 난 그렇게 무딘 여자가 아니라고! 라고 외쳐주고 난뒤 저만치 뚜벅뚜벅 걸어가자니 또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거 같았다. 허겁지겁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 너 지금 그거 개그라고 한 거야? " 어느새 나란히 보폭을 맞춰오던 자인이는 여전히 날 내려다보고 있을게 분명하다. 그 표정이 몹시도 짓궂을게 분명하다. " 아니야. "" 하나도 안 웃겼어. "" 개그한 거 아니라고."" 정말 웃기지 않았어. "" 아니라고 했잖아? " 이윽고 자인이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귓전을 윙윙거렸고, 대 여섯명의 아이들이 우루루 우리곁을 한 달음에 지나쳐갔고, 그 때마다 내옆에 꼭 붙어선 채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는 자인이를 의식하며, 마음 속 깊숙히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이 간지러운 느낌이 부디 오늘만은 오래도록 달아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가 준 녹음 테이프를 소중하게 포켓속으로 밀어넣으며 톡톡- 안전하게 잘 있어라. 곧 집으로 데려다 줄게. 진심으로 그렇게만 빌고 있었다. 4 아르바이트가 있다며 먼저 버스에 오르던 자인이는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창가에 기댄 채로 눈인사를 하는 그애에게, 조금 전에 쥐어준 테잎을 흔들어 보였더니 그제야 예의 선한 미소로 답하는 자인이었다. " 잘 들을게! " 나는 큰 소리로 말하였고, 자인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그 버스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나는 한참동안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집으로가는 버스가 한 대 두 대..석대가 지나칠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였다. ' 보물이구나. ' 포켓속에 넣어둔 테잎을 만지작거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굉장한 충만함이 무엇인지는 감히 짐작하지 못하고, 그저 이 파릇한 시간들이 좋기만 하여서 정류장의 가로등이 반짝, 하고 그 빛을 발할때까지 내 마음의 홍조는 가실줄을 몰랐다. 집으로가는 길은 그 어느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 자인이가 준 테잎을 한시라도 빨리 다시 듣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잰 걸음으로 걷던 걸음이 어느새 빨라져 거의 뛰다 시피 아파트단지에 들어섰다. 1동 2동.. 3동. " .....? " 가는 숨을 고르며 아파트 계단을 오르려던 내 걸음은 멈춰지고 말았다. " ...... " 유난히 큰 키에 정확하게 우리 동을 등지고 있는 화단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있기만 하는 그 애가 보였기 때문에. 해는 벌써 지고 이미 어둑어둑한 단지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전부였다. 그 애의 긴 그림자가 아스팔트위에 또렷하고도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애가 누군지는 금방이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학원수업은 끝났을까. 그러고보면 학년 톱을 놓친 적이 없다고 했었지. 참 굉장해.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면서도 채 얼마되지 않은 저 아이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을 휙휙-재빠르게 돌아다녔다. 여긴 무슨 일일까, 왜 저기에 앉아있는 것일까, 설마 우리 아파트에 사는 것일까, 그럼 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 ..... " 눈인사 정도는 해야할까? 사실, 모른 척 지나치고도 싶었다.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아까 오후의 일도 그렇고,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구석이 있어 내심 불편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애를 보았고, 이윽고 그 애도 나를 본 거 같았다. 날 보던 그 애는 천천히 화단가에서 일어나 겉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었다. 설마.. 날 만나러 온 것일까? 교복은 입고 있지 않았다. 편안한 후드티에 청바지, 운동화를 신은 그 애는 흡사 운동선수처럼도 보였다. " ...... "" ...... " 이윽고, 입구를 들어서는 계단을 앞에 두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이럴땐 어떡해야 하지? 안녕..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휙-하고 지나치는 못하는 내 성격이 못내 못마땅해지는 순간이었다. " ...... " 말이 없기는 이애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지독하게 꼭 잠겨진 지퍼를 보는 것 같은 입매였다. 자인이와 함께하는 교실에서 이 애가 얼마나 크고 화창한 목소리로 온 교실을 휘젓고 다녔는지를 익히 보고 듣고 하였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이 아이의 이런 침묵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것은 나로서도 의아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 애는 결코 먼저 말을 꺼내려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확신이 들었고, 결국 물끄러미 바라보던 일을 포기하고 머쓱하게 웃어보인 뒤 몸을 틀어 계단을 올랐다. " 야. " 그 애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심장이 재빠르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았고. " 난 하 엽이라고 해. "" ......... " 굉장히 깔깔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교실에서 듣던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 " 넌? " 내 이름을 묻는 것일테지. " 정 지후. " 나는 포켓에 들어있던 테잎을 한 손으로 꽉 쥐었다. 성큼 한 발짝을 내 딛는 그 애와 한 계단을 올라서 있는 내 키는 어느새 같은 높이였다. 그 애는 양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는 물끄러미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하나라도 놓치기 싫은 숨은 그림찾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게 내 눈과 내 코와 내 입술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움직일수 없었다. "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데.. 가능할까? "" 뭐? "" 너랑 나. 네가 자인이와 그런 것처럼. "" ...... " 어째서 이 애는 갑자기 나타나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 자인이는 좋은 친구야. "" ...... "" ..그렇지? " 어째서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것일까. "... " 이 애는 딱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거 같지 않았다. 그저 짧게 물었고, 짧게 단정지었고, 보다 빨리 알아채기를 바라는 거 같았다. 자인이는 좋은 친구이며, 자신도 좋은 친구가 되어 줄수 있음을. 그러나 나는 아무말도 못했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가까이서 보니 티없이 맑고 하얀 얼굴 하나가, 까끌한 목소리를 품고, 달처럼 서늘한 눈매를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잘 자라. 또 보자. " 그렇게 그 애는 돌아서 갔다. 길고 긴 그림자가 일직선을 하고 그 애 뒤를 따라다녔다.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엔 무게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쫓아가고 싶었다. 한 달음에 쫓아가 묻고도 싶었다. 왜? 왜 나랑 친구가 되겠다는 건데? 왜 내 대답같은 건 듣지도 않아? 그런데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인이는 좋은 친구야, 그렇지? 그 애가 또 한 번 물어올 것 같아서. 그럼 나는 또 대답을 못할 것만 같아서. 테잎을 쥔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계단을 딛고 선 두 다리가 후들거릴 것만 같았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아파트 현관을 통과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로 이마를 벽에 기댔다. 버튼을 눌러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갑고도 서늘한 벽의 질감이 그대로 와 닿았다. 나는... 나는, 자인이의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지 않아. ..말해줄 걸 그랬다.
@ BGM by 메이세컨, last dance
첫댓글 첫댓글이 부담스러워 다음에 쓰자 마음먹었다가 너무 많이 기다렸던 글이고 기다린만큼 좋아서 차마 그냥 가질 못했어요. 좋다, 고맙다, 인사를 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시월이 끝나는 월요일, 좋은 하루 되시길.
오래오래 많이많이 기다렸습니다 바쁘신거죠 ?!.....늘 건강하시고요 즐거운맘으로 읽었습니다
후아 뭐가 이리 가슴이 턱 막히게 하죠...너무 좋네요...ㅎ
아...정말 오랫동안 기다렸기에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습니다.오늘은 정말 피곤했는데 피곤이 확 가시네요.잘읽었습니다.^^
오랜만 이죠?여름은 잘 나셨는지요.. 그간 많이 바쁘셨나 봐요..오랫동안 들러 주시지도 않고..췻반가운 마음에 살짝 투정을 부려 봤습니다. ^^
역시,,,,,,너무 좋아요ㅠㅠㅠ
ㅠㅠ... 기다리는데.. 숨멎는줄.. 알았어요...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요!! 너무 너무 잘 읽고갑니다!!
첫댓글 첫댓글이 부담스러워 다음에 쓰자 마음먹었다가 너무 많이 기다렸던 글이고 기다린만큼 좋아서 차마 그냥 가질 못했어요.
좋다, 고맙다, 인사를 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시월이 끝나는 월요일, 좋은 하루 되시길.
오래오래 많이많이 기다렸습니다
바쁘신거죠 ?!.....
늘 건강하시고요 즐거운맘으로 읽었습니다
후아 뭐가 이리 가슴이 턱 막히게 하죠...너무 좋네요...ㅎ
아...정말 오랫동안 기다렸기에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오늘은 정말 피곤했는데 피곤이 확 가시네요.
잘읽었습니다.^^
오랜만 이죠?
여름은 잘 나셨는지요.. 그간 많이 바쁘셨나 봐요..
오랫동안 들러 주시지도 않고..췻
반가운 마음에 살짝 투정을 부려 봤습니다. ^^
역시,,,,,,너무 좋아요ㅠㅠㅠ
ㅠㅠ... 기다리는데.. 숨멎는줄.. 알았어요...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요!! 너무 너무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