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첫 토요일 성모 신심) 눈물과 슬픔 프란치스코 교종은 십자가의 길 묵상에서 성모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다고 했다. 그 글만 보면 거부감이 든다. 어머니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성모님은 오열하셨을 것이고 아마 혼절하셨을 거다. 그래야 사람이고 엄마다. 그 끔찍한 장면을 담담하게 지켜보신 게 아니라 지극한 슬픔과 눈물로 아드님을 따라가셔서 십자가 아래에까지 이르게 됐다. 교종은 그걸 두고 성모님이 믿으신 거라고 묵상했을 거다.
성모님은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셨다. 가브리엘 천사가 해준 말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억하셨을 거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33).” 사형수로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보고 또 동시에 천사의 그 말을 되새기면서 그 말씀과 현실의 완전한 불일치를 온몸으로 눈물로 슬픔으로 견디셨다. 그분은 아들에 대한 음해와 폭력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그 대신 슬픔과 눈물로 불의하고 죄스러운 세상에 저항했다. 그 슬픔과 눈물이 그분의 믿음이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고 하느님 뜻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 당연한데도 믿기 어려운 이유는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인 거 같다.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되는 데에 수십 년이 걸리고 그가 죽은 후에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천 년이 하느님께는 하루 같아서 그런지, 탐욕스러운 두 노인의 음모에 꼼짝없이 죽게 된 수산나를 살려낸 지혜로운 다니엘(다니 13,45)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시느라 그러신지, 하느님은 너무 느리다. 그 느린 하느님 정의 실현을 믿음으로 기다린다. 슬픔, 눈물, 원망 그리고 청원 이 모두가 우리 믿음의 표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기적적으로 내려오셨다면 당신의 목숨을 구하고 제자들은 기뻐했겠지만 지금 여기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었을 거다. 아무리 결심에 결심을 수없이 반복하고 별의별 수를 다 써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온몸을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마음은 씻겨지지 않는 것과 같다. 얼마나 열심히 수련해야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그렇게 못 한다. 그 대신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믿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성인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이웃의 믿음에도 손을 벌린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씻어내고 그분의 몸을 먹어 힘을 얻는다. 한 개인의 구원에도 이렇게 큰 믿음이 필요한데, 사회와 공동체에는 얼마나 더 큰 믿음이 필요하겠나. 기운이 있어야 백 번 이백 번 또다시 시작할 수 있고, 이 불의한 현실에 대해 울고 하느님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믿고 기다릴 수 있다.
예수님, 세상 한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신다고 믿게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면 기다림이 좀 수월할 것 같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십자가 곁에도, 그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도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믿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멘.
이종훈(macario)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