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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旭(이종욱·59) 서강大 교수는 「한국사학계의 파이터」이다. 1989년 부산에서 필사본 「花郞世記(화랑세기)」가 발견되어 그 眞僞(진위)논쟁이 가열되었던 10여 년간 그는 은사이며 한국사학계의 권위였던 李基白(이기백·2004년 6월 별세) 선생의 뜻을 거스르면서 그것이 왜 「眞本」인지에 관한 논리를 줄기차게 전개했다.
「고구려의 역사」는 「實證史學(실증사학)」과 「民族史觀(민족사관)」의 고구려史 왜곡과 북한 이데올로그들의 고구려-발해 正統論을 정면에서 통박했다.
─이번에 「고구려의 역사」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民族史觀과 後식민사학에서 벗어나 고구려의 눈으로 고구려 역사를 再구성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後식민사학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은 帝國 일본의 연구자들이 정치행위의 도구로 발명한 고구려史의 틀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몇 세대에 걸쳐 그들의 스승이나 선배들이 왜곡시킨 역사의 틀을 확대 발전시키며 고구려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광복 이전 日帝의 정치적 목적에 복무한 역사를 「식민사학」이라고 한다면, 광복 이후에도 그것에 추종한 역사는 포스트 식민사학, 즉 「後식민사학」인 것입니다』
─우리 교과서에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습니까.
『한국의 史學은 「三國志」의 기록에 바탕을 두고 고구려 초기국가 단계에서 계루부를 비롯한 5部가 연맹체를 구성했다는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 결과 諸加聯盟(제가연맹), 諸加會議(제가회의)가 있었던 것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왕들은 피정복국의 지배세력을 제후적인 존재로 편제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채택했지만, 部의 세력과 연맹체를 형성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2002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고등학교 「국사」에서 고구려 초기 수백 년의 역사를 「部체제」 說로 메우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後식민사학이라고 봅니다』
『한국사의 정통은 고조선-삼국시대-大신라(통일신라에 대한 李교수의 호칭)-고려-조선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고려는 大신라의 토지와 인민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그 지배체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渤海(발해)는 고려의 건국에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고구려-발해를 정통으로 보는 역사관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정치행위입니다』
─중국은 이른바 「東北工程(동북공정)」에 의해 고구려사를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중국內 소수민족인 조선족에게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가르쳐 조선족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를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 연구가 아니라 정치행위입니다. 중국에서도 제대로 된 연구자는 고구려史를 중국史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의 正史인 25史에 고구려史는 없습니다. 다만 25史의 東夷列傳 고구려 條에서 중국과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의 습속·제도·산물 등에 대한 기사를 실었을 따름입니다. 물론 고구려 역대 왕 대부분의 이름조차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고구려史가 중국史가 아닌 이유 중 하나입니다』
『風納土城의 연대를 측정해 보니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백제도 기원전 2세기에 이미 小國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고구려의 경우에도 첫 도읍지 卒本城(졸본성: 渾江 유역의 桓仁 지방) 지역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건국연대를 측정할 수 있을 겁니다』
三國史記 고구려 本紀 東明聖王(동명성왕=주몽) 條에는 건국연대인 기원전 37년 한 해 동안에 너무 많은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실제 기원전 37년에 그 많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기원전 37년의 사건은 오랜 기간에 걸친 이야기가 신화의 시간으로 변경된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는 여러 王代에 일어난 일을 주몽왕代의 일로 정리한 것으로 봅니다. 이런 系譜(계보) 조정은 고조선·백제·신라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고구려의 系譜 조정
─왜 그런 계보 조정이 필요했을까요.
『琉璃王(유리왕·재위 BC 19~AD 18년) 때 고구려가 卒本에서 國內城(국내성)으로 천도합니다. 이후 왕들은 자신들을 始祖 주몽과 좀더 가까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卒本시대에 재위했던 여러 왕들을 계보에서 빼고 주몽 한 사람으로 건국신화를 정착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존엄한 존재로 신격화된 始祖王 주몽과 가깝다고 해야 후대 왕의 지위가 강화되거든요』
『유리왕 때의 천도는 중국의 사서와 三國史記의 기록이 일치합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유리왕 22년 10월, 즉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습니다. 도읍 국내성은 현재 중국 吉林省 集安市(집안시) 지역이죠. 三國史記 유리왕 條를 보면 천도 이전의 기록은 상당 부분 신화적·설화적 기술이지만, 천도 이후의 기록은 實在한 역사의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고구려 6代 太祖王(태조왕)의 경우 무려 94년간 재위하다가 100세에 76세의 동생 遂成(수성: 7代 次大王)에게 양위했고, 次大王은 폭정을 하다가 재위 22년 만에 明臨答夫(명림답부)의 쿠데타로 살해당했습니다. 다음 왕위는 次大王의 동생 伯固(백고: 新大王)에게 돌아갔는데, 그때 新大王의 나이가 77세입니다. 失傳된 역사를 꿰맞추려고 재위기간을 늘리거나 나이를 올린 것 아닙니까.
『저는 太祖王, 次大王, 新大王은 형제 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력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봅니다. 또한 세 왕 사이에 왕들이 더 있었는데, 이 3人의 왕을 형제 관계로 만들어 놓고 몇 명의 왕은 역사기술에서 지워 버린 것이겠죠. 이런 현상은 고대사회에서 잦은 일입니다.
고구려에서는 태조왕을 「國祖王」이라고도 불렀는데, 그는 영토 확장과 제도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大王이었습니다. 태조왕 이후의 왕을 한 명이라도 더 줄여 놓으면 후대 왕의 권위가 올라갈 수 있거든요. 일종의 계보 조정이죠』
광개토왕碑를 세운 414년에는 고구려의 王者집단에서의 계보 정리가 이미 끝난 상태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라는 1세기부터 경상북도 일원을 지배하고 있던 영토국가였습니다. 백제는 기원전 2세기부터 주위의 小國을 병합, 기원후엔 경기도까지 진출한 큰 왕국입니다. 백제나 신라의 군사적·경제적 성장단계, 특히 무기체계가 倭보다 훨씬 앞섰는데, 그런 백제와 신라를 아직 古代국가 체제도 갖추지 못한 倭가 어떻게 臣民으로 삼습니까. 그럴 능력이 없는 겁니다』
─광개토왕碑 永樂(영락) 14년(404) 條에는 「倭가 대방(지금의 황해도) 지역으로 침략하여 왕이 몸소 출전하여 왜군을 궤멸시켰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外征의 능력을 갖춘 交戰 상대로 倭를 平價切上(평가절상)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광개토대왕의 즉위 20년 전에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故國壤王(고국양왕)이 平壤城(평양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합니다. 당연히 고구려 사람에게는 백제가 철천지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문에다 한 번도 「百濟」라고 하지 않고 卑稱(비칭)인 「百殘(백잔)」이라고 쓸 정도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백제 전지왕의 행보입니다. 전지왕은 아신왕의 태자로 즉위 전 倭에 체재하다가 父王의 부음을 듣고 급거 귀국합니다. 그때 倭의 호위병 상당수가 따라왔겠죠. 마침 그 시기에 고구려와 전쟁을 했으니 전지왕을 따라온 왜병도 전투에 투입됐을 겁니다. 결국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깔아뭉개기 위해 主敵을 倭로 바꾼 것 아닌가 합니다』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고구려의 중요한 산업은 정복사업으로 보입니다. 영역 내에 여러 피정복 종족이 거주하는 多重的 구조를 지닌 나라이며, 그들에 대한 통치수단도 행정력이 아니라 군사력에 의존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엔 坐食者(좌식자), 즉 놀고 먹는 사람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전문적인 戰士 집단이겠죠.
『당시 신라는 현재의 面 정도 단위에도 지방관을 파견합니다. 고구려는 郡 태수도 제대로 파견 못 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신라의 국가시스템이 고구려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역사가 바로 「한국史」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기술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자기 씨족의 역사를 쓴다고 할 때, 始祖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씨족 전체를 다루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나에게 피를 전해 준 이가 누구냐를 따져서 쓰는 방법입니다. 작은아버지·큰아버지나 조부·증조부·고조부의 형제들은 나에게 피를 준 사람이 아니니까 제외하거나 略述하고, 아버지-조부-증조부-고조부 이렇게 직계 조상 중심으로 쓰는 겁니다. 저는 후자의 방식으로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해가 오늘날 한국 사람에게 뭘 전해주었습니까. 망할 때 발해 왕자 大光顯(대광현)이 유민 몇만 명을 데리고 高麗(고려)에 투항했고, 그들이 평안도의 한 지역에 정착한 정도입니다. 고려는 신라의 전통을 90% 이상 이어받은 나라입니다. 王家만 바뀌었을 뿐 지배층도 거의 신라인 출신이었습니다. 발해가 오늘날 한국인을 형성하는 데 피를 주었습니까, 제도를 물려주었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발해가 한국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북한이 고구려-발해에다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은 「절 모르고 시주」를 하는 격입니다. 傍系(방계)를 直系보다 더 높은 위치에 놓으면 그건 우스운 족보나 가족사가 되는 거죠. 李교수께서는 발해를 건국한 大祚榮(대조영)을 靺鞨人(말갈인)이라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발해에서 唐에 보낸 국서에 그들의 국호가 「靺鞨」이라 자처했다는 사실이 「新唐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해의 3代 국왕 大門藝(대문예)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 그리고 자신을 「고구려왕」이라 칭했습니다. 三國史記에도 大祚榮이 「고구려 遺將(유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발해 王家를 굳이 靺鞨族(말갈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발해왕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고구려 국왕을 자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역사기록에는 「渤海」란 용어가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처음 발해 사람들이 나라를 세울 때 국명을 「靺鞨」이라고 했습니다. 713년에 唐에서 「靺鞨」의 왕에게 「渤海郡王」이란 칭호를 내리면서 渤海라는 국명을 사용합니다. 만일 大祚榮이 고구려 사람이라면 왜 「靺鞨」을 자칭했겠습니까. 고구려인보다 신분적으로 훨씬 格이 떨어지는 종족인데요』
다만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융합해서 산 것이 아니라 서로 거주 지역을 달리했던 겁니다. 따라서 말갈 군단을 지휘하는 자는 당연히 말갈인이었을 겁니다. 大祚榮은 고구려 장군이기는 하지만 말갈 출신으로서 말갈군을 지휘했다고 봅니다』
─일본에 10여 차례 파견된 발해 使臣들은 거의가 高씨 등 고구려 상층계급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발해에는 분명히 고구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발해의 主流세력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唐에서 20만 명의 고구려인을 끌고 갔습니다. 신라도 7000명을 잡아갔죠. 고구려 왕과 왕자, 귀족 등 중심세력은 다 잡혀갔습니다. 남아 있던 고구려인이 발해의 상층부에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발해의 국왕과 더 많은 수의 지배계급은 말갈인이었을 겁니다』
고구려인이 왕을 배출한 때는 고구려가 되었고, 말갈족이 왕을 배출했을 때는 말갈 또는 발해, 거란이 왕을 배출하면 遼(요)나라, 女眞族(여진족)이 세운 나라는 金(금)입니다』
『孫晉泰 선생이 전국 역사교사들에게 강연하면서 발해 역사는 물론 金나라 역사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분이 6·25 때 납북되는 바람에 그의 저서「조선민족사 개론」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역사 밖에 쓰지 못했어요. 그 후에 계속 글을 썼으면 아마 金나라도 우리 역사의 附錄으로 넣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역사가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발해와 金은 우리에게 피를 전해 준 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正史에 넣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 사람이 끝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강변한다면 우리는 「金·淸의 역사를 한국사의 附錄 혹은 外史로 취급한다」는 대항논리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孫晉泰 선생이 발해를 우리 역사로 넣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고려시대에 이르러 여진족이 金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은 한국인과 거의 단절되어 살아온 민족입니다.
실제로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압록강 이북의 땅은 우리 역사와 관계가 없어진 곳입니다』
8·15 광복 직후의 정치상황에서 孫晉泰는 선생은 「金春秋(후일의 太宗武烈王)가 唐에 請兵하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켰으니 反族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신라인의 입장에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때는 삼국이 서로를 같은 민족으로 보지도 않던 시대였습니다.
또 고구려의 시조 주몽도 신화속 인물이 아닌 역사적 실체로서 재구성된다.
그는 “발해는 발해사람(말갈족)들의 역사”라며 “지금 만약 말갈족들이 생존해 있다면 우리나라에 ‘역사를 빼앗아가지 말라’고 항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묘하게도 이 같은 상황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국내의 반응과 일치한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중화주의에 따라 펼치는 정치행위일 뿐이라는 데 이 교수도 동의한다.
이 교수는 “중국은 전통적으로 고구려를 중국사로 생각하지 않아왔다”며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흡수한 만큼 고구려사도 한국사로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이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 위치를 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신간 ‘고구려의 역사’(김영사)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국이 아니며 이민족 말갈의 나라일 뿐”이라며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어야 하는 타당한 근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이는 발해사를 통일신라사와 함께 한국사의 정통으로 수용하는 주류 역사학계의 인식과 맞서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고구려 멸망 후 말갈(발해)은 말갈인을 왕으로 세워 형성된 왕국이었다”는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동사강목’ 등의 사료를 근거로 발해를 한국사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발해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고구려는 예맥,부여,말갈,선비,숙신,거란 등 여러 종족들을 정복한 제국으로 다종족 국가를 형성했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버지는 속말말갈인으로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 고구려 영역 안에서 독자적인 부락으로 살며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지배를 받았다. 대조영은 고구려에 의해 말갈병을 거느리는 장수로 임명되었으며,고구려가 망한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 병사들을 이끌고 698년 말갈 왕국을 세웠다. 대조영은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받으며 나라 이름을 말갈에서 발해로 바꾸었다.
이 교수는 “고구려인 일부가 발해의 지배세력에 편입된 점,발해가 기와와 온돌을 사용했다는 점 등을 들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이 고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조회 : 13 스크랩 : 0 날짜 : 2006.03.08 09:22
고구려 '국수주의' 빼야 Vs 발해와 연결없어
[쟁점] 고구려사 연구 '과도한 국수주의' 비판과 발해와의 연속성 논쟁
편집부
* 이종욱 서강대 교수의 연구서 최신 연구서 [고구려사의 연구]에 대해 최광식 고려대 교수가 비판을 가했고, 이에 대한 이종욱 교수의 반론이 <교수신문>에 연재됐습니다. 두 학자의 치열한 고구려사 인식에 관한 관점을 <교수신문>의 도움의 받아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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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연구 반영 못해…발해, 말갈과 연합정권 / 최광식
저자는 사료가 부족하여 그동안 연구가 미진했던 고구려 초기 역사를 비교사적 관점에서 복원하는 한편, 건국신화에서 역사연구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또한 실증적 해석과 추론을 통해 호동 왕자가 낙랑이 아닌 옥저 지역의 제후국을 정복하였다거나, ‘광개토왕비’에 일본을 부각하는 내용이 들어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악용된 것은 고구려인 스스로가 원수였던 백제를 폄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는 예맥, 말갈, 선비, 숙신, 거란 등의 여러 종족을 지배한 일종의 제국이었다는 등 고구려사에 대해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최광식의 주장: 전체적인 내용이 사료를 나열하고, 그것을 저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을 가하고 있다. 고구려는 소국, 소국연맹, 소국 병합 과정을 거쳐 다른 왕국들을 정복해 토지와 인민을 늘려 커다란 왕국으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단계는 저자가 신라와 고조선의 국가형성을 논하면서 적용을 한 것으로 고구려에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과연 이러한 발전단계가 고구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를 검증한 후에 적용을 해야 하는데 그대로 도식적인 적용을 하고 있다. 저자가 비판하는 부체제설이 모든 한국 고대 국가에 적용하는 것이 무리이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라 하겠다.
새로 발굴된 고고학 자료나 다양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해석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복원하려는 최근의 연구 경향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 생활사나 문화사 등 그 시대의 사회나 문화를 재조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또한 대외관계의 경우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국제관계속에서 구조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의 멸망을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않고 ‘고구려왕정의 피로’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이 좋은 예라 하겠다.
그리고 발해의 역사적 정체성을 논하는데 있어 왕의 출신성분만을 중요시한 것도 문제라고 하겠다. 또한 대조영에 대해서는 ‘속말말갈’이라는 기록과 ‘고려별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별종’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속말말갈’설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고구려인 20만 명이 당나라에 잡혀갔기 때문에 마치 발해에는 고구려인은 소수만 남아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데,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고구려 인구는 70만호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70만 명이라고 보더라도 신라와 돌궐에 간 10만 명을 제외하면 발해에는 40만 명 정도가 남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는 고구려와 말갈에 의한 연합정권이라고 보는 것이 역사의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의 정체성을 논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계승의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최광식 교수의 서평에 감사드린다. 여기서는 그에 대해 일일이 답하기보다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몇 가지 변명을 하겠다.
첫째, 이 책에서는 본연의 역사로서 고구려를 객관화 하고자 했다. 한국사는 한국사상 존재했던 여러 나라를 다룰 권리가 있다. 그러한 이유를 갖고 이 책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다루었다. 지난 세기 고구려는 한국인의 자존심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제국 일본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백제나 신라와 달리 고구려를 애국심의 원천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고구려가 특별하게 취급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고구려의 역사를 있었던 대로 그럴법하게 되살려내고자 했다. 이것이 본연의 역사다.
둘째, 이 책은 고구려의 역사가 한국·한국인을 형성하는 데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 밝혔다. 그 하나는 고구려가 망한 후 대신라(소위 통일신라)에서 고구려인들을 어떻게 편제했나 하는 문제다. 신라에서는 원칙적으로 고구려인들에게 6두품까지의 신분을 주었다. 대륙을 지배하였던 고구려인들도 신라에 정복된 후 예외 없이 피정복민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 고구려의 토지에 자리 잡고 번성하였던 말갈(발해) 왕국을 한국사에 넣어야 하는가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698년 속말말갈인 대조영이 세웠던 말갈이라는 왕국은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된 후부터 발해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안에 옛 고구려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말갈(발해)의 신료로 활동했다. 그것을 가지고 발해를 고구려와 말갈에 의한 연합정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청나라를 여진족과 한족의 연합정권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한 발해를 한국사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그 때 안정복은 발해를 우리 역사에 수록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다.
문제는 지난 60년 동안 한국사학이 발해를 조금씩 승격시켜왔고 2002년부터는 국정교과서 ‘국사’에 발해와 신라를 일대일로 집어넣어 남북국시대를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신라의 유산이 없었다면 형성될 수 없었던 왕국이다. 그와 달리 발해는 고려의 형성에 별다른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 현재 한국·한국인을 만든 역사에서 발해는 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다. 여기에 발해를 한국사로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있다.
셋째, 이 책은 고구려사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앞으로도 새로운 가설은 나와야 한다. 그것이 고구려의 역사를 그럴듯하게 재구성해 나가는 길이다. 국정교과서 ‘국사’는 다양한 역사해석의 가능성을 말살하고 역사를 규격화하여 국민의 역사지식으로 강요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부체제설과 같이 역사를 왜곡시키는 가설을 ‘국사’에 수록한 것은 국가가 앞장서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이 책에서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구분을 하였다. 시대구분은 역사를 보다 체계적·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고 가설이다. 시대구분이 역사 자체일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신라의 초기국가 형성·발전 과정에 대한 해명 중 찾아낸 시대구분을 적용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비교사적인 방법의 적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한 시대구분을 이 책에서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자리 잡았던 예맥 지역의 정치적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에서는 부체제 단계를 시작으로 하는 기존의 시대구분이 갖는 문제도 분명히 밝혔다. 앞으로 또 다른 시대구분은 계속 나와야 한다.
다섯째, 이 책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생활사나 문화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은 것도 그 한 예다. 그것은 또 다른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점은 이 책이 그러한 문제까지 다루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섯째, 이 책은 지난 60년 동안 한국사학이 식민사학을 부둥켜안고 탄생시킨 후식민사학을 넘어서려 했다. 이 책은 그동안 한국사학이 풀지 못한 많은 문제를 새로 해석했고 결과적으로 문제도 제기하여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하였다. 예컨대, 지금까지 한국사학이 고구려 건국신화나 태조대왕 이전의 사료가 갖는 의미를 밝혀오기는 했으나, 태조대왕 이전 고구려의 역사를 이 책에서와 같이 본격적으로 다룬 예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후식민사학이 뭉개온 역사를 되찾는 작업을 한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광개토왕비'나 ‘삼국사기’와 같은 자료를 넘어 고구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도 된다.
일곱째, 이 책은 민족과 실증의 무대를 떠나 작성된 책이다. 민족·민족사를 외치며 다른 많은 사실을 은폐하는 방법으로 고구려의 강한 것으로 만드는 국수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그리고 실증을 외치며 왜곡된 역사를 정답이라고 내세우는 그런 책도 아니다. 다만 이 책은 고구려인 그들의 왕국을 그럴법하게 그려내고자 했을 뿐이다.
끝으로 이 책을 디딤돌로 하여, 정치적 목적을 버리고 고구려의 역사 그 자체를 위한 연구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 필자 이종욱 교수는 서강대에서 ‘신라국가형성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조선사연구’·‘한국 초기국가 발전론’·‘신라골품제연구’·‘신라의 역사’ 1·2 등 16권의 책과 '남산신성비를 통하여본 신라의 지방통치체제'·'백제의 좌평'·'고구려의 좌·우보와 국상'·'고구려의 지방통치조직'·'고구려의 중앙정부조직' 등 많은 논문이 있다.
남북국시대(신라-발해·7세기 후반~10세기 초반)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민족 개념에 입각해 발해를 한국사에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후삼국’이라는 용어도 널리 사용된 것은 1945년 이후의 일이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후삼국이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후삼국시대’는 ‘전국시대’로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신라 역사는 2000년 넘어… 기원전 12세기 권력자 등장”
이 교수는 “국사학계가 실증사학의 이름아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백제와 신라사의 절반을 포기했다”고 비판해왔다.
“경주 지역의 지석묘는 늦어도 기원전 12세기 이전에 축조되기 시작했다”며 “권력자의 등장을 말하는 지석묘 축조시기부터 보면 신라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이 된다”
“경주의 지석묘는 200곳이 넘지만 연대측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다른 지역의 지석묘가 기원전 14세기까지 올라간다며 경주의 지석묘도 늦어도 기원전 12세기 정도로 잡으면 안전하다고 했다.”
―한반도에만 지석묘가 수만곳이 넘는다.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다.
“신라의 기원인 사로 6촌은 각 촌마다 마을이 9개 정도씩 있었다. 마을마다 대표들의 무덤이 있다고 보면 지석묘가 그 정도 생길 수있는 것아닌가. 또 역사가 100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무덤 수도 많아졌을 것이다.”
삼한은 원래 경기 이남을 가리킨 용어로 신라가 정복한 지역을 삼한으로 볼 수있다.”
“후삼국이란 용어는 당시 수많은 군웅들의 존재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강릉 지역의 김순식처럼 당시 패업을 놓고 다투던 수많은 군웅들이 있었다. 또 당시 신라왕은 중국 전국시대의 주(周)나라 왕처럼 명목상의 군주로 존재했다. 후삼국이란 표현을 쓰면, 신라가 후백제나 고려가 동등한 지위로 다뤄진다.”
지금이야 말갈족이 없어진 민족이니깐 우리가 그냥 남북국시대를 만들어 발해를 넣어도 뭐라 할민족이 없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역사는 말갈족, 아니 발해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말갈족이 남아있다면 우리가 발해를 남북국으로 넣는것은 중국의 동북공정밖에는 되지 않는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따져봐도 로마가 유럽의 대부분을 점령한때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잉글랜드,에스파냐,프랑스지방에서
새로운 나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것을 이탈리아는 로마를 계승했다고 자신의 나라에 편입시킵니까?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명말하고 만주에대한 열망 때문에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서는 안됩니다.
지금이라도 남북국 시대라고 하지 말고 발해사를 좀더 연구해서 발해사를 발해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이런 주장이 나온 연유는 중국측 사서의 기록들에 있습니다. 발해인을 말갈의 일원으로 본 당나라가, 자신들의 기록에 발해말갈 내지는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말갈인으로서의 성향이 강하지 않았느냐는 문제에 따라 위와 같은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만 하더라도 만주에서 말갈은 그렇게 많은 비율을 차지한 종족이 아니었는데,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해서 갑자기 말갈족이 다수로 불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말갈이란 민족에 대해서 조차도 사서마다 다르게 등장합니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북만주에 살았던 말갈은 중국측의 기록에 나온 것인 반면, 삼국사기 등에서는 말갈이 한반도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두 기록을 그대로 수렴해서 보면, 5~6세기 물길은 백제를 침략했다가도 백제와 연합하려고도 하는 등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제서에는 숙신, 말갈, 물길이 같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여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이것은 제가 누차 강조한 것이지만, 말갈이 단일계(숙신-읍루-물길-말갈)로 내려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말갈을 100% 만주족의 조상,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로 이해해서는 곤란함을 뜻합니다. 말갈족 가운데에는 부여의 후손이라는 부유말갈도 있었고, 속말말갈 사람인 돌지계는 수에 투항하자 부여후라는 관작명을 받기도 하여 과연 우리와 말갈을 구분해서만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특히 천산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6말갈이 거주하던 곳은 대체로 예전부터 예맥계인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6말갈은 예맥계로 볼 여지도 높습니다.
(반면 중국측에 기록된 말갈은 유독 부여 등과 말이 다르다고 했는데, 이 말갈은 흑수말갈로 보여집니다. 흑수부로 대표되는 퉁구스계-우리와는 조금 이질적인-는 원래부터 만주의 주인으로 있었던 민족이 아니며, 후대에 금-청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이들이 만주의 주류로 변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로 볼 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그 세력이 고구려 유민이든, 속말말갈 세력이었든 이들이 우리와 구분되는 계통은 아닐 것임에 분명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흑수말갈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6말갈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고, 단지 생활 양식 면에서 농업이 아닌 수렵을 하고 살았던 정도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수렵을 하고 살았다고 해서 예맥계가 아닌 것은 아니지요. 양맥 부락 같은 경우도 수렵을 했던 세력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발해의 대부분을 차지한 사람들은 우리 민족과 이질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후대인들은 어떻게 발해를 인식했을까...이 문제는 조금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은 유득공을 기점으로 해서 발해를 우리 역사로 편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만, 명나라 사람이 쓴 조선세기라는 책에는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부분에서 발해가 언급되어 당시 중국인들이 발해를 조선의 역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종욱 교수는 "고구려의 역사" 책에서 김부식이나 서거정, 안정복 등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물론 김부식은 삼국사(기)라는 책 제목에서도 보듯이 삼국을 역사의 정통으로 생각하고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고조선이나 부여, 가야를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즉 그는 이들을 우리 역사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짧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국사절요를 편찬한 서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안정복이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말한 것은 주목할 부분입니다.
발해는 앞서도 언급한 바처럼 그 맥이 온전히 이어지지 못하고 멸망하였기 때문에 누구의 역사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발해가 멸망한 뒤 그 터전을 계승한 것은 거란과 여진이었기 때문에, 발해인의 요소가 거란으로 혹은 여진으로 흩어졌다는 말도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이들 만주 일원들은 차츰 우리와 멀어져 가게 되었다고 보는 것에 큰 이견은 없는듯 합니다. 문제는 발해가 얼마나 우리와 가까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민족 구성이나, 발해의 국가적 성격이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점 등에서 볼 때 발해는 우리 역사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여진족의 금나라 같은 경우는 우리와 상당히 멀어진 상태라, 한국사로 편입시키기 어렵다고 볼 수 있겠지요.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는 한반도와 점차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봅니다.
번호 : 68 글쓴이 : 블루데이즈
조회 : 156 스크랩 : 0 날짜 : 2005.06.15 15:42
지금의 한국사학은 後식민사학”
[경향신문 2005-06-10 19:45]
“해방 60년이 된 지금도 한국사학은 일제가 발명한 식민사학을 부둥켜안고 있다.”
역사학자 이종욱 서강대 교수(사진)가 한국사학계가 아직도 일본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국내 주류 역사학자들의 실명을 거명하며 맹비판하고 나섰다. 이교수는 현재 한국사학을 일제 식민사학을 답습한 ‘후(後)식민사학’이라고 명명하고, 후식민사학이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교수가 후식민사학자로 거론한 인물 가운데에는 노태돈(서울대)·이기동(동국대)·주보돈(경북대) 교수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들어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이종욱 교수는 지난 9일 한국고대사학회 홈페이지에 올린 ‘역사해방-우리 교과서를 왜곡시키는 후식민사학을 넘어 본연의 역사찾기’라는 글에서 “현재 일본 교과서의 한국사 왜곡을 비판하며, 우리는 국가가 주도하여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면서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국정교과서 등에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이교수는 이 글을 11일 고려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제85회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이교수는 식민사학의 대표적 잔재로 현재 역사학계가 여전히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신뢰하지 않고 3세기 이전 삼국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현행 ‘국사’교과서가 4세기 이전 신라의 국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진한의 한 소국인 사로국으로 기술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이교수는 “내물왕 때 진한의 소국들을 정복하였다는 ‘국사’의 주장은 식민통치시기 처음 발명된 것”이며 이처럼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식민사학의 연쇄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은폐·말살·왜곡·축소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교수가 식민사학의 발명자로 지목한 인물은 츠다 쇼우키치(津田左右吉). 일본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그는 1919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처음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上代)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교수에 따르면, 쓰다의 주장은 국내 1세대 역사연구자인 이병도·손진태, 2세대인 김철준(전 서울대 교수)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에서 식민사학의 연쇄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또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지만 ‘한국사신론’ 역시 ‘국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내물왕 이전의 신라 정복활동을 무시한 채 기술하고 있다며 이기백 교수 역시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내비쳤다.
이교수는 나아가 식민사학의 흐름은 제3세대 연구자인 이기동, 노태돈, 주보돈 교수 등에게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을 연구한 이기동 교수나 부(部)체제론을 펼친 노태돈 교수 모두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한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받아들이면 이러한 논리가 나올 수 없다는 게 이교수의 주장이다.
한국 실증사학은 내물왕 이전의 신라 역사를 〈삼국사기〉가 아닌 〈삼국지〉 한조를 중심으로 재구성해왔으며, 이는 일제시기 일본 연구자들이 만들어온 관행이라는 것이다. 그는 4세기 내물왕에 이르러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했다는 통설에 대해, 이미 1세기 중반부터 사로국이 이웃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했고, 3세기에는 진한의 모든 소국을 병합했다고 맞선다. 최근 풍납토성의 연대측정 결과는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삼국통일’이 아니라 ‘삼한통합’, ‘통일신라’가 아니라 ‘대신라’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신라가 패강 이북의 고구려 영토를 장악한 것이 아닌 만큼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남북국시대(신라-발해·7세기 후반~10세기 초반)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민족 개념에 입각해 발해를 한국사에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후삼국’이라는 용어도 널리 사용된 것은 1945년 이후의 일이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후삼국이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후삼국시대’는 ‘전국시대’로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말갈인으로 발해는 말갈족의 나라였다…(중략)…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킨 것은 역사 정복이자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세기적 희극이다…(중략)…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낸 민족이란 허구적 관념으로 역사를 비틀고 고문해서는 안 된다.”
< 발해사는 한국 역사에 편입시켜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한국이 현재 그 땅을 지배하고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말갈족의 역사인 발해사를 한국 역사에 넣을 수는 없다. 이렇게 한다면 역사적인 침략 행위인 것이다.>(역사충돌,김영사)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신간 ‘고구려의 역사’(김영사)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국이 아니며 이민족 말갈의 나라일 뿐”이라며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어야 하는 타당한 근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현재 남한과 북한에서 학문 권력을 장악한 연구자 집단이 말갈(발해) 왕국을 한국사로 만들었다. …발해는 고구려가 아닌 말갈에서 출발한 왕국이었다.”
이 교수는 “발해는 속말말갈인이었던 대조영과 그 후손들이 왕정을 장악한 말갈족의 왕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수십년 간 한국사학이 발해를 한국사로 승격”시켰고 “이제는 국가가 주도해 말갈(발해)을 한국사로 만들어 국민의 역사 지식으로 공식화하고 있는 것”이라며 “국정교과서에 발해를 대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국ㆍ북국으로 설정한 것이 타당한가. 누가, 어떤 근거로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는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발해를 발해인 그들의 역사로 살려낼 때, 중국인들에게 발해를 중국사로 정복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할 수 있을 테고 나아가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역사 정복하고 있는 중국학계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올해 초 ‘발해제국사’를 출간한 서병국 대진대 교수는 “중국 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 대조영이 ‘고구려에 부속되었으나 속말말갈’이라는 대목이 나오지만 이보다 앞선 ‘구당서(舊唐書)’에는 ‘고려별종’이라는 다른 설명이 있고, 당시 중국이 발해를 끊임없이 비하하려고 했다는 정황을 감안하면 ‘신당서’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고구려의 지배층인 고(高)씨 중에는 같은 고씨와 혼인하기 위해 성을 장(張)씨로 바꾼 사례가 있다”며 “대조영도 그런 이유로 고씨 성을 바꿨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발해사를 전공한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대조영은 말갈족이었지만 그 선대에 고구려에 귀속하여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엔 말갈족보다는 고구려민이라는 귀속의식을 가졌다고 설명한다.
경성대 한규철 교수는 “말갈은 당시 동북방 이민족이자 고구려 변방민에 대한 범칭이자 비칭이었기에 ‘구당서’는 발해의 종족 계통을, ‘신당서’는 그들의 출신 지역(속말수인 쑹화강 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인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이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은 일본의 연구자들이 정치 행위의 도구로 발명한 고구려사의 틀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몇 세대에 걸쳐 그들의 스승이나 선배들이 왜곡시킨 역사의 틀을 확대 발전시키며 고구려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며 이른바 ‘부(部) 체제’설도 비판했다.
그는 “고구려의 왕이 피병합국의 지배 세력들과 연합 정권을 형성한 일이 없다”며 “소위 부 체제설을 따르는 연구자들이 주목한 제가 회의는 각 나부의 회의일 뿐 왕국 전체의 제가 회의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조의 기록은 국내 학자들 주장 대로 “주어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니라 왜 그 자체”라며 하지만 이것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깔아뭉개고 그 존재를 무시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발해사 편입도 부당한 역사정복” 주장
문제의 광개토왕비 탁본 중 신묘년 조의 기록,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었다.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서 (또는 신묘년 이래) 백제, △△, 신라를 쳐서 그 신민으로 삼았다’는 부분에 대해 일본인 연구자들은 원문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이라 주장해왔고,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들 문장에서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돼 있다며 고구려가 바다 건너 왜를 쳐부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런 해석 둘 다 부정한다. 그는 신묘년보다 불과 20년 앞선 371년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군과의 평양전투에서 전사한 사실 등을 지적하면서 비석에서 백제를 백잔이라 폄훼하는 등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왜의 존재를 부각시킨 문제의 부분은 그 사실을 기록에 넣고 싶지 않았던 고구려 왕실의 의도적인 비틀기로 해석해야 한다며 여러 방증자료들을 제시한다. 건국신화속의 주몽은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대에 걸친 왕들의 업적을 그 한사람에 집약한 것일 가능성이 크고 그의 아들로 기록된 유리왕도 몇대 뒤의 왕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당시 상황에서 위나 수·당과의 조공관계는 오히려 고구려가 정복당하지 않은 독립국이요 외국이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고 지적한다.
말갈족의 발해사나 여진족의 금사를 국사에 넣자는 얘기는 중국이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에 넣자는 것과 같은 부당한 ‘역사정복’
"한국사학계의 학문권력을 장악한 연구가들은 일본에 사기 당한 역사를 되찾지도 못하면서 국수주의적인 역사정복의 추태를 벌이고 있다"
"삼한 사회에서 천군이 소도의 의례를 주관했다는 국사 교과서의 내용은 허구입니다. 사료 어느 곳에도 이런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천군과 소도'의 이야기로 '역사충돌'은 문을 연다. 그는 "천군이 소도를 주관했다는 설명은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며
7차 '국사' 교과서는 발해를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으로 격상, 말갈족의 왕국인 발해를 한국사에 끌어들이는 역사정복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속말말갈(粟末靺鞨)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국수주의적 잣대로 말갈족의 역사를 한국사로 조작하는 것은 또 다른 역사정복, 침략 행위라는 것이다.
첫댓글 송호정 임지현 김한규 이종욱 교수, 이 네사람이 그나마 좀 역사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이분들의 주장들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제일중요한것은 맞다고 생각한다.또 이들이 다른 쓰레기 무리들보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이게 가장 중요) 송호정,임지현교수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김한규 교수와 이종욱 교수는 중국의동북공정등을 비판한다.(난 이왕 여기까지 온것 중국의 동북공정도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중국학자가 쓴 책,논문들을 읽어 봤다.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것에 대해서 매우 놀랐다 아무튼...뭐 그렇고.. 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