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연중 제14주일) 하느님께로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 본래 그렇지 않았는데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들이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은 이후로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유전자가 사람 안에 만들어져 전해지게 됐나 보다. 예언자들조차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하거나 요나 예언자처럼 니네베로 가라고 했더니 대놓고 다른 곳 타르시스로 가버린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요나 1,1-3).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닮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하느님은 진리요 선(善) 그 자체이니 고민하거나 조언을 구할 필요 없이 당신이 하시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분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을 완전히 닮지 못해 제멋대로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게 선이고 진리라고 우기게 된 게 아닐까? 하느님은 당신이 하시고 싶은 대로 하면 다른 이들에게 선이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독재자들의 끝이 어땠는지 그리고 독선적인 이들이 공동체 구성원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하느님을 향할 때만 진정한 자유가 된다. 그래서 성인들은 하나 같이 그 자유를 제대로 사용할 자신이 없으니까 매일 매 순간 그것을 하느님께 드렸다.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산다.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다. 역시나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그분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다. 예수님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설교를 듣고 그분이 일으키는 기적을 보고서 그저 놀라기만 할 뿐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이렇게 말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없다. 니코데모의 말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는데(요한 3,2)’ 말이다. 사실 예수님을 제일 사랑한다고 자부했던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을 정면으로 막아섰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하느님은 정말이지 인간이 알 수 없는 분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쉽게 설명해 줘도 뿌옇게밖에 알아들을 수 없고, 죽은 이를 되살려내는 분이 정작 당신은 십자가형을 받아 죽는 하느님 마음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아둔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참사랑을 모르기 때문일 거다. 사랑을 몰라서가 아니라 나를 너에게 줄 마음이 없기 때문일 거다.
본래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주 쉬운 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분이었다. 지금처럼 고민하고 연구하고, 때론 도박처럼 믿어야 하는 분이 아니었다.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걸 예수님은 이미 알고 이 세상에 오셨다. 시메온의 예언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루카 2,34).’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다. 그런 이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돌려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 즉 세상의 죄를 없애려고 기꺼이 죽임을 당하셨다. 이를 듣고 가슴을 치며 송구한 마음으로 그리고 지극히 감사하며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이들은 축복받은 이들이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졌지만 모두가 믿는 건 아니다. 그러니 믿음은 선물이다. 믿는다고 모두가 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다. 주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키려는 바람이 점점 커진다면 그는 하늘나라에 가까이 있는 거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 믿음이 부족한 저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주님께 마음을 열어드리니 저를 차지하십시오. 저는 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 말씀을 하느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게 도와주소서. 아멘.
구속주회 이종훈(macario)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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