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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순수승부사
1700년대 후반에 한 부유한 집에서 사치스러운 음식을 개발해 먹어서 널리 소문이 난 것이 있었다.
그 음식은 바로 일종의 떡국이었는데, 국속에 들어가는 떡을 극히 교묘하게 만든 것이었다.
귀여운 어린 아이의 모양으로 떡을 빚는데,
눈 코 입 귀 피부를 어린 아이와 꼭 같이 정밀하게 만들고 팔과 다리 또한 진짜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음식은 눈으로 보기에 귀엽고 살아 있는 작은 사람처럼 생생하게 꾸미고,
귀로 듣기에 국물 속에서 움직이고 국물이 스며들고 나올 때에 소리가 먹음직 스럽고,
코로 맡기에 냄새가 향기롭고, 혀에 닿으면 맛이 오묘하고,
어린 아이 모양의 떡을 이빨로 뜯어 씹을 때
입술과 잇몸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기분 좋게 만든 것이었다.
이 음식은 널리 소문이 났는데, 곧 이 사람은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음식 사치를 극도로 부리는 자는 망한다는 속설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예로, 1651년 김자점의 가문이 망할 무렵 즈음에,
김자점은 모든 음식이 씹기에 단단하다고 투정을 부려서,
오직 갓 부화한 직후의 병아리만을 구해다가 알에서 겨우 병아리로 변한
그 직후의 상태로 요리하여 씹어 먹었다고 한다.
- 원본출전 청성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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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뱃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속설 중에
임산부가 배에 타고 바다에 나가면 안된다는 것이 있었다.
당시에도 미신이라는 생각은 있었으나,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이 물 속에서 임산부가 물 위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느끼면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화를 내면서
큰 비바람을 불러 일으켜서 배를 빠뜨리려 한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항해하는 도중에 위험한 바람과 파도를 맞이 하게 되면,
뱃사람들은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임산부가 없는지 확인하곤 했고,
만약 임산부가 발견되면 다른 사람들을 살게 하기 위해서 배에서 뛰어 내리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식을 갖춘 선비들은 이러한 행동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는 겁에 질린 사람들은 모두 한 뜻으로
임산부를 탓하며 몰아 붙이기 마련이었고,
그러다보면 배에 탄 임산부는 몰린 끝에 물에 뛰어 들어 익사하곤 했다.
간혹 임산부가 없을 때에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배를 탄 여자를
아무나 임신했다고 몰아 붙여서 바다에 내던져 버리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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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사망한 이륙(李陸)은 광주(廣州)에 사는 80세가 넘은 한 노인이
평생을 살면서 본 가장 이상한 것 두 가지를 듣고 기록에 남겨 놓았다.
그 첫번째 이야기는, 남해에서 본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노인은 젊은 시절 어떤 사람이 남해 해변에서 죽는 모습을 보았다.
이 사람은 이상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시체를 치워줄 사람이 없어서 바닷가에 쓰러진 모습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어 낮이 되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죽은 사람의 살이 점차 썩기 시작했는데,
썩은 살이 점차로 웅크러들더니 점점 모양이 미끌거리는 이상한 작은 덩어리들로 변해 갔다.
곧 이 죽은 사람은 온몸이 수없이 많은 개구리로 변하게 되었다.
이 수많은 개구리들은 죽은 사람의 옷에서 부터 튀어나와서 팔딱팔딱 뛰더니 점차 바다를 향해 갔다.
개구리들은 모두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물속에 들어가자 다리를 몸속에 집어 넣고 꽁무니에서 꼬리가 돋아나는듯하더니,
모두 평범한 물고기 모양으로 변했다.
잠깐 사이에 이 물고기들은 모두 헤엄쳐서 바다 어디론가 사라져 갔고,
해변에는 죽은 사람의 텅빈 옷가지만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원본출전 청파극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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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에 사망한 이륙이 남긴 가장 이상한 이야기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가면놀이에 흠뻑 빠져서 이런저런 가면을 구하며 다녔다.
그런데 나무로 되어 있는 어느 이상한 가면을 발견한 뒤로,
가면을 덮어 쓰고 춤추고 노는 일에 더욱 빠지게 되었고,
그와 함께 이상한 병이 전염된 것 처럼 시름시름 병을 얻어 앓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병을 얻자 이 집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무당은 "나무 가면이 병을 일으킨다"고 했다.
결국 이 사람은 그 이상한 가면을 들판에 버렸다.
그랬더니 곧 병이 나았다.
아마도 가면이 얼굴에 붙어서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빨아 먹은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몇 달 쯤 뒤에 우연히 가면을 버린 들판에서 다른 사람이 그 가면을 보게 되었다.
가면은 반쯤 썩어 있었고, 그 부분은 버섯으로 변해서 살고 있었다.
버섯이 향기롭고 먹음직스러워서 이 사람은 버섯을 뜯어 먹어 보았는데,
그러자 갑자기 비실비실 웃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히죽거리면서 웃다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가면을 덮어 쓰고 미친듯이 춤을 추는 몰골과 같았다.
다른 사람 하나가 또 버섯을 조금 떼어 먹어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웃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한참 후에 버섯을 먹은 사람들의 발작이 그친 뒤에 물어보니,
"처음에는 웃음이 나면서 기분이 좋고,
나중에는 날뛰고 춤추는 것을 뜻대로 멈출 수 없이 계속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아마도 단순히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이 우연히 생겨나 벌어진 일이겠지만,
가면의 모습과 버섯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면서
사람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이상한 생물이라는 느낌도 드는 이야기이다.
- 원본출전 청파극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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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8년. 성운(成雲)은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아 먼 경상도 땅으로 온 상황이었다.
항상 중앙의 조정과 한성부를 다스리는 직위 정도만을 떠돌던 그로서는 피곤한 여정이었다.
성운은 기묘사화에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는 데 한 몫한 사람으로 악명이 높았고,
때문에 성운 때문에 자신의 친지가 죽었다고 그를 원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원한을 많이 샀던 성운의 죽음은 정신병 발작으로 인한 죽음 기록 중에 유명한 것이다.
성운은 어느날 대낮에 잠깐 낮잠이 들었다가 가위에 눌리게 된다.
성운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가위에 눌린 상태라서 움직일 수도 없는데 이상한 귀신이 가득 보이기 시작했다.
성운은 자신의 좌우에 기괴한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눈, 코, 입이 없는 살로 되어 있는 얼굴에,
팔 다리 도 없이 몸뚱이만 이리 자리 뒹굴고 있었고,
머리카락과 이마 부분도 없는 상태였다.
성운을 그 모습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서 괴로워 했는데,
도저히 겁이 나서 그 모습들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눈을 애써 감으려고 하였다.
성운은 이후로 발광하여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중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괴로워하고,
눈을 뜨면 그 모습이 보일까 두려워서 질끈 눈을 감은채로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10여일을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성운은 사망하였다.
- 원본출전 기묘록 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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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에서 1592년 초에 이르기 까지,
당시 서울에서는 "등등곡(登登曲)"이라는 이상한 춤을 추며 정신 없이 노는 놀이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것은 일부러 정신나간 행동을 따라하면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 날뛰고 노는 행동이었는데,
주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여서 일부러 바보짓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설치는 것이었다.
히죽히죽 웃는 표정으로 짐승 같은 동작으로 아무렇게나 마구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가 하면,
밤새 깔깔 거리고 웃으면서 뒹굴고 그러다 갑자기 엉엉 울기도 하면서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네" 따위의 말을 서로 소리지르며 주고 받았다.
이 놀이를 할 때에는 기괴한 귀신, 괴물, 도깨비의 모습을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괴상한 옷을 입고 뛰어다니기도 했고, 정상적인 것이 아닌 겉모습,
사람이 보통 떠올리기 힘든 모습을 일부러 찾아서 몸에 걸치기도 했다.
이들은 무당의 모습이나 기괴한 행색 따위를 일부러 따라해서
서로서로 미친 모습을 자랑했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정신나간 듯한 동작만을 계속하며 밤새 놀았다.
이러한 퇴폐적인 기행은 삽시간에 퍼져서
수백명, 수천명이 한 데 엉켜서 이런 놀음을 하기에 이르렀고,
"한 번 죽으면 아무 소용 없으니, 지금 취하고 배부른 것이 제일이다" 따위의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이 놀이에 심각하게 빠져드는 사람들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무작정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놀기만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걸인이 되는 사람들까지 나타날 지경에 이르렀고,
유명한 선비와 명문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정효성(鄭孝誠), 백진민(白震民),
유극신(柳克新), 김두남(金斗南), 이경전(李慶全), 정협(鄭協), 김성립(金誠立)등이
이 등등곡을 즐긴 것으로 알려 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당쟁의 상황에서 허망함을 느낀 양반 가문에서
은밀히 어떤 일탈적인 취미가 유행했던 것이 갑자기 크게 퍼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후기의 여러 서적에서는 이것이 임진왜란 직전의 망조를 상징한다는 식의 해석도 통용되었다.
- 원본출전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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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9년 6월 26일, 선조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조를 시켜서 공사로 삼아라."
결국 현상금을 걸어 신고하고 체포하도록 특명이 내려졌다.
당시 사람의 고기와 간담이 창질(瘡疾)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라고 해서 비싼 값으로 팔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힘없는 아이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하는 것은 물론, 어른이라고 해도 혼자서 길을 걷노라면 잡혀서 배가 갈리
고 쓸개가 빼내어졌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인적이 드문 산의 골짜기에는 나무에 묶인 채 배가 갈려 죽은 사람들이 줄줄이 널려 있어, 나
무꾼이 나무를 하러 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섰는데 나무마다 배가 갈린 시체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면, 어느 나무꾼이 그걸 보고 싶어 산에들어갔을까.
행여나 그런 무도한 일당들과 마주친다면 이번에 배가 갈리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라에서 직접 나서서 사람 배를 갈라 간과 쓸개를 빼어가는 이들에게 현상금을 내걸었던 것이다.
아직 임진왜란이 시작되지도 않은, 굳이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평화로운 조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사서에는 창질(瘡疾), 나질(癩疾) 등으로 기록된 질병은 문둥병,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도 한다.
나병은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신체 일부가 없어지는 끔찍한 증세 때문에 인간의 역사상 혐오의 대상으로 다뤄졌다.
이스라엘의 성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진시황 시대의 법률문서에서도 나환자들을 격리시키는 규
정이 나와 있을 정도로 오래된 질병이다.
한국에서도 소록도가 생기기 전까지, 나환자들은 이리저리 떠돌면서 걸식하고, 온갖 악평을 들으면서 감금되었고, 돌
팔매질도 당했으며 때로 죽임까지 당하는 가혹한 대우를 받아왔다.
현대의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이 되지 안되는 병이고 도중에 치유되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물론 아직까지도 이런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 대신 오래전 속설에서는, 어린아이의 간이 나병의 특효약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있었다.
당연히 나환자들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고, 그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는
소문은 심심치 않게 전하고 있다.
명종 19년에는 상주(尙州)에서 정은춘(鄭銀春)이라는 사람이 같은 동네의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를 꾀어 산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 살을 구워먹은 일이 벌어졌다.
기록에는 병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정은춘은 아마 나병이나 기타 난치병 환자였을 것이다.
명종은 이 사건에 크게 놀라 자세히 취조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사람을 약으로 쓰는 방법이 완전히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유행했다.
명종 21년에는 좀 더 참혹한 현실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서울에는 사람을 죽여서 쓸개를 빼내어 가는 일이 많이 있었고, 이로써 처벌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방종한 생활 덕에 창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떤 의관이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병이 낫는다고
말하자 사람을 죽여 배 가르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도성 내의 동활인서(東活人署), 보제원(普濟院), 종루(鍾樓) 근처에는 걸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종루는 지금의 종로이고, 나머지 장소들은 모두 걸인이나 부랑자, 병자들에게 먹을 것과 약을 나눠주는 구제기관이었다.
하지만 약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이들 걸인들을 하나 둘 잡아가 쓸개를 빼내 죽였고, 불과 4~5년 만에 길거리에는 걸인
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걸인들은 아무 기댈 곳 없어 이런 곳에 찾아온 이들이었으니 하나나 둘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걸인이 모두 사라지자, 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을 뻗치게 되어 당시 사람들 중에서 아이를 잃
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간을 빼내어 갔을까?
이는 장기 중에서도 간, 그리고 정확히는 쓸개가 가장 약효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웅담을 보면 알 수 있듯, 동물의 쓸개는 가장 귀중한 약재 중 하나였다.
조선팔도 곳곳의 특산물을 기재한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곰은 물론이요, 소, 돼지, 잉어, 담비, 고슴도치의 쓸개들이
주요 특산물로 많이 기재되어 있다.
동물의 쓸개도 좋은 약일진대, 사람은 어떠할까. 그런 믿음에서 나온 게 아닐까.
세조 시대 때는 신숙주가 함길도에서 올린 장계에는 사람 쓸개를 약으로 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변경의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을 피해 도망쳐온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여진족 중 화살 맞은 사람이 많자
중국인들의 쓸개를 빼내 독을 치료하려고 하여 도망쳤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장기가 꼭 나병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약재로도 쓰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사람 쓸개를 빼내어 중국에 팔아 돈을 챙긴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꽤나 오래된 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선조 시대 때에는 이런 소문이 너무도 크게 번졌다.
평소라면 그냥 말썽을 피우고 지나치게 노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했을 법한 이야기가, 이제는 도성 안을 떨게 만들고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왕이 직접 사람 간을 빼어가는 범인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정도가 더 심각했던 것은 선조 40년 5월이었다.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간담을 빼어간다는 소문이 번졌고, 당시 서울에서는 사람이 혼자서 다니지 못하고 무리
를 지으며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이런 소문은 전국적으로 번져서 아녀자들은 물론 선비들까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숨어 다녔다.
사람들은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농부들은 농사를 그만두었다.
한마디로 온 백성들이 온통 두려움에 떨었다.
과연 사람의 간담이 약효가 있었는지, 그것을 빼가는 조직이 있었는지 분명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는 살인자들을 잡으면 큰 상을 주겠다는 방을 걸었다.
심지어 사간원에서는 사람을 죽여 간을 빼내어 가는 범인들을 열심히 잡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 우 포도대장을 파직시
킬 것을 청하기도 했다.
포도대장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 하겠지만, 사안은 위중한데 쉽게 해결되지 않으니 사람들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선조 시대 때에 이 같은 식인의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사회가 불안해지기까지 했을까.
사람을 죽여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나 어려울 때나 심심찮게 존재했다.
그런데 이것이 나라를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평범한 사실은 아니다.
여기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사람의 쓸개를 빼어가는 소문은 반드시 가뭄, 그것도 전국이 타 들어갈 만큼 심각한 가뭄과 맞물려서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소문이 돌았던 선조 10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등 법석을 벌였고, 같은 소문이 돌았던 선조 40년에는
훨씬 더 정도가 심해서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4월부터 날씨가 가물었지만, 나라는 느직느직 준비를 해서 5월 초에야 겨우 기우제를 치렀다.
기우제를 벌인다고 해서 반드시 비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기우제라도 벌이는 것과, 그저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어차피 하늘이란 현대 과학의 힘으로도 정확한 일기예보를 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이다.
하지만 불행한 일이 거듭되고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는데, 아무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불안해지게된다.
조선기담 - 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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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9대 왕 숙종때의 (재위 1674∼1720)의 일로
평소 건강하던 숙종은 갑자기 신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높은 열에 시달렸고 점차
위중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약을 바쳤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습니다.
이름 높은 의원들이 진맥을 해보니 역질로 판명이 났지만 그들이 아무리 약을 써봐도 효력은커녕 병세가 점점 더해 갔
습니다.
수많은 명의가 병을 고치려고 했지만 숙종의 병은 차도가 없었습니다..
숙종의 몸엔 고름이 나오며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귀신이 있다고 허소리를 하는등 병세는 더욱더 심해져 갔습니다..
숙종의 눈엔 역질신명을 비롯한 여러 잡귀들이 몰려와 그의 목을 조르고 칼로 몸을 찌르는등 괴롭혔기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고통 속에 지내던 어느 날, 숙종은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전날까지도 날뛰던 잡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문 앞에 어떤 장수의 영이철모와 갑옷을 입은 채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숙종이 비몽사몽간에 장군의 이름을 부르자 장군의 모습을 한 영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 했습니다..
“너는 누구냐?”
“요동백 김응하(金應河, 1580~1619)입니다. 소신은 민 왕후님(인현황후)이 전하를 차도를 빌며
기도를 하자 그 정성에 전하를 보호하기 위해 왔나이다..
그리하여 잡귀들이 들끓는 것을 보고 놈들이 못 들어오게끔 막고 있습니다.”
요동백 김응하는 조선 선조 때 출생하여 광해군 때까지 나라의 일을 하던 장수 였습니다.
그는 강직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당시 만주 땅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하자,
명에서는 1618년 건주위(建州衛)를 치려고 명(明)나라에서 조선에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참전하였습니다.
싸움은 점차 불리해 졌고 명나라 유정(劉綎)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차령(富車嶺)에서 패하여 자결하자,
김응하 장군은 3천 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그도 전사하였습니다..
김응하 장군의 활약과 용맹함을 명나라의 황제도 인정하여 그에게 요동백(遼東伯-요동의 주인)이라는호칭을 내릴정도 였죠..
그가 생전에 역병에 걸려 위중하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그의 벗이 약을 가지고 김 장군의 병상에 이르니, 장군은 열에 이끌려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벗은 훌륭한 장군이 병으로 헛되이 죽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가 일찍이 나라 일을 하다가 싸움터에서 죽지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되니 누가 그대를 알아주겠는가!”
이 말을 들은 장군은 별안간 눈을 번쩍 부릅뜨고 소리질렀습니다.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로다. 어서 약을 가져오라!”
김 장군은 그 자리에서 약을 세 사발이나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내 쾌차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생전에 역병을 물리친 바 있는 김 장군이 였기에 죽어서도 역귀를 물리치는 수호령이 되었나 봅니다..
그 후부터 숙종이 잠들면 어느 때나 김응하 장군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잡귀도 침범하지를 못하였고,숙종은 침식이 편해졌고 병세도 차츰 차도가 있었습니다.
숙종은 오래지 않아 쾌차하였고 숙종은 그 보답으로 김응하 장군을 모신 충렬사에 사람을 보내어 정성껏 제사를
드리도록 하며 충별비를 세워 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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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유명 연쇄 살인마라면 5명의 기녀와 부총리 유희서를 살해한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수십명의 상인과 부녀자를 죽인 해적 김수은
4명의 여인을 성고문해 죽인 권채(權採, 1399~1438)가 유명 합니다.
이중 임해군이나 김수은은 일종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채는 당시 최고 문장가로 뽑힐 정도로 학문도 깊고 매사에 반듯한 사람 이었죠.
즉 정신은 멀쩡하나 감정이 저하된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다고 보입니다.
조선조 세종 9년 5월 22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해 장안에 떠들썩 했습니다.
여인이 죽은 채로 물에 내려왔는데 시체는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었고 성기에서 항문까지의 부위가 칼로 도려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얼굴 마저 도려내져 신원을 알수도 없었습니다..
이후 몇주를 간격으로 실종된 여인들의 시신일 발견 됬는데 온몸이 불로 지져 있다던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분노한 세종은 범인을 잡으라고 명했고 수많은 의금부사와 어사들이
사건을 조사하고 거리를 순찰 했습니다..
그리고 '무원록(無寃錄-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로
세종 22년에 이를 바탕으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함, 시체를 검시 하는법등이 상당히 자세 하게 나옵니다)'
을 바탕으로 시신을 과학적으로 조사합니다
그리고 그나마 얼굴이 손상되지 않은 한 여인의 골격 등을 살펴
얼굴을 그려냈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원을 조회한 결과 덕금이라는 여인으로
당시 최고 문장가이자 집현적 학자인 권채의 몸종이란걸 알게 됩니다..
당시 사건을 맡은 의금부 신상은 권채가 세종의 글 스승이기도 했고 당시 문장가라 함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자 아얘 잠복을 했는데 잠복 한지 4일정도 되자 한 여인이 갑자기
대문을 열고 도망나오고 몇몇의 남자들이 그녀를 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상이 수하들과 함께 여자를 구출 했는데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앙상 했습니다.
그녀의 진술로 인해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 졌는데
권채가 수하들을 시켜 여자들을 납치해서 일주일간 잔인하게 성고문해 죽인 거였죠.
권채는 3년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도 상당히 지식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잡힌 여인들은 거의 일주일을 고통을 당하다 죽었는데 몸의 힘줄과 핏줄을 도려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여자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고
개의 변을 먹게 하는등 성고문 방법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권채는 의금부에 소환됬지만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문 연구를 했을 뿐이라고 일축 했죠.
게다가 수많은 집현적 학자들과 세종이 권채의 편을 들어
결국 무혐의로 풀려 나고 좌천 되지만 곧 복귀 합니다.
대신 애꿎은 권채의 처 정씨가 질투로 노비를 살해 했다는 누명을 받아 곤장 아흔대를 맞다가 죽었죠.
권채는 이후에도 <작성도(作聖圖)>,<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 하는등 왕성한 학자활동을 하다가 40살이 되자 갑자기 급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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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 남천동입에서 갈라지고 있는 삼거리를 지나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를 예로부터 '흔행이 고개'라고 합니다..
이 고개는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직접 넘지 말라고 명할 만큼
출입이 금기시 된 곳이 였습니다..
조선 중엽 어느 농부가 소를 판 돈을 가지고 고개를 넘다가 산적에게 재물을
뺏기고 죽음을 당하는 일이 벌어 졌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밤에 고개를 넘는 사람들 앞에 머리를 산발한 남자 귀신이
출물하기 시작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넘다가 다음날 죽은체 발견되는 끔찍한 일까지 벌여 졌습니다,,
정조(1752~1800)때도 이 고개를 넘다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왕이 직접 그곳으로
출입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 였습니다..
이후 조선 헌종대에 이르러서는(1835∼1849) 음성 현청에서 죄수를 효수하는데
이 곳 고개에서 참수를 했고 죄를 지어 장도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몰래 이 곳에 시체를 가매장 했다고 합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고개에는 대충 묻힌체 썩어가는 시체의 흉한 모습과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코를 둘 수가 없었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흉측한 고개라고 해서 이 고개이름을 흉행을 하는 고개라는 뜻으로 흉행이 고개라고 했다가
오늘날 '흔행이 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후에도 출입이 금기시 됬는데
일제 시대 이곳에 별장을 지은 한 일본 상인 가족이 죽음을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설이 됬지만 그 근처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고개를 넘는걸 기피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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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창귀란 귀신이 있는데 크게 두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된 창귀(倀鬼)와 고양이에 의해 생겨난 귀신을 의미 합니다..
옛날엔 고양이가 죽은 사람의 시신 곁에 있으면
사람의 혼이 고양이에게 물들어악령이 된다고 믿었는데
이런 귀신을 창귀라 불렀는듯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 창귀중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 비슷한 성질의 창귀를 얘기 합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 >나 고려 시대의 <속요담>이라는 괴담집을
보면 창귀는상당히 악질적인 취급을 받는 악령으로 묘사 됩니다.
창귀는 보통 아이가 된다고 하는데 게중 부모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른 아이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은 아이들의 시신을 제대로 장례식을 하지 않고 한곳에 모아서 돌로 무덤을 만들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무덤을 애기살이 혹은 아장살이 라고 합니다..
참고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 역시 호식총이라는 돌로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두 귀신이 같은 이름을 가진걸로 생각 됩니다..
암튼 애기살이 묻혀진 아이들의 원령은 너무 어린 나이라 저승에도 못가고 있는데
이 무덤을 고양이가 뛰어 넘으면 그 아이의 영은 창귀가 되었다고 합니다..
창귀는 얼굴이 창백하며 고양이처럼 세로로 찢어진 눈을 하고 있는 아이의 형상을 하며
배고품과 갈증 때문에 민가로 들어와 짐승들의 피를 빠는데 점점 맛을 들여 산사람을 헤친다고 합니다..
창귀는 특히 자신을 버린 부모와 어른들에게 원한이 크며 생전 자신의 집에 들어가
재앙을 주거나 그 집에 있는 아이들의 피를 빨아 먹기도 해서
상당히 악질적인 귀신으로 여겨 졌다고 합니다..
창귀는 아이 특유의 순수하지만 악한 면을 가지며 상당히 물리치기 힘들다고 합니다..
보통 어른이 된 귀신은 생전의 원을 씻겨 주거나
원하는 것을 들어 주면 되는데
아이에는 모든것인 부모에게 버림 받은 창귀는 달랠 만한 점이 없기 때문 입니다..
창귀를 물리치는 방법은 특이한데 창귀의 앞에 한줌의 쌀이 떨어져 있을 경우,
창귀는 그 쌀을 세느라 시간을 보내게 되며 이때 무당이 창귀의 주위로 진을 치거나
동자신을 보내 제압 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용재총화에 나오는 얘기를 보면 전라북도 완주에 애기살이 터가 있었는데 어느날 만취한체 산으로 들어간 청년 둘이 날이 밝아도 오
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찾으러 갔는데 아장살이 근처에서 청년들의 시신이
발견 됬는데 몸의 군데군데에 할퀴어 진듯한 상처가 나 있고
몸에 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의논 끝에 아장살이를 태웠는데 불에 탈때 아이와 고양이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고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마을을 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다른 괴담을 보면 한 중년의 여성이 백정에게 방급 잡은 소의 고기를 집으로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 오는 느낌이 들
었다고 합니다..
아낙은 처음은 그려려니 하고 다시 길을 갔는데갑자기 허리쭘에서 묵직한 느낌이 느껴졌고 어딘선가 뭔가를 핥는 듯한 소리가 들렸
다고 합니다..
이상한 생각에 아낙이 고개를 내리자 그녀의 허리에 한 봉두난발의 아이가
아낙의 허리에 매달려 고기에서 나오는 피를 핥고 있었고 아낙은 그대로 기절 했고 몇일뒤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흡혈귀에는 창귀외에 두억시니가 있는데 두억시니는 부정되고 악화된 악령들의 피를 정화 하는 신적인 면이 크지만
창귀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사악한 전형적인 흡혈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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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靑丘野談-조선 헌종때 출판된 걸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야담집)에 기록된 이야기로
조선조 연산군때
영월읍 흥월리에 잣나무백이라는 마을에 신영언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집은 살림이 부유하여 여느 양반들 처럼 첩까지 두고 지냈습니다..
그러던중 첩이 경읍이라는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은 준수하게 생겼을 뿐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쎈 장사였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조선시대는 서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죠..
경읍 역시 차별을 당했고
그는 점차 자신에 대한 사람드르이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불만은 점점 집안 사람들에 대한 원망으로 치닫았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까지 차별을 당하자
그 한이 더욱 커져서 말썽을 부렸습니다..
워낙 기운에 쎄 하인 한두명으로 말리기는 어려웠고,
점차 그 집안과 마을에서도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집안의 가장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온 집안이 장사 준비로 골몰했습니다..
경읍은 유일하게 의지하던 부친이 작고하였으니
허탈한 마을을 가눌수가 없었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갔으나 가족들에게 의해 쫒겨 났습니다..
부친의 제사 때에도 서자는 제청에 들지 못하고 뜰 아래에서
절을 해야만 했야만 했기 때문이죠..
이에 그의 분노는 점점 가중되었고,
아침부터 대취하여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오일후 신씨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지관이 명당이라고
점지한 땅에 봉분을 짓기 위하여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이때 만취한 경읍이 나타나 관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의 시체가 땅속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나니
심사가 더욱 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죠.
이 광경을 본 문중 사람들은 참다 못하여 술취한 그를 흙구덩이에 밀어 넣고,
술이 담긴 큰독을 들어 그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흙이며 돌을 마구 던졌습니다.
본래 미움을 받던 그인지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군중심리가 작용하여
모두 돌을 던지고 흙 메우는데 참가하였죠.
이렇게 하여 경읍은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신씨가는 경읍의 처자식을 마을에서 쫒겨내고 그의 죽음은
문제삼지 않고 쉬쉬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명당 자리를 알아 봐서
그곳에 아버지의 시신을 매장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그 마을에서는 가축과 사람들이 질환에 걸리는등
이상한 재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밤마다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길을 가다가 죽은 경읍이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고
혼절해 죽는 사람들도 생겨 났습니다..
가족들이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아가 물어보니 무당은
생매장 당한 원귀의 작희(作戱-난동을 부린다는 뜻으로
주로 귀신이 일으키는 현상을 일컫는데 쓰인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씨 가족들은 경읍의 가족을 찾아서 자초지정을 얘기하고
경읍의 한을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경읍의 아들이 푸닥거리를 하자 신씨 집안의 변괴는 사라 졌습니다..
그런데 10년도 안되서 신 씨의 본집은 망해버렸고,
후대에 와서 경읍의 자손이 번창 했는데,
명당에 서자가 생매장한 그 흙구덩이가 원래
신씨의 묘자리 였던 명당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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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조선 영조때의 학자 신돈복이 쓴
야사집인 학산한언과
작자 미상의 기문총화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조선 숙중때의 일로
순창 출신의
분영이라는 기생이 있었습니다..
분영은 얼굴도 예쁘거니와 노래와 춤에도 능하여
많은 세도가들이 관심을 샀는데
당시 정읍 현감인 권음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당시 분영은 17살이지만
권음겸은 52세가 넘었으니
그때의 관점으로 봐도
어울릴것 같지는 않았지만
둘은 금술이 좋았고
사랑이 깊어 하루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디만 권음겸은 2년뒤 죽었고
분영은 권음겸의 시신을 모시기 위해
같이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권음겸의 가족들은
나이 먹은 사람이
젊은 기생을 끼고 산걸
용납하고 싶지가 않았고
그녀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쫓아 냈습니다..
분영은 울며 집밖에서
권음겸의 명복을 빌고 있었죠,,
그런데 그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장례식장을
뒤엎은 것이 였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바람은 멎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는데
그순간
권음겸의 둘째 아들이 갑자기
상여 앞에 서더니
노한 목소리로 분영이를 불러 오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둘째 아들을
말렸지만
아들은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서서
계속 분영을 데려 오라고 하는 것이 였죠..
가족들이 문밖에 있던
분영을 데려오자
둘째 아들은
마치 자신이 권음겸 인것 처럼 말하며
"네가 어찌 어여 쁘지 않다 하겠느냐?
내가 평생 술을 즐긴 줄을 알면서 어찌 내게 술 한잔을 권하지 않느냐"
하였습니다.
분영이 말없이 울며
술을 따라서 둘째 아들에게 건네주자
아들은 술 한잔을 마시고는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권공의 말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진짜 생전의 권음겸과 똑같은
행동과 말투를 하는 것이 였습니다..
분영은 울면서
권음겸과 인사를 나눴고
권음겸의 둘째 아들은 갑자기 쓰러졌고
잠시후 정신을 차리자 본래대로
행동 하는 것이 였습니다..
이후 분영은 고향에 돌아 왔는데
점점 신기가 생겨 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주변의 대소사를 신통하게 알아 맞췄는데
그녀의 말로는 밤마다
권음겸의 혼이 찾아와 그녀에게 여려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이 였습니다..
권음겸은 밤에
모관(毛冠)에 헤어진 도포를 입고 큰 신을 끌고 문을 열고 들어오며
분영을 위로 했고
분영은 권음겸을 생시와 다름 없이 혼연히 대했습니다..
한번은 권음겸이
"이제 너를 만나 옛정을 폈으나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닌지라 혹시 내가 두렵지 않느냐"
하며 묻자
분영은 웃으며 말하기를
“마음이 기쁜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라고 대답 했다고 합니다..
권음겸의 혼은 늘 밤마다 분영을 찾아와
닭이 울며 사라 졌는데
3년이 지나자 나타나는 일이 없어 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분영의 신기는 계속 남아서
그녀는 당시 내노라 하는 무당이 됬는데
신내림도 받지 않고
전문적인 굿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신통한 능력에 대해 많이 알려 졌다고 합니다..
이후 분영은 52세에 죽었는데
그때 까지도 용모가 아름답고
피부가 윤택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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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慵齋叢話-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에
기록된 얘기 입니다..
고려 시대 말기 우왕 [禑王, 1364~1389-고려 제32대 왕(재위 1375∼1388)때의 일로
기씨성을 대대로 명 재상을 배출한 훌륭한 가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씨 문중은 기유라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무너지고 말았는데 바로 원귀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유는 기씨 문중의 17대 가주로 가문을 잘 다스리고 나라일을 잘 맡았습니다..
그런데 재상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부터
그 집에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기유의 손자가 밖에서 놀고 있다가 울면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 오길래 짐안 어른들이 자초 지정을 물었습니다..
손자가 말하기를 밖에서 놀고 있는데 누군가 내몸을 붙들고 때리기
시작 하였다 라는 것이 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손자의 등엔 손바닥이 찍혀 있었습니다..
하인들을 시켜 그근방을 지나는 사람들을 조사했으나
손자를 해꼬지한 범인은 밝힐수 없었습니다..
또 기유의 며느리는 임신중이 었는데 어느닐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한참 달게 자고 있던 며느리는 갑자기 배에 통증이 느껴져서 눈을 떠보니
웬 남자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의 배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며느리는 그만 혼절을 했고 아이는 유산 됬습니다..
또 밤이 되면 지붕과 바닥이 울리고
사람들의 웃음 소리과 울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상한 일은 이뿐만이 아니였습니다..
밥을 지어 놓으면 어느 사이에 그 밥이 뜰에 흩어져 있고,
또 밥을 지으면 솥뚜껑은 그대로 있는데
그 곳에 밥 대신 똥이 가득 들어 있곤 하는 것이 였습니다.
무언가 변괴를 부리는 귀신의 짓이라고 경계하면
어떤 때는 화분이나 책상이 공중으로 날아 다니기도 하고
또 큰 가마솥 뚜껑이 천정에 붙어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앞뜰에 있는 채소가 시들어 있어 조사를 해보니 모두 거꾸로 심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또 농안에 넣어둔 옷이 모두 나와 천정이나 대들보 위에 늘어져 있기도 했고
어떤때는 불이 없는 아궁이에서 불이 갑자기 일어나 그 불을 끄면 불이 문간방에 옮겨 붙어 다 태워 버리는것이 였습니다.
그리고 기유의 아들인 '기아우'는 관원 이었는데
어느날 밤에 업무를 마치고 오다가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걸 보고는
걱정되서 그사람의 몸을 흔들며 정신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순간 그 사람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기유의 아들은 살인죄로 잡혀가고 말아습니다..
이렇겐 집안이 내,외로 변괴가 생기자 가문의 사람들은 뭔가 귀신이 붙은 거라고 생각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습니다..
무당이 한참 의식을 하며 영접을 시도 하자 무당의 몸이 떨리며 눈이 뒤집혀 지며 말하기를..
"망할 기씨 놈들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넌 누군데 이런 일를 저지른다는 말이냐.."
기유가 소리쳐 묻자 무당에 붙은 원귀가 소름이 끼치는 소리로 대답 했습니다..
"나는 유계량이다.."
"유계량"
유계량은 기유의 외사촌인데 2년전 우왕을 몰아내려는
역모를 일으키려 하다가 기유의 아버지에게 발각되서 사형 당했었습니다..
"이놈,,!너놈이 죽을 죄를 지어 넣고는 이 무슨 회괴한 짓이냐.."
"흥..닥쳐라..너놈의 아비가 날 배신 했거늘,두고봐라..내 너놈들의 피를 말려 줄테다"
이말을 끝으로 무당은 쓰러지더니 피를 토하며 그대로 절명 했습니다..
사람들이 집안을 떠나는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기유가 분연히 말하기를
"오랫동안 선조들이 살던 집을 빈집으로 만들어 황폐하게하는 것은 자손으로서는 할일이 아니다.
귀신 따위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며 굳게 마음을 먹고 그 집에 남아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괴이한 일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의 얼굴에 똥과 오물이 떨어 지기도 하고,
가축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어린 손자와 여자들이 뭔가에 놀란듯 기절을 하거나 하인들이 자다가 죽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그리고 기유의 꿈에 유계량이 자신의 목을 들고 나타나서는 밤새 괴롭히곤 하였습니다..
기유가 화가 나서 도사나 무당을 불러 유계랑의 원귀를 내쫒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공중에서 "그런게 나한테 통할것 같으냐? "라며 조소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원귀를 퇴치시키려고 있었던 기유마저 처음에는 힘으로 버티어 나갔지만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집을 버리고 떠났고 사람들이 떠나고 난후 집은 폐허가 됬는데 그 집에선
밤마다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와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이 귀신 소동은 후에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역성혁명으로 우왕을 죽이자 사라 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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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때의 제상
이귀(李貴, 1557~1633)가 나이 60이 되자
병이 크게들어 일어나지 못하자,
자손들이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밤새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결국 이귀는 자정이 되서 숨을 거뒀고 후손들은 오열 하며 장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닭이 우는 무렵 이귀가 갑자기 일어 나는 것이 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르는등 한동안 소동이 계속 됬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진정되자 이귀는 하인을 시켜 곧장 아랫 마을에 가서 감나무가
있는 집을 찾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심부름 갔던 하인이 돌아와 아뢰기를,
"가 보니 감나무가 있는 집에서 무당을 불러 신굿을 크게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연평대감(이귀)'님의 상을 성대하게 차려놓고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귀는 자신이 겪은 이상한 경험을 얘기 했습니다..
밤에 자신의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 있자 작은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그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던중 한 머리를 풀어 해친 노파가 나타나더니
이귀를 데리고 가는 동자와 귓속말을 하는 것이 였습니다..
귓속말이 끝나자 동자는 이귀에게 인사를 하며 사라졌고
노파는 이귀를 끌고 가는 것이 였습니다..
그대로 노파를 따라가니 감나무가 있는 집에서 크게 굿을 하고 있었고
그 주변엔 각종 귀신들이 집안을 둘러 쌓고 있었습니다..
노파를 따라 이귀가 들어가니 참석했던 귀신들이 조금씩 흩어져 길을 만들 었습니다..
노파가 안내한 집앞엔 어떤 아이의 몸을 밝고 있는 흉악한 흉상의 악귀가 있었습니다..
악귀의 발밑에서 아이가 고통 스러워 하는걸 보자 화가 난
이귀는 자기도 모르게 호통을 쳤는데
입이 아닌 몸 전체로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이에 악귀는 온몸이 흩어지는듯 사라졌고 아이는 무사 할수 있었습니다..
이에 무당이 부모를 시켜 이귀를 비롯한 여러 귀신들에게 음식을 대접 했는데
귀신들은 음식을 먹지를 않고 음식을 마시는 시늉을 하는 거였습니다..
이귀도 음식을 먹지 않고 코로 마시자 저절로 배가 불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노파가 다시 이귀를 안내해서 집으로 향했고
집에 오니 자신의 육신이 완연하게 자리에 누워 있기에,
그 육신 가까이 가니 어느덧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무당을 불러 연유를 물으니
"어제 아이를 헤치려던 악귀를 상대하기 위해 여러 귀신을 불렀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고
마침 강림 도령이 재상님을 데려 가는걸 알게 되서 잠시 양해를 구해 아이를 구했습니다..
아무리 강한 악귀라도 덕에는 버티지 못하니 영감님의 영이 완전 기억을 잃기 전에
덕을 빌려 악귀를 물리 친것 입니다..
대신 그 공로로 영감님은 좀 더 장수 하실 겁니다.."
이귀는 그후 10년 정도를 더 살았다고 합니다..
이귀는 광해군을 몰아낸 것 때문에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정묘호란때 외교 활동과
인조를 잘 보필하는등 사후 영의정으로 추앙될 만큼
공신으로 인정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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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때 강원도 영월의 수곡리 라는 마을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 졌다고 합니다..
정약용이 쓴 흠흠신서(欽欽新書)중 <의율차례>에 기록을
보면 한 여인의 원한이 가져온 이상한 현상이
언급되죠..
그 마을에서 살던 처녀가 무슨 이유인지 이웃 마을의 총각과
결혼을 앞두고 목을 메달고 죽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혼인 하기가 싫어 자살 했다 생각하고
몹쓸 년이라고 하며 마을의 뒷산 중턱에 대충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후로 이제까지 별로 탈이 없던 마을에 재앙들이 생겨 났습니다..
그녀의 무덤가가 있는 중턱을 지난 행인들이 몇몇이
시름 시름 앓더니 두명이 죽는 일이 발생 했고,,
가축들이 밤새 울다가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을 곳곳의 담벼락에 피칠이 되있기도 했고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중 여인의 곡소리를 들었다며
공포에 떨기도 했죠,,
이런 일이 자꾸 생기자 마을굿을 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피를 토하며 죽기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이 얘기를 들은 영월의 군수는
고심 끝에 상소문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일은 정조에게도 들어 갔고,,
정조는 정약용에게 부탁해 마을 일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정약용은 마을의 사람들에게 그 처녀에 대해 알아 보고
시체가 묻힌 곳을 파냈는데
처녀의 시신은 썩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약용이 시신을 조사해 본 결과
자살이 아닌 타살로 들어 났고
시신에 남은 상처와 처녀와 혼인 하기로
한 이웃 남자의 집을 조사 한 결과
그녀의 정혼자가 그녀와 결혼이 하기 싫어
사람을 시켜 그녀를 죽인 거라고 밝혀 졌습니다..
사건 전말이 드러나자 마을에서의 변괘는 없어졌고
정조는 그녀을 위한 사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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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왕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사연이 있는 나무에 벼슬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중국 진시황부터 시작된 이 풍습은 왕의 위엄을 상징 하는 것으로
관직이 붙여진 나무는 실제로 관직에도 호칭이 붙여지고
낮은 직급의 사람들은 나무를 보고 인사도 해야 했죠..
그런데 이중엔 임금과 나무의 운이 함께 하는 기묘한 사연도 있습니다..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은 유년 시절은 강희맹(1424-1493)에서
지냈습니다..
강희맹의 집에는 늙은 소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는데 어린 연산군은 나무 밑에서 놀거나
나무 위로 올라가 놀고는 하였습니다..
어느날 나무 위로 올라간 연산군이 밑으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나뭇 가지에 걸려 무사 할수 있었습니다..
후에 임금이 된 연산군은 이 소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이 폭정 끝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가 강화도로 귀향가 죽었는데
연산군이 죽은 날부터 강희맹의 집에 있던 정 3품 소나무는 점점 말라가더니
3년내에 말라 죽었습니다..
남한산성 동문 밖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주필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습니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살피다 잠시 쉬어 가면서 이름 붙인 바위 옆에는
언덕 위에는 정조에게 벼슬을 받은 소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나무는 원래 귀목이라 불렸는데
남자에게 버림 받은 한 기생이 목을 메달아 죽은뒤
노래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에 인근의 사람들이 공포에 떨자
남한산성을 살피던 정조가 이 얘기를 들고는 친히 나무를 찾아가 위로하며
벼슬을 상징하는 옥관자(玉貫子)를 걸어주고 떠나자
더이상 통곡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조가 죽은후 이 나무는 3일간 통곡 소리를 내며 몸서리를 치듯 떨다가
스스로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 고종이 어릴 때 올라가서 놀았다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임금이 된 후 고종은 어릴 때를 생각하여 이 소나무에 종2품 벼슬을 상징하는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었습니다..
이 소나무 역시 고종이 죽자 갑자기 벼락을 맞아 뿌리째 날라 가 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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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16~17세기는 기상 이변이 잘 일어나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때였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 조선조 광해군 1년(1609년)에 충청도 연산 땅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흙비가 심하
게 내렸으며,
그해 봄은 아주 극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무려 3년간이나 가물었다고 하니 당시 농업에만 집중되 있던
우리나라의 환경상 날 살림은 점점 어려워 졌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습니다..
굶어죽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무렵 그 때 가평군 북면 백둔리
어느 마을에 어린 딸아이를 하나 둔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세식구 모두 굶기 일수 였지만 불을 때서 끓여 먹을 알곡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산에 가서 풀뿌리며 칡뿌리 그리고 산열매 같은 것을 따오고
캐오는 것을 먹었지만 그것마저
사람들이 따가기 때문에 입에 넣을 수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아이를 가져 이제 출산할 달이 되었지만
워낙 먹지를 못해 아이를 밴건지 안밴 건지도 모를 정도로 배는 조금 불룩했습니다.
남편은 출산할 때가 되었으나 여기는 시어머니도 안계시고 하니
친정에 가서 아기틀 낳는 것이 좋겠다고 부인에게 제안을 했고
부인은 그러기로 마음먹고 친정에 갈 채비를 차렸습니다.
어린 딸이 따라 가겠다고 나섰지만 부인은 기운이 없으니
딸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친정 집에 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여야만 했기 때문이죠..
부인은 맥없는 발걸음을 한 발자욱씩 옮겨서 겨우 고개 마루에 올랐습니다.
몇일간 풀뿌리로 겨우 연명 했으니 힘도 없는데다 아이를 가졌으니 고개까지 오르는 것이 너무 힘들어 나무 그늘에 앉
아 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 했습니다.
부인은 친정 집까지는 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일어 서려 했지만 배가 점점 더 아파와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프고 힘겨웠 지만 온 힘을 다해
아이를 낳았지만 정신을 잃었습니다..
잠시후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서 옆을 보니 싱싱하고 큼직한
고깃 덩어리가 있는 것이 였습니다..
허기가 진 부인은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 먹었습니다.
어느정도 배가 부르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고 아기를 낳은 것이 생각나
사내아인지 계집아인지 보려고 옆을 보니
아기는 온데 간데 없고 핏자국만 있었습니다.
부인은 자신이 먹고 있던 고기를 봤는데 그것은 아기의 뜯겨진 시체 였습니다..
그때서야 자기가 낳은 아기를 잡아먹은 줄 안 부인은
오열하며 쓰러졌고 그대로 죽어 버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인과 반쯤 뜯긴 아이의 시신을 보고 기겁을 했으며
이 얘기를 들은 남편은 딸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졌다고 합니다..
이후 부인이 죽은 고개를 애잡이 고개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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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文臣) 눌재(訥齎) 박상(朴祥1474~1530)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유명 했습니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때(1494 ~ 1506)년 그는 왕의 폭정을 겁내지 않고 바른 말만 했기 때문에
연산군의 노여움을 샀고
궐에서 나와 전라도(全羅道) 나주의 부사(조선조때 관사(官使)의 감찰과 규탄을 맡은 관직)로
부임을 하게 됬습니다..
1506년 그가 전라도 부사로 부임하자 그에게 동료나 수하들이 전라도 나주를 주름 잡던 우부리에게 「부임인사」를
하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당시 연산군은 색을 밝혀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연산군이 만든 벼슬로 왕에게보낼 여자를 구하러 다니는 벼슬아치)를
내려보내 예쁜 여자들을 데려 가는 대신
그녀의 가족들에게는 많은 재물이나 권한을 주었는데
우부리 역시 딸이 채홍사에게 선택되 재산을 받은 인물 이였습니다..
얼마 후 그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되자 우부리는 딸덕분에
기세가 등등 하여 법을 무시하며 온갖 못된 짓을 일삼았고
그곳 원님은 말할 것도 없고도 관찰사까지도
그 자의 비위를 거슬리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었죠.
하지만 박상 선생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부하들에게 엄명을 내려 우부리를 잡아다가 곤장으로
장살(杖殺-조선조의 사형 방법중 하나로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형벌) 시켰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연산군에게 대항하는 엄청난 폭거 였습니다..
우부리의 집에서는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람을 서울로 이일을 알렸고
대노한 연산군은 박상 선생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곧바로 박상 선생을 죽이기 위해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전라도로 출발 했는데
한편 박상 선생은 우부리의 죄상을 조정에 알리며 당당한 자세로 대죄(待罪)할 것을 결심하고
사람들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한양으로 가던중 올라가던 중 「장성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박상 선생의 앞을 가로 막고는
그의 바지가랑이를 물고 잡아 당기며 숲으로 향했습니다..
박상 선생은 뭔가 이유가 있다고 보고 고양이를 따라 갔습니다..
박상 선생이 고양이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선 동안에
사약을 가진 금부도사는 그 갈림길을 지나 갔고 서로 길이 엇걸린체
박상 선생은 금부도사를 만나지 않고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주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 되었고
이 사건은 불문(不問)에 붙이게 되었습니다..
박상 선생은 고양이가 자신을 살렸다 하여
자신의 친가가 있는 오산마을에 그 고양이를 제사지내는 논인
묘창답(描倉畓)을
수십 두락을 두어 정양사(正陽寺)에서
관리 하게 했는데
이땅은 이상 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차지 하면 곡식이 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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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 일장산 중턱의 남한산성에는 숭열전이라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과
충정공(忠正公)월봉 이서를(月峰 李曙.1580~1637)를
제사 지내는 제전이 있습니다..
이 제전이 세워진데는 사연이 있는데
조선 16대 인조왕이 병자호란이 일어 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청나라에 항전을 했습니다..
그러던중 인조가 잠이 들었을때 간신 김자점이 보낸 측근에게
암살을 당할뻔 했는데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인조를 깨워 그는 암살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그후 인조는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인조 14년(1636년)
온조왕을 모시는 온조왕사(溫祖王祠)를 건립하기 시작 했습니다.
(1638년에 완공 되고 정조 19년(1795) 숭렬전으로 이름 바뀜)
그러던 어느날 인조왕은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온조왕이 찾아 와서 말하기를..
이미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나의 묘를 세워 주신 것은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 제전에 자기 한 사람이 있는 것은 좀 적적하니
청컨대, 당신의 신하중 호조판서 [이서]를 나에게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서는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을 구축하고 청나라 군대를 맞서
싸운 공신 이였지만 몸이 안좋아 칩거 하고 있었습니다..
인조는 이서에게 대답을 구하겠다고
묻자 온조왕은 3일뒤에 오겠다면 조용히 사라 졌습니다..
인조는 다음날 이서를 불러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서는 어차피 언제가는 죽을 몸,
전하의 명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3일뒤 온조왕이 꿈에 나타나자 인조는 허락을 했고,,
그 이튿날 잠에서 깬 인조는 이서가 어젯밤
서거하였다는 부고를 접하였습니다.
인조는 이서를 온조왕이 데리고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이서의 시호를
충정공(忠正公)
이라 짓고 온조왕의 제전에
이서를 함께 묻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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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경에는 월방산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 중턱에는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그 계곡 앞엔 산신을 모시고 있는 산신당이 있습니다..
이 사당 주위에는 돌로 담장을 쌓았으며 그 둘레에는 노송으로 둘러 쌓았고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 산신당은 마을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으로 오래도록 전해 오고 있죠.
조선이 막 세워질때의 일로 마을에 살던 처녀가 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그만 계곡에서 미끄려 져서 온 몸에 많은 상처를 입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처녀를 정신 차리게 한뒤 계곡의 바위 틈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있을터이니 그 물을 먹고 상처에 바르면
곧 나을 것이다 라고 일러 주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여인은 꿈속의 노인이 시키는데로 그 물을 마시고 몸에 발랐더니
상처는 씻은 듯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마을에 돌아온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산신령이 처녀를 도와준거라고
생각하고 계곡에 산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정월 대보름이면 산신을 모시는
제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병자들이 계곡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 하는등
마을에선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곳이 됬죠..
마을 사람들은 너무 마시면 물의 효력이 없어질까봐 정해진 때에만 환자들 위주로
마시게 하고는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했죠..
그런데 일제 시대때 이 마을에 들어온 일본인이 미신을 믿는다고 비웃으며
사당을 불태우고 또 물이 나오는 바위 틈을 마구 파헤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일본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3일만에 그 사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후부터 마을의 우물들은 전부 흙탕물로 변해버렸고
밤이면 가축이 이유 없이 죽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의논해서 정월 대보름날 쌀을 모아 제사를 드려 산신령의
분노를 달랬다고 합니다..
다행히 산신의 저주는 금세 풀린듯 이상한 일이 발생 하지는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약수는 다시는 흐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에도 일본인이 들어오면 비명 횡사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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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 1년(1469) 이상한 내용의 상소문이 올라 옵니다..
충홍도(지금의 충청남도)를 관리하던 김훔심이라는 목사는
무녀 바위의 원때문에 죽은 사람이 많다는 거였습니다..
이 바위는 대안(태안)의 마을에 있는 산 기슭에 위치한 바위로
이 바위가 무녀 바위라
이름이 붙여진데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한 무당의 딸이 신내림을 피해 시집을 갔지만 남편의 무관심과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았고 이웃에도 멸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몸은 점차 쇠약해지고, 오로지 괴로움과 슬픔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죠..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매일 저녁 산에 올라가 바위에 앉아 몰래 울음을 터트리곤 했는데
남편이 후처를 들이자 구박은 더 심해져 갔습니다..
이후 그녀는 아들을 낳았으나 집안에선 그녀의 아들을 빼앗고 내쫓았습니다..
그녀는 아들까지 뺏긴 원한을 견디지 못하고 바위 앞에서 비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그녀의 피는 바위에 물들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무녀바위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그런데 상소의 내용에 따르면 이 바위를 건드리면 이변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바위를 만진 사람은 하나 같이 화를 입었다고 합니다.
마을 청년이 이 곳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무의식중에 무녀 바위를 건드렸는데
그날 저녁 화근이 집에 돌아와서는 갑자기 쓰려져서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의 동생까지 까닭없이 목을 매달고 죽으니
이 집의 대가 끊기고 말았죠.
그후에도 몇몇 사람이 죽자 처녀를 괴롭힌 시어머니와 남편은 원한이 무서워서
마을을 떠났습니다만,,마을 어귀도 넘지 못하고 둘다 시신으로 발견 됩니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나자 동네 사람들은 바위 근처는 얼씬도 안했고
멀리에서 조차 그 바위를 바라보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상소를 받은 예종은 궁궐을 관리하는 풍수사들을 보내 바위의 원을 풀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별 일도 없고 무녀 바위란 명칭도 사라 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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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가평군·설악면 장락산의 산 중턱에는 바위 굴이 하나 있는데
그 굴을 각시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굴이 각시 굴이라 불린 이유는 한 이야기 때문인데
조선 중엽에 이 마을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쁜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처녀는 너무도 얌전하고 착하며 살림도 잘해 칭찬이 자자했죠..
그런데 임진왜란 일어나 마을 청년들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아이들과
여자들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처녀 역시 홀어머니를 봉양 하며 농사일을 했는데
그런데 어머니가 전염병에 걸리자 마을의 산에 있는
바위굴에 어머니를 모시고 봉양 했습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왜군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피를 했는데 처녀는 동굴에서 어머니를 모신다고
이런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워낙 정신이 없는 터라 모녀를 챙길 여유가 없었죠..
마을에 왜군이 쳐들어 오자 처녀는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으나 결국
발각 되고 말았습니다..
동굴이 좁아 왜군들은 그녀를 보고 나오라고 했지만 처녀는 응하지 않았고
왜군은 동굴 앞에 불을 피워 연기를 동굴앞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처녀는 연기 때문에 숨이 막혔지만 어머니를 꼭 붙잡은체 눈을 감았고
모녀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처녀의 죽음이 알려져 마을 사람들이 동굴에서
시신을 꺼내 봉양 했는데
두 모녀는 꽉 끌어 안은체 썩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얘기가 다시 상기된건 일제 치하 였을 때였습니다..
당시 이마을을 다스리기 위해 부임한 일본인 관리는 일주일을 못버티고
죽기 일수 였다고 합니다..
당시 총독부 행정 관리인 마이조우 사쿠해이의 기록을 봐도
가평군에 부임 했다가 죽은 일본인이 10명이 넘으며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온 사람도 3명이 되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밤마다 한 여인의 혼령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곳은 한국인이 지방 관리로 내려 와서 어느정도
탄압과 수탈을 피해 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현상에 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왜군에게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원한 때문 일거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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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의 얘기를 보면 사람이 무슨 이유로 인해
짐승 같은 행동을 했다는 수인화에 대한 사례가 나옵니다..
서양이 늑대 인간이 대표적 이라면 동양권에선
호랑이,아프리카에는 표범등 각 지역의 특색과 환경에 따라
바뀝니다..
보름달을 보고 변하는 늑대 인간과 달리 호랑이 인간은 수인화의 특징이나 시기등이
뚜렷하게 정해진게 없으며 인간으로 돌아오는 때도 정해지지 않은게 특징 입니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도 호랑이 인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갑작스레 변하거나 혹은 도술로 변하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원나라때 쓰여진 신비한 역사나 괴담을 담은 책인 <제해기續齊諧記>를 보면
태원 원년(376)년 호남성에 살던 설도순이라는 관리가 이름 모를 중병에 걸려
몇일간 발작을 일으키다 밖으로 나가더니 그대로 실종되는 일이 벌어 졌습니다..
그후 1년뒤 설도순은 상처 투성이의 몸으로 집으로 돌아 왔는데 가족들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지만 그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마을에서 사람들이 한두명씩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 했는데
설도순의 집안 하인이 주인이 몰래 담을 넘어 가는 모습을 보고 관가에 고발 했고
이에 설도순은 관아로 끌려 갑니다..
문초를 시작하자 설도순은 1년전 병을 앓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뛰쳐나가니
자신도 모르게 맹수가 되어 있었고 그는 사람들을 잡어 먹으로 살았습니다,,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으나 점점 살육에 빠져 들었고 다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살육을 잊지 못해
마을의 아이들이나 사람들을 습격 했다고 자백 했습니다..
결국 설도순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우리 나라의 기록에도 있습니다..
조선의 순조때 예조판서였던 계서(溪西) 이의준(李羲準)의 문집인 [계서야담(溪西野談)]에 나오는 얘기를 보면
단종 5년(1456)년 합천 지방의 마을에 검은 털을 한 흉악한 짐승이 나타난 사람들을 잡아 먹었는데 관리들이 다가오면
순식간에 도주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당시 사냥꾼의 우두머리가 쏜 활이 짐승에게 명중했고 샤낭꾼들과 관리들이 짐승의 핏자국을
쫓아 갔는데 어느 집 앖에서 핏자국이 멈춘 것이 였습니다..
그들은 그 일대를 찾아 봤으나 짐승의 털과 발자국은 보였지만 형상을 찾을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으로 한 여인이 다가 와서는 자신의 시아버지가 수상하다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사냥꾼과 관리가 그 집으로 가자 집안에는 노인이 몸에 상처를 입고 신음을 하고 있었는데
노인의 옆엔 짐승의 털이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관리들이 들어오자 노인은 도주를 시도 했지만 곧 잡혔고 며느리는 노인이 흉악한 모습으로 변해
마을 사람들과 노인의 아들또한 잡아 먹었다고 증언 했습니다..
사건이 워낙 괴상하다 보니 관리들도 보고를 올리고 노심초사 하고 있는데
노인은 감옥에서
죽은체 발견 된걸로 끝납니다..
여기서 보면 사람이 변한 짐승이 꼭 호랑이라는 얘긴 없습니다..
하지만 대표적인 맹수가 호랑이 이기 때문에 호랑이 인간이라고 부른 것이죠,,
서양의 늑대인간도 목격담이나 얘기에 따라 형상이 천차 만별인데
늑대 인간으로 통일되게 부르는 거랑 마찬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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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에는 여러 기록이 나오는데 그중엔
귀신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선현의 외숙 안부윤은 젊었을 때 날이 어둑해질 무렵 말을 타고 어린 종 한 명을 데리고는 서원 별장으로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별장까지 10리쯤 남았을 때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은 질흑같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만 방향을 읽고 말았습니다..
둘은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쪽을 바라보니 횃불이 보였습니다. 떠들썩하게 사람들 소리도 들리는걸 봐서는 사냥하는 듯했는데
횟불은 점점 가까워졌고 좌우를 삥 두른 횃불의 길이가 5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웬걸,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발자국과 웃음 소리만 들려 왔습니다..
그 횃불은 다름아닌 도깨비불귀화(鬼火) 였던거죠.
놀란 안부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정신없이 말에 채찍질만 해댔습니다.
둘은 그렇게 7리나 8리쯤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도깨비불은 잠시 그들을 쫓아오는듯 싶더니 서서히 흩어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도망을 치다보니 방향도 잃었고 하늘이 흐린지 조금씩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길은 갈수록 험해졌지만 그래도 도깨비가 쫓아오지 않는것 같아 마음은 진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고개를 넘어 산기슭을 돌아 내려가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도깨비불이 이제는 겹겹이 나타나 안부윤의
앞길을 막아버리는 것이 였습니다.
혼이 나간듯 안부윤은 칼을 뽑아 들고는 소리치며 앞으로 돌진했습니다.
그 순간 불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우거진 풀숲으로 사라졌는데, 돌진하던 안부윤은 나무에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순간 안부윤의 귀에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도깨비불을 귀화(鬼火)로 쓰고 있습니다.
이는 도깨비라는 존재를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중국의 귀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조선의 기록서에도 공통으로 표기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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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임실 고을의 오원천이 흐르는 어귀에 있는 오원이란 마을에는 귀신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둑이 있습니다..
이 둑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은 애기가 전해져 오고 있죠..
조선조 임실 고을의 좌수(마을 일을 다스리는 직위)를 하던 마씨성을 가진 부원군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도 신분이 그리 높지 못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저녁에 들에 나가서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다섯 알의 둥근 돌을 주웠습니다.
마좌수는 돌이 예뻐서 집으로 가져 왔는데 밤이 되자 돌이 영롱하게 빛을 내는 거였습니다..
그는 보통 물건이 아니라 생각하고는 이 구술을 궤짝안에 넣어 잘 보관해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몇일의 시간이 지난후 잠을 자고 있던 마좌수는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그 소리는 마당에서 나고 있었는데 임좌수는 소리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임좌수가 나가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산사람이 아닌 귀신들 이였습니다..
마좌수는 순간 겁이 났으나 사대부의 쳬면을 지키기 위해 헛 기침을 하면서 '웬놈들이냐'며 소리 쳤습니다..
그러자 귀신중 한 위(位-귀신을 하나씩 세는 단위로 보통 귀신은 위,악귀는 지위로 셉니다)가 나서더니 애걸복걸 하며말을 했습니다.
.
"저희가 귀왕부(鬼王符)를 잃었는데 어른께서 그것을 갖고 계시니 원컨대 빨리 이를 돌려 주소서."
말이 끝나자 여러 귀신들이 저마다 빌며 사정을 하는 것이 였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마좌수는,
"아니 귀왕부라니? 그게 도대체 뭔고."
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께서 며칠전에 얻으신 기이한 돌이 바로 귀왕부이옵니다."
도깨비들이 이같이 말하면서 내어주기를 간청했으나 마좌수는 그 구술이 아까워서 선뜻 내어주기가 싫어서
거절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귀신들이 흥정을 붙였습니다.
"어른께서 만일 원하시는 게 있으면 뭣이나 받들 것이니 제발 귀왕부만은 되돌려 주십시오."
순간 마좌수는 매번 장마가 오면 마을의 오원천이 범람하여 마을 사람들이 고생하는걸 알고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하룻밤 새에 오원천에 돌로 만든 둑을 쌓으면 내가 귀왕분지 뭔지를 돌려주마."
고 귀신들의 제의에 응했습니다..
귀신들이 응락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내일 까지 둑을 만들기로한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그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정말로 오원천에 돌들을 쌓은 기나긴 둑이 번듯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마을에선 갑자기 세워진 둑에 의해 소란이 일어났고 마좌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간밤의 일을 얘기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고마워서 마좌수에게 구술을 돌려주면서 원하는게 없는지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귀신들은 다시 마좌수에게로 몰려들었고 마좌수는 그들에게 귀왕부를 약속대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뭐 원하는게 없는지 물었으나 귀신들은 이제 저승으로 가야하니 마지막으로 이승 음식이나 먹게
콩 한말만 삶아 달라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마좌수는 곧 하인을 시켜 오랑콩 한 말을 삶아서 잔치를 베풀어 그들의 노고에 보답코자 하였습니다.
귀신들은 한위에 콩을 한 알씩만 나누어 먹었습니다. 하지만 맨 끝에 앉은 한 마리의 귀신만이 콩을 얻어 먹질 못했습니다.
귀신의 수에 비해 한알이 꼭 모자랐던 것입니다.
그 귀신은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러나 가 버렸습니다.
그 귀신은 심술을 부려 자기들이 놓은 둑 가운데서 두석자 가량이나 되게 돌들을 뽑아서 둑에 구멍이 나게 망가 뜨려버렸습니다.
마좌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을 주어다가 빈 틈을 막았습니다.
이 둑은 해마다 장마를 겪었지만 사백년을 넘게 언제나 새로 쌓은 듯이 멀쩡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콩을 못 먹은 귀신이 헐었던 부분만은 마좌수가 메웠는데도 해마다 장마때면 무너지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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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은 홍의장군 곽재우와 더불어 임진왜란 크게 활약한
의병입니다..
광주 석저촌 사람으로 몸은 작으나 힘이 엄청 쎄고 화가 나면 눈에서 불이 날것 정도로
강력한 안광을 내뿜었다고 하는데 이 눈을 보면 아무리 기운이 센 사람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김덕령은 무등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날때부터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데 심지어는 그가 뱃속에 있을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김덕령의 어머니가 동료 아낙들과 빨래를 하고 있을때 였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더니 그중 어린 계집을 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덕령의 어머니가 호랑이를 막았는데 호랑이는 김덕령의 어머니 한테
덤벼들지 못하고 물려나는 것이 였습니다..
호랑이가 옆으로 움직이니 김덕령의 어머니도 다시 호랑이 앞을 막았습니다..
호랑이는 김덕령의 어미니한테 덤벼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가 물러났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고승한테 물어보니 이 아낙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 호랑이가 덤벼 들지 못한거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태어난 김덕령은 날때부터 눈을 뜨고 있었고 울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김덕령은 14살때 마을에 나타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잡을 만큼 힘이 쎗다고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호랑이 3마리도 맨손으로 잡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감 이귀(李貴)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어
정병 5천을 거느리고 피난중인 세자(후의 광해군)을 구해 익호 장군이란 호칭이 붙여졌습니다..
이때 나이가 26살로 김덕령의 활약으로 인해 왜군은 김덕령이 있는곳은 어씬도 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년간 김덕령이 의병장으로 활약을 할때 였습니다..
의병들이 거주하는 곳의 인가의 주민들이 사라지거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 했습니다..
이일을 괴이하게 여긴 김덕령은 평소 안면이 있던 유정(惟政)스님(후의 사명대사)를 찾아가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유정은 왜놈들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요괴를 불러들여서 사람을 헤치고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 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김덕령은 유정대사에게 자신이 그 요괴를 잡겠다며 요괴가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유정은 요괴는 함경도 지방의 작은 성에 주군하고 있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수하로 위장해 있다고 했고
김덕령은 말을 타고 기요마사의 진중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김덕령은 아주 대담한 행동을 했는데 바로 적진으로 들어가서 그가 잘쓰던 무기인 철추를
양손으로 휘두르며 왜군을 공격 했습니다..
갑작스런 공격에 왜군은 당황했고 김덕령은 적들을 몰아 붙이다가 적의 별량고에 불을 붙엿습니다..
곧 적진은 혼란 스러워졌고 김덕령은 그대로 본성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성안도 난리가 아니였는데 김덕령은 그안을 헤집고 다니다 한 하녀를 붙잡아 물었습니다..
"너도 보아하니 조선인 같은데 여기 혹시 사람이 아닌자가 없는지 알고 있느냐..?"
그러자 여인은 의외로 침착하게 말을 하는 것이 였습니다..
"야만바(山婆-일본의 유명 식인 요괴로 힘이 쎄다고 합니다)라고 사람의 생간을 먹고 잘때도 눈을 감지 않고 자는 자가있사옵니다.."
"잘됐다!.. 그놈에게 안내하라.."
하녀는 김덕령을 데리거 성의 구석진 곳에 있는 방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곳엔 엄청난 덩치의 푸른 색의 피부를 한 남자가 눈을 뜬체로 자고 있었습니다..
"이놈이 자고 있는게냐.?"
김덕령이 묻자 하녀가 답하기를..
"사실 어제 저녁에 꿈을 꿨는데 요물을 잡기 위해 천장이 올것이니 요뮬에게 술을 많이 먹여
잠재우라 라는 꿈을 꾸었나이다.."
"허 잘됐구나..이놈 죽어라.."
김덕령은 철추로 요물을 내려 쳤습니다..
"끄에엑"
철추에 맞은 요물은 비명을 내질렀으나 죽지 않고 본신을 드러내며 김덕령에게 달려 들었고 김덕령 역시
요괴와 맞부딪혔습니다..
둘이 힘겨루기를 시작하자 바닥이 움푹 패일 정도 였습니다..
한참 힘겨루기를 하다가 김덕령은 크게 호흡을 하며 요괴를 집어 던졌습니다..
요괴는 벽을 부수며 건물 밖으로 떨어 졌고 김덕령은 요괴를 따라 뛰었고
성 마당에 쓰러진 요괴에게 달려 들었습니다..
성마당에는 불을 끈 왜군들이 있었으나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야 그렇듯이 성안에서 왠 흉악하게 생긴 괴물이 나왔고 그 괴물과 싸우는 사람이 있었으니
당황해 할만하죠..
김덕령과 요괴는 다시 싸움을 시작 했는데 둘의 힘이 호각이라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김덕령을 안내해준 하녀가 김덕령에게 칼을 던져 주며 소리 쳤습니다..
"가등청정(기요마사의 한자를 그대로 발음한 이름)이 갖고있던 명검입니다..
이것이면 놈의 목을 칠수 있을 것입니다.."
김덕령은 칼을 휘들러 요괴의 목을 쳤는데 잘려진 목은 다시 붙었습니다..
김덕령이 몇번 내려쳤으나 그때마다 목은 계속 붙었습니다..
"이런..뭐 이런놈이.."
김덕령이 다시 목을 친순간 하녀가 달려와서 잘려진 요괴의 목에 불을 붙였습니다..
목에 불이 붙자 요괴의 목은 그자리에서 떨어졌고 김덕령은 성마당에 있던 돌 기둥을
들어올려 요괴를 깔아 뭉개고 요괴의 목을 칼로 토막을 내자 그제서야
요괴의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김덕령은 그제서야 왜군들이 있는걸 알았지만별로 신경 안쓰는듯 칼을 돌려주며 자신을 도와준
하녀를 말에 태우며 적진을 떠났습니다..
왜장 기요마사는 제법 명장으로 이름이 있는 인물이나(일본에선 신으로 모셔지죠)
자기들 앞에서 요괴를 죽이고 유유히 떠나는 김덕령을 바라 보는것 외에
아무것도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 군사를 회군하여 그의 라이벌인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유명이
먼저 한양에 진출할수 있었습니다..
김덕령이 잡은게 실제 요괴인지는 알수는 없지만 임진록이나 임진유람기총집 같은 기록서를 보면
음양사등 일본의 주술사와 한국과 중국의 도가들이 주술 싸움을 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첫댓글 내용이 많으니 나눠서 읽으셔요 ^^
감사합니다! 그래야겠네요잘보고갑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덕분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감사.^^
잼있네요. 잘 읽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