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하 1:1절부터 합니다. “솔로몬이 독자적인가?” 솔로몬의 신앙이 독자적인가? 지난 시간에 유훈통치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귀신이 통치하는 북한의 김일성처럼 유훈통치를 말하였습니다. 이미 다윗은 죽었습니다. 다윗이 죽고 이제 솔로몬 시대가 되었으면, 어제 이야기 한 것처럼 죽은 사람에 대하여서 아픔은 조금 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죽은 사람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그 사람은 신앙은 그 사람의 신앙이고 내 신앙은 나의 신앙이기에 내가 그 사람의 신앙을 따라갈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여기에 있고 그 사람은 죽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면 이미 죽어버린 자의 신앙을 본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사람위에 하나님이 계셨으니 각자의 하나님을 믿으면 그뿐이지 내가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립적 개별적 존재로서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솔로몬이 독자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 보면 솔로몬을 우리와 똑같이 취급하여 아~ 솔로몬은 다윗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배울 것이 많군요! 이렇게 하고서는 결별입니다. 유훈통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귀신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참 고맙습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참 많이 배웠습니다. 나도 아버지를 본받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편견이고 성경을 덮어버릴 때 우리가 흔히 하는 오류가 되는 것입니다. 독자적이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독자적이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에 엘리야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우리 보통 종교성은 각자의 종교성이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기에 그 사람을 존중은 해 주되 종속은 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이 각자에게 내려오는 것으로 보지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하는데 이 지하수처럼 큰 흐름 속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솔로몬이 태어나는 이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이 무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니 들은 기억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하고 내 신앙의 독자적인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인의 일반적인 종교성과 다른 점입니다.
약간 이야기 어렵게 되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고시원에 들어올 사람이 사무장과 만났습니다. 방 있어요? 예 있습니다. 얼마입니까? 한 달에 오십 만원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제 방에 들어갑니다. 학생! 학생 이리와! 왜요? 이름 써! 아니 내가 직접 와서 내가 돈 내었는데 왜 그래요? 아니 이름 쓰라니까! 아 알았어요. 그 참 깐깐하네! 하고 이름 쓰고 들어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혹시 이곳에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왔습니까? 오늘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들어가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은 만나지를 못합니다. 만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존하신다는 것을 이름을 통하여 알리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영철! 하고 부르면 문을 열고 나와서 만나는 것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해당되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가 있으니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이란 그것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신이라는 것을 불러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유대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제공한 주의 이름을 불러서 하나님과 교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사도행전 2장 로마서 10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신학자들은 이 주의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는가 하면 신의 이름으로 바꿉니다. 그것이 바로 사이비입니다.
주의 이름을 이야기 했는데 신의 이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신의 이름의 부른다는 것은 신의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 나 당사자 이 둘의 이름이 합하여 신의 이름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민족마다 신의 이름의 다 다릅니다. 엘이고 바알이고 조물주고 하는 식으로 다 다르지만 이것은 항상 ‘나’라는 민족 ‘나’라는 동족 ‘나’라는 추장 파벌 등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무엇이 빠지는가 하면 인간이 빠집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데, 신학적으로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중세신학 즉 스콜라신학인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만든 내가 있으매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서 나왔겠는가? 누군가 만들었겠지! 나를 만든 그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아~ 신이다.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있으매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실체를 밝힌 사람이 포이에르 바하입니다. 신이란 것을 자아의 투사라고 본 것입니다. 자아를 영사기에 투사시킨 것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신이 다 다른 것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의 신과 내가 건강할 때의 신이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투영된 것이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트맨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영화를 보면 밤하늘에 박쥐 문양이 불빛에 떠오릅니다. 이 문양은 옥상의 조명등에 작은 박쥐 문양을 하늘에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비춰진 이것이 신이고 이 신을 추적 해보면 그 안에 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으므로 신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생각 속에 신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없으면 신도 내가 믿는 신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어서 교회 좀 다니다가 나이 많아 가지고는 내가 신도 찾아보고 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존재증명이라고 안셀무스 같은 신학자들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내가 합리적이니 신도 합리적일 것이고 내가 도덕적이니 신도 도덕적일 것이고 내가 합리적으로 따질 수 있고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으니 는 신도 이 우주를 합리적이고 인과적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내가 어떤 목적이 있으니 신도 이 우주를 만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이런 식으로 해놓고 그 다음에 성경을 들고 와서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그런 식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장사 해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확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에 나오지요! “주께서 내 주에게” 주가 갑자기 둘이 되었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그래서 조금 전에 말한 것은 사람들이 원한 신이지만 이 말씀은 사람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먼저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데 이 중요한 것을 마지막 시간에 말해가지고 먼저 간 사람들한테 내가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 출애굽기 6:2-3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포착한다고 해도 포착될 수가 없는 이름이고 하나님을 포착하고 말고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다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할까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 누구 의도입니까? 아브람 본인의 의사였습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이 누구의견입니까? 야곱 본인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는 것은 아브라함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족한 줄 알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난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다 웃었습니다. 이 나이에 어떻게 아기를! 전계향 권사님이 아이를 임신했다고 해 보세요! 놀라 자빠질 일 아닙니까!
전계향 권사님이 임신하는 것이나 마리아가 잉태하는 것이나 같은 레벨입니다.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고서는 얼마나 부끄럽고 황당했겠습니까? 그 사실이 동네방네 소문이 나면 어떻겠습니까? 묻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애 아버지 누구인데? 그것은 말씀이... 그래 마리아 너 신앙 좋은 것은 아는데 그것 말고 아이 아버지가 누군데? 누구하고 잤는데? 그게 아니고 성령께서... 그래 당신 믿음 좋은 것은 내가 인정하고 그것은 내가 챙기겠는데 그런데 누구 아이인데? 그 사회에서 못삽니다. 나이 90넘어 임신한 사라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들은 신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엘’ 말고 다른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인 ‘엘’을 알고 있으니 이 ‘엘’에다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임하였으니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너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구체적인 이름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김영철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부르지 못합니다. 김영철이라는 친구가 방안에 있는 것을 아는 친구가 부르는 것입니다. 김영철 나와라! 누군데? 아이고 반갑다 친구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합니까? 우리는 신을 부를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을 주실 때에 인간 빼놓고 주셨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마지막에 누구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의 이름으로 기도해 버리면 기도의 내용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면 자아의 요구사항인 자아의 꿈과 희망이 담긴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치 팔공산 갓 바위처럼.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려면 이 주의 이름이 하시는 그 일과 내용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종속되려면 나의 희망과 꿈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신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이 창안해 낼 수 있는 그런 신입니다. 이것을 버리고 주님과 주님의 합의로 만들어낸 그 내용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출입구가 무엇이냐 하면 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미리 약속을 던져놓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희망 포부 기대 새해가 되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그런 것은 일체 주의 이름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 적어도 하나님이 만드신 교회 같으면 어느 정도 인가하면 죽음의 권세를 이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와 율법의 권세를 다 이길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소원과 목표를 달성하여도 죽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하고 나이 많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욕망의 문제입니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말한 것인데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 욕망이 없고 전부다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욕망이기에 비교를 느끼고 그 비교한 데서 상대를 꺾음으로 말미암아 상대방보다 우위에 섰다는 것으로 자아의 존재가치를 타인을 통하여 발견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늙은 분들은 인생을 좀 살아왔기에 배려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인간아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배려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머리가 흰 사람을 존경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 애들은 아무리 좋은 관계라고 하여도 다 계산을 합니다. 저 사람하고 사귀면 나중에 얼마나 수입이 생길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집의 친구와 사귀더라고 공부 못하는 아이와 사귀지 말고 공부 잘하는 친구와 사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공부 잘하는 아이는 누구와 사귀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함께 웃고 떠들고 술 먹고 하는 것 같지만 전부다 경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삐에로처럼 웃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너를 앞서고 말거야! 이러한 경쟁과 게임을 통하여 나는 이 사회에서 나의 레벨이 어느 정도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철저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나이 많은 사람은 양보 배려 바다 같은 넓은 마음 용납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타인의 욕망이기에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하여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남을 의식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굉장히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구시 한 복판에서 육교로 안 건너고 횡단보도도 아닌 곳으로 마음대로 건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주로 연세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순경 만나면 봐주소!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경쟁하지 않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 하는 사람들 소설 쓰는 사람들이 자꾸만 거짓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인간의 자유 인간의 해방을 외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는 이제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자유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자유 어머니로부터의 자유라는 것 자체가 앞에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거기에서 파생된 개념이 자유 아닙니까?
이게 무슨 자유입니까? 아버지! 두고 보세요!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여 살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나중에 아버지 죽고 나서 소주 한 병 들 오징어 굽어한 마리 구워 무덤에 가서는 아버지 제가 지금 이렇게 승진하였는데 이것도 못 보시고 돌아가시다니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그러지요! 그것 남의 무덤인데요. 프로이드에 의하면 평생 인간은 자유,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 자유는 누구를 의식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나 보세요! 이렇게 가치가 있잖아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 이것이 무슨 자유입니까? 스트레스 받을 일이지요!
나이 한 80,90 되어 보세요! 횡단보도도 보지 않고 그냥 건너는 것입니다. 새벽이 일어나가지고 육수간(식육점)이 어디입니까? 치매 걸린 노인이 그렇게 묻듯이 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취직을 하면 30대 초반의 대리가 굉장히 구박을 하지요! 그런데 70대 된 회장은 업무처리를 잘 못하면 젊어서 그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려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신입사원은 나와 경쟁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쟁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이 그야말로 자유입니다. 이 말을 의지하고 있어야 됩니다.
솔로몬이 아버지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의 신앙이고 이제부터 나는 나의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독자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의 언약을 통해서 그 출입구가 주의 이름이라는 것으로 나에게 오는데 진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솔로몬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재 창조물로 되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이라는 그 출입구를 뚫고 주여! 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출발점에서는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내 이름 속에 주의 언약이라는 이름이 덮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왜 만들었습니까? 자기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쓸 모가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쓸모가 있기에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를 믿으라. 다른 복음은 저주 받는 것이기에 십자가만이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 외에는 너를 의롭게 할 자가 없다! 라는 복음이 주어진 것은 지금은 모르지만 이것이 언약의 의해 꼭 필요하기에 천국과 지옥에 꼴 필요하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믿어지기에 믿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도 제가 약간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타인들은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좀 안타까워 하다가 나중에 잊어지지만 본인은 죽으면 유일한 현실 타인이 알 수 없는 자기 문제로 되 돌아오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 ‘나는 지금 지옥 불 속에 있을 뿐이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전도서 7장에 보면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는 것입니다. 왜? 초상집에 가야 네가 가끔가끔 느껴지는 너의 본질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끝에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청년들아 때가 늦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속되어야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은 언약인데 언약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무엇이냐 하면, 출애굽 할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예를 들어 저 출입구에 피를 발랐더니 이 안에 직업과 귀천과 나이를 불문하고 저 출입구에 피를 발랐다는 것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이곳을 그냥 넘어가 버린 것이 유월절입니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핵심은 피 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지금 당장에는 자기 욕망에는 다른 것들이 도움이 될까 싶겠지만 전체를 보시고 모든 것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유일한 언약이고 이 피는 남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피란 주의 이름으로 그 내용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절대로 독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처럼 나는 아버지의 그 언약이 내 신앙이 되기를 원해서 역대 하 1장6절에 보면 “여호와 앞 곧 회 막 앞에 있는 놋 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니” 여기에 일천번제가 솔로몬의 자기 아이디어이냐? 아닙니다.
다윗이 이미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한 장만 거꾸로 보시면 역대 상 29:21절입니다. 오늘 아침에 아주 컨디션이 좋습니다. 어제 화이투벤을 먹고 잤는데 목은 원래 이렇게 쉬는 것이지만 몸은 괜찮은데 화이투벤 덕분도 아니고 화이투벤을 주신 김을수 집사님 덕분도 아니고 김을수 집사님을 주신 하나님 덕분입니다.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21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튿날 여호와께서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숫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 이요 또 그 전제물이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이것을 솔로몬이 알고 그대로 따라 한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신앙을 벗어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일천번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에서는 일천번제를 일천 번으로 말하면서 교회에 올 때마다 돈 가져오라고 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올 때마다 천 원씩 한다고 해도 천원 곱하기 천원이면 얼마이며 또한 이자를 계산해보세요! 새마을금고에 넣으면 6%입니다. 엄청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기를 치는지 몰라요! 아니 이것만 사기입니까? 다 사기인데!
교회가 정말 언약적인 교회라면 주의 이름이 건성으로 주의 이름이 아니고 자기 욕망의 주의 이름이 아니고 이런 것은 이방신의 이름이기에 정말 솔로몬처럼 독자적이지 않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증거 하는 교회가 진짜 하나님이 함께 있는 교회입니다.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역대 하 6장을 봅니다. 26절입니다.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 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이고 이 언약을 따라 용서 되는 것은 피에 있는 것입니다. 즉 제사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36절입니다. 36절에 보면 아주 기분 좋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랜만에 강의 시작하고 제일 기분 좋은 말이 끝에야 나옵니다. 다 같이 봅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 붙이시매.... ”이러 할지라도 어디를 향하여 기도합니까? 38절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인생이 없습니다. 범죄 하지 않는 인생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죄가 무엇입니까? 이런 이방신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자기의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타인의 기대에 의해서 형성되는 그런 욕망을 따라 나오는 나의 기대사항 희망 포부 떠오르는 달과 해를 보고 비는 이런 딴 동네에서 범하는 이런 죄에서 주여! 주의 이름 안으로 들어오게 하옵소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모르고 마귀가 원하는 인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원하는 기도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주여! 돌이 떡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또 기도하는 것은 인기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그 다음의 기도는 주여! 제가 주의 성도로서 이 땅에서 권력을 가지고 출세하게 하옵소서! 내 남편 내 아들 출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세 가지 기도 누가 가르쳐 준 것입니까? 어디서 많이들은 기도 아닙니까? 바로 마귀가 예수님께 세상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데 너도 이렇게 기도하지? 그때 예수님이 사람이 말씀을 산다.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는 것, 내 뜻대로 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것이 본래 인간을 만든 목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요즈음 만약에 교인이 새벽에 이런 기도하는데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면 교인이 정말 물러가버리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에 가는 대신으로 오는데 절은 산 중에 있고 멉니다. 일요일만 갈수 있습니다. 등산 겸 그런데 교회는 골목마다 있으니 멀리 있는 산당보다 가까운데 있는 산당에 오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 아닙니까?
제가 이런 강의를 하면 꼭 끝에 불만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이 불만은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너무 기뻐서 기도할 것이 없네요!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화를 내면서 기도할 것이 없네요!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너무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 욕망대로 나오는 것을 그대로 두시면서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은 그런 기도를 하나하나 지적하시면서 그런 것이 바로 죄이며 나쁜 것이라는 말씀의 기능이 들어올 때 우리는 하나하나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는 언약에 종속되는 기도 즉 솔로몬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그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란 솔로몬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듯이 내가 십자가 앞에서 따로 나의 자아를 챙겼습니다. 하는 회개가 나오는데 그것 3초갑니다. 왜 3초인가 하면 어렵게 기도하고 돌아서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타인의 욕망의 그물망입니다. 옛날 철학자들은 주체의식 때문에 다들 독자적입니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이 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사랑할 때 C라는 사람이 무안가 나를 떠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부다 울렁울렁하는 그물망입니다. 만원인 지하철에 내가 가만히 서 있고 싶어도 뒤에서 떠밀면 이것은 우발적으로 앞에 있는 아가씨의 등을 떠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떠밀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가씨라면 이게 웬 치한이냐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니라고 합니다.
부도가 난다는 것 성경에 보면 열심히만 부도 안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도나게 되어있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부도나서 오셨잖아요! 회사가 문을 닫아가지고, 회사 돈을 다른데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데 투자한 것이 아닙니다. 착실하게 거저 재투자하고 거저 열심히 욕심도 없이 아주 소박하게 살다가 부도가 난 것입니다.
교회마다 교인 수가 준다고 합니다. 그것은 국민소득 2만 불이 넘어가면 동일한 현상입니다. 모든 국가가 2만 불이 넘어가면 교회에 나올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왜? 맞벌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맞벌이해야 하기 때문에 청소도 좀 해야 하고 일반 직원이면 일요일 놀지만 회사에 간부급이 되면 노는 날도 없습니다. 일요일 회사 문 닫아도 회사 걱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일요일은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침 늦게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이제 교회가야지 하다가 보면 벌써 12시 반이고 벌써 끝나버렸는데 오후예배에 갈까 뭐 다음에 가지하면서 안 가는 것입니다. 2만 불이 가만히 있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양쪽이 밤낮으로 벌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옛날 농경시대 때는 365일 중에 일하는 날이 150일 뿐입니다. 나머지 200일은 놀았습니다. 노는데 그냥 노니 심심하니 윷놀이, 사물놀이, 짚불놀이 하고 그렇게 놀려고 하니 미안해서 별자리 보면서 견우직녀라고 하면서 또 노는 날 만들어 놀고 무슨 구실을 만들어 단합대회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지금은 동진데 촌에 내려오지 않느냐 팥죽 먹으러 와야지! 아버지 지금 회사에 잔업 해야 하는데 갈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티브이에서 예야 지금 아무 필요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2만 불 사회에서는 아버지도 가족도 돈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나 자식을 돈보다 더 사랑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것입니다. 처나 자식도 돈 앞에서는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란 키울 때 귀여울 때 말이지 커 가지고 아버지 사업하는데 어떻게 보증 좀 서달라고 하면 이것은 벌써 자식이 아닙니다. 동업자이지 자식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 죽고 나서 유산 다툼 일어날 때 형제도 없습니다. 컬 때 코 흘릴 때 형제이지 유산 앞에서 형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는 그나마 점잖아도 동서들이 난리가 납니다. 아버지 양로원에 계실 때 돈 얼마를 냈느냐? 그것은 장남이 당연히 하는 것이 아니냐? 웃기고 있네! 그것도 철저하게 계산해! 회계사 불러야 겠네! 이러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우리를 업 시켜 놓은 것입니다. 남들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남들처럼 2만 불이 안 되면 사람취급이 안 되는 것처럼 소속의 안정감을 가질 수 없기에 좋든 실든 그들의 구미에 맞추어서 따라 가 주어야 도태되지 않고 콩고물이라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요일이라고 가 버리면 돈 누가 줍니까? 안 먹는 술도 먹고 취한 척 비틀거려야 하고 노래도 못 부르지만 노래방에서 개똥벌레라도 불러야 되고 그래야 무언가 교제가 되어가지고 저 사람은 우리 편이다.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알려주어서 함께 살자는 식으로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냥 한 통속으로 사세요! 우리가 죄 짓는 것이 우리 주특기입니다. 내 밖에 모르는 것 그것을 제일 잘 합니다. 목사가 시키지 않아도 잘 합니다. 이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죄 인 것을 인정하면서, 주여 바로 이런 죄인이 오늘도 십자가 앞에 왔습니다. 묵고 살려고 하니 하는 수 없습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서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아닌 척 하는 것은 아예 신앙도 없는 인간인 것입니다.
사회라는 곳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떠미는데 엎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떠밀리면 원수지간이 아닌데도 나도 떠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떠밀릴 때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천사입니다. 그런데 내가 떠밀어야 할 때는 상당히 미안한 것입니다. 내가 떠밀 의도가 없는데도 떠밀리면 떠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열심히만 하면 산다고 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산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고 지금은 서로 얽혀서 살아가기에 내가 밀치는 자리가 내 자리가 되고 내 자리가 되었지만 그 자리가 또 오래 못 갑니다. 그 자리가 인기가 떨어지면 또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래방 하다가 털어먹고 치킨 집 하다가 털어먹고 베이커리 하다가 털어먹고 계속 옮겨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바다 이야기 하다가 법정에 걸리고 그렇게 털어먹고 경륜에 빠져서 털어먹고 그렇게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유목민들!
회사에 승진을 해야 하는데 자리는 하나뿐일 때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면 라이벌에 대하여 인간 개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들어갑니다. 이것은 신자고 불신자고 간에 이 사회자체가 남을 떠 밀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거기에 저항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왜? 타고난 것이 나만 챙기는 것으로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관성이고 우리 마음의 타성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 사후에 하나의 조치를 취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역대 하 8장 11절 읽어보세요!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겠지요!
솔로몬의 나라가 커졌습니다. 예를 들면 200명을 목회 하는 자가 자신이 200명을 목회하는 자라고 생각이 들면 무엇이 괴로운가 하면 150명이 되면 미치는 것입니다. 100명짜리 목회자라고 생각했는데 150명이 되면 감사 할 텐데 200명이라고 생각했는데 150명이 되면 사람이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버렸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150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덩치가 커지면 덩치를 관리하기 위해서 다른 쪽에 있는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어냐 하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좋게 지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남에게 대접하는 대로 자기가 대접받는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이방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카사노바처럼 여자를 밝혀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회가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아직도 신앙이 있다는 티를 내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이방인의 여자가 내 아내로 와도 이스라엘의 다윗의 궁에는 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껏 이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힘으로 밀리기 시작합니다. 자꾸만 밀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압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부자가 되고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영토가 넓은 것은 야베스의 기도이고 또 다윗의 기도의 응답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통치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방의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듣고 그 소문이 정말인지 와보니 자기의 예상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보고서 놀라서 자진해서 공물을 바치고 그 지혜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압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언약대로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면, 이 큰 덩치를 어떻게 유지할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다윗이 재산을 2천억 물려주었다면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2천억을 물려주었으니 나도 2천억 정도는 되어야 해! 말로는 아버지가 2천억 전부를 주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버지가 주신 것을 내가 잘 유지해야지 하는 순간부터 그 2천억은 나에게 짐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2천억을 주기까지 어떻게 그것을 모았는지 그 원리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솔로몬아 네가 다윗처럼 온 율법을 지키면 너도 다윗처럼 해 주겠다는 이런 원리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그 큰 덩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덩치를 어떻게 유지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그 다음부터 무리수를 두게 되고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그것을 유지하려다 보니 자기의 신앙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정복해 놓은 그런 나라들이 다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솔로몬이 무엇을 알았는가 하면 진짜 원리는 다윗이 물려주었든 누가 물려주었든 간에 이 나라를 도로 하나님의 나라로 반납하는 그것이 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 지혜가 전도서에 나옵니다. 전도서 잠언 아가, 내 몸이 더 이상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라는 것을 뽑아내는 평생이 성도의 가야할 한 평생입니다.
무얼 더 보태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 갖다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짓이고 그것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100억이든 20억이든 이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맞습니다. 내 손가락 발가락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살아온 일대기와 같은 맥락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이 한 일을 예수님이 인계인수 하였다고 할 수도 있고 다윗이 예수님이 미리 하실 일을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면서 느낀 것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기적행하지 않고 함부로 으스대지 않고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 몸을 아낌없이 바치겠나이다. 대속물로 바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도로 반납하는 모습입니다.
이 솔로몬이 마지막에 알아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이 내 뜻이라고 생각하니 그것은 바람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하듯이 내 것이라고 한 것이 바람처럼 잡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람 잡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 잡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바람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내 속에 많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자식도 있었고 아내도 있었고 교인들도 있고 목사님도 있는 것입니다. 다 바람입니다. 교인들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교인들을 보면서 김 바람, 최 바람, 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것입니다. 내 남편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적합해서 붙여준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이 아니라 네가 바람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바람 같은 남편 부쳐준 것입니다. 오랜 만에 바른말 한번 하지요!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관리하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께 종속된 그것을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에 예속 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자유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사람 의식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의식하면 그것이 나이 많은 노인네처럼 이제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을 것도 없고 네 마음대로 사세요! 네 마음대로 사시는데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사시면 내가 헛되며 모든 것이 바람임을 비로소 아는 그런 지혜가 천국의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들어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