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집집마다엔 자작나무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는데, 아마도 신축건물을 짓고 함께 입주하면서 일괄해서 그 나무를 주문해서 심은 듯하다. 우리집과 함께 나중에 입주한 아랫집도 덩달아 자작나무를 심어놓았네그랴.
매일 정원에 나가면 원하든 원치 않든 이집 저집의 자작나무를 보면서, 왜 저렇게 볼품 없는 나무를 너도 나도 심었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들의 머릿속엔 설경 속 핀란드의 자작나무숲을 그리고 있었거나, 아님 가까이에 있는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숲을 연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작나무 한 그루는 키만 뻘쭘하게 크고 비쩍 마른 데다 잎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닐까? 고장난명(孤掌難鳴)이란 말의 의미를 이럴 때 곱씹어 본다. 손바닥 한 쪽은 소리가 나지 않듯 자작나무도 군락을 이루어야지만 비로소 아름답다는 건 뭐 핀란드의 그림이나 원대리의 그림을 보면 모르진 않을 터.
오페라의 발레도 마찬가지다. 물론 솔로의 창의적인 에드립이 두드러지는 독무도 아름답지만, 같은 호흡으로 정교한 대열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유기체맹키로 이야기를 빚어내는 군무(群舞)야말로 발레의 꽃이라는 게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만이 갖는 생각이다.
그건 인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라 하겠으니, 군무에서 각 성원이 하나로 작동하듯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완수할 때 비로소 완성이 있고 이룸이 있는 것이다. 토우슈즈로 뭉개진 발가락 사진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무용수였던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군무 없이 주연 없다."는 말은 드러나지 않는 조연의 역할을 해 주는 군무가 있음에 주연이 있고 발레의 완성이 함께한다는 말이리라.
최근 파리오페라발레단이 내한해서 공연한 '지젤(Giselle)'에서 사랑에 배신당한 윌리들이 선보인 발레발랑은 보는 이들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의 의미에 더하여 황홀한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한 실연이었다는데...하나의 모습으로 최고를 연기한다는 건 그들 하나하나가 자기의 역할을 위해 혼신을 쏟은 결과에 다름아닐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