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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산(930m : 횡성/홍천)
*일 시 : 2005. 10. 27(일), 제55차(22명), 날씨(구름 낀 맑은 날, 안개)
*코 스 : 三馬峙 고개-남동릉-공터-H-고사목-전망바위-정상-북릉-임도
-억새군락 삼거리-공주터 마을-월운리 삼거리
*소 시 : 오전 8시 40분 ~ 오후 1시 30분 월운리(약 13km, 4시간 50분간 소요)
<산행코스>
삼마치고개(폐쇄된 휴게소)-우측으로 60m 진입, 구도로 포장국도-동남쪽으로 휘어드는 도로로 100m 지점 큰 미루나무 밑둥에 손가락형 안내판-동쪽 솔밭길 안으로 뚜렷한 산길
-2분 후 진주강씨 무덤-지능선따라 5~6분 오르면 주능선인 남서릉과 만남-동쪽 능선따라 13분 오르면 헬기장이 있는 무명봉 공터(정상이 마주 보임)-울창한 숲터널 아래 11분 바위봉-평탄한 능선 5~6분 거리 5개 지점 밧줄을 연이은 급경사 구간 오름-마지막 밧줄 통과하면 삼거리(남쪽 창봉리 사기전골 하산로)-좌측으로 굽돌아 이은 주능선으로 10분 오르면 고사목이 있는 전망바위-2분 거리 20m 밧줄이 걸린 급경사 암릉 오르막-4분 거리 무명봉-좌측 거북이 바위-작은 안부로 내려섬-200m(7~8분) 오르막-오음산 정상(7~8평 공터)-북릉-진달래군락사이급경사능선 13분에 바위꼭대기-7~8분 후 수직절벽인 두 번째 바위꼭대기-바위의 좌측 급사면을 내려 첫 번째 절벽아래를 S자로 굽어 급사면 가로질러 두 번째 절벽아래 북릉에 붙음-북릉따라 30분 거리에 아름드리 적송군락-서쪽사면 적송군락 능선 길 35분간 내려섬(607봉)-임도절개지-절개지에서 좌측으로 난 길을 타고 임도로 내려섬-우측으로 30m 지점에서 임도를 건넘-10여 그루 노송군락 아래로 길이 이어짐
-지능선길로 10분 내리면 무덤 2기-잡목숲길로 들어가 5분 거리에 납엽송 숲-
5분 거리에 억새군락 3거리-인삼밭-공주터마을-월운 3거리
오음산(五音山)
오음에 대한 검색을 해보니 여러 가지 내용이 실려 있다.
한국 전통음악에서 한 옥타브 안에 쓰인 기본적인 5음률로 오성(五聲)이라고도 한다.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로 중국음악이론의 선법(旋法)이론에서 쓰인 말이다. 오음의 음정관계는 궁을 서양음악의 C로 잡았을 때 장2도와 단3도인 관계로 이루어진다.
또 음운학적으로 오음(五音)은 한국이나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음절 초의 닿소리를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에 따라 분류한 것이며, 아음(牙音, 어금닛소리), 설음(舌音, 혓소리), 순음(脣音, 입술소리), 치음(齒音, 잇소리), 후음(喉音, 목구멍소리)을 가리킨다. 이것에 반설음(半舌音, 반혓소리)과 반치음(半齒音, 반잇소리)을 증가해서 쓰인다. 한국어에 대해서는 초성오음(初聲五音)이라고도 한다.
삼마치(三馬峙) 고개와 관련된 오음산의 유래전설이 흥미롭다.
홍천읍 삼마치리와 횡성군 경계에 삼마치라는 고개 마루를 품고 있는 오음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는데, 옛날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산에서 다섯 장수가 태어나리라는 예언을 믿고 있었다. 당시 고을에 장수가 나면 재앙을 입는다고 속설을 믿던 마을 사람들은 장수가 나지 못하게 산등에 구리를 녹여 붓고 쇠창을 꽂았다. 그러자 장수의 혈맥이 끊겼던지 검붉은 피가 용솟음치며 다섯 개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사흘 밤낮을 그치지 않더니 사흘째 저녁 무렵 주인을 잃은 백마 세 마리가 갈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 고개를 넘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고 하는데서 이 산을 오음산, 이 고개를 삼마치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은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명산에 혈을 찔렀다는 전설과 일맥상통이다. ‘오음산-삼마치’ 전설로 미루어 횡성 쪽에서 왜병이 들어오지 않고 춘천 쪽에서 왜병이 내려 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 고개는 6.25와 1.4후퇴 때 신남전투에서 국군의 수가 모자라서 일반인이 흰옷을 입은 채로 논에서 진흙을 묻혀 흰옷을 물들인 후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열세에 몰려 수많은 피아장병과 피난민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 고개를 유엔군과 중공군까지 서로 얽혀 살육극을 벌렸던 역사의 현장으로 또 하나의 전설을 남긴 곳이다.
백두마루의 척추인 두로봉(1,422m)에서 좌측으로 빗겨 오대산 비로봉(1,563m)-계방산(1,577m)을 지나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한강기맥은 불발현을 지나자마자 남서쪽 방향 구목령(1,148m)과 북서쪽 방향 운무산(980m)-대학산(876m)을 거쳐 묵방산(596m)에서 한 호흡을 마친 후 홍천읍과 횡성군 공근면을 경계로 남서쪽에 일군 산이 오음산(五音山·930.4m)이다. 오음산 능선은 금물산(780m)-성지봉(791m)을 거쳐 여주군 주읍산-고래산-보금산 등으로 이어가다 끝내 그 여맥을 남한강에 잦힌다.
아침 7시 20분.
새벽차는 京江국도인 팔당댐-양수리를 통과해 양평을 향하고 있다.
차창에 비치는 팔당호 수면은 안개에 묻혀있다.
창회(創會)-은회(隱會)-현회(顯會)의 과정 중 우리 친목모임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생각해봤다.
7시 30분.
널따랗게 이어진 이른 휴일 아침 6번 국도는 대체로 한산하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살을 앓는 도로다.
두 얼굴의 6번 도로는 매양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소설이 지난 지 닷새째다. 節氣(=節侯)는 속일 수 없나보다.
소설은 24절기 중의 하나로 입동과 대설 사이에 들며, 음력은 10월이고 양력은 11월 22일이나 23일경이다. 태양의 황경이 240°에 오는 때이다. 이때부터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여 점차 겨울 기분이 든다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따뜻한 햇볕이 간간이 내리쬐어 소춘이라고도 불린다.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소설로부터 대설까지의 기간을 5일씩 삼후(三候)로 구분하여, 초후(初候)에는 무지개가 걷혀서 나타나지 않고, 중후(中候)에는 천기가 올라가고 지기가 내리며, 말후(末候)에는 폐색되어 겨울이 된다고 하였다.
소설 무렵, 대개 음력 10월 20일께는 관례적으로 심한 바람이 불고 날씨가 차갑다.
이날은 손돌이 죽던 날이라 하고 그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해서, 외출을 삼가고 특히 뱃길을 조심한다.
거기에는 따른 아픈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에 왕이 배를 타고 통진과 강화 사이를 지나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왕은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들어 그런 것이라고 호령을 하고 사공의 목을 베었다. 사공은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그 사공의 이름이 손돌이었다. 그래서 그 손돌이 죽은 곳을 손돌목이라 하고 지나갈 때 조심한다. 해마다 그날이면 강풍이 불고 날씨가 찬데, 이는 손돌의 억울하게 죽은 원혼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강화에서는 이날 뱃길을 금한다.
월동을 위한 주부들의 손놀림과 마음이 바빠지는 계절이다.
초등학교 1~2년생 이빨처럼 듬성듬성 빠진 좌석을 바라보는 마음이 씁쓸하다.
양덕원리에서 우측으로 빗겨난 494번 지방도로로 옮겼다.
5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삼마치고개를 향해 좌회전이다.
중앙분리대가 설치된 왕복 4차선 신설도로다.
3분 만에 만난 우측으로 들어가는 舊도로로 올라섰다.
舊도로를 잠깐 오르면 삼마치 고갯마루 바로 아래 폐쇄된 휴게소가 저 아래에 보인다.
오전 8시40분.
홍천읍에서 약 15Km 지점인 구도로인 해발 490m 삼마치고개다. 만 5년만의 재회다.
이후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지는 미지수다. 수상한 세월이기에 되뇌어 보는 거다.
무상하기 짝이 없는 폐쇄된 휴게소건물은 옛 그대로다. 우측 공간에 정차했다.
홍천-횡성을 잇는 5번 국도를 넘던 삼마치 지하로는 관통된 터널이 지나간다.
오음산 등산은 삼마치-남쪽 횡성군 창봉리 사기전골로 내려서는 것이 일반적인 등반코스인데 2002년 6월부터 2005년 5월까지 생태계 및 자연보호를 위한 휴식년제로 묶여 일반인들 출입이 금지된 바 있다. 지난 5월에 풀렸다는 보도가 없어 하산은 북능을 택해 임도-억새군락 삼거리-싸리재를 넘어 삼마치2리 삼청분교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았다.
옛 기억을 더듬으며 약50여m 동향하자 우측에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이 선명하다.
들머리로 잡아도 무난하다는 생각에 각종 山지가 소개한 일체의 들머리를 생략하고 일행들과 함께 완만한 경사를 올라섰다. 발목을 덮을 만큼 소담하게 쌓인 낙엽길이다.
낙엽 밟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린다. 대부분 상수리나 굴참나무 낙엽들이다.
8시 45분.
낮은 지능선에 오르자 만난 분묘군집지대다.
<국가유공자 安키石의熙 의 묘>
낮은 키의 石碑가 있는 첫 번째 묘소 위로 지능선을 따라 3기의 묘소가 나란히 누워있다. 송림으로 덮인 지능선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이다. 한참 옛날에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거의 허물어진 참호를 지났다. 갈, 솔잎 낙엽이 깔린 능선은 자칫 미끄럽다.
4분 후에 만난 무덤군락지대다. 앞에서 만난 무덤들처럼 능선따라 일렬종대로 누워있다.
<善山 金公永華之墓>
묘소가 끝나면서 경사가 급해지는 오르막이다.
새벽안개 비라는 일기속담대로 나목사이로 햇살이 파고든다. 새벽 안개비에 젖은 갈잎낙엽들이 촉촉하게 젖은 것까진 좋은데 발바닥에 붙어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다. 점차 해발이 높아간다. 좌우에 보이는 산록엔 안개가 내려 한국화에서나 봄직한 선경이다. 오르막 바닥엔 군사용으로 사용됨직한 0.5Cm의 검은 케이블선이 묻혀 표면에 노출된 부분이 자주 보인다. 가파른 오르막에 수북하게 덮인 낙엽소로를 오르는 게 올라갈수록 여간 까다롭지 않다.
9시 03분.
제1 헬기장에 올랐다.
헬기장 주위에는 비록 제철은 지났지만 늦가을의 상징인 억새가 무수하다.
동쪽 정상 쪽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군 레이더 기지 설치물이 운무에 언듯 보인다. 산록 아래 조망은 불가능했지만 일행들이 모두 모여 소담을 즐겼다. 약 5분간의 휴식을 마치고 이동하려는 순간 오늘 새벽까지 23만에 귀국한 엣 친구와 술좌석이 있었다며 애초부터 산행을 포기하고 최이사님과 함께 역산행을 하기로 했던 정감사님의 전화다. 중식식당을 결정하고 메뉴일체까지 장황하게 소개하는 그의 전언을 일행들에게 그대로 중계하며 빠른 시간에 정상에 오르기를 독려했다.
나목(裸木)터널아래 활엽수 낙엽으로 발목이 덮이는 수평능선이다.
야산의 가벼운 높낮이 곡선을 보이는 구릉을 닮은 능선이다.
9시 19분.
전망바위에 올랐다.
말이 전망이지 사방이 운해(雲海)로 덮여 그냥 훑어보는 그런 지점이다.
잠시 이어가는 내리막이다.
9시 22분.
둔덕을 이룬 삼거리 갈림길이다.
우측은 남쪽인 사기장골로 내려가는 코스다.
좌측 능선으로 조금 내려서 수평능선으로 꺾었다.
좌측 산록 아래로 오음산 3~4부 산록을 또아리로 휘감은 하얀 임도가 살아 움직이는 구렁이행보처럼 꿈틀거린다.
9시 31분.
가벼운 스탠딩 휴식을 마치고 미끄러운 낙엽 쌓인 길을 밟고 오른다. 호흡이 이내 경사지바닥에 떨어질 듯한 심각한 오르막이다. 곳곳마다 로프가 준비되어 있지만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다. 겨울철 심설산행 때는 상당한 까다로운 코스이겠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완만한 능선에 이어 곧바로 직벽에 가까운 두 번째 깔딱고개가 가로 서있다.
9시 40분.
<등산로→>
검지모양으로 판각한 목판 이정표다. 로프가 끝나는 지능선 전망대 삼거리에 올랐다.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종전과 비교해 완만한 오름새다.
9시 58분.
노송 4~5그루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린 바위 휴식터다.
후미가 닿기를 기다렸다. 예상보다 두 번째로 참여한 정은소씨가 경쾌한 행보다.
김자연씨의 시원한 무맛도 별미다. 각종 과일과 떡, 그리고 따끈한 차의 부가가치치가 새롭다. 한참 머물며 서로가 덕담나누기에 바쁘다. 친정아버지의 괴로운 병고를 잠시 잊고 산을 찾은 이순임씨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2명을 제외한 산행에 오른 20명의 물끼 젖은 얼굴마다 오음산의 五音이 스며든다.
지난 영남 알프스 산행 때 언양휴게소에서 만났던 부천거주의 이종만씨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김창돈씨로부터 듣고 비로소 생각나는 점이 많았다. 각설하고 사뭇 건강한 산행을 즐기는 그의 노력이 미쁘다는 생각이다. 10여분 머문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로프가 달려있는 새로운 경사의 오르막을 한참 오르면 ∩자형 수평능선이다.
좌우가 절벽을 이룬 절경의 능선은 언제 밟아도 즐겁다.
능선을 중심으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흐르는 안개구름이 운치가 넘친다.
무대 위에 오른 연극배우라도 된 기분이다.
산을 타는 게 아니라 구름을 타고 이동하는 지금이다.
10시 10분.
3~4평 내외의 오음산 정상에 올랐다.
다른 산에 비해 저상의 공터도 가난한 노부집 부엌 앞 봉당정도의 너비이고, 그 흔한 정상표지석 하나 없는 공허한 정상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싫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정상 930m> <1976 재설>
정상 정수리에 박힌 쇠파이프 중간쯤에 걸린 정상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과 삼각점은 5년 전 그대로다. 그밖에 국토지리정보원이 설치한 안내문이 고작이다. 정상 옆 바위에 흰색 페인트로 <오음산>이라 쓴 것도 풍화에 씻겨 선명함을 잃었다.
날씨가 따랐다면 삼마치는 물론, 서쪽 눈앞에 금물산이 그 뒤로 갈기산, 주읍산, 백운봉, 용문산, 중원산과 도일봉 위로 폭산 등이, 동으로는 발교산-봉복산-태기산의 파고를, 북서쪽으로는 봉미산, 장락산이, 그 우측으로는 팔봉산, 금학산, 삼악산 위로 명지산과 화악산 등 경기의 고봉들이, 북으로는 구절산과 대룡산, 그리고 조금 멀리 가리산-사명산이 을 눈 안에 가득히 고였을 것이다.
초겨울 청산에 오른 일행들의 주위엔 구름안개가 떠날 줄 모른다.
김연자씨가 권한 정상주 한 잔에 잠시 시름을 멎었다.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잡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歲月)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煩惱)도 벗어놓고 욕심(慾心)도 벗어 놓고
강 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나옹선사의 시를 대중가요 곡조에 실어 흥얼거려봤다.
그리곤 하산로를 가늠해보려고 주위를 눈짐작하기에 바빴다.
10시 26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정상에서 정북방향으로 빠지는 북릉 코스는 입구부터 길 흔적도 흐릿하지만, 내려설수록 가파르다. 깊은 적설량처럼 적엽(積葉)으로 바닥내용이 확인되지 않아 미끄러지기 십상인데 여간 주의가 필요한 게 아니다. 빽빽하게 밀집된 진달래군락 사이를 뚫고 내려가는 급경사는 약초꾼들이 다닌 흐릿한 길일 성싶다. 외진 하산 코스에 걸린 ‘인천나눔산악회’ 리본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10시 35분.
안개가 아니라면 홍천읍 방면이 조망되는 바위꼭대기 옆구리를 우회했다.
급박한 내리막은 계속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했다.
올라왔던 시간보다 내려가는데 소비하는 시간이 더 걸린다고 생각했다.
10시 45분.
수직절벽인 두 번 째 바위를 우측 급사면으로 내려섰다가 첫 번째 절벽 아래를 좌측으로 감돌며 급사면을 가로질러 두 번 째 절벽 아래로 내렸다. 예서 북릉으로 다시 붙어야한다는 산지의 소개대로 북릉을 찾으려했으나 짙은 안개로 시야가 불분명하고 코스확인도 어려웠다. 판단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은 북릉과 동릉 사이 계곡으로 내려섰다.
11시 13분.
한참 만에 만난 우측 지능선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제법 험난한 약초길을 따라 내려갔다.
질이 난 하산로 보다는 이런 루트가 더 재미있다는 은근한 격려를 보내는 회원들이다.
다시 내려선 계곡의 사면로(斜面路)다.
11시 36분.
우측으로 누운 북능 지능선에 올랐다.
비로소 북쪽 아래로 사행천을 닮은 허연 임도가 보였다.
애궂게 어부의 그물에 걸려 익사한 채 발견된 고래(鯨)의 흰 뱃바닥같다.
11시 41분.
편안한 지능선의 길을 따라 만난 아름드리 강송군락이 시립한 헬기장에 모였다.
선착한 일행들은 배낭에 남은 나머지 행동식을 나누며 후미일행 모두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몇 번을 뒤로 넘어지거나 딩굴었던 험로였다. 여름철 산행이었다면 녹음으로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까짓 산행은 별게 아니라는 예사표정의 일행들이 대견하다.
11시 56분.
자작나무가 가로수처럼 즐비한 절개지와 임도에 내렸다.
개념도에 나타난 북릉을 향해 동북방향으로 이동했다.
사행(蛇行)보다 더 굽은 임도를 따라 가는 행보가 여름철이라면 내려쬐는 뜨거운 태양볕으로 꽤나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초겨울의 임도는 그런대로 사위를 둘러볼 수 있어 지루하지는 않다.
12시 7분.
좌측으로 내려서는 지능선을 발견했다.
만 5년 전에 내렸던 바로 그 지능선이다.
노송과 잣나무가 들어찬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완만한 능선이다.
12시 25분.
계류다. 이어 억새지대에 내렸다.
어른 키를 뛰어넘는 억새밭이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개활지(開豁地)에 펼쳐진 하얀 억새를 보는 일행들의 입이 벌어진다. 싸리재를 올라가는 길을 찾다가 실패했다.
차라리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월운리로 내려가기로 작정했다.
계곡 좌우는 대부분 검은 휘장을 두른 인삼재배 밭 일색이다.
만 5년 전 이곳은 채소밭 일색이었다.
당시 가을은 배추농사는 공급과 생산과잉으로 빚어진 디플레이션 사태로 수난시대였다. 5년이 지난 금년은 그 정반대 현상이다. 이래저래 골병드는 계층은 생산업자와 소비자인 일반 서민들이다. 한국 농정의 끝은 죽음의 터널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민요 <西門行> 중에 나오는 말이다.
“人生不滿百, 常懷千歲憂”
(백년도 안 되는 인생이건만 언제나 천년을 근심하다)
허망한 노파심일까?
오후 1시.
월운리 공주터마을에 내렸다.
소나무 서너 그루가 굽어 내린 작은 둔덕을 이용해 만든 울안의 사슴사육장이다.
수컷 한 마리가 암컷 3~4마리를 거느리고 있다. 울안에서 날뛰는 수컷의 동일한 동작이 희극적이다. 마을 중간 쯤 되는 지점에서 때맞춰 지나가는 마을사람에게 위치파악을 확인하고 삼마치 2리에 머물고 있는 황범식 기사께 이곳으로 회차를 요청했다.
너른 월운리 들판은 온통 검은 포장의 인삼밭이 주종이다.
요즘은 애써 가꾼 농수확물의 도둑이 기승을 부린다는데,
포장도로를 따라 홍천군 동면 월운리 월운리 월운초교 앞으로 어슬렁거리는 행보다.
1시 30분.
공주교를 지나 월운 3거리 버스정류장에 닿았다.
삼마치고개를 들머리로 남서릉-헬기장-고사목-전망바위를 경유해 정상에 오른 다음 북릉-임도-억새군락 삼거리-공주터마을-월운리를 경유해 월운초교 앞 3거리 버스정류장에 이르는 산행거리 약 13km로, 소요시간은 약 4시간 50분간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노변 아스팔트 포장위에 서리태 콩깍지를 재탕으로 털기 위해 도리깨질하는 8순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마다 그로부터 도리깨를 빌려 한 차례씩 흉내를 낸다. 농촌 출신의 남자들은 제법 익숙하지만, 도시태생의 주부들은 영 어설프다. 손에 익숙하지 않은 작은 농사일이라도 어디 그렇게 만만하고 손쉬우랴. 세상살이 중에서 자식을 기르는 일과, 농사일이 가장 힘들다고 하지 않던가.
1시 36분.
홍천읍-동면을 돌아 들어온 버스에 올랐다.
20Km 떨어진 삼마치2리 예약식당인 봉화막국수(기사식당·033-434-6567, 018-300-6567 정덕재)집으로 이동이다. 풍기태생이라는 무던한 인상의 황기사의 심산이 우선은 넉넉해서 좋았다.
오후 2시 55분.
정감시께서 직접 삼마치 2리 식당에서 홍천읍까지 대절택시로 나와 돼지고기를 구입, 식당에 특식으로 주문한 제육볶음과, 최이사께서 구입한 소주를 함께하는 영광과 평화의 좌석이다. <한솥밥>이란 의미가 새로운 맛깔진 식사다. 정작 자신은 수저를 들지 않고 좌왕우왕하며 일행들에게 음식을 권하는 정감사님의 주기가 꽤나 올랐나보다.
3시 45분.
식당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용두 휴게소-용문-양평-양수리를 잇는 경강 국도는 오늘이라 해서 예외일 순 없었다.
지, 정체를 반복하며 끌려가는 버스가 늘 불만이다.
낙조 이전에 入京하라란 예상은 빗나갔다.
천신마고 끝에 들어선 88도로도 오늘따라 주차장에 가깝다.
어느새 초겨울의 메마른 대지에 겨울밤이 조용히 내린다.
6시 50분.
화곡역에서 대거하차(10여명)다.
월요일 아침을 생각해서 적당한 뒤풀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늘 그렇듯 밤은 마음의 무장을 해체시키는 마력의 시간이다.
원만한 작심(作心)이 필요하다.
지지부진한 버스에서 시달린 건조했던 목구멍이 간지럽다.
윤여사네 가게에 들려 맥주 두 병에 온 밤을 싣고 다른 날보다 이르게 귀가하는 발길이다.
오늘밤 침대가 무척 가볍고 따사하리라는 예상이다.
*교통 :
-대중교통
[서울 상봉터미널에서 10분~1시간 간격(05:50~ 21:10)운행하는 홍천행 버스 이용.
인제, 양구 방면 버스 이용
[東서울 터미널(전철 2호선 강변역)에서 20~30분 간격(06:15~21:10)서
1일 22회 홍천行 버스→홍천 터미널 13번 승강구에서 1일 13회 운행하는 삼마치행 버스를 이용.
[홍천 시외버스터미널 13번 승차코너에서 1일 10회 운행하는 삼마치행 시내버스 이용,
삼마치2리 종점에서 하차]
-열차
[서울 청량리역에서 06:50 발 부전행 통일호 열차를 이용, 용문역까지 간 다음(08:10착),
용문 버스터미널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홍천행 버스로 환승(용문~홍천)
삼마치2리 종점에서 홍천행 버스 1일 10회 운행. 이 버스편은 싸리골 입구 삼마치1리에
5분 후에 도착한다.
홍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봉 및 동서울 터미널행 버스 15~30분 간격(06:00~21:10)으로 운행.
공휴일 오후나 귀경길에는 홍천에서 용문까지 버스로 나 온 다음, 용문역에서 16:35, 17:16, 19:30
(주말 임시열차), 20:07, 20:32, 21:44, 22:27발 청량리역행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승용차[경강국도-양평-6번 도로 용두에서 횡성방향으로 우회전-
신촌리 신곡교에서 5번 도로로 좌회전-삼마치]
*숙박 : 횡성[로얄 관광호텔(033-343-6512), 귀빈장여관(033-344-0989)]
홍천[홍천관광호텔(0 - )
*식사 :
-홍천[인정식당(033-434-3187 양곱창), 만석집(033-434-2139 돌솥밥),
영변 메밀막국수(종합병원 앞)
-삼마치2리 버스종점 옆 :
원두막(033-434-7279), 초두부집(435-7789), 양지촌두부(434-6585)
봉화막국수(기사식당·033-434-6567, 018-300-6567 정덕재)
*홍천 온천 ; ☎033-434-5000, 02-573-5516 북방면 소매곡리 홍천강변, 숙박(홍화장)
*시장보기 : 홍천5일장(1, 6일장)-더덕, 취나물, 도라지, 영지버섯, 표고버섯, 두릅 및 각종 약초류,
토종꿀, 서석 막장, 서면 기름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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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충식]비만(肥滿)과의 전쟁 (동아 05.11.22)
사람의 ‘살집’으로 보는 시대상의 변화는 흥미롭다.
르네상스기의 여인들은 풍만한 살집으로 건강미와 섹시함을 자랑했다. 그 시절, 서양의 명화들에 나오는 누드가 다 그렇다. 이 땅의 대한제국 때, 카메라에 잡힌 민중의 얼굴은 한결같이 깡마르고 움푹 팬 얼굴이다. 못 먹고 굶주린, 지금의 북녘 인민들의 얼굴과 다르지 않다. ‘먹고 죽은 귀신이 화색도 좋다’는 속언도 그런 비참한 기아(飢餓)와 절망의 표현이리라.
▷오늘날은 거꾸로 과체중과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다.
기아로 허덕이고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고 내달리는 사이, 어느 새 비만을 걱정하는 나라가 되었다. 더 극적인 역전(逆轉)도 있다. 미국의 경우 비만이 아예 저소득층으로 옮겨 가 버린 것이다. 가난한 부모가 돈과 시간이 없어 방치하는 사이 아이들은 값싼 정크 푸드, 패스트푸드에 빠져 든다. 칼로리만 높은 먹을거리는 빈민가 아이들을 사정없이 살찌운다. ‘굶주린’ 계층에 비만이 번져 가는 역설을 낳은 것이다.
▷정부가 민관 합동의 국가비만관리위원회를 만들고 비만 치료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쪽으로 간다는 보도다. 아이들이 자기 전 시간대인 밤 9시 이전의 패스트푸드 광고를 금지하고, 모든 식품에 칼로리와 지방 함유량을 표기하는 방안도 검토된다고 한다. 비만과의 전쟁에 정부도 거들고 나선 것이다. 수면무호흡증, 뇌중풍, 당뇨병 등이 있는 비만의 경우, 보험 혜택을 주는 것이 오히려 의료 재정을 아끼는 방법이라는 주장이 의사들 사이에 제기돼 왔다.
▷21세기 유망 사업에는 반드시 ‘건강’ ‘미용’ 분야가 꼽힌다.
삶의 질을 따지고 참살이(웰빙)가 추구되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이 최고가 되는 것이다. 비만을 이기는 것은 건강을 얻고 미용도 성취하는 것이니 일석이조(一石二鳥)다. 비만은 분명히 ‘질병’이다. 성인병의 전 단계인 대사증후군의 원인이 되고, 만병(萬病)을 부르는 공적(公敵)이 된 지 오래다. 정부가 나서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비만관리위나 예산 확보 등을 빌미로 ‘정부의 비만’이 가속화되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