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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규 시인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낙타]외 4편의 시로 등단
2002년 계간 <시작>의 창간 주도 초대 편잡장
2006년 계간<시인시각>창간 현재 편집인으로 활동
도서출판 <문학의 전당>설립 시작활동와 출판활동병행하고있슴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녀가 내 명을 핥을때] [물위에 찍힌 발자국][아무 망설임 없이]등이 있다
1999년 제1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제 1회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작]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낯빛으로 바라보면 물의 빛도 어두워 보였다
물고기들이 연신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것은
어둠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닐까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 취하지 않는 물고기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몰골은 어떻게 보일까
무작정 소나기 떼가 왔다
은몸이 부드러운 볼펜심 같은 소나기가
물위에 써대는 문장을 물고기들이 읽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그들의 교감을 나는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것인가
살면서 얻은 작은 고통들을 과장하는 동안
내 내부의 강은 점점 수위가 낮아져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풍성하던 魚族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후로 내 문장엔 물기가 사라졌다
물을 찾아 온다고 물기가 절로 오르는것은 아니겠지만
물이 잔뜩 오른 나무들이 그 물기를 싱싱한 잎으로
표현하며 물 위에 드리우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나를 부끄럽게 했다
물을 찾아와 내 몸이 조금이나마 순해지면
내 문장에도 차츰 물기가 오르지 않을까
차츰 환해지지 않을까
내 몸의 군데 군데 비늘 떨어져 나간자리
욱신거렸다
이 몸으로는 저 물속에 들어가 헤엄칠 수 없다
[수상소감 발췌]
........................중략
내 가장 오래된 벗, S! 시동아리를 한다고 그대를 비롯한 다른 세명과, 그러나 정작 시에 대해선 함구하고 안주 부실한 술만 마셔댔던, 그 남산골이 오늘 문득 떠오릅니다. 기억하는 지요? J와 다른 J가 그 남산골에서 주는 풋과일 같은 문학상을 받고 술집으로 향할 때 나는 스스로에 대해 노여워하며 부천의 내 작는 방으로 가 400여 편의 시를 찢어발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시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오히려 그때보다 더 아득합니다만, 이놈아, 그동안 고생했으니 잠시 쉬어 숭늉이나 마시라며 등을 다독거려주는 따스한 손과 손이 있어, 나의 세계가 어둠만으로 들러 싸인 곳만은 아니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느다란 빛 한 줄기가 스며들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이 따스함만으로도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을 듯합니다. 얼마 전이었지요 어느 산의 나무 속에 들어가 살고 계신 스승을 만나러 둘이서 강화로 가던날, 그날 우리에게 쏟아졌던 빛을 기억합니다.
(나의 존재를 긍정해준 미네르바, 선해 주신 여러 선생님, 그리고 내 곁의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내 손바닥에 주어진 빛 한줌을 고루 나눠드립니다)
[심사평]
상처를 껴안을 때 詩는 빛난다
뜻 깊은 미네르바 작품상이 만들어졌다. 계간 미네르바는 작품상을 신설하고 지난해 겨울호부터 올 가을호까지 온, 오프라인의 모든 문학매체에 발표된 시 중에서 등단 10년 전후의 시인의 작품에게 수상키로 했다.
미네르바 편집위원들이 1차로 15명의 작품을 선정하고 그 중 4명의 시인의 후보작품인 <회전목마(이경임), <등이 없는 풍경>
(이화은), <물푸레나무를 보러갔다>(조정인),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김충규)를 본심에 회부했다.
문학상이 아니라 작품상인 만큼 심사위원은 후보작품을 포함한 시인들이 심사기간 내에 발표한 모든 작품을 필독했다. 1편의 작품에게주는 상이지만 시인이 그 한 편의 작품을 빚어내기까지의 열정에 대한 1차적인 점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경임의 <회전목마>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심사기간 내에 발표한 양이 적어 시인이 시적역량에 대해 더 깊이 알 수없는 것이 아슁웠다. 이화은의 <등이 없는 풍경>은 시인의 내면에서 울리는 문제 제기는 묵직했지만 산문적인 진술이 시의 흐릠을 자주 방해하는 점에서 다음기회로 넘겼다. 해서 최종작품에 조정인의 <물푸레 나무를 보러간다>와 김충규의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남았다 두 시인이 심사 연도에 발표한 작품양도 많았고 대부분 고른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엇다.
어떤 작품에 작품상이 돌아가도 좋았기에 심사위원들의 오랫동안 토론이 있었다
<물푸레나무를 보러갔다>는 시가 젊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시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도 참신했다.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감각적인 시적 표현들이 좋은 점수를 얻었다. 전향적인 세계관도 돋보였다.
오랜 토론 끝에 조정인 시인의 작품들은 내년에 다시 보기로 하고 김충규 시인에게 제1회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의 영예를 주기로 결정했다. 김충규 시인이 발표한 많은 시들은 대부분의 상처와 죽음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그래서 어둡고 지친, 자폐증 같은 시인의 초상을 읽을 수있엇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시인의 시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에서 자신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껴안는 '전향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어, 상처를 껴안을 때 빛나는 시와 가능성을 가늠케했다.
김충규 시인에게 수상을 축하하며 앞으로 그 가능성으로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줄 것을 부탁한다.
함께 본심에서 자웅을 겨룬 작품의 시인들에게는 열심히 쓰는 시인들에게는 영예의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다는 말로 격려의 말씀 보낸다.
[심사위원 : 박제천, 정일근 (글)]
[김충규 시인 시모음]
낙타
나의 집으로 낙타가 들어왔다 쉴 곳을 찾았다는 듯이 길게 숨을 토했다 맑
은 눈에선 고행의 흔적을 엿볼 수 없지만 살점 없이 앙상한 다리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낙타와 함께 지내기엔 집이 너무 좁아 나는 낙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낙타가 등을 낮췄다 나더러 올라타라는 것인지 푸르르 몸
을 털었다 나는 낙타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나는 사막을 지키는 전사가
아니므로 더구나 순례든 고행이든 사막으로 떠날 계획이 없었으므로 낙타
를 집 밖으로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지 않자
낙타는 그만 풀썩 주저앉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낙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눈앞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웅크리고 있었
다
그 숲엔 무수한 뼈가 있다
머리칼 서로 엉켜 햇볕을 허락하지 않는 나무들 하체가 희고 늘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곰팡이가 나무들의 음부 속에서 제 일생을 꽃피우고 있다 숲 속
을 서성거리다 끝내 길 못 찾고 스러져 간 자들의 뼈가 낙엽들 위를 뒹굴고
있다 썩지 않는 뼈들이 낮 밤 없이 인광(燐光)처럼 반짝거린다 언제였던가
숲 속에 들어갔다가 헤맨 적이 있었다 내 뼈를 하나씩 뽑아내어 던졌다 반
짝이는 내 뼈를 딛고 숲을 나온 적이 있었다 몸 속의 뼈를 버리고서야 비로
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은 낮 밤 없이 무수한 뼈들 중에서 제 뼈를 찾으
려는 자들로 시끄럽다 뼈 없는 내 몸이 잔바람에도 휘어질 때 나는 내 뼈를
찾으려 숲 속으로 들어간다 길을 잃을까 두렵다 더 이상 뽑아낼 뼈가 없다
이별 후의 장례식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겠다고 쓴 네 편지를 받고 당혹스러웠다. 편지를
읽기 전까지 나도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편지를 찢
으며 봉분을 다졌다. 나를 지켜 보고 선 살구나무가 풋살구를 톡톡 떨궜다.
풋살구를 한 입 깨물었다. 한때 너는 나의 나무에 열려 있던 붉은 살구였
다, 지금은 서로 장례식을 치르지만. 먼 하늘가에서 몰려 온 먹구름이 제
몸을 잘게 찢었다. 우우우―, 미친 늑대처럼 빗줄기가 울부짖었다. 내 몸은
빗줄기에 후줄근히 젖어 들었다. 내 속의 무덤은 빗소리에 흠뻑 젖었다. 한
순간, 내 속이 자궁으로 변했다. 망할 것, 나는 너를 낳고 싶었다.
그곳에 가려는 자들
그곳에 이른 자 아직 없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자들이
그곳을 향해 집을 떠났다
가다가 지쳐
주저앉아 그대로 돌이 된 자도 있다
돌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는 순간
돌의 울음소리에 놀라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자도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혼자만의
지도를 몸 속에 지니고 있다 또한
나침반과 가득 채워져 있는 물병,
짊어진 배낭 속엔 한 줌의 소금
그러나 안내자는 없다 그곳에 이른 자 없으므로
집을 떠나온 자들은 오직
홀로 걸어갈 뿐이다
군데군데서 만나는
돌이 된 자들의 울음소리에도 끄떡없이
무심히 걸어가는 자도 있지만
그곳이 과연 있긴 있는지 의심스러워
막 신던 신발을 벗어놓는 자도 있다
꽃멀미
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 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마음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 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빽빽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패여,
그 자리에 햇살들이 피라미처럼 와글와글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아니, 황금의 등을 가진 고래 한 마리가
물결 사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마흔도 되기전에, 내 눈엔 벌써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사후(死後)의 어느 한적한 오후에,
이승으로 유배 와 꽃멀미를 하는 기분
저승의 가장 잔혹한 유배는
자신이 살았던 이승의 시간들을 다시금
더듬어보게 하는 것일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이 꽃 냄새, 이 황홀한 꽃의 내장,
사후에는 기억하지 말자고
진저리를 쳤다
저수지
바닥 전체가 상처가 아니었다면 저수지는
저렇게 물을 흐리게 하여 스스로를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수지 앞에 서면 내 속의
저수지의 밑바닥이 욱신거린다
저수지를 향해 절대로 돌멩이를 던지지 않는다
돌멩이가 저수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동안
내 속의 저수지가 파르르 전율하는 것이다
잔잔한 물결은 잠들어 있는 공포인 것이다
상처가 가벼운 것들만 물 속에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다닐 수 있다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그들을 잡으면 안 된다
그들은 저수지의 상처가 키운 것,
저수지를 떠날 때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상처 가진 것에 대해 연민 혹은 동정을 가지면
몸을 던지고 싶은 법,
그런다고 내 속의 저수지가 환해지는 것이 아니다
낙타 2
목마름을 참은 만큼 낙타의 혹은 더 불룩하게 솟는다.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스린 낙타만이 사막을 덤으로 얻어 횡단할 수 있는 법. 사막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선인장들이 제 속의 어둠을 가시로 밀어내고 견디는 것처럼 낙
타는 제 등의 혹으로 인해 견디는 짐승이다. 그의 유순함은 견딤의 과정에
서 얻은 상처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자는 들어라. 낙타의 두 눈이
오아시스로 출렁거리고 있다. 빠른 속도에 대한 극도의 경멸 끝에 낙타는
쉬엄쉬엄 걷고도 위엄을 터득했다. 사막에 뒹구는 고행자의 인골들, 그들의
죽음은 목마름에 대한 참지 못할 조급증과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스리지 않
아 비롯된 것. 사막을 건너가려면 자신을 버리고 한 마리 낙타가 되어 터벅
터벅 걸어야 한다. 등에 혹이 불룩하게 솟을 때까지 걸어야 한다. 낙타가 된
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에 정직해지는 것이다.
꽃냄새가 있는 밤
어디서 꽃이 피는가
치약 냄새보다 환한 꽃 냄새로
누웠던 밤이 벌떡 일어선다
제 울음소리에 놀란 고양이가
그림자를 버리고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넘어가고 있다
달빛을 넘겨도
잠이 오지 않아 나는 옥상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 없는 꽃이
우리 집으로 꽃냄새를 퍼뜨리고 있다
꽃 냄새가
잠으로 가는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내 속으로 들어와 주무세요, 하고
꽃의 손길이 다가와서 유혹하는 밤이다
때론 생을
무언가에 취하게 하고 싶다
그 기회에 생의 길을 바꾸어도 좋으리라
이 밤,
꽃의 남편이 되어
꽃의 품 속에서 하룻밤
푹 자고 싶다
강
방금 수면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가 물고간
달빛, 그러나 달빛은 물고기의 몸 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배설물과 함께 강 밑바닥에 쌓일 것이니
그렇게 쌓인 달빛들 수북할 것이니
비오는 밤이거나 달뜨지 않는 밤이 와도
강은 제 속에 쌓인 달빛들로 환해지리
그 환함으로 물고기들 더듬지 않고도 길을 가리니
내 한 줌 강물을 마신다 내 몸 속도 환해져서
캄캄함의 세월이 와도 더듬지 않을지니
신발을 벗어놓고 정중히 강을 경배함이
어찌 사람의 할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강변여관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강변에는 여관이 없다
강변에 여관 하나를 뚝딱 짓고 싶지만
나는 그럴만한 돈이 없다
강변에 여관이 있었다면 나는
그곳에 장기 투숙했을지도 모른다
일렁거리는 강물 위에 나는 너무나
많은 이름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강변여관에 투숙한다면
그 짓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강물소리가 내 스산한 뼈들 사이로 스며들어
나를 곤히 잠들게 할 것이다
강변여관을 감싸고 도는
강물 소리 밤바람 소리 또는 어찌할 수 없이
고름 든 제 시름을 쥐어짜고 있는
달의 흐느낌을 침대도 없는 방에
누워 듣는 일은
내가 누릴 은밀한 즐거움이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날은 방마다
강물 소리를 끌어들여서 달을 품게 하고 싶다
해변여관
해변여관에 묵으며 갈매기 소리를 듣는다
뭍의 살을 조금씩 뜯어가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평화롭게 보이는 해변, 모든 평화로운 것은 위험하다
평화로운 것에는 비린내가 난다
해변여관의 늙은 주인여자 몸에서도
비린내는 서식한다 해변여관의 방에서도
내륙의 여관에서 나는 곰팡내 대신 비린내가 난다
해변여관이니까, 하고 투숙객들은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비린내 속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모든 공포의 결말은 피의 비린내이다
바다에서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지막 처소가 되기도 한 해변여관
그들이 바다를 제 죽음의 장소로
지목한 까닭은 자궁에서의 공포 때문이다
물의 공포, 그리하여 세상에 태어나기 직전
태아들은 제 몸의 아가미를 뜯어 버린다
자궁은 절대 따뜻하지 않은 곳,
공포의 기억을 씻는 길은 다시 공포 속에
몸을 담그는 것뿐이다 바다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은
미처 아가미를 뜯지 못했던 것,
거대한 자궁으로 돌아가 아가미를 뜯어내려고
첨벙 뛰어드는 것
해변여관에서 나와 해변을 거닐다 보면
물살에 떠밀려 나온 아가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대나무 잎과 잎이 서로의 귀를 갈아준다
어린 새가 그 사이에서 퍼덕거린다
퍼덕거린 만큼의 전율이 대숲에 좌악 펼쳐진다
대숲을 품고 있던 산이
울컥 토해놓은 놀 찌꺼기
찌꺼기가 잎마다 반점처럼 묻어 있다
그 아래에서
나는 귀신처럼 서성거렸다
대숲에 들어가면
내 생을 애태웠던 시간이 흐름을 멈추고
제 몸 속에 깊은 우물을 판다
우물 속으로 들어간 시간을 불러내면 안 된다,
그러면 대나무 잎들이 날카로운 칼로 변해
내 몸을 베려고 덤빌 것이다
무엇을 완성하려고 하면 안 된다,
대숲에선 속에 든 것을 울컥울컥
토해놓아야 한다 토해놓을 것이 없으면
내장이라도 토해놓아야 한다
나날이 비우고 비우기 위하여
사는 대나무들,
비운 만큼 하늘과 가까워진다
하늘을 보라, 가득 채워져 있었다면
어찌 저토록 당당하게 푸르를 수 있겠는가
다 비운 자들만이 죽어 하늘로 간다
뭐든 채우려고 버둥거리는 자들은
당장, 대나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불꽃나무
그 나무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대체 누가 이렇게 고즈넉한 숲에 들어와
나무에 불을 놓았을까요
타 들어 가는 푸르름이 안타까워 나무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옷이라도 벗어
불의 심장을 꺼뜨리고 싶었습니다
불에 타버리면 나무는 뿌리까지 화기(火氣)가 번져
영영 푸른 잎을 피우지 못하리라는 것,
나는 내 몸이 타 들어 가는 듯
소름이 돋아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화들짝 놀라며 주춤 물러났습니다
그 나무는 불꽃나무였습니다
전혀 뜨겁지 않았습니다
잔뜩 흐려 있는 하늘에서 툭, 툭,
빗방울이 떨어져내렸습니다
비에 젖어도 불꽃들은 꺼지지 않고
더 격렬하게 타올랐습니다
내 속의 어두운 숲이
일순간 환해져왔습니다
나무
나무가 잎사귀를 일제히 틔우고 있다
감겨 있던 무수한 눈들이 눈을 뜨는 순간이다
나무 아래서 나는 나무를 읽는다
이 세상의 무수한 경전 중에서
잎사귀를 틔우는 순간의 나무가 가장 장엄하다
이 장엄한 경전을 다 읽어보는 것이 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이 경전을 읽으려면
마음거울에 먼지 한 점 앉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마음거울은 너무 얼룩이 져 있다는 것을
닦아내어도 자꾸 더럽혀진다는 것을
새들도 이 경전을 읽으려고
나무의 기슭을 찾는 것이다
새들을 끌어당기는 나무의 힘!
나는 그 힘을 동경한다
나무로 집을 짓고
나무로 화살과 창을 만들어 썼던 시대,
그 시대까지가 평화의 시대였다
나무 화살과 창에 맞은 짐승들은
죽는 순간의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나
금속 화살과 창이 나오고부터 분노에 몸을 떨었다
나무는 자신을 희생하여 온갖 경전을 기록해 주기도 하지만
나무라는 이름만으로도 장엄한 경전이다
벌레
하늘에서 벌레들이 꼬리를 물며 내려오는 것같이
비가 숨소리를 참으며 꼬물꼬물 내려왔을 때
평소 다소곳하던 왜소한 나무들이
갑자기 몸이 가려운지 이리저리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나무 뒤편의 낡은 이층집 담장 미세하게 갈라진 틈마다 꼭꼭
숨어있던 어둠과 햇빛의 알갱이들이 빗물에 서로
뭉쳐져 땅바닥에 털버덕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디서 기어나온 벌레 한 마리 비의 화살이 괴로운지 연신
입을 꼼지락거리며 제 몸으로 가느다란
고랑을 파며 이동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벌레는
눈물을 찔끔찔끔 쏟아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벌레가 지나간 자리,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다른 곳보다 더 따뜻했다 이무기 한 마리가
빗줄기 사이를 뚫고 속도를 내며 하늘로 오르는지
그걸 가려주려고 잠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린 사이
벌레는 아무 신음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나무들과 함께 나는 후줄근히 젖었다 작살에 살점들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오래 전에 떨어진 태양은 먹다 버린 사과처럼 더럽게
뒹굴고 있었다 내 생은 왜 항상 굴욕인가, 내 영혼은 자꾸 작살 같은 질문을
내 몸에서 퍼붓고 있었다 돌들이 일제히 딱딱한 옷을 벗고 맨몸으로 돌아다
녔다 세상은 왜 항상 물음표 속에 갇혀 있는가, 내 주변에 선 나무들이 물음
표로 구부러져 있었다 오래지 않아 둑이 무너져 먼 바다에 살고 있다는 흰
고래가 지상으로 올라온다면 나는 그 놈의 등에 올라 타고 지상을 떠나고
싶다 늘 어디로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함이 목마름이었다 장대비가 쏟아
졌고, 그 사이 죽순은 쑥쑥 자랄 것이다 죽순, 그 연약한 짐승의 살갗을 만
지고 싶어 한때 대숲에 머문 적도 있었다 대나무들은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물음표로 구부러지지 않았다 대나무들은 늘 느낌표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대나무, 그 앞에 서면 일종의 경건함을 느꼈다 속이 텅 비었으면서도 그렇
게 꼿꼿하게 서 있기가 얼마나 불가해한 일인가 그러나 내 몸은 한번도 느
낌표처럼 꼿꼿하게 서지 못했다 나는 왜 항상 물음표로 서서 세상을 굽어보
는가, 이런 나를 사선으로만 퍼붓는 장대비는 비웃고 있었다 비 오는 날마
다 비를 맞고 서서 흰 고래를 기다리며 한 시절 느릿하게 보내도 좋을 것 같
으다 석 달 열흘동안 쉼없이 비가 퍼부어서 뭍과 바다의 경계가 지워져 버
린다면 흰 고래 성큼 내 앞에 헤엄쳐와 등을 낮추리라 아아, 부질없는 짓 다
집어치우고 죽순처럼 단순하게 쑥쑥 자라기라도 했으면
우체국 계단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냇가로 끌려간 돼지
냇가로 끌려가면서 돼지는 똥을 쌌다
제 주검을 눈치챈 돼지는
아직 익지 않은 똥을 수레 위에 무더기로 쌌다
콧김을 푹푹 내쉬며 꿀꿀거렸다
입가에는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늘은 창자처럼 붉었다
내일 있을 동네 잔치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돼지가 냇가에 도착했을 때
거기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은
숫돌을 갈고 있는 칼이었다
칼이 시퍼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념한 듯 돼지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에
씩 웃었다 그 순간, 쑥 들어오는 칼을
돼지의 멱은 더운 피로 어루만졌다
나무 밑동에 박힌 거울
무슨 나무였는지는 모른다
깨진 거울이 나무의 밑동에 박혀 있었다
누가 일부러 박아놓은 것인지
나무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나무의 피가 거울에 지저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무는 거울을 통해
제 몸의 환부를 보고 있었다
나무는 땅 속에 박힌 제 뿌리가 그리운지
뿌리 몇 가닥을 땅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드러내놓은 뿌리가 말라갈 때마다
나무는 가지를 부르르 떨었다
그때마다 거울엔 피가 흘러내렸다
이런 날은 내 등과 옆구리에도 지느러미가 돋아서
살아있는 물고기를 요리 할 땐
도마 위에 올려놓고 몸통을 토막 내기 전에
칼의 손잡이 부분으로 머리를 힘껏 내리쳐야한다.
먼저 물고기를 기절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렁그렁한 눈을 뜬 채
연신 입을 뻐끔거리는 물고기의 몸통을 토막 내려고 하면
칼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평생 피 맛을 보며 살아온 칼도 그 순간만큼은
눈을 감아버린다 하물며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의 손이 바르르 떨리지 않는다면
그는 넉넉히 살인을 저지르고도 남을 인간임에 틀림없다
생각해 보라 제 몸통이 탁,탁
토막 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물고기의 시선을
그 순간의 참을 수 없는 비애를......
두 손바닥을 웅덩이처럼 내밀어 비를 받으면
비가 꼬리지느러미를 치며 파르르 떤다
이런 날은 내 등과 옆구리에도 지느러미가 돋아서
저 빗속을 유영하고 싶다, 아니
어느 횟집 수족관에 들어가 요리 되기를 기다리고 싶다
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 요리사를 빤히 올려다보고 싶다
그가 내 머리를 때려 먼저 기절을 시키는지
숨가쁘게 몸통부터 토막을 내는지
길에 미친 사람
밤에 도착하자마자 제가 걸어다녔던 길들을 감아들여 몸속에 넣는 사람이
있다 몸 속에서 스르르 풀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여 아우성을 치는 길들
로 인해 몸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부르튼 발바닥을 주무르며 내일 걸어
갈 길을 미리 지도 위에 찍어보는 사람이 있다 지도에 없는 길은 마음의 지
도 위에 그려넣는 사람이 있다 길들이 친친 온몸을 감아들이는 악몽을 꾸다
가 울컥 길을 토하는 사람이 있다 토해낸 길이 회충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자나깨나 길에 미치고 사무친 사람이 있다 심지어
정사할 때도 제 아내를 길처럼 펼쳐놓고 그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밤이면 저승의 문이 열린다
낮의 광휘를 쓸어모아 물을 끼얹어놓은
일몰이 잔물결처럼 잔잔하다 눈먼 벌레들이
그 속에 웅크려 가느다란 어둠을 배설하고 있다
어둠들이 그물처럼 이승을 포위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격렬하게 파닥거리던 이승이 이내 잠잠해진다
밤이 되면 저승의 문이 스르르 열려
그 속에 서성거리던 영혼들이 이승으로 산책을 나온다
낮에 고요해져 있다가 밤만 되면 슬프게 우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 이미 저승 쪽으로 쓰러지고 있는 중이다
새들 중에도 훌쩍 저승 쪽으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밤만 되면 숨결이 격렬해지는 사람 있다면,
이미 그의 몸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둠이 출렁출렁 창궐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어둠이 숨결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니
잠자다가 저승의 문을 연 내 할머니가 그런 경우다
오래지 않아 죽을 자는 자신도 모르게
제 죽음을 주위에 암시해놓는다
그 암시는 어둠 속에서 더 예민해진다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
고양이로 하여금 쓰레기 봉지를 찢도록 한 것은
생선 찌꺼기의 비린내였나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
새끼들이 어딘가에서 떨며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의 눈은 터널처럼 깊고 그 속엔
어둠이 고여있다 그 어둠을 파내어
내 눈에 바르면 나도 저것처럼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슬픈 아비가 될까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자식들은 겁도 없이
가시로 내 생을 쿡쿡 찌르며 자란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 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객혈을 하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린다 거울을 보면 내 눈빛은 차츰 흐릿해져 간다
손톱으로 거울을 찢고 거울 속의 나를 끄집어내어
눈을 후벼 파고 싶은 나날들
고양이는 쓰레기 봉지를 거침없이 찢어놓고
사라졌다 쓰레기 봉지를 테이프로 봉합하며
너덜거리는 내 생은 무엇으로 봉합하나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
내 속의 새를 꺼내 날려보냈다
약을 줘도 앓기만 하는 내 속의 내 새를 꺼내 날려 보냈다
새는 태양의 반대편으로 비겁하게 날아갔다
새를 비운 내 속에 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었고
저녁놀이 오기 전까지 읽다가 둔 시집을 읽었다
아무리 읽으려 해도 세상의 껍질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내 머리는 자꾸 화석으로 굳어갔고 한때 뜨겁게 치닫던 핏줄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내가 날려보낸 새도 어느 허공에선가 추락할 것이다
자꾸 귓바퀴를 긁으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떤 검은 그림자가 내 속으로 들어올 것처럼,명치끝이 아렸다
신지 않는 낡은 신발을 꺼내 신고 옥상을 거닐었다
구석에 몰려 있는 몇 줌의 흙 위로
풀 한 포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왈칵, 한 모금의 피를 토해 풀의 마른입에 넣어주고 싶었다
목련을 끌어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목련을 끌어안았다
꽃피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어 목련의 남편처럼
종일 곁을 서성거렸으나 그녀는 경련하지 않았다
배가 불룩한 목련은 지금 임신중, 그녀는 행복할까
목련을 가까이하면서 내 불행이 꽃피지 않기를
나는 빌었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절대 불행하지 않다
일기 대신 기록하는 불안한 문장들,
나는 행복을 꿈꾸지도 않으면서 왜 불행에 민감한 걸까
내가 잠든 사이 목련이 한꺼번에 뭉텅 꽃을 피워놓았다
오래지 않아 꽃잎들은 흩날릴 것이지만
그것이 목련의 불행은 아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 비워버린 상태,
그것을 불행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출산으로 할쑥한 그녀를 위해
내 살을 한 근 베어내어 뿌리 곁에 묻어주고 싶다
소리 없이 함성을 지르는 목련의 흰 꽃잎들,
저것들을 먹여살리는 힘은 그녀의 뿌리에서 나오는 법
나 목련을 끌어안으며 네가 행복하다면
내 불행쯤은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할께……
중얼거려보는 일이 내 일과이다
가난이 불행을 몰고 온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꽃잎들 후드득지면 그 꽃잎들 잘근잘근 씹어
내 피가 되게하리라 마음먹었다
안개 속에서 너와 나는
사방이 안개로 자욱했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네
안개는 연신 알을 낳고 더 몽롱해져갔네
날개가 축축해진 새들은 날지를 못하고 주저앉았고
사람들의 옷도 젖은 날개 같았네
세상을 향해 너는 저주를 퍼부었지만
나는 네가 지독하게 세상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네
모든 저주와 사랑은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한 뿌리의 두 몸뚱이라는 것을 느꼈네
안개 속에서 너는 병든 물고기처럼
내 기슭에 닿으려 했네
안개 속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나는 타고 왔던 낙타를 풀어주었네
낙타는 모든 길을 고행의 길로 만들며 가는 동물,
등에 불룩 솟은 두 개의 혹에는
소금과 모래알로 새긴 경전이 가득하다네
나는 너를 경전처럼 더듬어 읽었네
세상을 향하여 퍼붓는 네 혀의 저주가 꽃처럼 달콤했네
세상의 모든 길이 안개 속으로 들어와
지친 몸을 풀고 있었네
너도 나도 실은 하나의 길이었네
안개가 걷히고 나면 세상의
어딘가에 가서 뜨겁게 누워야 하는 길
길에게는 세상의 모든 발자국이 애무라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나무들이 무수한 혓바닥으로 얼얼하도록
핥고 핥아 저 하늘이 멍들어 간다
미처 지상에 내려오지 못한 새들도 멍들어 간다
유일하게 멍들지 않은, 달이 조심스레 얼굴을 내민다
그녀가 핥을 때마다 지상은 붉게 달아오른다
늙지 않는 그녀는 아무리 핥아도 환해지지 않는
늙고 병든 자들을 하늘 너머 공동묘지로 모시고 간다
멍든 새들이 멍든 하늘을 날아가고
멍들지 않은 달은 새들의 어깨를 떠민다
길을 걷다 만난 물웅덩이, 지상의 저 흔한 멍
그 속에 달이 노른자위처럼 둥둥 떠 있다
그 달을 밟는다고 달이 멍드는 게 아니다
멍들면 달이 아니다 멍들지 않으므로
달은 밤마다 지상을 핥을 수 있다
지상의 한구석에서 나는
몰래 옷을 벗고 멍을 드러낸다
달의 혀에 내 멍을 맡겨
멍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나는 실신한다 정신의,
아찔한 하혈을 일으킨다
'주유소' 단평 - 김충규 시인
주유소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우회로에 있다
[단상]
이 시는 쓸쓸하게 읽힌다. 젊은 시인들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렬함' 대신 이 시인은 마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아니 독백하듯 나긋하고 차분하게 시를 풀어내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시인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강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시인의 시편들이 매우 안정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들뜬 시들이 난무하는 이때 분명한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시에서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이라는 구절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한 편의 "쓸쓸한 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하거나 불온한 청춘'의 뒤끝, 결국은 휘발되는 사랑! 실연으로 인한 상처의 흔적 따위를 찾으려고 하지 마라. 그냥 홀로 차를 몰고 가라. 우리 생의 주유소는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그 잠깐의 주유를 통해 잠시나마 돌아온 길을 더듬어보는 것, 더듬어보도록 하는 것. 이 시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현명한 자는, 아니 제 삶을 스스로 위무할 수 있는 자는 분명 뒤를 돌아볼 줄 안다. 앞만 보고 속도를 올리는 자들, 그들에게 사랑은, 사랑의 여운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사랑이란 것이 끝내는 '휘발'된다는 것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이때의 '휘발'은 '소멸'과 얼마나 그 간격이 깊고 넓은가. (김충규 시인)
검은 목덜미/ 김충규
내 검은 목덜미는 유년시절의 뒷골목이다 순경들에게 쫒기던 동네 건달이다 변소 옆 큰 우물에 서 있던
해바라기다 마당가에 놓인 비누를 갉아먹던 쥐의 빨간 눈동자다 농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던 누이의 불은
손이다
네 얼굴을 그리려고 하면 네 검은 목덜미가 떠오른다 네 눈 네 코 네 입 네 표정은 지워지고 네 검은 목덜미만
백지의 지표면에 걸린다 일몰의 뒤로 사라지는 새 떼처럼 너란 존재는 희미해지고 어쩔거나 네 검은 목덜미는
언제나 내 숨을 앞지른다 네 목덜미는 아련하고도 불편한 기억이다
<시인시각> 2012년 봄호
통증
김충규
저 일몰이란 것, 밤이 되기 전에 보여주는
하늘의 통증 빛깔이다
통증을 참으며 밤의 캄캄함을 견디는 하늘의
살갗에 돋아나는 별은 통증의 열매이다
지상에서 통증 가진 사람만이 피멍 들도록 입술 깨물며
별을 더듬으며 시간의 잔혹을 견뎌낸다
자궁을 막 빠져 나온 신생아는
그 어미의 통증 덩어리인 것,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도
이내 눈뜨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무에 열린 열매를 쳐다보며
입 속 가득 달콤함의 침이 고인 사람아,
그 열매는 나무의 통증인 것
통증으로 쑤시는 생애를 살아온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열매는 피가 굳어버린 멍으로 보인다
사랑의 끝
김충규
실연하고 돌아오는 저녁 길은
무화과 잎처럼 딱딱해져 버린 입을 다물었습니다
무수한 애원과 변명에도 당신은 기어이
내게 뒷모습을 보였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랑이 끝이라는 증거임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가시밭 지나오지 않았는데도
내 몸에는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습니다
당신의 내면은 장편소설보다도 두꺼워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내게는 잘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눈빛을 떨며 한 장 한 장
당신의 생애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나갔습니다
내가 읽어낸 페이지가 깊어질수록
조금은 당신을 알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는 당신이
손수 붉은 잉크로 밑줄을 그어 놓았지요
그 붉은 잉크가 당신의 따뜻한 피인 줄
내가 왜 모르겠어요 아아,
어느 페이지에선가 백지가 나왔을 때
난 혹여 인쇄가 잘못된 것인가 싶었습니다만
거기까지가 내가 읽을 수 있는 당신의 생애였습니다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당신의 단호함이
내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백지만 나오게 했습니다
무화과 잎을 따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무화과 그늘 아래서 시작된 우리 사랑이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늘을 만들 줄 차마 알지 못했습니다
이 그늘이 내 생의 얼룩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며
나는 파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당신은 떠나고
나는 무화과나무 속으로 들어가
영영 꽃피지 않고 남은 세월을 견뎌내렵니다
바닥의 힘
-김충규
갓 태어나 바닥에서 자란 사람, 갓 죽을 때 바닥에 눕는다 사람의 일생이란 무어냐,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바닥에서 시작
하여 바닥으로 끝나는 것이다 바닥을 딛고 일어난 힘으로 걸었고 뛰었고 지치면 쉬었고 하고 싶으면 바닥에서 정사를 나
눴고 병들면 바닥에 누웠다 지하역의 노숙자도 청와대의 대통령도 바닥에 눕고 바닥을 딛고 살아간다 제 아무리 떵떵거
리며 살던 사람도 추락하기 시작하면 바닥에 닿는다 바닥은 추락의 마지막 지점, 바닥을 피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해도
그곳에도 바닥이 있다 죽어 무덤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도 바닥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바닥에 등을 댄다는 것, 그것은
바닥의 힘에 순응하는 것, 바닥이 등을 밀어 올려준 힘으로 오늘 내가 호흡을 이어간다 바닥이 등을 밀어 올려주지 않으
면 영영 바닥에서 등을 뗄 수가 없다 호흡 정지, 죽음이다 생과 사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건 바로 바닥이다 바닥이 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