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공원 앞 지하철 9호선 한성백제역 근처 방이근린공원에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의 시비가 있다.
서울 방이동 방이근린공원은 서거정의 묘가 있던 곳이다. 서울시의 도시 계획으로 1975년 화성시 봉담읍으로 이장되었다.
이장 당시 대구 서씨 종친회장으로 직접 시신을 수습했던 서정표(87) 옹은“관을 열어보니 6척 장신이었다”고 전한다.
옛 사람으로는 드물게 180㎝를 넘는 큰 키였던 것이다.
송파구가 건립한 서거정의 시비는 폭 3m, 높이 2m 규모의 화강석, 마천석, 오석으로 구름을 형상화 한 받침대 위에 보름달 형태로
둥근 원형의 돌을 깍아 만들어 세웠다
송파구청은 서거정의 시비를 세우면서 서거정의 일생을 검은 돌에 새겨놓았다.
徐居正 선생 : 선생은 조선조 초기(1420-1488)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세종 2년 한양에서 태어나 45년간 여섯 임금을 보필하면서 한성판윤(漢城判尹)과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거쳐 대사헌(大司憲) 좌찬성(左贊成)에 올랐으며, 특히 대제학(大提學)의 중책을 23년간이나 맡았었다.
성종 2년에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으로 달성군(達城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곳 몽촌(夢村)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받아 말년을 몽촌에서 살다가 성종 19년에 69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저서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인시화(東人詩話)등 많은 문헌과 시문을 모은 사가집(四佳集) 23권이 전해 오고 있다. 선생의 유지를 따라 생전에 즐겨 찾았던
망월봉(望月峰) 자락의 묘소가 있었던 방이골 안산 근처에 달이 돋는 모양의 시비(詩碑)를 세워 그 높은 뜻과 공적을 기린다.
2001년 6월 송파구청장
구름위에 얹어놓은 월륜석(月輪石) 시비(詩碑)의 전면(前面)에는 회고시(懷古詩)를 새겼다.
우리 역사의 한 때에 이곳이 숨막히는 요충지(要衝地)였음과 그때부터도 이곳에 잠실(蠶室)이 많았음을 상기시킨다.
懷古詩
當年麗濟角雒强
그 옛날 고구려 백제 웅강함을 겨룰 적에
一水中分波吋疆
한강물 사이에 두고 서로 경계를 다투었네.
歷歷戰場今尙在
지금도 전쟁터는 역력히 남았건만
昇平閻落富桑農
누에치는 마을마다 풍년 들어 평화롭네.
서거정의 시비 뒷면에는 삼밭나루 가는 길(三田渡途中)이 새겨졌다.
三田渡途中
嬴馬三田渡 西風吹帽斜
澄江涵去雁 落日送還鴉
古樹明黃葉 孤村見白沙
靑山將盡處 遙認是吾家
삼밭나루로 가는 길에
여윈 말 타고 삼밭나루로 가는데
서풍이 불어대며 모자를 벗긴다.
맑은 강물에 나는 기러기 잠기고
지는 해는 돌아가는 까마귀를 보내네.
고목에 달린 누런 단풍빛 밝고
외로운 마을 앞은 흰 모래판이네
푸른 산이 끝나는 저쪽 언저리에
멀리 우리집이 건너다 보이누나.
서거정의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사가(四佳)’는 ‘네 가지의 아름다움’ 혹은 ‘네 가지를 좋아함’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네 가지는 서거정이 좋아했던 ‘매화, 대나무, 연꽃, 해당화’를 가리킨다.
그는 집안에 이 네 가지 꽃과 식물을 심어놓고 즐겨 감상하면서 자신의 호를 ‘사가정(四佳亭)’이라고 하였다.
그의 친구였던 박팽년의 ‘강중(剛中)의 집안에 심어진 매화, 대나무, 연꽃, 해당화 네 가지를 소재로 읊다
(題剛中家梅竹蓮海棠四詠)’라는 시(詩)에 잘 나타나 있다.
서거정(徐居正)이 용마산 자락에 정자 ‘사가정’을 짓고 살았다고 하여 그런 연유로 1984년도에 도로명을 정비하면서
당초에 면목로라 불렀던 길을 그의 호를 따서 사가정로라고 고쳐 불렀고, 그 뒤에 생긴 역 이름도 사가정이라고 했다.
서거정(1420∼1488)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양촌 권근의 외손자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서거정은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김시습과 쌍벽을 이룬 당대의 대문호였다.생육신인 김시습과는 달리 계유정난 때 세조의 편에 서게 되어 출세가도를
달린 고위관료였다.6살 때부터 글을 지었다는 천재 사가정은 시를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 스스로 일만 수가 넘는 한시를
지었다는 독백을 ‘졸고 후에 쓰는 글(書拙稿後)에서 토로했다고 하니 그의 생활은 그 자체가 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종은 그를 몹시 아꼈다. 그가 병들자 자신이 입던 따뜻한 옷을 주고 어의를 보냈다.
그가 죽자 수랏상의 반찬을 줄이고 조회를 폐했을 정도였다.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한성판윤을지내기도 했다.
그는 32년간 불암산 밑에 살다가 나이 50이 넘어서는 현재의 서울 송파구 방이동 지역인 몽촌토성 근방에 살았다.
성종이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해 광나루와 몽촌 일대 땅을 하사한다.
그는 벼슬에 있을 때도 아차산 아래 광나루에 농가를 마련하고, 그 남쪽 한강변의 풍경을 즐기며 시를 썼다.
말년에는 아예 한강가에 머물러 여생을 보냈다. 한강의 큰 홍수가 있던 해에 강가에 있던 그의 농가가 그만 물에 떠내려갔다.
그는 남은 가구를 소에 싣고 강 남쪽의 제부촌(諸富村)으로 잠시 옮겼다. 그러나, 강가의 풍류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강변 마을인 몽촌(夢村)으로 식구들을 옮겨 놓고 나랏일을 보던 중에도 틈틈이 자주 왕래했다.
그는 몽촌에 오면 머리를 식혔다.서거정의 정자 오정(梧亭)이 있었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잠시 잊고 한가로운 농촌 생활로 돌아와 시상(詩想)에 잠겼다.
달 있는 밤이면 마을 뒤 '망월봉(望月峰)'이라는 낮은 봉우리에 올라 달을 보며 노래를 읊기도 했다.
때때로 서거정은 이 곳에 술을 들고 올라가 달이 뜨기를 기다리면서 시를 지었다. 이 시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