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지나 막 10월로 접어들었던 어느 날 오전, 보병제1연대장 김정운 대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일반적인 사고보고는 참모계통으로 이루어지지만 중요한 사고일 때는 지휘관이 직접 지휘 보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연대장의 보고 내용은 뜻밖이었다. 1연대 3대대 10중대장이 수류탄 훈련장에서 안전사고로 숨졌다는 것이었다.
수류탄 훈련시에 드물게 사고가 일어난다는 말은 들은 것 같은데, 사병이 죽지 않고 중대장이 숨졌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연대장에게 사고에 대한 수습을 지시하고 사기가 저하되지 않게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고 일렀다.
연대장 김정운 대령은 침착한 어조로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을 잊지 안았다. 나는 웃는 목소리로 연대장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고 그를 오히려 위로하는 것으로 통화를 끝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중대장이 수류탄 사고로 숨졌는데 그의 부하인 중대원 가운데 사망자는
커녕 부상자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 의문을 풀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헌병참모 이준혁 중령을 불러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저녁 무렵 해가 지기 시작하는 알맞은 가을 날씨 때문인지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
현병참모가 서류봉투를 들고 나를 찾았다. 헌병참모는 몹시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다가왔다.
나는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였다.
"사단장님. 안전사고가 아닙니다."
"아니, 중대장이 죽었다는데 안전사고가 아니라니."
"우선 이 서류를 받아 보십시오. 제가 개요를 보고드리겠습니다."
헌병참모의 보고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숨진 강재구 대위는 중대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제1군단 하사관학교 교관이었다고 한다.
바로 현재의 제1연대 제3대대 주둔지인 그 병영 그 자리였다고 한다. 그 시절에도 오늘 사고가 발생한 장소가
수류탄 훈련장이었는데, 골짜기 경사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잘못 수류탄을 던지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부터 수류탄 훈련장을 옮기기 위해 상부에 건의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어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훈련에 나가기 전 장교식당에서 동료 중대장과 식사를 하면서 수류탄 훈련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대더라는 것이었다. 제10중대장 강재구 대위와 제9중대장 용영일대위는 서울고등학교와 육사16기 동기생으로
각별한 관계이기에 수류탄 교육에 대해서 상의하면서 "전투시 수류탄을 투척할 경우는 지형이나 주위 조건이 나쁜 것이
대부분이므로 그런 악조건하의 훈련이 오히려 득이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용 대위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장교식당을
나와 훈련장으로 향했다고 했다.
헌병참모가 현장조사한 결과로는, 중대원이 있는 곳에서 약30미터 안전거리를 두어 1개분대씩 투척호에서
수류탄 1발씩을 던지는데, 박해천 이등병 차례가 와서 수류탄을 나누어 주니 수류탄을 손에 들고 벌벌 떨더라는 것이다.
강 대위는 따로 불러내어 연습 수류탄(모양만 같을 뿐 폭약이 없음)으로 몇 번 던지도록 훈련을 시킨 다음,
수류탄 투척선에 데리고 가서 강대위가 직접 안전핀을 뽑아 주며 던지게 했다고 했다.
박 이병은 얼굴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눈을 딱감고 수류탄을 힘껏 던지더라는 것이다.
그 순간 수류탄이 투척선 앞 골짜기 쪽으로 안가고 높게 원을 그리며 반대 쪽 중대원이 앉아 있는 곳으로 떨어져 갔다.
순간 강재구 대위는 럭비 선수처럼 수류탄 떨어질 것을 예상한 쪽으로 달려 갔다고 했다.
강대위는 육사 시절 럭비 선수였다고도 했다. 그리고 럭비 공 받는 것처럼 받으려고 했다가 이미 내민 손보다
빠르게 수류탄이 떨어지자 럭비공 껴안듯 온몸으로 덥썩 덮쳐 장렬하게 순직했다는 것이다. 그 덕택으로 주변의 중대원들은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고 강 대위의 유체(遺體)복부와 가슴팍은 갈기갈기 찢겼다고 했다.
헌병참모는 수사관답지 않게 눈물을 글썽이며, "강재구 대위의 죽음은 안전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殺身成仁)입니다."
보고를 마치면서 헌병참모 서류봉투를 두개 꺼내면서 나에게 정중히 주는 것이었다.
하나는 조사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강재구 대위의 직속상관인 제1연대 3대대장 박경석 중령의 건의서라고 했다.
나는 먼저 건의서 봉투를 열었다. 타자 친 것도 아니고 직접 펜 글씨체로 또박또박 정성껏 쓴 글이었다.
그 글에는 일단 부하 중대장이 사고로 순직했으므로 책임을 통감하고 대대장직 해임과 함께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이고, 다음 글은 좀 길게 쓴 것으로 헌병참모가 보고한 내용과 대강 같은 내용이지만 문학적 터치로
강재구 대위에 대한 일상과 근무태도, 평소의 희생정신으로 영구히 그의 부하사랑을 기려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감성소설을 읽는 기분이었고 그 글의 호소력이 나를 감동시켰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박 중령은 육군대위 시절 필명 한사랑(韓史郞)으로 등단한 작가라는 것이었다.
사흘이 지난 뒤 사단 관할지역에 있는 제2야전병원에서 사단장(師團葬)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부인 온영순씨가 흐느끼는 가운데 경건하게 끝냈으며, 육군본부에서는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나는 헌병참모의 건의 내용을 되씹고 대대장이 쓴 글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도저히 그대로 견딜 수가 없어 그 글을 타자로 쳐 다시 깨끗이 문서로 작성해서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그 무렵 때를 같이 하여 모든 일간신문에는 대문짝만 하게 강재구 대위의 살신성인 정신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청와대에서도 기별이 왔다.
박 대통령은 그 글을 읽은 후 감동하고 육군참모총장에게 지시하여 강재구 대위를 일계급 특진시키고 군인 최고의
명예인 태극 무공훈장을 추서한 후 육군장(陸軍葬)으로 다시 장례식을 치르라는 엄명이었다. 육군사상 위관급 장교의
육군장은 전무후무한 일이었고, 전쟁영웅도 아닌 순직자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된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전국은 고 강재구 소령 열풍으로 감동에 젖었고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국민적 여망은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이 무렵 유행하기 시작한 군가 「맹호는 간다」는 어린 초등학교 학생으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유행가를
압도하는 분위기로 인기 상승했고,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나는 연대장 김정운 대령에게 강재구 대위의 순직 장소인 수류탄 훈련장을 가 보고 싶다고 전했다.
기왕이면 강재구 대위가 순직한 시간인 10시 37분에 가겠다고 했다. 순직 장소에서 기도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각 10시 30분에 제1연대 제3대대 숙영지 뒷길을 지나 얕은 산골짜기에 도달했다. 대대장 박경석 중령을 몇 번
보아 안면은 있었다. 대대장 가운데 가장 젊고 패기가 넘치는 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강재구 순직사건 이후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나와 육사5기 동기생인 박영석 장군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알고서의 첫 대면이었다.
그의 형과는 동기생 가운데서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정감이 갔다.
대대장은 현장에 브리핑 차트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죄인인양 몸 둘 바를 모르고 어려워했다.
나는 웃으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나는 속으로 몸시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손을 놓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오렸다. 이윽고 대대장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그 내용인즉, 이번 순직사건은 위대한 부하사랑으로 육군사에 영원히 남길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역사적 순간임을
강조한 뒤, 그러나 대대장의 위치에서는 수류탄 훈련장을 잘못 선정한 책임이 있으므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고 전제하고는, 뜻밖의 제안을 하여 나와 연대장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지휘하는 제1연대 제3대대를 오늘부터 재구대대(在求大隊)로 선언하여 영원히 고 강재구 소령의
부하사랑 정신과 살신성인의 거룩함을 육군사에 남기겠다고 했다.
연대장, 사단장, 직속상관 앞에서 자기 대대를 멋대로 이름지어 선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돌하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대대장의 유창한 브리핑을 계속 듣다 보니 대대장이 밉지 않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 녀석 쓸 만한 녀석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차츰 상했던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육군 대학에서의 강의와 국방대학원의 특강에서 명성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과연 브리핑이 호소력이 있었다. 그는 말미에 가서 나와 연대장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눈치챘는지, '재구대대'선언은 오로지 대대장인 자신의 마음 속의 메아리일
뿐 그 공식화는 "여기 계신 존경하는 사단장 각하의 영단에 달려 있습니다"고 했다. 당시는 장군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쓸 때였으나
님의 경칭과 반반 호칭하던 시절이었다. 그날 따라 대대장의 각하라는 호칭에 신경이 쓰였다. 대대장에게 부담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명쾌한 브리핑과 빛나는 눈동자에서 나는 마음이 움직였다. 대대장 박경석 중령의 생각과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대대장을 가볍게 안았다. 그리고 오른손의 지휘봉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오른손으로 대대장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래!경석아. 오늘 이 시간부터 네 대대는 재구대대로 탄생했다. 뒷 일은 나에게 맡겨라."
나는 대대장에 이어 두 번째 재구대대 선언에 가담한 격이 되었다. 연대장 김정운 대령은 어리둥절해 서 있었고
대대장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사단사령부로 돌아와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대장과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한 후 구두승인을 받았다.
그 후 행정절차를 거쳐 국방부는 일반명령으로 수도사단 보병 제1연대 제3대대를 재구대대로 명명했다.
제1진 재구대대는 베트남에서 잘 싸워 대대단위 최고의 수훈을 기록했다. 불과 1년 사이 고 강재구 소령의 태극무공훈장에 이어
대대장 박경석 중령을 비롯하여 중대장 용영일 대위, 소대장 김길부 중위, 김무석 중위 등 네 개의 을지무공훈장과 15개의 충무,
32개의 화랑, 인헌 등 무공훈장이 장병들에게 수여됨으로써 파병 전기간에 걸쳐 대대단위 최고 무공훈장 수상기록을 세웠다.
나는 그때의 재구대대 명명을 되돌아보며 잘 결정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따. 재구대대 명명 후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수도기계화사단에는 재구대대가 건재하다.
또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 동측에는 고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우뚝 서 있고, 매년 봄에 실시하는 졸업과 임관식 후의
빅 이벤트는 강재구 소령 동상 앞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재구상'을 제정, 매년 시상하고 있다.
강재구 소령은 재구대대와 함께 영원한 우리 육군의 군신(軍神)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끝으로 밝혀 둘 것은, 대대장이 나에게 보냈던 첫 번째 글은 그 후 단편소설로 한국문단에 발표되었고,
그 글은 다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게재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소령 강재구」에 대한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고 한다.내 생각으로는 다시 「소령 강재구」가 교과서에 게재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희생정신의 거룩함과 부하사람의 미덕 그리고 살신성인의 빛나는 정신을 일깨우는데
이보다 좋은 교재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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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채명신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에서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