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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죽음에 대한 소망은 당신들의 삶에 대한 욕구보다 강하다
- 모프사르 바라예프
2002년 10월 23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에서 남동쪽 4킬로 떨어진 두브로브카 거리 1번지, 돔 쿨리크(문화의 집) 극장에는 900명 가까운 관중들이 한참 인기를 끌고 있던 뮤지컬을 관람하고 있었다. '노르드 오스트'라는 제목의 그 뮤지컬은 소비에트 연방 시절 가장 인기 있었던 소설인 '두 대위'를 원작으로 한 롱런작이었다. 알렉세이 그레고리에프라는 러시아 소년이 제정시대부터 2차대전까지 살아남으며 꿈의 '북동항로'를 정복한다는 내용이었다.
돔 쿨리크 극장
밤 9시, 이제 막 2막이 시작되었다. 뮤지컬 내용에 따라 배우들은 2차대전 소련군 복장을 하고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대 위로 예정에 없던 사람들이 올라왔다. 현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대 위의 배우들을 밀쳐내고 가운데에 섰다. 배우들은 처음에는 리허설에 없던 특별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총을 난사하며 배우들을 무대 구석으로 밀쳤고, 그래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던 어느 배우의 머리를 총으로 쏴버렸다.
체첸인들이 무대에 난입하는 순간. 맨 좌측이 체첸인
무대 아래에서 보고 있던 관중들은 순식간에 당황했지만, 이미 극장 내의 구석구석에 무기를 든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22명의 군복을 입은 남자와 19명의 검은 베일을 두른 여자들이었다. 상황이 통제된 뒤에 무대 중앙으로 리더로 추정되는 젊은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체첸에서 왔다. 현재 이곳은 전장이 됬으며 당신들은 우리의 인질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모프사르 바라에프였다. 아르비 바라예프의 조카였던 그는 불과 22살이었다. 잔혹했던 그의 삼촌은 2001년 6월 23일에 알칸 칼라에서 전사한다. 러시아 스페츠나츠에 의해 교전 끝에 죽었다는 설과 러시아 군 정보총국인 GRU가 고용한 친러시아 체첸인들에 의해 생포되어 고문받다가 죽었다는 설이 있다. 모프사르는 어느 쪽이던 삼촌의 복수를 위해 모스크바에 왔으며, 아르비의 아내였던 주라 바라예바가 19명의 베일을 두른 여자들을 지휘하였다.
모프사르 바라예프. 아르비 바라예프의 조카였다.
이 인질극은 샤밀 바사에프가 자신이 보유한 단도 - 리야드 살리힌 - 을 러시아의 심장부에 꽂은 사건이었다. 바사에프는 최소 2개월 이상 이 작전을 위해 준비하였다. 최초의 계획은 러시아 연방 의회와 두마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임무를 맡길 만한 유능한 사령관이 준비 과정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42번가에 있는 모스코브스키 드보레트 몰로도지 극장, 에스트라다 극장, 두브로브카 극장 중의 한 곳을 노리기로 했다.
믿을만한 부하들을 보내어 주변 일대의 지형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교통편과 통행량을 검토한 뒤에 샤밀 바사예프는 이중 두브로브카 거리에 있는 돔 쿨리크 극장을 최종 목표로 선정하였다. "도심지에 가장 가깝고, 사람들의 통행량이 많기 때문에 충분한 관객들이 모일 수 있다."
극장 내의 체첸인들. 왼족 여자의 허리에는 폭탄 벨트가 메져 있다.
목표가 정해진 뒤에 모스크바에 온 바사예프의 부하들은 극장 주변의 지형을 보다 철저하게 살폈고, 극장 내부의 구조와 객석의 형태, 인근의 군부대의 위치까지 검토하였다. 필요한 무기의 수와 인원의 적정선을 정한 뒤에 필요한 병력을 선정하였다. 40여명의 체첸인 중의 여자가 절반이었다. 이는 러시아 군의 검문을 쉽게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절반은 오랜 전투로 단련된 고참 체첸군에서 선정하였다. 그중 한명이 아부 하사노비치 엘무자에프로, 일명 '야시르"라고 불렸던 사람으로 실질적인 계획의 실행 책임자였다.
계획이 거의 확정된 뒤에는 모스크바로 서서히 집결하였다. 40여명의 리야드 살리힌 부대원들은 단체로 모여서 가지 않았고 약속된 날짜에 맞춰서 한두명 씩 모스크바에 집결하였다. 10월 21일 경에 루즈니키 경기장에 집결하여 최종적인 작전 회의에 리허설까지 마치고 10월 22일 밤 9시반에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모여서 인원을 점검한 뒤에 작전날인 23일 밤 9시에 3대의 트럭에 나눠타고 극장에 진입한 뒤에 바로 정해진 위치를 선점하고 부비트랩을 설치하였다.
극장의 지도. 체첸인들은 중앙 무대에 난입하고 좌우측 통로를 봉쇄하였다.
모프사르 바라에프는 철저하게 샤밀 바사에프의 선레에 따라 움직였다. 최대한 많은 인질들을 확보한 뒤에 러시아 기자들을 불러서 그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였다. "1주일 내로 체첸의 러시아군을 모두 철수하라"
러시아는 숱한 검문소를 통과해서 무기와 폭탄을 싣고 수도 한복판의 극장을 점거한 체첸인들에게 넋이 나가 버렸다. 푸틴 대통령은 즉각 FSB 최정예 대테러부대인 알파부대와 오몬 부대로 극장 주변을 봉쇄하였다. 그리고 외신 기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체첸인들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체첸인들은 러시아측 대표인 세르게이 야츠젬브스키에게 좀 더 구체적인 사항을 전달한다.
"체첸 내의 모든 포격과 폭격 중지. '자키스트카' 의 중단. 푸틴의 공식적인 체첸전 종료 선언"
러시아측 대표가 1주일 내에 체첸군의 전면 철수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모프사르 바라예프는 그렇다면 체첸 내 특정한 지역을 선정하여 그 지역의 러시아군을 철수하는 성의를 보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모프사르는 외신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테러리스트라면 우린 백만 달러의 돈과 도주할 헬기를 요구했을 것이다. 우린 체첸 전쟁을 멈추기 위해, 아니면 알라의 뜻에 따라 이곳에 죽기 위해 왔다."
체첸인들과 협상을 하기 위해 자청한 사람들이 속속 몰려왔다. 주로 기자들과 정치인, 외교관 등이었다. 하지만 체첸인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전권 대표와 협상하기를 원했고, 푸틴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도 취소한 채 모스크바로 달려왔지만 이에 대한 확답을 내놓지 않았다. 철수 문제는 점점 지루한 협상으로 흘러갔고, 체첸인들은 매일 매일 노약자와 여자, 외국인 등을 대상으로 인질들을 조금씩 석방하면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계속해서 전달하였다.
극장 주변의 러시아군
그렇게 3일이 흘렀고, 10월 26일이 되자 체첸군도 협상의 지루함에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모프사르 바라에프는 푸틴 대통령에게 체첸의 종전을 공식 선언할 충분한 시간을 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푸틴의 확답은 오지 않았고, 그것은 러시아 측의 성의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질들의 휴대전화를 통해 외부 세계로 '인질의 처형 시간'이 아침 6시라는 것을 알리도록 한 뒤에 바라에프는 3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첫째는 푸틴 대통령이 지목한 러시아 남부 군관구 대표인 빅토르 카잔체프 상장이 극장으로 출석하는 것이었다. 바라예프는 이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인질 100명을 사살하겠가도 공언했다. 두번째는 체첸 내의 친러시아 주요 인물을 극장으로 데려와서 러시아인 인질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친러시아 체첸 정부 수장인 아흐마드 카디로프의 경우 인질 50명과 교환할 것을 약속하였다. 세번째는 두브로브카 극장을 빠져나올 안전 통로의 보장이었다.
극장 주변의 러시아군
최후 통첩을 한 시간은 새벽 1시 반이었다. 체첸인들은 이제 러시아측의 답변, 정확히는 반격을 준비하였다. 그들이 시한을 최종적을 못을 박았기 때문에 러시아측은 이제 선택을 피할 수가 없었다. 부데노프스키 인질극의 경우 러시아는 샤밀 바사예프에게 종전과 함께 안전 통로를 제공하였다. 키즐레이의 경우 러시아는 살만 라두예프에게 안전 통로 만을 제공하였지만, 그나마도 페브로마이스코에 마을에서는 약속을 파기하고 공격을 가했다. 두브로브카 극장에서는?
새벽 3시, 극장 밖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러시아 스페츠나츠 알파 팀이 극장 쪽에 접근하다가 체첸군에게 발각되어 수류탄을 뒤집어 쓴 것이다. 두명은 중상을 입었다. 체첸군은 긴장하고 주변을 경계하였지만 그 뒤로는 러시아측의 특이한 움직임이 없었다. 한참을 노려본 체첸군은 다시 원래의 경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약 2시간이 흐른 뒤였다.
2002년 10월 26일 새벽 5시, 갑자기 극장의 모든 창문으로 서치라이트가 비쳤다. 동시에 극장의 환기구와 배관을 통해 연기가 세어들었다. 체첸군과 인질들은 처음에는 불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연기는 심상치가 않았다. 통로에 가까운 쪽 사람부터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하였다. 체첸군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스 공격이었다.
러시아군의 극장 진입
체첸인들의 일부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가스 마스크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미 가스에 노출된 사람은 소용이 없었다.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연기로 보이지 않는 사방으로 총을 난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가스를 투입하고 바로 공격하지 않았고, 시간을 좀 더 들여서 충분히 효과를 볼 때까지 기다렸다. 약 30분 뒤, 러시아가 자랑하는 최정예 스페츠나츠인 알파와 빔펠 팀이 극장 천장과 베란다,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진입하였다.
극장 내의 폭탄 거의 터지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기습의 효과를 최대한 살렸으며 체첸인들은 가스에 노출되어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체첸인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의 상당수는 폭탄 벨트를 메고 있었지만 가스가 투입되고 한참을 교전을 하였지만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가스에 노출된 체첸인 지휘관들이 미처 폭파 명령을 내리지 않아 여자들이 터트리지 않았다는 설과, FSB 요원이 사전에 기폭 장치를 훼손하여 폭파가 불가능했다는 설이 있다.
극장에서 죽은 체첸 여자들
교전이 종료되고 인질들을 건물 밖으로 구출한 시간은 아침 7시 쯤이었다. 극장 안에 있던 체첸인들의 대부분이 가스에 중독되어 죽거나 사살되었다. 영국 BBC의 최초 보고에서는 3명의 체첸인이 생포되었다고 되어 있었지만, 곧이어 러시아 정부는 33명의 체첸인 모두를 사살했다고 발표한다. 그 중에는 모프사르 바라에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극장에 들어왔던 체첸인의 일부는 난전 중에 탈출에 성공하였으며, 특히 실질적인 수장인 '야시르'는 러시아의 사살 명단에 빠져 있었다. 러시아 정보부는 2003년도에 '야시르'가 체첸 내에 암약하고 있다고 보고하였음을 볼 때 그는 또 한번 사지를 빠져나와 다시 전장에 선 것으로 보인다.
이 작전은 러시아 스페츠나츠의 최고 성공작 중의 하나로 자평한다. 체첸인의 대부분을 손실없이 사살했다는 점에서 지나친 평가는 아니다. 그러나 가스에 노출된 러시아 인질들의 생각은 달랐다. 어느 인질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특수부대가 진입했을 때의 체첸인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들은 우리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우리 특수부대가 한 행동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들은 우리가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극장에 그 때까지 있었던 인질 700명이 가스에 중독됬으며, 그 중 최소한 129명의 인질이 가스로 죽었다. 러시아 측은 그 가스의 성분에 대해 정확히 발표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언론과 외신들은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취 효과를 위해 사용하는 가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의식을 잃고 다시 깨어나지 못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 측도 할 말은 있었다. 극장 요소요소에 배치된 체첸인들을 제압할 다른 뾰죽한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러시아 스페츠나츠 장교는 "만약 정상적인 특수 작전을 했다면 우리측 150명은 죽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극장을 제압한 이후에 부상자와 사망자를 옮기는 장면. 너무 많은 인질이 희생되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위 인질극이 체첸 공화국의 정식 지휘에 따른 작전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고, 자살과도 같은 이번 인질극은 러시아의 잔혹한 체첸 전쟁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말을 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측에 이 전쟁의 종식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지만 푸틴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인질극이 진압된 지 3일 뒤에 '러시아는 자신에게 가해진 도전에 적절히 응대할 것이며, 이런 테러를 저지른 자들을 현장에서 처리함은 물론, 배후에서 이런 테러를 기획했던 자들과 자금을 제공한 자들까지 모두 찾아낼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던 반드시 찾아내어 조치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극장 인질에서 희생된 자들에 대한 추모
결국 또 한번의 부데노프스키를 꿈꿨던 샤밀 바사에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전임자와 달리 푸틴 대통령은 인질들의 희생도 얼마든지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체첸 독립의 대의를 테러로 더렵혔다는 비판에 대해 바사에프는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의 허가없이 독단으로 벌인 작전에 대해 용서를 구했으며, 체첸 공화국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다만 '리야드 알 살리힌' 부대의 지휘권은 남겨줄 것을 간청하였다.
샤밀 바사예프. 그의 회심의 공격은 최악의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바사에프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노선을 천명하였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한 모든 과오를 우리에게 떠넘기며, 그 비극의 원인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을 한 뒤에, "향후 더 이상 러시아에 요구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요구 조건이 없다면 인질을 붙잡을 필요가 없었고, 이는 러시아인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공세 속에 보유한 병력과 물자가 점차 고갈되는 상황에서 획기적인 역전을 노리기 힘든 바사예프는 전쟁을 보다 더 잔혹하게 만들었다. 자살 테러를 일상화 한 것이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Moscow_theater_hostage_crisis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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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에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근데 처음 목표는 두마였고 모스크바의 극장에 성공적으로 잠입하는 이 상황을 이걸 뭐라고 해야될까요? 체첸 측이 대단한건지 아님 러시아가 맛이 간거라고 해야되는지
그러고 보니 러시아가 저 사건 진압방식으로 욕먹을 때 부시가 옹호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2008년에 일어난 상황보고 부시 후회했을듯
극장에 잠입하고 무기를 그 정도로 반입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군의 검문 체계가 그만큼 허술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 아니 푸틴에게는 인질도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_-;
요구를 들어준 뒤에 더 많은 인질극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 봅니다
푸틴을 가지고 괜히 짜르 운운하는게 아니네요.
단호하고도 과감하기 그지없죠
역시 푸짜르 -ㅁ- 가스로 진압할 생각을 하다니 -_-;; 예전에 저거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가스로 테러범 진압후 진입한 특수부대원들이 인질을 끌어내어 구급차에 실은게 아니라 근처 지나던 버스를 잡아세워서(!) 거기다 차곡차곡(!) 인질들을 쌓아놨다고 -_-;;;; 결국 맨 밑에 깔린(!) 한 소녀가 질식사................
구급차를 미리 준비하면 병원 측에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것이고 그러면 모스크바에 사는 체첸인들을 통해 바라예프에게도 알려졌을 수도 있다고 봐서 일부러 준비를 안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꽤 작전의 성공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 테러범들이야 완벽히 제압되었지만 인질들의 희생이 좀 많아서....... 그래도 이집트 어디의 특수부대였나?? 뭐 그런 안습사례보다야 훨씬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러시아 스패츠너츠 알파, 빔펠팀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게 바로 이 사건이죠.
돌입하면서 사상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가스가 강력하고 스페츠나츠팀이 능숙했다는 것이겠죠
푸짜르...당신은참...대..대단하이...
푸틴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겠죠
이 인질사건을 옛날에 tv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여기서 희생된 인질들이 안타깝더군요..
모스크바 인질극은 비교적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이미 '독립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면죄부를 씨워줄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인질이 700명이나 되고 게다가 폭탄까지 있었으니.. 보통 진압작전으로는 재수없으면 폭탄으로 인해 대부분 죽을수도 있었으나 가스진압으로 그나마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민간인 테러 하는 체첸도 그렇지만 죽어나가는 민간인은 정말 안타깝네요..
양쪽 모두 상대방의 민간인을 전쟁과 무관한 존재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