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박시영 옮김, 민음사(2005)
이 소설은 한 자리에서 약 3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이 속도감은 작가의 시니컬한 문장 전개와는 별도로 무료함을 빨리 해치워버리자는 생각에 그 가속을 더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단점이 있다. 각 부를 이끄는 “이제 어떻게 될까?”하는 문장은 내적 필연성이 없는 십대 아이들의 범죄와 그에 수반된 폭력을 어떤 작가의식의 개입도 없이 그려내고 있지만,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든 되어버린 강도, 강간의 현장을 ‘이렇게 되었군’하는 태도로 지나치게 한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작품이 개봉되었을 때, 십대 패거리들의 범죄행각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해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상영금지 조치가 내려졌다고 하는데, 나로선 이 영활 보지 못했지만, <올드 보이>와 <킬 빌>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독자로선 그닥 충격적인 영상으로 다가올리 만무하다는 예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큐브>의 에피소드 격인 <큐브 제로>를 보았는데, 언뜻 든 생각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과 연결해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일단 이러한 망상에는 <큐브>에서 고안된 그 권력 통제 장치는 그 안에 붙들려온 주체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주선이란 거대한 큐브 안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각고의 노력 끝에 큐브의 출구에 다다른 주체에게 다음과 같은 외설적 초자아의 질문이 내려진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영화에서 ‘안 믿는다’고 하면 화형을 당해 죽는데,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믿는다’고 하여도 큐브는 그 죄수를 큐브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탈영토화가 ‘영토화’라는 실정적 지반에 붙들려 있는 한, 탈영토화는 재영토화의 이전이나 이후에 위치할 것이다. 물론 재영토화를 통해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그러한 권력 통제=교화 장치는 “루도비코 요법”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요법은 작품 속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어떤 약물 주사를 맞고 폭력적인 영상을 보여주면 곧바로 구토증세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요법 이후에 어떤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 순간에 죄인은 구토증을 느끼게 된다. 즉 국가 기관은 폭력성을 더 이상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요법을 통해 그들을 강요된 선에 굴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정화 장치인데, 나는 이 장치마저도 좀 구태의연하다는 생각과, 이미 작가가 그려보고자 상상했던 미래에 위치한 독자가 사는 사회는 교화나 정화가 아니라 대문자 정의(Justice)로부터 얼마간 후퇴한 방식으로 분열된 권력에 알아서 복종하는 알 수 없는 장치가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문자 정의가 그것이 대문자라는 한에서 폭력을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의 정의는 더 이상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비가시성의 상상적 가시성이랄까? 그 자체로 분열되어 편재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권력 담지자의 목소리는 현대의 독자나 문학 관련 신문 기자들에게 쓸 거리를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지만, 이 권력의 목소리는 정말 구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임상 대상은, 여러분도 보다시피, 강제적으로 착한 일을 하게끔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나쁜 일을 하도록 강요당해서 말입니다. 폭력적으로 행동하려는 의도에 동반해서 육체적 괴로움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 고통을 물리치기 위해서 임상 대상은 극적으로 정반대되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겁니다. 질문 있습니까?”
‘선택한 악보다 강요된 선이 더 나쁘다’는 게 이 소설의 전언들을 모아주는 주제이지만, 더 나쁜 건 강요되지도 않은 선을 강요되었다고 상상하며 선택하는 게 아닐까? 소설은 교도소의 간수, 교회의 목사, 시민을 임상 실험하는 박사, 그리고 정부를 비판하는 혁명 시민들 연합들도 모두 다 주인공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일면적 권력이라는 것을 그려나가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은 물론 사회의 주체는 암암리에 아니, 이미 어느 정도 분열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작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이 소설의 마지막-소년이 드디어?! 철이 좀 드는-장면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 하나와 같은 거야
이러한 자의식을 통한 외부를 관념적으로 규정하려는 첫 시도가 행해지는 것은, 소설의 몇 페이지가 남지 않은 순간에 발생한다. 자기 동일적인 주체가 되어 지난날의 폭력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청춘을 덧없는 것으로, 때문에 합목적적으로 폭력의 흔적을 청춘의 그것으로 뒤덮는 것. 이 사소한 깨달음마저 권력의 교화나 정화가 아닌, 신문에 난 아기 사진을 보고, 지난날 함께 놀던 시절의 패거리 중 한 친구를 만나 그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 소년은 “엄청 구리고 더러운 세상”에서 “홀로 짝을 찾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루도비코 요법’은 한국의 일진회를 비롯 나일 이리 많이 먹어도 철이 들지 않는 독자를 정화하기엔 그 임상 대상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