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덕령--1.0km--구덕산(565m)--2.1km--대치고개--3.2km--괴정고개--2.0km--장림고개--0.8km--봉화산(149.6m)--2.7km--아미산(233.7m)--4.0km--몰운대 |
8. 산행 일정
[1] 산행지 이동
수원(04:00) ∼ 영동, 중부내륙, 경부, 대구부산고속도로 ∼ 대동TG ∼ 구덕터널 ∼ 구덕령 꽃마을(07:50/아침/08:10)
[2] 산행코스 및 시간
구덕령 꽃마을 (08:20) → 승학산 삼거리(08:50) → 구덕산 (09:00) → 시약정(09:10/09:20)→대치고개(10:00)→까치고개(10:10) →우정탑(10:30/10:40)→괴정고개(11:10)→철탑봉/예비군훈련장(11:25)→ 부대정문(11:35)→장림고개(11:50)→봉화산(12:05/점심/12:45)→2차선도로고개(12:58)→147m봉(13:08)→다대고개(13:40)→아미산봉수대(14:10/14:20)→ 홍치고개(14:35) →다대포(15:05)→몰운대(15:25) |
[4] 산행의 실제
〇 산행지 이동
수원(04 : 00) ~ 부산, 김해 TG 통과(07 : 30) ~ 아침 식사 (08 : 30, 할메 콩나물 국밥집)
〇 산행코스 및 시간
구덕문화공원 안내판(09 : 02) → 부산 조경 앞(09 : 03)→구덕산(09 : 55)→ 시약정(10 : 00)→나무계단(10 : 07)→ 안부 / 임도(10 : 20)→안부 이정표(대티고개 1.5km, 10 : 25)→내림길 이정표(대티고개 1.2km, 10 : 28)→밀성박씨가족묘(10 : 30)→지그재그(Z) 내림 길(10 : 40)→산불 감시 초소, 이정표(대티고개, 10 : 43)→대티고개(10 : 50)→까치고개(10 : 55)→공동묘지(11 : 05)→TV안테나봉(11 : 12)→우정탑(11 : 20)→극락암안부(11 : 36)→성불사 산신각(11 : 42)→부영 벽산아파트(11 : 43)→괴정고개(11 : 50)→해동고등학교(12 : 00)→동아공업고등학교 뒤 철망 길(12 : 05)→예비군훈련장, 체육시설(12 : 07)→부대팬스끝(12 : 20)→자유아파트(12 : 23)→대동중고교정문 / 부산 海사랑 내림 길(12 : 28)→장림고개(12 : 30)→봉화산초입(12 : 35)→봉화산/체육시설(12 : 56)→149.8봉/지도상봉화산(13 : 00)→2차선차도고개(13 : 03)→147봉 삼각점(13 : 07)→구평가구단지 / 동서식당(13 : 15)→국제 그린아파트 내림 길(14 : 10)→다대고개 육교(14 : 15)→서림사→아미산/봉수대(14 : 42)→홍치고개(15 : 00)→다대포 백사장(15 : 20)→몰운대입구/표지석(15 : 35)→다대포 객사(15 : 55)→군부대(16 : 06)→몰운대 군 초소(16 : 25)
[5] 산행 후
몰운대 ~ 해안가로 진행 ~ 화손대(17 : 00) ~ 자갈치 시장(남해 횟집) ~ 비치모텔
9. 탈출로 및 편의사항
해운대한화리조트(051-749-5500),
비치모텔(051-405-3331)
지멕스콜벤(051-206-9890),
부산콜택시(051-200-2000)
초원복국(051-413-0495),
기장꼼장어(051-721-2934)
송아추어탕(051-291-4636),
할매콩나물국밥(051-257-9765)
10. 산 행 기
[1] 산행 전
[1-1] 자화자찬을 해 보는 낙동정맥
2009년 8월 22일 호남정맥 430km의 산줄기를 25구간으로 나누어 1년 3개월에 걸쳐 완주를 하고 국내 제일의 오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경상도 전체를 가로 지르는 거대한 산줄기로 지도상의 능선 거리만도 약 411.9km이고 고도와 기복을 감안한 실제거리가 약 700km를 넘는 낙동정맥을 산행하기 위해 2009년 10월 24일 한배 산꾼 8명(노승애, 노부장제자,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은 남한강, 낙동강, 오심천을 가르는 삼수령(三水嶺, 일명 피재 : 강원 태백시 적각동 135에 위치)을 지나 낙동정맥의 始發點인 천의봉(매봉산)에 올라 산신령님께 낙동정맥 산행을 告한지 1년 3개월, 이제 마지막 한 구간(구덕령~몰운대)만 산행을 하면 어렵고 힘들었던 낙동정맥 산행도 마무리를 하게 된다.
매봉산에서 산신제를 올릴 때만 하도 낙동정맥만큼은 한 구간도 빠지지 않고 중간 탈출 없이 완주를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는데 결국 作心三日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구간까지 이어 온 것이 대견스럽다고 自畵自讚을 하며 2010년 12월 10일 늦은 시간까지 산행 준비를 해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1-2] 함께 산하하지 못한 아쉬움
12월 11일 03 : 00시 기상, 다시 한 번 배낭을 점검을 하고 박사장의 도움을 받아 산행 출발지인 경기도여권민원실로 이동을 했다.
이번 산행은 또 하나의 큰 산 줄기를 마무리 짖고 다음 날 부산의 관광 명소를 돌아보는 것으로 계획이 되어 있어 회원들이 많이 참여 할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막상 출발지에 도착 해 보니「강영재, 김명자부장」모처럼 나왔고 평소 늘 함께 정맥 산행을 하던 「노승애,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 홍영표」등 이 약속된 시간 전에 나와 있다. 이태인 총무님도 이번 산행만큼은 꼭 가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 하고 박기양 교장은 철새도래지 탐사 계획이 있다고 한다. 연지님을 비롯하여 김교수, 김재윤 고문님도 이번 산행만을 참여할 것이라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정의 여의치 않는 모양이다. 낙동정맥을 마무리 짖고 한 해를 보내는 산행이라 바쁜 가운데도 짬을 냈으면 싶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1-3] 구덕령 할메 콩나물 국밥 집
04 : 10분경 경기도 여권민원실 앞 출발, 영동, 중부내륙, 경부, 대구부산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7 : 00시를 좀 넘겨 부산/김해 TG를 통과하여 대동TG, 구덕터널을 지나 예정시간 보다 약 30여분 늦게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구덕령 꽃마을』에 도착, 미리 아림을 해 둔 「할메콩나물국밥집(부산시 서대신동 3가 6-7, ☎ (051) 257-9765 / H.P 011-849-2177, 메뉴 : 콩나물국밥, 콩나물비빔밥, 두부, 찌짐이, 가오리찜, 닭똥집볶음)」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2] 구덕산 오르는 길
09 : 02분, 아침 식사를 끝내고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 구덕령 꽃마을 사거리, 구덕문화공원 안내판이 있는 포장길로 이동을 했다.
늘 출발 전 시작점에서 단체 사진 촬영을 했는데 오늘 따라 무엇이 급한지 각자 이동이다.
가장 후미로 오던 윤사장, 출발지점을 촬영하다 카메라를 떨어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다.
「釜山造景開發」표지석을 지나 정자가 있는 쉼터에서 카메라 작동 여부를 확인(카메라가 망가지기는 했어도 작동이 됨)하고 나무계단을 따라 오른다. 잠시 후 볼록거울과 "부산항공무선표지소"와 「구덕산기상관측소」의 안내판이 설치된 지점을 지나 도로를 버리고 산길로 들어섰다. 시작부터 급 오르막이라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숨소리도 거치러진다. 앞서 간 대원들은 이미 멀리 갔는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는데도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3] 구덕산(九德山)
09 : 45분 「부산 항공 무선 표지소」건물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갈대가 무성하고 영도섬과 부산항의 모습이 조망되고 지난 산행 때 올랐던 엄광산도 지척에 있는 듯 뚜렷이 보인다.
산행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바다와 갈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어 모자가 날아가고 몸까지 비틀거린다. 간신히 사진 한 장을 찍고 좌측 배수구를 따라서 진행하기를 6, 7분, 오늘 산행 구간에서 가장 높은 『구덕산』정상석이 있는 곳에 도착(09 : 55분 경)을 했다. 별다른 특징은 없지만 감천만을 비롯하여 영도와 영도다리 등 부산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이 된다.
『구덕산(九德山)』은 서구와 사상구 그리고 사하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서 부산의 등줄인 낙동정맥의 주능선에 솟은 높은 산정의 하나로 해발 562m이다. 북동쪽으로는 엄광산·백양산·상계봉으로 연결되면서 금정산의 고당봉에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시약산과 승학산이 차례로 이어지면서 다대포의 몰운대까지 산세를 뻗친 산이다.
문헌기록인『동래부지(1740)』에는 구덕산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두송산을 구덕산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일본기록인『초량화집(草梁話集)』에 "구덕산(舊德山) 아래 구덕사(舊德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일본인의 침입이 심하고, 방탕한 행동을 하게되어 20년 전에 절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 일본인이 쓴『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에는 구덕산(九德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구덕산은 보수천의 발원지로 동쪽산록에는 부산 최초의 상수도 급수원인 구덕수원지가 자리 잡고 있다. 옛날 「고저기(古底岐)」또는 「구지기(久至岐)」라고도 불리어 오던 구덕산은 풍치가 빼어나 시민들의 등산로 및 산책로로 크게 각광 받고 있다.
노인들에 의하면 구덕산을「사병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병산」이란 병풍처럼 둘러진 산이라는데서 나온 이름인 듯하다.
<출처> 부산최고봉산악회
http://cafe.daum.net/besttopline/WerW/49?docid=1G4GJ|WerW|49|20100114224520&q=%BA%CE%BB%EA%C0%C7+%BB%EA&srchid=CCB1G4GJ|WerW|49|20100114224520
[4] 시약정(蒔藥亭)과 시약산(蒔藥山)
『구덕산(九德山)』을 뒤로하고 『시약정』으로 이동(10 : 07분)을 했다. 먼저 온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며 뒤쳐진 윤사장과 나를 기다리다 시약정 직전 안부에 도착을 하니 곧바로 배낭을 메고 출발이다.
山頂의 亭子라면 분명 眺望이 최고일 터, 부산의 모습을 한 눈에 담기 위해『蒔藥亭』에 올랐다.『蒔藥亭』은 『시약산』 직전 좌측으로 마루금을 살짝 벗어난 곳의 바위지대에 세워 놓은 정자인데 예상대로 부산을 한 눈에 조망을 할 수 있는 명당이다.
부산항, 영도대교, 영도봉래산, 해운대, 물운대, 광안대교, 대대포 등이 몽땅 조망되고 돌아서니 지나온 엄광산이 咫尺에 있으며 구덕운동장이며 고층 빌딩과 아파트 등 도심의 풍경도 한눈에 들어오고 햇볕에 반사된 수면이며 바다에 떠 있는 배들도 바다를 두르고 있는 산과 섬이 이 함께 어우러져 환상적이 풍경을 만들어 낸다. 山頂의 亭子 값어치를 제데로 하는 곳이다.
『蒔藥亭』에서 환상적인 조망을 하고 『蒔藥山』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안부(10 : 25분)로 내려섰다. 이정표에 「대티고개 1.5km/꽃마을 3.4km/ 시약산정상 0.9km」라 표시되어 있다. 4, 5분이면 『蒔藥山』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후 정상 도착. 정상에는「구덕산 기상관측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정상석도 없는 특징 없는 곳이다.
『시약산(蒔藥山, 515m)』구덕산 남쪽 산으로 대티고개 북동쪽 산이 된다. 동쪽은 서대신동이 되고 서쪽은 주택가가 아닌 산지인 시약산으로 내려오다가 남으로 비탈진 자리에서야 괴정동이 형성되었다. 괴정천은 이 시약산에서 시작된다. 이 산을 시약산이라 한 연유를 알 수 없지만,「蒔」字가 ‘소회향 시자(모종낼 시)’로 이곳에 약초로 요긴한 소회향이 많았거나 약초를 채취한 곳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출처> 부산최고봉산악회 / 부산의 산
http://cafe.daum.net/besttopline/WerW/49?docid=1G4GJ|WerW|49|20100114224520&q=%BA%CE%BB%EA%C0%C7+%BB%EA&srchid=CCB1G4GJ|WerW|49|20100114224520
[5] 「밀성박씨」묘역
시약산 정상의「구덕산 기상관측소」를 뒤로하고 약 5분여를 빠른 걸음으로 안부에 내려서니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룬 가운데 돌담을 쌓아 만든「밀성박씨」묘역 있고 산불 감시 초소와 이정표도 세워져 있는데「대티고개 0.9km, 꽃마을 4km, 시약산 정상 1.5km」라 표시되어 있다.
[6] 대티고개(大峙峴)
「밀성박씨」묘역을 뒤로하고 넓은 길을 따라 10여분을 진행하니 지그재그(Z) 내림 길(10 : 40분)이 나온다. 좌우로 가고 오기를 3분여, 산불감시 초소와 이정표(대티고개 0.3km, 시약산 정상 2.1km, 꽃마을 4.6km)가 세워진 곳에 도착(10 : 43분)을 했다. 앞서 온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강부장, 윤사장 도착을 기다리며 휴식.
잠시 후 후미 도착,
산불감시초소를 뒤로하고 텃밭을 지나 산동네 주택가 담장을 끼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니 2차선 포장도로의 고개마루가 나온다. 『대티고개』다.
『대티고개(大峙峴)』는 구덕산의 산등성이에 해당되는 시약산과 아미산 사이에 있는 재(嶺)로써 해발고도 100~200m에 이른다. 『대티고개(大峙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말기 경까지 대신동일대가 동래부 사하면 대치리에 속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하구 홈페이지(문화관광 / 사하이야기 / 우리동네 이야기 / 괴정동)에는 『대티고개(大峙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해 놓았다.
신촌(新村)에는 집은 별로 없었고, 밭(田)이었는데 그들을「중맥들」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티고개를 넘으면 대신동인데 이 고갯길은 소나무가 많아서 솔티(松峙)라고 불렀다. 길이 험하고 산짐승도 나오고, 도적이 나오는 일도 있어서 하단재첩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괴정사거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가 넘어 갔다고 해서「재첩고개」가「대티고개」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
대티고개에는「天下大將軍」과「地下女將軍」의 장승이 있었는데 6ㆍ25동란 때 없어져 버렸다. 지금은 서대신동으로 넘어 가는 길이지만, 그 당시에는 괴정에서 아미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였다. 이 길은 하단, 독지(禿旨 : 구평동), 구포, 강 건너 김해지역에서 부산까지 왕래하는 보부상(褓負商)과 일반 행인들이 다니던 길목이었다. 일제시대에 지금의 대티고개에 큰 길이 닦아지고, 괴정사거리를 거쳐 엄궁, 사상으로 가는 길과 다대포로 가는 길을 닦았지만, 좁고 거칠은 시골길 그대로였다.
--- 중략 ----
이 고개는 1930년 고개를 따라 새로운 차도가 생기기 전까지 옛 부산 쪽에서 하단지역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교통로 구실을 했다. 그 이전에는 옛 부산 방면에서 하단이나 괴정 방면으로 가려면 지금의 아미동에서 산으로 올라 법원 뒤쪽 고개를 넘어 현재의 대티터널 위쪽의 대티고개를 넘어서 괴정동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1971년 4월 25일 고개 밑에 대티터널이 개통되어 양편의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사하구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1993년 지하철 1호선이 대티터널과 나란히 달리자 대티고개의 옛 교통로 기능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 고개 양쪽 언덕에는 개나리ㆍ무궁화ㆍ벚꽃이 많이 심어져 있어서 경관이 수려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서구 서대신2동과 사하구의 괴정2동을 경계 짓는 고개로 서구와 사하구를 연결 짓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 부산광역시 서구청 홈 / 문화관광
http://culture.bsseogu.go.kr/content/?hnum=dltfO2rjHRP0&s_code=bjOjw1qP9IL3&w_code=enhMz2wAVIC4&subcnt=6
[7] 까치고개
10 : 50분, 『대티고개』로 내려서서 도로를 횡당하면「동양할인마트」가 나오는데 마트 좌측 골목을 끼고 주택가로 골목길로 접어든다. 골목길에서 전봇대가 서 있는 곳에서 우측골목으로 꺾어 좁은 담장 사이를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까치마을맨션 옹벽 길이 나오는데 옹벽에는 기러기가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과 화려한 꽃을 가득 그려 놓았는데 높고 삭막한 옹벽에 벽화로 장식한 것이 돋보이고 운치가 있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옹벽의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고개마루 큰길(10 : 55분경)로 올라섰다. 『까치고개』다.
『까치고개』는 서구 아미동과 사하구 괴정동을 잇는 고개로 현재 서구민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심은 벚꽃나무 고개로 유명하나, 옛날에는 밤나무가 울창하고 무성한 숲과 송림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한다. 『까치고개』란 이 곳 고개에 까치가 유별나게 많이 찾아든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0년 일제의 강점을 전후하여 지금의 천주교 아파트 부근에 화장장이 설치되면서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자주 열렸고, 그 때마다 제물의 음식 찌꺼기가 까치먹이로 제공됨에 따라 아미동ㆍ감천동ㆍ괴정동 일대의 까치가 한낮에도 먹이를 찾아든 데서 까치고개라 부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까치가 울창한 송림에 집을 치고 서식한 이곳에서 한 노파가 까치의 서식을 도와주면서 까치의 집단서식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고도 한다. 까치를 유달리 좋아했던 노파는 밤낮없이 까치와 어울려 지냈고 노파가 죽자 벗을 잃은 까치들이 생전의 노파와의 정을 잊지 못해 이 근처를 맴돌게 되면서 이곳이 까치가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 졌다고 한다.
한 때 이 고개 중턱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왜구 침입에 항거해 싸우다 전사한 임란공신 김근우公의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역사의 의미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57년 화장장이 당감동으로 이전한 후 아미동은 주택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감천2동에서 아미동 山谷을 따라 지어진 주택들과 아미골에서 올라가며 지어진 주택들이 잇따라 이어져 있다.
1970년대에는 오솔길과도 같았던 까치고개가 확장되고, 1993년에는 괴정동 쪽으로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현재 서구와 사하구를 잇는 우회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 부산광역시 서구청 홈 / 문화관광
http://culture.bsseogu.go.kr/content/?hnum=dltfO2rjHRP0&s_code=bjOjw1qP9IL3&w_code=enhMz2wAVIC4&subcnt=6
[8] 우정탑
도로를 횡단하여 「아미 까치 공영 주차장」을 거처 탱자나무 길, 마을4거리를 지나 민가와 텃밭을 끼고 잠깐 진행하니 산길이 시작되며 다소 가파른 오름 길로 이어진다. 된비알을 약 7, 8분 올라가니(11 : 05분) 공동묘지(옥녀봉)가 펼쳐진다.
공동묘지를 지나 TV안테나봉 하나를 넘어서서(11 : 12분) 약 7, 8분을 더 진행하니(11 : 20분) 정교하게 쌓은 돌탑 하나가 나타난다. 탑 상단부에 『우정탑』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무슨 연유로 이 탑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탑을 쌓은 정성이 너무 놀랍다.
탑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며 휴식.
[9] 괴정고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후 우정탑 3거리에서는 우측으로 바짝 꺾어 사면 내림 길로 들어섰다. 선행자들에 따르면 직진 넓은 길은「천마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11 : 36분 「극락암」이 자리 잡고 있는 안부 작은 봉에 오르니 산불감시 초소가 있고 좌측으로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지고 전면으로 아파트 단지도 내려다보인다.
11 : 42분 「성불사 산신각」을 지나 부영 벽산아파트 도착(11 : 43분), 아파트 지하 계단을 지나 정문을 빠져 나오니 멋진 돌 조각품이 세워져 있는데 사람 형상의 공간이 마련 돼 있어 모두 얼굴을 내 밀고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핑계 삼아 잠시 쉼을 취하고 아파트 옹벽 길을 따라가니「옥천초등학교」건물이 보이고 육교가 6차선 도로를 횡단하는 고개에 도착(11 : 50분)을 했다. 『괴정고개』다.
「괴정동(槐亭洞, 사하구)」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괴정동의 뒷 줄기인 속칭 「아래머리」구덕산을 「용호부리」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낙동강 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를 이렇게 부르며 풍수지리설에서 온 이름인 듯하다. 구덕산의 강안(江岸)에 뻗은 말맥(末脈)이 병풍처럼 둘러져서 세찬 폭풍과 낙동강을 불어 내려온 강풍을 막아주고, 동쪽에는 시약산이 솟고, 남쪽에는 금티산이 솟아 그 줄기가 서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을 이루어 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의 괴정동을 옛날에는 목장리라 했다. 괴정동 주위는 조선시대에는 국마(國馬)를 기르는 목장이었는데 이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크고 목장으로서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다대진 관하의 목장으로는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컸던 모양이니 괴정동을 목장리라고 부르게까지 되었고, 지금의 희망촌 일대를 마꼴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 다대포첨사가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이었는데 어느 감목관 때 감목행위가 너무 지나치게 가혹해서 마을사람들이 팔정자나무 아래서 그 감목관을 성토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입었다고 한다. 그 팔정자나무의 하나가 지금 부산시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인데 이 나무가 있는 정자를 괴정이라 했고, 이 괴정으로 괴정동이란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1914년 대티동 일부를 편입하였으며, 그때 부산부에서 동래군 사하면으로 편입되었다. 1942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59년 괴정1,2동으로 1965년 시조례에 의해 괴정1동을 괴정1,3동으로 분동하였다. 1979년 8월 괴정1동이 괴정1,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분들마을, 괴정마을, 대티마을, 신촌, 양지마을, 희망촌이 있었다.
<출처> 부산광역시 홈
http://www.busan.go.kr/06_intro/02_history/01_03_10.jsp
[10] 장림고개
괴정고개 육교를 건너 우측에 있는 SK주유소에서 골목길로 진행,「해동고등학교」를 지나(12 : 00시) 산길로 들어서서 약 5분여를 진행(12 : 05분)하니 동아공업고등학교 뒤 철망 길이 나온다. 철망을 따라 걷기를 2분 예비군 훈련장과 체육시설이 있는 안부에 도착(12 : 07분)하여 잠시 휴식을 가졌다.
느긋하게 휴식을 가진 후 다시 출발,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표지판을 정문에 설치해 놓은 6339부대 정문에서 좌측으로 꺾어 5,6분 정도 부대 철망을 따라 진행, 철망이 거의 끝나는 안부 삼거리에서 표시기가 있는 좌측 방향을 바꾸어 소공원, 자유아파트를 지나 대동고등학교 정문 앞을 통과(12 : 28분)하여 부산 海사랑 건물을 좌측으로 두고 5분 정도 내리막 길을 따라 내려서니 4차선 도로가 가로지르는 고개 마루가 나온다. 도로를 횡단하여 SK다대주유소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고(12 : 30분경) 강부장과 함께 후미로 오는 노부장, 윤사장을 기다리며 선행자들의 길 안내를 살펴보니 이곳이『장림고개』라 표시되어 있다.
「장림동(長林洞, 사하구)」이란 숲이 우거진 곳이라기보다는 지형적으로 아미산 둘레에 길게 늘어선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림(長林)이란 지명은『동래부지(1740)』에 사천면 하단에 장림리로 다대진(多大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고다대(古多大)라 전해지기도 하였다. 「장림리는 관문으로부터 4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촌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림에는 안장림(安長林)·바깥장림(外長林)·보덕포(補德浦 ; 부득포 또는 비득포)의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깥장림은 농업을, 안장림은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형태를 갖추고 반농반어의 취락형태를 이룬 조용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안과 밖 장림이 주택으로 이어졌으나, 원래는 안장림이 옛날의 장림이며 바깥장림은 부산과 다대간의 도로개설 이후 도로변에 새로 집들이 들어서서 생긴 마을이다. 보득포는 안장림에서 두송산 줄기가 북쪽으로 끝나는 능선을 넘어 낙동강 강가에 가면 응봉봉수대의 북쪽 기슭에 있었던 마을이었다.
1914년 동래군 사하면 장림동이었다가 1942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83년 10월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시 조례에 의해 장림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바깥장림마을, 보덕포마을, 새마을, 성화원마을, 안장림마을이 있었다.
<출처> 부산광역시 홈
http://www.busan.go.kr/06_intro/02_history/01_03_10.jsp
[11] 봉화산
12 : 45분경, 『봉화산』오르는 초입에 도착을 했다. 초입 나무 한그루에 여러 개의 마루금 표지기가 매달려 있고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세워 놓은 경고판 사이에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5, 6m의 계단을 올라보니 좌측으로 산 하나를 몽땅 드러내기라도 한 듯 택지가 조성이 되어 있도 산을 오르는 길도 뚜렷하지 않고 흙먼지가 쌓여 걷기가 힘들다. 산도 가팔라 모처럼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땀을 훔친다.
봉화산 초입 계단을 밟은지 약 11분 후 체육시설과 함께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봉화산』 정상에 올랐다. 휴식.
휴식도 잠시, 삼각점이 있는 『149.8봉』을 지나 2차선 포장도로가 가로지르는 안부로 내려선 후 산길로 들어서 5분여를 오르니(13 : 09분) 묘 1기와 준.희가 달아『147.0m』놓은 표지판도 눈에 띈다.
[12] 구평 가구단지
풀 섶에 가려진 삼각점을 확인하고 쉼 없이 진행, 컨테이너와 움막 집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밭을 지나 『구평 가구단지』에 도착(13 : 15분)을 했다. 시간도 13 : 00시를 넘은 터라 배꼽시계가 계속 신호를 보낸다.
가구공장과 가구상이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도로를 잠시 진행, 「구평산가구마트」를 지나 「동서식당(두송로 144번길, 69 ☎ 265-0476)」에 들려 동태국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반찬도 푸짐하고 주인아주머니의 친절도 훈훈하기 그지없다.
구평동(舊平洞)은 구서평(舊西平), 구시평, 구평이라 불렀으며, 조선(朝鮮) 초부터 만호영(萬戶營) 즉 서평포(西平浦)가 설치되어 군사상의 요충지였고, 독지장(禿旨場)이 섰던 교역의 중심지였다.
구평동은 동북으로 감내포(甘內浦 : 大浦灣)와 마주보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티산(金峙山)이 우뚝 솟아 괴정, 신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송반도(頭松半島)가 남쪽 바닷가로 돌출하여 다대동과 이웃하고 있어서 해륙(海陸)의 요충지(要衝地)이다.
구평동의 성개(성포)는 구평동 동남쪽에 설치된 개(城浦)로써 성(城)이 있었으며, 최근까지 토성지(土城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토성이 언제 쌓아졌고, 진성(鎭城)이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토성의 축조 상태와 거기에서 출토된 신라 시대의 토기편으로 보아 아마 신라 때부터 이곳에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중략> ------------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 따르면 17세기를 전후하여 독지장(禿旨場)이 개시(開市)되었다고 하는데 장(場)이 섰던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1일과 6일에 개시(開市)되어 사하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와 장림에서 생산된 소금, 그리고, 수공업품 등이 물물교환이나 미포(米布) 또는 전화(錢貨)에 의하여 교역되었다.
독지장은 동래, 부산, 좌수영장과 함께 조선 중기에는 유명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의 독지리(禿旨里)의 범위를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동래읍지에 사천면(沙川面) 하단(下端)이 신초량리(新草梁里), 구초량리(舊草梁里), 대티리(大峙里), 목장리(牧場里), 감천리(甘川里), 독지리(禿旨里), 장림리(長林里), 다대리(多大里) 등 9리(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서평포를 독지리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구평동은 성개에서 해안선을 따라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두송반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여 뚜렷한 발전을 못하고, 조용한 어촌으로 형성되어 왔었다. 마을까지 겨우 찻길이 닿은 것으로 일제시대 일본군이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하였기 때문에 군사도로가 개설되었던 것이다.
구평동은 어촌 마을이기 때문에 당집이 있으며, 산신도를 걸어둔 신당이 있고, 부락의 일년 동안 안강(安康)을 축원하는 동시에 동구(洞口)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마을에는 바닷가에 용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으며, 이 굴이 신평동 뒷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굴을 용머리로 보고, 신평동 뒷산을 용의 꼬리로 보는 전설이 전한다.
구평동에는 극동철강(현재 한보철강)이 들어서고, 여러 공장이 이사를 와 자리를 잡고 세워졌고, 1977년에는 해안도로를 폭 4m로 넓혀 교통문제를 해결하여 살기가 편리해지자 발전하기 시작했다. 구평동 어항도 정비되었고, 더구나 감천항이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개발되면서 많은 바다가 매립되어 감천항 배면도로와 배후가 건설되고, 관세자유지역으로 조성되는 등 지역개발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구평동은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전술한 바와 같이 구서평, 구시평 또는 줄여서 구평이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9)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평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에 의하여 사하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12월 15일 사하구청 승격으로 사하구에 속하게 되었다.
<출처> 사하구 / 문화관광 / 사하이야기 / 우리동네 이야기 / 구평동
http://tour.saha.go.kr/rbs2/modules/freeForm/view.php?rbsIdx=UR_6_62
[13] 다대고개
식사 후 자판기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국제 그린아파트 내림 길, 삼환아파트 102동을 지나(14 : 10분) 도로를 따라 6, 7분을 진행하니 6차선 도로(多大路)를 만나 잠시 더 진행을 하니 고개 마루에 설치된 육교가 나오는데 이곳이『다대고개』다. 이 고개는「다대2동과 장림2동」을 이어주는 고개다.
「다대동(多大洞)」은 낙동강구(洛東江口)에 자리 잡고 있어 옛날부터 국방의 요새지로 주목을 끌어 온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자비왕조(慈悲王條)의 기록을 보면 5년 여름 5월 왜인이 활개성을 쳐서 사람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6년 봄 2월 왜인이 삽량성(梁山)에 침입했으나 패하여 달아났다. 17년 일모(一牟)•사호(沙戶)•광석(廣石)•답달(畓達)•구례(仇禮)•좌라(坐羅) 등 성(城)을 쌓았다. <五年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六年春二月 倭人揷良城 不克而去 十七年 築一牟•沙戶•廣石•畓達•仇禮•坐羅等城...>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답달(畓達)은 다대(多大)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답달」의「답(畓)」은 인마잡답(人馬雜畓)으로 거듭(重)을 의미 또는 현(顯) 저(著)를 의미하며, 오늘의 다대(多大)의 뜻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記)에도 다다라진•다다라(多多羅)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란 일본 고서(古書)에는 다다라(多多良)라고 한 것을 보면, 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다다라(多多羅)•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地名)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는 것이다.
다대동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5~6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몰운대(沒雲台) 북쪽에 남겨놓은 다대포 패총(貝塚)으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대포 패총(貝塚)의 아래문화층에서 기하문계(幾何文係)토기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발견되고, 윗문화층에서 회색(灰色) 경질토기계통(硬質土器系統)의 유물(遺物)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두 문화는 성격이 달라 신석기시대 말기에 아래층 문화의 사람이 살다가 버리고 간 뒤에 윗층 문화의 주민이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략> -------------
다대포는 국방의 요새로서 조선시대에 경상좌도 7진(慶尙佐道七鎭, 부산, 다대, 서평, 포이, 개운, 두모, 서행) 가운데 국방의 요새지로 가장 중요시하여 다른 진(鎭)의 2배의 병선(兵船)을 배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가운데서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와 한만국경의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만은 무장(武將)으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만으로 임명하였으니, 이것은 수사(水使 : 수군절도사)와 동격이었다. 이러한 수군명장(水軍名將)들이 근무한 다대포에는 선인(先人)들의 무공(武功)을 알려 주는 많은 유적(遺蹟)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윤흥신(尹興信) 첨사를 비롯한 다대포 주민의 항전(抗戰)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한 왜적은 서평포진(西平浦鎭 : 舊平洞)을 함락하고, 이어서 구름떼 같이 다대포진(多大浦鎭)으로 침공하여 왔다. 이에 윤흥신 다대첨사가 지휘하는 아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다대포는 우리 수군과 대결하던 제일선이오, 격전지였다. 특히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부산포를 총공격할 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이 가장 아끼던 선봉장으로 왜적과 다대포 앞 바다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공(鄭公)이 전사한 곳이 몰운대(沒雲台) 앞 바다이며, 여기에는 정공의 순절을 기리는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다대성(多大城)은 석축둘레 6,960m이고, 성내(城內) 면적은 26,162㎡인데 현재 남아 있는 옛날 건물은 몰운대로 이전된 첨사영(僉使營)의 객사(客舍) 하나뿐이다. 다대포 첨사가 우리나라 수군을 통솔하면서 공무를 집행하던 동헌(東軒)이 있었던 곳에는 다대초등학교가 세워져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첨사영 건물로 몰운대에 이전된 객사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사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객사 건물의 관리는 지나칠 정도로 소홀하여 1904년 4월 구한말(舊韓末)때 세워진 다대실용학교의 교실로 사용되어 오다가 그 뒤 다대초등학교로 개편된 뒤에도 60여 년 동안 교실의 구실을 하다가 몰운대로 이전, 복원된 것이다.
---------<중략> --------------
다대포에는 1906년 일본 후꾸오까껜에서 어민들이 이주해 왔다. 지금의 현대APT앞 바다에서 멸치가 무진장 많이 잡혀 지예망 어업이 성행했다. 지예망 어업은 바다에 그물을 치고 육지에서 잡아당겨 고기를 잡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 잡은 멸치를 마른 멸치로 만들어 남포동에 가지고 와 객주에 넘겼다.
임진왜란 때 격전장이었던 다대포 앞 바다는 일제(日帝)말 미군(美軍)의 그라망함재기가 여객선 가모메마루를 격침, 일제의 패망을 예고했던 곳이다.
그리고, 1953년 1월 부산에서 여수간을 운행하던 여객선 창경호(昌慶號)가 다대포 앞 가덕도에서 침몰하여 330여명이 사망한 애환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1939년 구한말(舊韓末)의 정객으로 태극기(太極旗)를 처음 국기로 사용했던 박영효가 서울에서 죽자, 다대포의 가족 묘지에 매장했다. 당시의 대규모 장례 광경을 처음 보게 된 부산 사람들의 한동안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중략> ------------
다대동은 어촌이기 때문에 다른 동보다 신당 건물과 성역의 규모가 큰 다대포 성황당이 있다. 그리고, 홍티부락에는 상조대신(上祖大神), 당상조모(堂上祖母)의 위패를 모셔 놓고, 1월 초순에 당제를 지낸다. 1970년대에 다대동은 그 면모가 일신되었다. 몰운대가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해수욕장이 정식으로 개장(開場)되어 관광명소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1981년부터 다대지구 택지조성을 비롯하여 아파트 단지의 조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숨결이 꿈틀거리는 다대동으로 이사를 와 날로 발전하고 있다.
다대동은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다대포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6)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홍티동을 병합하여 다대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는데, 1942년 부산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에 의하여 서구 사하출장소에, 1975년 부산시 시직할출장소, 1983년「사하구」로 개칭되었다. 1992년 9월 1일 구 조례 제242호로 다대동이 다대제1동과 다대제2동으로 분동되었다.
<출처> 부산광역시 / 사하구청 홈 / 문화관광 / 사하이야기 / 우리동네 이야기
http://tour.saha.go.kr/rbs2/modules/freeForm/view.php?rbsIdx=UR_6_65
[14] 아미산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
다대고개 육교를 건너 신다대아파트 105동 우측 도로를 잠시 진행하면 「한국전력공사」건물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 「아미산 서림사」표지판을 세워 놓은 계단을 따라 오른다. 사찰 입구이기 때문인지 계단 주변으로 벚나무 등으로 조림이 되어 있고 산도 자리하고 있어 도심 속 산행의 운치를 돋운다.
계단을 올라 시멘트 포장길을 잠시 따르면 송림 숲 입구에 「서림사」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우측으로 間易 산불 감시초소가 있는 쪽으로 길이 잘나 있는데 이곳으로 진행을 한다. 잠시 숲길을 따라 진행하니 돌무더기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 가파른 오름 길로 올라붙었다.
14 : 42분 넓은 공터에 봉수대가 자리 잡고 있는 아미산 정상에 올랐다. 짧은 오름이지만 모자 창끝으로 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우선 봉수대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봉수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
〇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 31-2
〇 시 대 : 조선시대 중종 25년(1530년)
봉수대는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거나 외적의 침입 등 변란이 일어났을 때 그 사실을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하여 중앙으로 알리는 옛 통신시설의 하나이다. 봉수대는 낙동강하구 일대와 몰운대 앞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쾌청한 날이면 거제도 연안과 대마도까지 감시(監視)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응봉봉수대는 전국 5개 봉수대 중 직봉 제2로 기점으로 여기서 한낮에 올린 봉수는 해지기 전에 최종 집결지인 서을 남산봉수대에 도착하는게 원칙이었으며, 전국적으로 총 673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다. 사하구에서는 이곳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2010년 1월 1일 봉수대 모형을 설치하였다.
〇 기단 : 직경 4m, 높이 1m
〇 화구 : 가로 1m, 세로 1m
〇 봉수 : 직경 3.4~2.8m 높이 3.5m <사하구>」라 안내를 해 놓았고 사방이 툭 터져 조망 또한 그저 그만이다.
산 정상에「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가 있는『아미산(蛾眉山)』은 서구 아미동 일대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해발 162.4m로 서구와 사하구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산록이 완만하여 산정의 일부를 제외하면 도시화에 따른 주택지대로 변모하였다.
『아미산(峨眉山)』은 본래 이곳의 마을을 '아미골'이라 부른데서 비롯되나, 아미골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여러 가설이 있으나 그 가설 중의 하나는 지금의 토성동에 있었던 반월형(半月形)의 토성에서 유래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토성동은 반월형의 토성에서 토성동이란 이름이 태어났지만 그 토성은 지금의 아미동에서 바로 내려다보인다.
반월형의 토성을 미화하여 「蛾眉月」의 아미골로 이름 하였다는 추정을 해본다. 蛾眉月이란 음력 초사흘달인 半月을 말하는 것으로 누에나방처럼 예쁜 미인의 눈썹을 뜻하며, 이 산의 모습이 마치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과 같다 하여 아미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가설은 본래 이곳의 마을을 「아미골」이라 부른데서 비롯되나 아미골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속설에 의하면 아미골은 「움막집」이란 의미의 옛말인 「애막」이 바뀐 것으로 이를 한자식 峨眉로 표기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미산은 부산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설치된 공동묘지의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 홍치고개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인 『아미산 봉수대』에 올랐으니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긴다. 낙동정맥의 종주의 종착지 『몰운대』도 눈앞에 있다.
여유 있는 쉼을 취하고 『몰운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미산 정상을 뒤로한지 약 12, 3분, 송림지대를 지나 산불감시초소와 『홍치고개』라 표시된 이정표(대건아파트0.3km, 응봉봉수대0.9km, 체육공원1.8km)가 세워진 곳에 도착(15 : 02분)을 했다.
이 고개를 일명 『무지개고개』라고도 하는데 다대동(본동)과 홍티 간을 왕래하던 고개로 낙동정맥 주능선이 되지만 현재는 고개 아래쪽으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선행자들에 따르면 롯데캐슬아파트로 들어가 대우아파트를 지나 다대포로 내려선다고 했는데 이미 마루금의 기능이 상실 된 상태라 6차선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을 한다.
[16] 다대포 백사장
15 : 20분, 해안으로 난 큰 도로를 횡단하여 「해안 백사장」으로 내려섰다. 낙동강하구 철새 도래지 「을숙도」와 뭍으로 변한 가덕도가 물 건너 보이고 은빛으로 빤짝이는 수면도 가슴으로 밀려든다.
먼저 내려 온 박사장 모래사장에 「낙동정맥 완주」라 크게 써 놓고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연못을 출발하여 도상거리 411.9km, 실제거리가 약 700km를 월 2회, 酷暑, 酷寒, 山의 高低와 區間의 長短을 무릅쓰고 타박타박 걸어 낙동정맥 마지막 지점 『몰운대』를 지척에 둔 감회가 벅차 오른 모양이다. 후미로 도착 한 우리도 더 넓은 백사장과 바다를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고 『몰운대』로 걸음을 옮긴다.
[17] 몰운대의 李春元 詩碑
15 : 35, 「다대포 꿈의 낙조 분수」광장을 지나『몰운대』표지석을 세워 놓은 물운대 안내소 입구에 도착을 했다.
『몰운대(沒雲臺)』는 부산기념물 제27호로 낙동강하구(洛東江河口)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16세기까지는 「몰운도」란 섬이 있었으나 그 후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가 쌓여 다대포(多大浦)와 연결된 것으로 전하며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은 그 속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몰운대』라 하였다 한다.
몰운대(沒雲臺)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와 다대포 객사(客舍)가 있으며 해안변(海岸邊)의 기암괴석과 상록활엽수림은 다대팔경(多大八景)중 가장 아름다운 경승지(景勝地)다라고 안내판에 소개를 해 놓았다.
드디어 낙동정맥의 끝 지점에 도착을 했다. 우선『몰운대』표지석을 중심에 두고 단체로 기념촬영을 한 후 잠시 휴식을 가졌다. 여러시간 산행을 한 피로한 기색보다는 환한 웃음을 띈 얼굴들이다. 또 하나의 정맥을 완주한 기쁨이리라.
넉넉한 휴식을 가진 후 차량통행이 금지 된 몰운대 산책길로 진입을 했다. 해송과 솔향, 그리고 바다 내음이 어우러진 한적한 산책길을 쉬엄쉬엄 걸어「화손대」갈림길을 지나 잠시 더 걸어나가니 「몰운대 詩碑」가 세워져 있다.
浩蕩風濤千萬里
白雲天半沒孤臺
扶桑曉日車輪赤
常見仙人賀鶴來
호탕한 바람과 파도천리요 만리로 이어졌는데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낙동강 하구가 바다와 어우러지고 태백산맥의 마지막 끝자리가 되는 이 몰운대는 경관이 아주 뛰어나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노래한 동래부사 李春元(1571∼1634)의 시(詩)가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전하는데 이 시를 돌에 음각한 "몰운대 詩碑"를 1999. 6. 12 사하지역발전협의회에서 건립을 하였다고 한다.
[참고자료] 李春元(1571∼16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평(咸平). 초명은 신원(信元). 자는 원길(元吉), 호는 구원. 일찍이 남양의 홍지성(洪至誠)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박순(朴淳)이 영의정을 그만두고 영평(永平)에 은거할 때 그를 찾아가 다시 배우니 단연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출처> 풍류하회
http://cafe.daum.net/poongryuhahoi/JDL2/2558?docid=1BubA|JDL2|2558|20090823225623&q=%B8%F4%BF%EE%B4%EB+%BD%C3%BA%F1&srchid=CCB1BubA|JDL2|2558|20090823225623
[참고자료] 송철호의 시 「몰운대(沒雲臺) 기행」
낙동강 칠백리 굽이 돌아
바다와 맞닿은 곳
몰운대
매양 구름에 잠겨
몰운대라 했으니
옛 시인의 문재(文才)가 섬 가득 찼구나
해그름에 한적이 찾으니
올올올찬 나무 사이로
늦여름 낙조가 흐르고
찰나에
절벽에 매달린 건
인생지사 허무라
[18] 多大浦客舍
李春元의 몰운대 감회를 마음에 담고 다시 海松 鬱鬱한 길을 따라 나기니 『多大浦客舍』가 나온다. 객사 앞에 세워 놓은 안내문에
○ 다대포 객사(多大浦 客舍)
○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 144
이 건물은 조선후기 다대첨절제사영(多大僉節制使營)에 있었던 객사이다. 다대포는 예부터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으로 중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상좌도 7진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중시되어 다른 진보다 2배의 병선을 보유하였으며, 첨사는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의 하나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보관하고, 고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망배(望拜)를 드리던 곳인데,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객사에는 정당(正堂)과 그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객사는 정당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八作)지붕이다. 안두리기둥 위에 절단된 큰 들보를 놓은 5량 집이며 벽이 없다.」라 기록을 해 놓았다.
[참고자료] 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
○ 사하구 다대동 산144번지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1972. 6. 26 지정)
객사는 조선시대 지방 관아건물의 하나로 각 지방의 행정중심지에 있었으며, 수령이 부임할 때 의식을 치르고 또 임금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안치하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망배(望拜,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절하는 것)를 드리던 곳 이며, 사신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현재 다대포 몰운대 내에 있는 객사는 조선후기 다대포 일원의 방어를 담당하던 다대첨절제사영(多大僉節制使營)의 건물 중 하나이다.
다대포를 비롯한 남해안은 예로부터 왜적들의 침략이 심하였던 곳이다. 조선 세종때 삼포의 개항으로 남해안의 방어가 중요시되어 부산포와 제포(薺浦)에 첨절제사영을 두고, 경상좌도에는 다대포 등 10포(十浦)에 만호영(萬戶營)을 두었다. 이때 영은 장림포(長林浦)에 있었으나 언제 다대포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명종 이후 수군제도의 변경에 따라 진(鎭)?보제(堡制)가 실시되자 부산포와 다대포는 방어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진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군제의 개혁으로 다대진은 부산진, 두모진(豆毛鎭), 개운진(開雲鎭), 포이진(包伊鎭), 서생진(西生鎭), 서평진(西平鎭)과 함께 경상좌도의 7진의 하나가 되었다.
다대진은 부산진과 함께 중요시 되어 다른 진보다 2배의 병선을 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첨사는 정3품 당상관의 높은 벼슬이 주어졌다.
다대포객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대진이 설치된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되며, 건립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가 1825년(순조 25)에 마지 막으로 중수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벽체가 없이 기둥만 남아 마치 누각 건물처럼 보인다. 객사 건물에는 가운데 정당과 좌우에 날개처럼 익실(翼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임을 볼 때 현재 남아 있는 정당 외에 좌우에 익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관청 건물이 그러하듯이 다대첨사영 역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초등학교로 전용되면서 다대포객사도 학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1970년 현재의 자리에 이전?복원하였다. 그러나 이 객사를 원 자리인 다대초등학교에 그대로 두었더라면 교육적인 효과가 보다 컷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부산광역시 문화관광 홈
http://tour.busan.go.kr/kor/05_culture/01_04/03/01/1204318_4804.jsp
[19] 낙동정맥 완주의 감회
다대포 객사를 한 바퀴 돌아보고(15 : 55분) 삼거리로 나와 우측으로 약 3분여를 내려가니 군부대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어 더 갈 수가 없는 출입 금지지역이다.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와(16 : 06분) 좌측으로 진행, 안부를 지나 송림이 울창한 작은 봉에 올랐다. 『몰운산(沒雲山)』이다.
『몰운산(沒雲山)』은 몰운대의 몰운섬을 이루고 있는 산으로 해발 78m이다. 구릉에 가까운 산으로 산정부분이 둥그스레한 종순형으로 되어 있고, 사면 또한 완만하나 산기슭의 끝부분은 낭떨어지의 단애를 이룬다. 산전체가 짙은 송림으로 덮혀있고, 이 때문에 두송산, 금티산과 함께 조선시대에는 경상좌수영 관할의 봉산으로 지정된 산이다.
산정의 끝자락에는 보초가 없는 군 초소가 있고 초소 앞은 수십길 암벽 낭떨어지로 바다와 접해 있고 그 앞 좁은 공간에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의자를 마련을 해 놓았다. 드디어 낙동정맥의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 『몰운대』끝자락에 도착(16 : 25분)을 했다.
우선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초소 아래 바위로 내려섰다. 몰운대 앞에 펼쳐진 수평선, 손 뻗으면 잡힐 듯 한 작은 섬(쥐섬)과 여(암초) 위에 세워 놓은 등대를 보는 순간 눈앞이 흐려진다. 어렵다. 힘들다. 하면서 낙동정맥 700리를 걸어 온 감회리라.
오늘 산행에 참여한 강영재, 김명자, 노승애,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 홍영표, 모두가 초소 아래 바위에 올라 【낙동정맥 완주 / 한배산악회 / 2010. 12. 11】프랭카드를 펼쳐 잡고 주먹을 불끈 쥔 손을 높이 치켜들며 우렁찬 함성을 질러본다. 그동안 고단한 발품과 또 하나의 정맥을 완주했다는 기쁨이 어우러진 함성이다.
돌이켜 보니 참 많은 산을 오르내리고 고개를 넘어 먼 길을 걸어 왔다.
『매봉산(1145)0km을 출발하여 작은피재(880m)1.0km→느릅령(932m)5.0km→통리(700m)2.5km→백병산(1259m)4.5km→토산령(930m)→면산(1245m)3.0km→석개재(910m)3.5km→묘봉(1168m) 3.0km→삿갓봉(1119m)5.0km→1136m()4.0km→진조산(908m)8.0km→답운치(620m)4.0km→통고산(1067m)5.5km→광비령(610m)6.0km→칠보산(974m)2.0km→885m()6.0km→한티재(430m)9.0km→추령(520m)4.5km →601m()5.0km→1017m()4.5km→백암산(1004m)5.5km→굴아우봉(747m) 5.5km→ 옷재(700m) 5.0km → 독경산(683m)5.5km→창수령(490m)1.0km→ 울치재(490m)3.0km→맹동산(808m)5.0km→명동산(812m) 5.0km→장구매기(570m)6.0km→화매재(330m)4.0km → 황장재(350m) 4.0km →대돈산(905m) 4.0km → 느지미재(650m)4.0km→왕거암(907m)1.5km→798m()3.0km→ 745m() 4.0km → 피나무재(490m) 3.0km → 612m()3.5km→ 질고개(430m) 3.0km → 785m() 5.5km → 통점재(550m) 4.0km→ 742m() 2.5km → 가사령(550m)1.5km→709m()3.0km→사관령(788m)2.0km→배실재(370m)3.0km→침곡산(725m)3.5km →한티재(266m)2.5km→블랫재(290m)4.0km→운주산(806m)4.5km→이리재(290m)5.0km→ 도덕산(703m)3.5km→삼성산(578m)2.5km→시티재(195m)2.5km→어림산(510m)7.0km→317m()5.0km →관산(394m)4.5km→아화고개(130m)6.0km→사룡산(685m)5.0km→산성남문(630m)3.5km→ 당고개(321m)5.0km→단석산(827m)2.0km→수의동(470m)4.0km→소호고개(550m)7.0km→백운산(870m)3.0km →소호령(670m)2.0km→고헌산(1033m)2.5km→와항재(550m)2.5km→895m()2.5kn→운문봉(630m) 2.0km→ 가지산(1240m)4.0km→석남고개(750m)2.5km→능동산(983m)2.5km→간월산(1083)5.0km→신불산(1209m) 2.0km→취서산(1062m)2.5km→지경고개(110m)2.5km→정족산(700m)6.0km→천성산(910m)5.0km→원효산(922n)2.5km→597m()4.5km→지경고개(150m)9.0km→계명봉(602m)1.5km→금정산(802m)3.5km → 산성고개(410m)4.0km→만덕고개(270m)4.0km→백양산(642m)4.5km→엄광산(508m)6.0km→ 구덕산(550m)2.5km →괴정고개(30m)4.5km→봉화산(169m)2.0km→홍치고개(110m)3.0km→몰운대(=411. 9km)』까지 酷寒과 酷暑, 눈비를 무릅쓰고 好不好의 마음을 다스리며 1년 3개월을 걸어 온 길이다.
낙동정맥 완주를 하기까지 숙식을 같이하며 고락을 같이했던 한배 산꾼들, 그리고 산행 계획을 짜고 선두에서 길 안내를 해 준 대장님, 너무 고맙다. 한동안 산행을 같이 하다 직장 일로 중도에서 그만 둔 김교수와 연지님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여러 사정이 있어 함께 산행은 하지는 못했지만 物心으로 격려하고 도와 준 이태인 총무님을 비롯한 모든 대원들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2010년 12월 11일 16 : 00시 낙동정맥을 무사히 완주하게 해 준 산신령님과 용왕님께 진한 술 한 잔을 올리고 남은 낙남정맥 산행도 큰 보살핌이 있기를 기원하며 큰 절을 올리는 것으로 낙동정맥 산행을 마무리 했다.
2010. 12. 24
[산후 후 카페 댓글]
〇 산악대장
천의봉(매봉산)에서 출발하여 도상거리 411.9 km, 실제거리 약 700km의 긴 종주를 무사하게 이어 몰운대에서 완주의 기념 축배를 함께 해주신 정맥꾼 여러분과 회원님들의 건강한 웃음을 보니, 정말 좋은데........ 무어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다시 마음 추스려 2월부터 이어지는 마지막 정맥인 낙남정맥 종주에서도 더 멋진 모습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배, 화이팅!
〇 핑크(장현옥)
뒤돌아보니 또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 길을 걷던 한걸음 한 걸음이 모두 소중한 느낌이 듭니다. 대장님 고생하셨고 감사합니다. 함께 걷던 모든 분들에 또다시 감사드립니다. 먼 훗날 지금을 생각하면 정말 소중한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한배 화이팅!!!
[참고자료] 부산의 산
1. 금정산(金井山)
부산의 진산(鎭山)으로 주봉인 고당봉(801.5m)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727m)과 남으로 상계봉(638m)을 거쳐 성지곡 뒷산인 백양산(642m)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미륵봉, 대륙봉, 파류봉, 동제봉 등의 준봉을 일구어 놓고 있다.
또한 약수터가 14군데가 있어 등산객의 목을 축여주고 일부 구민의 식수로 쓰여지고 있다. 가까이 동래온천, 금강공원, 범어사,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17.3Km)등 명소를 두루 지니고 있다. 동으로는 부산의 금정구, 북으로는 경남 양산시, 남으로는 부산의 동래구, 서로는 북구와 접하는 넓은 지역에 위치한다
(유래)
'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또한 금정산에는 국내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곽인 금정산성이 있으며 그 둘레는 약17km, 높이 1.5m~6.0m 이고, 동?서?남?북의 사방에 4개의 성문을 갖고 있다. 이 산성의 축성된 최초의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것은 경상감사 조태동에 의해 1703년(숙종 29년)에 임진왜란 후 일본의 재침을 대비하여 석축으로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어 1707년과 1808년 그리고 1824년에 각각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금정산은 부산에서 가장 높은 산지일 뿐 아니라 부산의 진산으로서의 위용이 당당하며, 곳곳에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문화재와 명소가 많아 부산의 명산이라 할 수 있다.
2. 상계봉
금정산의 주봉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은 제2망루에서 서쪽방향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제1망루 남쪽에 있는 봉우리가 상계봉(上鷄峰)이다. 이 봉우리는 638.2m의 금정산 남부를 대표하는 봉우리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자 부산의 산악운동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깎아지른 듯한 수십 길의 직벽과 기기묘묘한 거대한 암석들로 이루어진 상계봉은 산악미의 극치를 이룬다.
부산 산악인들에게 최초의 기술적인 암반 등반을 시도한 곳으로 전체가 바위산처럼 보이며, 이곳에는 병풍바위, 콩동바위, 영감바위, 할멈바위 등으로 불리는 기암들이 서로 자태를 다투기라도 하듯이 서 있다. 이들 바위가 빚어놓고 있는 그 형상이 자연의 신비로움이자 금정산의 또 다른 매력으로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다.
상계봉(上鷄峰)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에도 그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산정 형상이 마치 닭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상계봉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일설로는 이 부근의 봉우리 중 가장 높이 있다고 하여 새벽이 다른 곳보다 빨리 온다는 데서 '닭 계(鷄)'자를 붙였다고 한다. 상계봉은 그 형상의 기묘함이 신령한 힘을 지니고 있는 탓인지, 고당봉 주변과 같이 오랜세월 무속신앙의 본거지로서 이 암봉의 주위에는 무속신앙 경배자들이 몰려들고 있고, 토굴 생활을 하면서 도를 닦거나 장기간 기도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상계봉 직벽 아래에는 한때 암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난 1960년대까지 암자를 지어 놓고 한 남자가 기거하면서 등산객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였다. 상계봉 암벽 아래에는 베틀굴로 불리는 암굴이 있는데 넓이가 10평 가량의 큰 굴과 3평 정도의 작은 굴이 있어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3. 장산(艸長山)
해운대의 주산으로 해발 634m로 금정산에 이어 부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장산의 전체 산 모양은 원추형으로 산정은 예리하고 사면은 가파르며, 산정 아래에는 제4기 빙하시대에 형성된 애추가 발달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1481)』에는 상산(上山)이라 하여 "동래현에서 동으로 15리 떨어져 있으며 대마도가 가장 가깝다"고 하였고,『동래부지(1740)』는 상산이라고 하고 "장산(壯山) 또는 봉래산(蓬萊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위에 평지가 있으며 장산국기(壯山國基)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상산이란 가장 높다는 뜻이고 장산이란 동래지방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 이곳 장산 주위에 장산국(壯山國)이 있어서 산 이름이 장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산국은 삼국시대 인구가 아주 적은 부족국가인 취락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4. 승학산(乘鶴山)
승학산(乘鶴山)은 구덕산과 시약산의 서쪽이고 엄광산의 남쪽으로 사하구 당리동의 뒷산으로 해발 495m이다. 이 산의 정상으로는 사상구와 사하구가 나누어지는 경계선이 되고있다.『동래부지(1740)』등의 기록에는 산의 명칭이 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승학산이라는 산명이 붙여진 것은 19세기 중반으로 보이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승학산은 고려말 무학대사가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곳에 오니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높아 마치 학이 나는 듯하다 하여 승학산 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향하여 조그마한 산인 에덴공원은 승학산에서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렸다고 하여 강선대(降仙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에덴공원의 원이름은 강선대다.
5. 구덕산(九德山)
구덕산(九德山)은 서구와 사상구 그리고 사하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서 부산의 등줄인 낙동정맥의 주능선에 솟은 높은 산정의 하나로 해발 562m이다. 북동쪽으로는 엄광산·백양산·상계봉으로 연결되면서 금정산의 고당봉에 이어지고, 남서쪽으로는 시약산과 승학산이 차례로 이어지면서 다대포의 몰운대까지 산세를 뻗치고 있다.
문헌기록인『동래부지(1740)』에는 구덕산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두송산을 구덕산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일본기록인『초량화집(草梁話集)』에 "구덕산(舊德山) 아래 구덕사(舊德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일본인의 침입이 심하고, 방탕한 행동을 하게되어 20년 전에 절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 일본인이 쓴『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에는 구덕산(九德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구덕산은 보수천의 발원지로 동쪽산록에는 부산 최초의 상수도 급수원인 구덕수원지가 자리잡고 있다. 옛날 '고저기(古底岐)' 또는 '구지기(久至岐)'라고도 불리어 오던 구덕산은 풍치가 빼어나 시민들의 등산로 및 산책로로 크게 각광 받고 있다.
노인들에 의하면 구덕산을 사병산이라고도 한다. 사병산이란 병풍처럼 둘러진 산이라는데서 나온 이름인 듯하다.
6. 구봉산(龜峰山)
고도 408m 로 엄광산에서 남동으로 뻗어나간 산으로 현재 부산고등학교 뒷산과 고관의 뒷산을 말한 것으로 수정동, 초량동 뒷산을 말하며, 서구의 동대신동과 동구의 초량동의 경계가 된다. ‘龜峰山’이란 산의 모습이 마치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데서 비롯된다.
한말까지는 구봉봉수대가 이곳에 있어 이 고장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왔다. 구봉 봉수대는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영조 원년(1752)에 석성산(천마산)에서 옮겨온 것이다. 석성산은 당시에 초량왜관 (용두산일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 될 것이라 하여 봉수대를 현재 초량 뒷산인 구봉산으로 옮겼다. 구봉 봉수대는 자체적으로 바다를 후망하고 또 황령산 봉수대와 다대포 응봉 봉수를 받아 부산포의 수군과 주위의 사정을 전하는 중계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봉수대 일대를 시민을 위한 체육시설이 잘 갖추어진 중앙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7. 아미산(蛾眉山)
서구 아미동 일대에 넓게 자리잡고 있는 해발 162.4m로 서구와 사하구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산록이 완만하여 산정의 일부를 제외하면 도시화에 따른 주택지대로 변모하였다.
'아미산(峨眉山)'은 본래 이곳의 마을을 '아미골'이라 부른데서 비롯되나, 아미골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여러 가설이 있으나 그 가설 중의 하나는 지금의 토성동에 있었던 반월형(半月形)의 토성에서 유래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토성동은 반월형의 토성에서 토성동이란 이름이 태어났지만 그 토성은 지금의 아미동에서 바로 내려다보였다.
반월형의 토성을 미화하여 蛾眉月의 아미골로 이름하였다는 추정을 해본다. 蛾眉月이란 음력 초사흘달인 半月을 말하는 것으로 누에나방처럼 예쁜 미인의 눈썹을 뜻하며, 이 산의 모습이 마치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과 같다 하여 아미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가설은 아미골은 움막집이란 의미의 옛말인 애막이 바뀐 것으로 이를 한자식 峨眉로 표기 한데서 비롯된다.
아미산은 부산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설치된 공동묘지의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8. 엄광산(嚴光山)
고도 504m로 서구 동대신동과 부산진구 개금동 그리고 동구 좌천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래부지(1740) 산천조에 보면, "엄광산은 부(府) 남방 30리에 있으며 위에 구봉이 있고 아래에 두모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산은 북쪽으로 백양산과 마주하며, 남서쪽으로는 구덕산과 이어지고, 동남으로 구봉산에 이어져 있다.
옛날에는 ‘고원견산’이라 했으며, 고원견산 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이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대한해협을 지나 멀리 일본의 쓰시마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동래부지?의 산천조에 ‘고원견산’이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 때 사용된 일본식 지명으로 고원견산은 신하가 되어 일본에게 엎드려 절을 한다는 뜻의 민족정기 말살이라는 식민풍수에서 나온 말로 최근(1995)에는 이우리지명 바로 찾기운동에 따라 산의 이름을 ‘고원견산’에서 ‘엄광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산 정상에 서면 부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구, 서구, 사하구, 사상구, 해운대구 일부도 한눈에 들어와 부산의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진다.
엄광산은 안산암질의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산정이 대체로 평탄하며, 산정 부근에는 잔 자갈들로 된 애추가 발달되어 있고 산록은 비교적 가파른 편이다.
9. 윤산(구월산)
금정구 부곡동의 동쪽 산이 되고 서동의 서북쪽에 있는 해발 317m의 산이다. 구월산은 금사동, 서동, 오륜동과의 자연경계를 이루는 산.
동국여지승람과 동래부지에는 윤산(輪山)으로 기록하여 진산(鎭山)이라 했다. 진산이란 도?읍이나 성지의 뒤쪽에 있는 큰산을 말하는데 이 윤산은 동래부 뒤쪽의 큰산이니 진산이 된다. 윤산이라 한 것은 동래쪽에서 보면 산 모양이 수레의 바퀴 모양으로 둥글다고 해서 바퀴?輪?, 뫼?山?의 윤산이라 한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구월산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윤산의 윤(輪)자는 ‘바퀴륜’자이고 바퀴가 구불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구불다’의 원말은 ‘구르다’이다. 그래서 ‘구르다’의 고어인 ‘구불다’가 ‘구을다’, ‘구불산’으로 변하였고, 이 중 구을산은 구월산으로 와전되고 ‘구불산’은 윤산(輪山)으로 한자화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구을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된 것이고 ‘구월산’을 한자로 표기하려니 우리나라의 신령한 산으로 유명한 황해도 ‘구월산’과 같은 이름으로 오기(誤記)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산의 형상이 둥글게 보인다고 해서 ‘둥글산’이라 부르게 되고 둥그니까, 잘 구르니 ‘구불산’이라고 구전으로 불리어 졌다는 설도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동래의 풍수형국은 거북이가 금정산에서 동래로 향해 하산하는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이라 했다. ‘영구’는 구월산을 가리키며 이것이 풍수의 형이 된다. 거북이가 오는 산(구을산)이 구전되어 구월산이라는 한자음을 빌려 구월산이 된 것이라는 풍수식 풀이도 있다.
10. 백양산(白楊山)
해발 642m로 부산의 등줄산맥인 금정산맥의 주능선에 솟은 산으로, 부산진구와 사상구의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금정산과 이어져 있다.
?동래부지?(1740)에는 백양산이라는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백양사라는 절 이름은 나오는데 백양사는 금용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백양산은 1740년 이후 금용산에서 나누어지면서 생긴 이름으로 보이며, 백양사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백양산은 산록이 가파른 것이 특징이고 동편은 새미산인데 사직동 사람들은 돌작동이라 하며, 임진왜란 때 인근 주민이 피신하여 생명을 건진 곳으로 유명한 배틀굴이라는 동굴이 있다. 동쪽 산록 아래에 선암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선암산이라고도 부른다.
11.용두산(龍頭山)은 중구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49m의 구릉
조선시대 일본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던 ?초량왜관?은 이 동산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고(1678~1876),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고부터는 일본 사람들의 전관(專管) 거류지역이 되면서 용두산 일대가 거의 일본인 거리로 탈바꿈하였다.
1945년 4월에는 용두산 일대 1만 2천평이 일본 사람들에 의해 공원지대로 지정되었으며,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일본 신사가 헐려 없어졌고, 6.25전쟁 때는 부산으로 밀려든 피난민들의 판자촌을 이루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1954년 12월 10일에 일어났던 큰 불로 피난민 판자촌이 거의 다 불타 없어진 뒤 그 일대가 정리되어서 다시 도심의 산림지대로 가꾸어지게 되었다.
1957년에는 그때의 대통령 이승만의 아호를 따서 ‘우남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다가 숨진 희생자의 위령탑이 서면서 이름도 용두산으로 되돌아왔다.
용두산은 본래 짙은 곰솔(해송)들이 짙은 산림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송현산’ 이라고도 하고 ‘초량小山’이라고도 했으며, 용두산이라 불리게 된 것은 산의 모양이 마치 용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하였으며, 중앙동 구 시청 자리는 용의 꼬리에 해당한다 하여 용미산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곳 부산포 해전에서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어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의 동상이 있으며, 1989년에는 일제 때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이 제작 세워졌다.
부산항 일대와 주요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부산의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동산이다
12. 복병산(伏兵山)
중구 대청동에 있는 해발 46m, 기상청이 자리잡고 있다. 복병산이란 이름은 용두산 둘레인 동광동과 신창동 주위에 왜관이 있을 때 왜관 왜인들이 담장을 뛰어 넘어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으로 와서 잠상(潛商:밀무역)을 꾀하기도 하고, 우리 민가를 침범하기도 해서 복병막 여섯군데를 세워 우리 병사가 밤낮으로 지켰다. 복병막이란 군사 잠복초소로서 초량 왜관 안의 일본인들의 난동, 풍기문란, 밀무역을 하는 상인들을 막기 위해 왜관밖의 동네로 통하는 이 산에 병사를 잠복시켜 놓았던 시설로서 영조 15년 동래부사 정형복에 의해 설치되었다. 그 복병막이 있는 산이라 해서 복병산이라 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복병산은 부산항 개항이후 1892년에 복병산 조차에 관한 협정으로 일본인 공동묘지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24년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의 촬영소가 이 산의 숲속에 자리잡으면서 우리나라 영화 제작의 효시가 된 산으로 이름 나 있다.
13. 봉래산(蓬萊山)
영도의 주봉을 이루는 산으로 해발 394.6m로 산 전체가 원추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산록의 사면은 가파른 편이고, 특히 남쪽 사면은 급경사로 바다에 거의 수직으로 돌입하고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조봉(祖峰)이라 하고, 그 다음 봉우리를 자봉(子峰), 그 아래의 것을 손봉(孫峰)으로 부르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세 봉우리의 구별이 잘 되지 않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굽어진 봉우리의 낮아진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고갈산 또는 고깔산으로 불리우는데, 한자어의 ‘沽渴山’?‘枯渴山’은 각각 목이 마른산, 마른 도마뱀의 산, 말라서 없어지는 산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봉래산의 또 다른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봉래산에는 두 가지 속설이 있다. 봉래산은 지세가 마치 아늑한 어머니의 품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자식들인 이곳 주민이 어머니 품을 떠나면 못 살게 된다는 설, 또 봉래산 산신령이 욕심이 많아 영도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나 밖으로 떠나는 것을 싫어해 이 곳 주민들이 영도를 떠나면 좋지 않다는 설이다. 이런 것들은 속설에 지나지 않고 영도 사람들은 유달리 인정이 많아 이곳에서 한평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데서 유래된 듯하다.
14. 수정산(水晶山)
수정산은 수정동 뒷산으로 동구와 부산진구의 경계를 이루며, 해발 315m. 서쪽으로는 엄광산과 접해 있고, 남으로는 구봉산으로 이어진다. 수정산은 옛 기록에 지명이 보이지 않으나, 옛날 이곳 산에서 수정이 많이 채굴된 데서 수정동이란 이름이 생겼으나, 수정의 채굴장소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한 이곳에는 공동묘지가 많기로 이름나 있었으며, 그 공동묘지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수영천은 아무리 소나기가 내려도 물은 수정처럼 맑았다고 한다. 20여 년 전만 해도 산림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헐벗은 산이었으나 주민들의 힘으로 울창한 활엽수와 침엽수림으로 뒤덮인 산은 경관이 빼어난 부산 제일의 도심 산지로 부산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15.증산(甑山)은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 사이에 있는 해발 130m의 완만한 사면을 가진 산으로 수정산(315m)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독뫼에 해당한다. '甑山'이란 이 독뫼의 산릉을 따라 쌓은 城의 모습이 마치 '시루'와 같다는데서 비롯된다.
『동래부지(1740)』산천조에 "증산은 동래부 동으로 2리 지점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축성한 산인데 산 위에 장대가 있고 아래에 성황당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증산이 부산(釜山) 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곳으로 보인다.
16. 천마산(天馬山)
서구 초장동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사하구(감천동)의 경계를 이룬다.
엄광산(구 고원견산)에서 남쪽으로 송도반도까지 이어지는 부산의 등줄 산맥인 금정산맥 산정의 하나이며 해발 324m이다. 산록이 완만하여 옛부터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되기도 한 산이다. '천마산'이란 지명도 목마장과 관련이 깊다. 즉 옛부터 이곳은 이름난 목마장으로서 하늘(天)에서 용마(龍馬)가 내려와 서식할 정도로 천해의 자연조건을 갖춘 산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절영도는 물론 천마산에서 승학산으로 이어지는 감목장 감독을 다대포 첨사가 담당하였고, ?동래부지?에 나오는 목장리(牧場里)가 지금의 괴정동이었고, 괴정동 뒷산에 國馬城이 쌓여 있었다고 하니 그 국마장은 아주 넓었던 것 같다.
천마산은 산정에 돌로 쌓은 성이 있어서 ‘석성산(石城山)’으로 불리던 것이 천마산으로 불린 것도 목마(牧馬)의 실제성에서 연유된 것으로 본다.
17. 황령산(荒嶺山)
높이는 427m로 산정이 비교적 평탄하며 북동쪽으로 금련산이 연결. ?동국여지승람?에는 누를 ?黃?의 黃嶺山으로 기록하여 “縣에서 남쪽 5리에 있다”고 하였고, ?동래부읍지?에는 거칠?荒?의 荒嶺山으로 기록하여 和池山으로 뻗어났으며 마하사가 있다고 하였고, 동래부지도 거칠?荒嶺山?으로 돼 있다.
황령산과 금련산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나 연산동의 마하사 계곡과 남구의 南川계곡을 경계로 두 산을 나눈다면 마하사는 황령산쪽이 되고 문현동과 대연동의 북쪽이 되며 전포동의 동쪽이 된다.
황령산은 동래가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동래지방에 있었던 거칠산국에서 온 산 이름으로 보고 있다. 거칠산국에 있는 산이어서 ?거칠뫼?라 했던 것이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거칠 ?荒?, 고개 ?嶺?의 황령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산기슭에 부산시민의 휴식처, 청소년의 수련장이 개장되어 있으며, 산정에는 옛날 해운포를 감시 했던 황령산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다.
18. 금련산(金蓮山)
금련산(金蓮山)은 북으로는 연제구, 서로는 부산진구, 동으로는 수영구, 남으로는 황령산과 몸을 같이한 산(해발 415m)으로 배산(盃山)을 마주하는 산이다. 금련산의 유래로는 산이 연꽃 모양을 해서 금련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고, 부처님 앞에 공양을 올릴 때의 황금색 금련화(金蓮花)로 말미암아 금련산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금련화로 인한 금련산이라면 마하사와 연관이 있는 말로 여겨진다. 문헌기록인『동래부지1740)』산천조에서는 금련산을 "동래부 남쪽 5리에 있다. 산아래 수영이 있다"고 했을 정도다. 연산동의 동명 이름도 금련산으로 인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금련산에서 들려오는 절의 종소리가(연산모종) 으뜸이라 하여 수영팔경에 들어있으며, 청소년수련원, 약수터, 등산로 등의 휴식공간이 많이 마련되어 있다.
19. 배산(盃山)
금련산에서 북쪽으로 약 1.5km에 위치하는 산으로 해발 254m. 산지의 고도와 규모에 비해 산정 부근의 경사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동쪽에는 배산에서 삭박작용으로 분리된 해발 80m의 토곡산이 수영강과 평행하게 놓여져 있다.
수영구와 연제구에 걸쳐있는 유서 깊은 산으로 배산이란 이름은 술잔을 엎어놓은 꼴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동래부읍지?에는 “동래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황령산으로부터 뻗어 내렸다. 겸효대가 있다”고 했는데 그 겸효대는 지금 그 흔적이 없어졌다.
산 중턱에는 옛 거칠산국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배산성지가 있으며, 이 지역이 옛 거칠산국의 중심지였다.
?동래부지?에 ‘척산(尺山)’이라 기록된 산이 이 산으로 보고 있으며, 나이 많은 노인들은 ‘절미산’ 또는 ‘잘뫼산’이라고도 하고 있다. 위치는 국군부산병원에서 연산로(28 지방도)를 따라 연산동 방향으로 550m 거리의 우측편 도로를 따라 3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20. 운수산(雲水山 일명 금티산)
감천동 배후에 있는 산으로 괴정동? 신평동? 구평동과의 경계를 이루며, 해발 187m.
천마산, 아미산과 함께 감천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운수산’이라고도 한다. 계곡 아래에는운수사라는 고찰이 자리잡고 있다는데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경상좌수영지』병고조에는 운수산을 병고(兵庫)라 기록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예부터 이곳은 군사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산이다. 이곳 운수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덕포와 삼락천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이일대의 평야지대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하여 하천의 명맥만 이어지고 있다.
21. 봉화산(烽火山)
해발 227.7m로서 녹산의 중심에 자리한 향토의 명산이다. 옛 이름은 봉화대, 봉오재로 불리웠으며 ?동국여지승람?엔 성화예산, 성화야봉대라 하며 산정에는 가덕도 연대봉에서 봉수를 받아 북으로 김해시 분성산으로 이어주는 봉대가 있다.
산맥은 서쪽에서 뻗어와 보개산과는 부부처럼 마주하고 그 가지 뻗어 북쪽으로 천마산에 이어지고 동으로 높낮은 능선을 이루며 장강(長江)을 만나 장락포를 만들고 그 산세 힘주어 멈춰선 절벽 아래엔 사자암이 있으며, 그 옆으로 처녀골 총각골의 많은 전설이 묻혀 있다.
산은 높지 않았어도 산정에 오르면 녹산동 자연부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 보개산 위용이 늠늠하다, 남으로 가덕도와 남해의 파도가 하구에 펼쳐진다. 동북으로 물금, 양산, 대동의 들과 산을 누비며 흐르는 하구의 전모가 장관이다. 북으로 금병산 아래 태야벌이 한눈에 들고 김해의 황금들이 강줄기를 베고 누워 있다.
22. 연대봉
연대봉은 천수만의 배후에 솟아 있는 산으로 해발 459.4m로 가덕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연대봉이란 조선시대 연안의 방위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봉수대가 자리잡고 있는데서 비롯되며, 이곳의 봉수는 북쪽으로 녹산의 성화례(省火禮)에, 서쪽으로는 진해 웅천의 사화량(沙火良) 봉수대에 연결되었었다. 연대봉은 가덕도의 명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남해바다와 대마도가 드리우며 서쪽으로는 거제도와 진해만의 절경이 내려다보인다. 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의 주봉은 연대산이라 하고 산꼭대기 부근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를 연대봉이라 부른다.
23. 운봉산(雲峯山)
운봉산(雲峯山)은 반송동 북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464m. 북서쪽으로 개좌산에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기장군 철마면과 경계를 이룬다. 수영천의 지류인 석대천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기장읍지』에는 기장의 8대 명산중의 하나라고 하였으며, "현에서 서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백운산에서 산맥이 내려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산은 별로 높지 않고 특별한 운치도 없는 평범한 산이며 북동쪽에는 사등골이 있고, 그 동북쪽에는 고촌리가 자리잡고 있다.
운봉산이란 명칭의 유래를 그저 구름이 많이 이는 산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山名을 고어로 고증해 보면 ?암뫼? 또는 ?암뫼山?으로 풀이가 되며 母山 즉 陰山의 뜻이다. 삼국사기 권 34 ?지리?조에 운봉현이 있다. 原名이 母山縣 또는 阿莫城이라 했다. 아막은 ?암?으로 읽으며 母로 대석했다.
이러고 보면 이 산명이 그저 구름이 이는 산이라기보다 모산 즉 음산이란 뜻이 되며 이 산은 서향이므로 이같은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24. 개좌산
해운대구 석대동 및 기장군 철마면과 자연경계를 이루는 높이 449.3m.
25. 가야산
진구 가야2, 3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금정산맥의 백양산에서 이어져 동으로 수정산, 남동으로는 구봉산, 남서로는 구덕산이 이어져 있다. 1895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에는 “동래부의 서남쪽 15리에 위치하고, 금정산에서 시작하여 이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엄광산을 가야산과 동일시하고 있으나 ?동래부지? 산천조를 살펴보면 “엄광산은 동래부 남쪽 30리에 있고 선암산에서 이어지며 위쪽으로는 구봉산 봉수대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가야산은 엄광산과는 다르다.
26. 계명봉
금정산의 동남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범어사의 맞은편 동쪽으로 뾰족하게 돌출해 있는 봉우리로 해발 601.5m로 불교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난날에는 이 봉우리가 독립된 산으로 계명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이 봉우리에는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계명암이 있고, 이 암자에는 범어 3기의 하나인 ?자웅석계(雌雄石鷄)?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형상이 수탉의 형상만 남아 있을 뿐 암탉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또 계명봉의 가장 낮은 동쪽 봉우리에는 역사가 오래된 계명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약간의 석축과 불을 피울 수 있었던 터만이 남아 있다.
계명이란 명칭은 불교적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듯이 즉 새벽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으로 이것은 밤기도를 위해 밤을 세워가며 기도에 정진을 하던 남자들이 새벽2시쯤이면 일어나 예불을 드리던 그때 맑은 하늘 날씨에 총총한 별을 보고 가늠했지만 흐린날이 되면 하늘에서 닭울음소리가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닭울음소리가 들려와 예불시간을 알려 주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하여 계명봉이라 했다고 한다.
27. 공덕산
두구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 두구동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해발 230m인 산이다. 이 산은 철마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의 봉우리로 비교적 험준하고 산기슭의 골짜기 또한 깊은 것이 특징이다.
28. 곽걸산
송정동 북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154.3m. 산정과 산록이 완만하여 기장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29. 국수봉
가덕도 남단을 이루는 산으로 높이 268m. 봉우리가 첨봉을 이루며 산록 또한 가파르다. 이 산은 산세가 험하고 기암괴석이 자태를 갖추고 있어 가을이면 경치가 절정을 이룬다. 또한 눌차리의 내눌 동쪽에는 138m의 국수봉이 하나 더 있다.
30. 굴암산
경남 진해시 대장리의 성흥사 뒤편에 있는 여러 봉우리 중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해발622m이다.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산세가 험하다. 동쪽으로는 곰티고개를 지나 옥녀봉에 이어지고 남동쪽으로 보개산(478.9m)과 연결된다. 백두대간이 마감된 지리산 천왕봉에서 동으로 뻗어 낙동강 하구로 빠지는 길고 긴 산맥을 조선조의 지리서인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이라고 부르고 있다. 낙남정맥은 창원부근에서 이 산줄기의 한 봉우리인 불모산(佛母山 801m)을 이루고 여기서 동쪽으로 뻗어 화산(花山 792m)을 거쳐 굴암산으로 이어지며 다시 동쪽의 보개산(寶蓋山 479m)을 지나 낙동강 하구로 주저앉는다. 용추폭포는 굴암산의 또 다른 작은 능선이 남으로 내려가는 자락의 끝부분 계곡에 있다.
31. 금용산
고도 149.6m로 부산진구 초읍동과 연제구 거제동에 위치하고 있다. 금정봉과 화지산문의 안쪽 부분에 있는데 일명 "새미산", "쇠미산"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한자식 지명으로 이 산에 쇠물이 많이 나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금정산의 연맥이 남쪽에서 끊어질 듯하다가 동으로는 화지산으로 그 여맥을 간신히 이어 붙이고 서로는 백양산에 이어진다. ?동래부지(1740)?에 보면, “금용산은 부 서쪽 5리에 있다“고 했다.
남쪽 기슭에는 초읍동 주택가, 서쪽 산록에는 어린이 대공원이 있으며 북동쪽에는 사직 종합운동장의 육상보조경기장이 있고 남동쪽 산록에는 사직동과 초읍동을 연결하는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으로 진입하는 대로가 연결되어 있다.
금용산에 둘러싸인 성지곡은 신라시대 聖知라는 地師가 8도 강산을 돌아디니며 자기 선조를 모실 무덤터를 찾았는데 이곳에 와서 그 명당자리를 찾아 쇠말뚝을 꽂았다고 하여 뒷사람이 그 골짜기 이름을 성지곡이라 했다 한다. 혹들 저수지의 못을 따라 성지의 못 ?池?를 쓰기도 하지만 바른 표기는 聖知다.
32. 노적봉
녹산수문의 동쪽 강 가운데 있는 독뫼. 높이 50cm. 1933년 녹산수문이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노적봉은 서낙동강 하구 바다에 떠 있던 작은 갯바위 섬으로 크기가 녹두처럼 작다고 하여 ‘녹도’로 불리기도 했다.
노적봉이란 임진왜란 때 왜(倭)의 수군이 쳐들어 오기 전에 이 섬 전체를 짚으로 둘러씌워 군량미가 충분한 것처럼 위장을 해 놓으니 왜군이 놀라 도망을 갔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조그마한 섬이었던 녹도가 1934년 4월 낙동강 일천식공사로 말미암아 성산과 노적봉 사이에 녹산수문이 설치되어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김해평야를 곡창화하는 과정에서 육지로 연결되었다.
33. 녹제산
노포동의 북쪽 녹동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경상남도 양산시와 자연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높이 250m이다. ‘녹제산’이란 이곳에 노루가 많이 서식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34. 농청산
청학동에 있는 산으로 영도의 주봉인 봉래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나온 산지
35. 달음산
달음산(達陰山)은 기장군 장안읍 좌천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정관면과 일광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587.5m의 산이다. 서쪽으로는 천마산, 함박산, 문래봉을 지나 백운산(白雲山)에 이어진다.
문헌기록인 ?기장읍지?에는 취봉산(鷲峰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새벽빛이 가장 먼저 이 산봉우리를 비춘다는 달음산은 기장지역의 산지 중에서 '어미산'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원적산이 동으로 그 산맥이 뻗어내려 백운산을 이루고, 다시 동으로 뻗어내려 동해에 맞대면서 크게 높게 뭉치면서 달음산이 되었다. 그러니 달음산은 원적산의 정기가 뭉친곳으로 옛부터 이곳에서 천명의 성인이 나오고,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는 피란지라 하였으며 팔기산과 더불어 기장군의 2대 명산 중 하나이다.
달음산에는 취봉(鷲峰)과 옥녀봉(玉女峰)이라는 두 주봉이 있다. 취봉은 보통 수리봉이라 하고, 옥녀봉은 구슬아기봉이라고 부른다. 또 취봉은 추봉으로 부르고 그 뜻은 독수리이지만 정수리의 뜻으로 수(首)의 뜻이다. 이는 수컷의 수, 술, 소, 솔과 함께 남신을 나타내는 말이 되고, 또 살의 대자로도 되어 신역(神域)의 뜻이된다. 옥녀봉은 구슬애기로서 구슬은 크슬크다(大)의 뜻이고, 애기는 자녀의 뜻이 되어 추봉의 자녀봉이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정상에는 주봉인 취봉을 비롯해 좌우의 문래봉과 옥녀봉 등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50여 평의 반석이 있어 발 아래 펼쳐진 일광면을 비롯, 기장군 5개 읍?면과 해안선, 일망무제의 동해바다와 천성산?금정산 등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36. 덕도산
강동동 북정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38.3m, 면적은 0.6㎢로서 삼각주 지역에서는 오직 하나뿐인 산이며 산이라기 보다 동산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대저동의 칠점산과 함께 낙동강 삼각주상에 있는 구릉성의 낮은 산지로 삼각주가 형성되기 전에는 바다위에 떠 있던 외딴 바윗섬. 이 산의 북쪽, 서쪽 기슭에는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가 출토되는 패총이 자리잡고 있어 덕도산 일대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임을 잘 알 수 있다.
37. 두류산
초읍동 성지곡 수원지의 북쪽에 있는 산이다. ‘두리산’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사면이 급한 비교적 험준한 산에 해당된다.
38. 두송산
승학산에서 봉화산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내린 두송반도의 끝에 자리잡은 산으로 해발 95m이다. 두송산은 다대포의 자연 방파제로서 동남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대포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자연 표지로 이용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몰운대?금티산과 함께 병선을 만드는 재료를 조달하기 위해 나무의 벌채를 금지한 바 있는 경상좌우영 관할의 봉산으로 지정된 군사상 중요한 산이기도 하다.
39. 마안산
해발 148.8m, 134m의 2개의 종순형 산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래의 진산인 윤산에서 뻗어내린 동래의 주산이다. 주능선을 따라 동래읍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산정일대는 이 고장의 사적공원인 마안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마안산의 정상 북장대에 올라서면 발밑에 복천동 고분과 학소대가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는 하마정까지 시야가 탁 트인다. 왼편으로는 안락, 명장동, 오른편에는 온천동에 둘러 쌓여있는 마안산은 가히 동래의 중심산이라 할 수 있다.
마안산이란 산의 모습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동래구청 쪽에서 보면 두봉우리(왼쪽은 북장대, 오른쪽은 체육공원)가 솟아 있는 모습이 여자의 젖가슴 같기도 하다 하여 일명 “유방산”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또, 마안산을 대포산이라고도 한다. 이는 개항이후 이 마안산에 대포를 비치하고 발포병이 오가서 대포산이라 한 것이 지금까지 일컬어지고 있으며, 산정에는 부산지역 3.1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부산 3.1운동 기념탑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40. 매봉산
연대봉(459.4m)과 응봉산(314m)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 359m. 남동쪽으로 누른 연곡고개 넘어 해변에 절경인 누른연벼랑이 있는데 마치 깎아놓은 듯한 절벽에 가을이 되면 고운 단풍이 바닷물에 비쳐 누른 연못처럼 보인다하여 누른연벼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매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구랑과 미음 부락의 경계가 된다.
41. 몰운산
몰운대의 몰운섬을 이루고 있는 산으로 해발 78m이다. 구릉에 가까운 산으로 산정부분이 둥그스레한 종순형으로 되어 있고, 사면 또한 완만하나 산기슭의 끝부분은 낭떨어지의 단애를 이룬다. 산전체가 짙은 송림으로 덮혀있고, 이 때문에 두송산?금티산과 함께 조선시대에는 경상좌수영 관할의 봉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42. 묘방산
태종대 남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197.5m로 비교적 험준하고 사면은 급하며 100m에 이르는 해식애에 이어진다. 산의 대부분은 태종대의 유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43. 무지개산
반송2동 개좌산 중턱에 위치한 개운사의 뒷산으로 해발 129.8m. 무지개산이란 이 산 중턱에 있는 개운사가 창건되기 전 이곳에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산수가 수려하여 선녀들이 내려와 춤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놀다가 승천할 때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이곳의 무지개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3일 이전에도 하루에 2번씩이나 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4. 백산
민락동의 뒷산으로 해발 129.5m. ‘백산’이란 수영만과 수영강에서 안개가 짙게 끼일 때는 산 전체가 하얗게 보이기도 하고, 흰구름이 이 산을 덮을 때는 하얀산이 되어 버리기 때문인데서 비롯된다. 지금의 수영교 부근이 옛날에는 모두 갈대밭이였는데, 이곳에 학들이 날아와 먹이를 찾고 놀다가 이 산에 둥지를 튼데서 백학산(白鶴山)이라 했고, 후에 이를 줄여서 백산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옛 이름인 향산(向山)을 잘못써서 ‘白山’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동래부지?나 ?동래영지?에도 ‘백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호랑이 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속인들이 주술하는 곳이 되어 있으며, 백산의 형상이 마치 수영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자의 모습이라 하여 수영지역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수영야류 제4과장 사자무 과장에는 호랑이를 사자의 먹이로 제공하는 특이한 점이 있다.
1998년 5월 24일에는 부산을 가꾸는 모임에서 조선시대 좌수영 수군이 바다를 침략하는 왜구들을 살피는 망대가 있었던 곳을 기념하는 ‘백산 점이대'를 산 정상에 세웠다
45. 백운산
백운산(白雲山)은 기장지역의 배후산지 중에서 가장 으뜸을 이루는 산으로 정관면 서쪽에 있는 산으로 철마면과의 경계를 이룬다. 이 산은 해발 520.2m. 남쪽으로는 철마산과 북쪽으로는 용천산에 이어져 있으며 동쪽 사면으로는 좌광천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백운산은 그 갈래가 동, 서, 남, 북으로 뻗어내려 차성지방의 모든 산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 계곡이 생겨 모든 하천을 이루었고, 이 산과 하천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든 마을이 생겼다. 그래서 백운산은 차성지방의 조산(祖山)이 되는 것이다.
?기장읍지?에 "백운산은 그 산 위에 항시 흰구름이 있기 때문이며, 창립한 절이름을 이 때문에 선여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흰구름 바다에 절?寺?이 배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백운산의 백(白)은 배달민족, 박달민족, 또는 배미산, 배산, 바리산, 고개?赤峴?, 배오개?梨峴?, 박달산 등 말과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새밝, 새벽?曉?의 뜻을 가진 옛말이 되는 배에서 유래되었다.
백운산의 운은 구름 雲자인데 이는 그루라는 옛말로서 大?長을 뜻하는 클의 변음이다. 그러므로 백운산은 새벽, 큰, 산의 뜻이 되는데 한역하면 曉大山이 되는 곳이다. 옛말로 배큰뫼가 되는데 백운산 고개를 배너머고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46. 범방산
구포초등학교 뒤쪽에서 모라동쪽 구포도서관에 이르는 백양산 산등이의 하나. ‘호방산(虎方山)’ 또는‘ 범바위산’으로도 불린다.
47. 보개산
부산시 강서구와 경남 진해시의 경계를 이룬 보개산(寶蓋山) 은 해발 478.9m로 강서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굴암산에서 동남으로 향하던 줄기가 남해바다를 보고 우뚝 멈추어 선 자리에 있다.
서로는 진해시와 경계하고 안으로 지사, 신명, 명동을 안으며 명월산에는 가락국 허왕후의 도래 전설로 유명한 명월사지가 있고 동으로 내린 종산에는 예부터 팔도명지가 있다는 어산이 있으며 그 기슭에 대압, 소압, 잠뫼, 송곡의 4개 마을로 구성되는 압곡이 있다. 금정산 북문보다 100m정도 낮지만 정상에 서면 강과 바다 도시와 섬 들판과 해안선이 잘 어우러져 가슴이 확트이는 볼거리를 만들어준다.
48. 보수산
중구 대청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165m의 낮은 산이지만 그 위치가 부산 남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정상에 넓게 대청공원이 자리 잡고 있어서 방문객에게 깨끗한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49. 봉대산
해운대여고 서쪽에 있는 산으로 장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170m의 봉우리.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산정이 둥글고 산록이 완만하다. 봉대산이란 산정에 조선시대의 봉수대가 자리잡고 있는데서 비롯되며, 한편으로 ‘간비오산’이라고도 불린다.
50. 봉오리산
용당동 동쪽에 있는 산. 해발 170.9m로 용호4동과 경계를 이룬다. 황령산 서쪽 산록에서 남쪽으로 우암반도까지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봉우리
51. 부흥산
송정해수욕장 배후에 있는 산으로 좌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해발 181m.
52. 비룡산
용당1동에 위치한 동명불원이 자리잡은 뒷산으로 일명 ‘신룡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 역시 용마산이나 동명목재가 있던 자리와 같이 용과 관련된 전설이 얽힌 지명이다.
53. 사배야산
노포 본동 마을 뒤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196m이다. 산정이 둥그스레하고 산기슭 또한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지금은 대부분이 부산컨트리클럽 골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배야’란 새벽이 일찍 온다는 현대어의 새벽인 새배려의 고어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54. 삼각산
기장읍지에 “삼각산은 현에서 북녘으로 40리에 있고, 원적산에서 산줄기가 내려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각산은 똑 같은 삿갓모양의 세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아주 사이좋게 솟아 있다. 흔히 보는 바위산 봉우리가 여러개 솟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나즈막한 토산이 마치 큰 왕릉처럼 산정은 뾰족하게 솟아 그 산정에도 소나무가 울창하다 기묘하게 생긴 삼각산은 높지도 않고, 주변에 인가도 없고, 유적이나 유물도 없는 산중에 있는데도 옛사람들이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이상하다. 옛 선인들은 서울의 삼각산을 비롯하여 삼신(三神)사상 등으로 유달리 삼(三)을 신성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서 유래된 것 같다. 삼각산에서 원류가 된 계곡을 박천(朴川)이라 하였는데 박천은 밝내로서 옛날의 신천(神川)임을 알 수 있다.
55. 석성산(石城山)
‘천마산’의 옛지명으로 ?동래부지?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의 각종 지도와 문헌에는 천마산으로 나타난다. ‘石城山’이라 함은 이 곳 정상에 돌로 쌓은 봉수대가 자리잡은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쌓은 석성산의 봉수대는 군사상의 불리한 점 때문에 구봉산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 결과 석성산의 지명은 봉수대의 폐지와 함께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56. 송림산
서구 암남동 송도해수욕장의 동쪽에 자리잡은 독립 구릉으로 해발고도 23m이다.
본래 이 산은 천마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의 끝부분으로 남항에 몰입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섬이었으나 주변 해안이 매립되면서 육지화되고 지금은 송림산으로 불리고 있다.
송도해수욕장이 자리잡고 있는 일대를 ‘松島’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송림산의 과거 모습인 섬에서 비롯된다. 소나무 숲으로 우거진 송림산은 모두가 공원(송림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송도 해수욕장의 수려한 경관과 어우러지면서 부산의 빼어난 해안명승지로 이름나 있다.
57. 시약산[蒔藥山]
구덕산 남쪽 산으로 대티고개 북동쪽 산이다. 동쪽은 서대신동이 되고 서쪽은 주택가가 아닌 산지인 시약산으로 내려오다가 남으로 비탈진 자리에서야 괴정동이 형성되었다. 괴정천은 이 시약산에서 시작된다. 이 산을 시약산이라 한 연유를 알 수 없지만, 蒔자가 소회향 ?시?자고 보면 이곳에 약초로 요긴한 소회향이 많았지 않나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58. 십자산
부산교육대학교와 지하철 교대역 앞 사이에 있는 이사벨여중?고의 뒤편의 산으로 해발 46m. 도심의 전형적인 구릉성 동산에 해당된다.
십자산이란 산꼭대기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데서 비롯된다. 급속한 도시화로 말미암아 지금은 옛자취를 더듬기 어려운 이 동산은 십자가가 꼭대기에 세워지기 전 한자로 鷄卵 보통은 ‘황새알’ 또는 ‘한새알’이라 불렀다. 이는 옛날 학의 고장이던 동래지방에 이 동산의 모습이 황새알과 닮은 데서 비롯된다. 지금 이 일대에 황새알 옛동산을 비롯하여 인근 황새알 벌, 황새알 마을들, 학과 황새에 관련된 이름이 주위에 많이 남아 있어 십자산은 황새와 학의 서식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9. 암골산
두구동의 임석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해발 200m의 구릉성 산지. 이 산은 공덕산의 남쪽 산등성이로서 산기슭이 완만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서쪽으로 솔바아들에 이어져 있어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발원지가 된다.
60. 와우산
미포와 청사포 사이에 있는 산으로 해발 183m로 장산에서 왼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 끝부분. ?달맞이고개? 또는 ?달맞이동산?으로 더 잘 알려진 와우산은 옛부터 해운대 저녁달 조망의 경승지로 짙은 산림으로 덮여 있었으나 1972년부터 AID단지 등 대단위 아파트와 고급빌라, 대형음식점 등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61. 용당산(용마산)
용당동 뒤편에 있는 산으로서 용의 형상을 하고 있고 산아래에는 연못이 있어 용당이란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산은 용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옛날 어느 해 산의 앞부분을 절개하여 전답을 일구웠을 때 이 용머리 부분의 땅속에서 붉은 혈흔이 보였다고 한다.
62. 우룡산
황령산의 지맥으로서 문현고개를 지나 우암동까지 뻗어 있는 산. 지금은 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 있고, 말단은 해안선의 매립으로 제7부두가 자리잡고 있다.
63. 일광산
동쪽으로는 일광해수욕장, 북쪽으로는 달음산, 서쪽으로는 금정산, 남쪽으로는 장산이 보인다. 일광산은 고(古) 기장(機張)의 발상지(發祥地)이다. 기장 고읍성(古邑城)의 진산(鎭山)이 되는 주산(主山)이 되며, 일광산의 고명(古名)이 무엇이었는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읍지(邑誌)의 산천(山川)에는 일광산(日光山)이라는 산명(山名)이 없다. 그러나 차성가(車城歌)에는 "삭출(削出) 금부 일광산(日光山)은 만장봉(萬丈峯) 높았는데"라 하여 그 이름을 적고 있다. 일광산은 고읍성(古邑城)의 진산답게 어울리는 쌍바위의 전설이 있다.
정상에 서면 달음산, 장산, 금정산 등 동부경남 지역의 웬만한 산은 능선길이 다 보일 정도로 조망이 일품이다.
64. 장군산
해발 152m의 천마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가 대한해협에 몰입하여 형성된 송도반도(또는 암남반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천마산의 연맥이지만 지금은 감천 고개를 경계로 길이 크게 났기 때문에 독립된 산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산을 장군산으로 부르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선이 부산포에서 왜선 100여 척을 무찌르고 돌아갈 때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정운 장군이 전사하게 되니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이때부터 이곳 산을 ‘장군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장군산은 산림으로 뒤덮여 있는데다 남쪽으로 멀리 대한해협을 넘어 쓰시마를 바라다볼 수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송도만과 감천만이 자리잡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산이다.
65. 장산봉
용호3동의 동쪽에 솟은 산으로 해발 225m. 짙은 산림으로 덮혀있고, 동쪽 산록 아래는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넓은 암반이 길게 뻗어 이기대 공원을 이루고 있다.
66. 전선산
대연2동 남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142m. 우암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는 ‘전서방 먼테이’라 불렀다.
67. 중군산
명장1동의 동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해발 117m이며, 동래구와 해운대구(반여동), 그리고 금정구(서동)의 경계를 이룬다. 사발을 거꾸로 엎어 놓은 듯한 이 산은 산허리까지 주택가로 변하였다. 산록은 북동쪽에는 명장정수장이 자리잡고 있다. 서쪽 산록에 위치하는 금불사 부근에는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흘에는 마을의 풍요와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당산제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명 ‘옥봉산’이라고도 한다.
68. 천마산
구랑동?녹산동?생곡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242m. 봉화산에서 북동으로 이어진 산세는 구절봉을 만드는데 그 중 제일 높은 봉우리.
천마산이란 산세가 마치 말을 하늘로 나는 듯한데서 비롯되며, 풍수지리의 형국으로 보아 천마 시풍형(天馬嘶風形)에 해당된다. 예부터 이 산자락의 미음과 중곡 마을에서는 천마가 놀라 하늘로 영원히 달아날까봐 쇠(풍물)를 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69. 천제산
지금의 부산공업고등학교가 있는 뒷산을 말하며, 남구의 담장역할을 하고 있다.
70. 추마산
석대동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서 높이는 73m이다. 군마가 달리는 산이란 뜻으로 옛날 이곳 기슭에서 군마를 훈련시켰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71. 칠점산[七點山]
대저1동 자연마을인 평강리 칠점에 있은 일곱 개의 작은 구릉. 높이31m. 칠점산이란 7개의 작은 산이 마치 7개의 점을 찍어 놓은 것 같다는 데서 비롯된다.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하중도인 넓은 대저도에서 유일한 산지이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경 오늘의 삼각주가 물위에 솟아오르지 못하였을 때 칠점산은 바다에 떠 있던 갯바위섬으로 마치 오륙도처럼 6~7개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었다.
칠점산은 낙동강 제방 축조 공사와 김해국제비행장이 건설됨에 따라 8?15 광복절전에 3개의 동산이 없어지고, 해방 후에 다시 3개가 없어졌으므로 현재 남은 1개도 대부분 깎여나가 버렸다.
72. 팔기산(불광산)
사시사철 계곡의 경치가 좋아서 옛 사람들이 금수동이라 불렸다는 곳. 계곡 아래 쪽 입구에는 아직도 바위에 새겨진 금수동이란 글자가 선연한데, 길을 내면서 이 바위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우회하느라 급커브 길을 만들면서까지 지켜온 이름이다. 장안사 계곡이라 통칭하는 이곳 불광산은 봄에는 철쭉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이, 가을에는 단풍이 좋고, 겨울에는 벌거숭이 나무숲이 장관이라 휴일이면 관광객들로 붐빈다. 장안사를 지나 척판암과 백년암 쪽으로 오르면 시멘트로 포장된 길 양옆으로 울창한 활렵수림이 하늘을 덮고 서서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 준다. 백년암을 끼고 돌면 본격적으로 흙과 풀을 밟으며 등산할 수 있는 숲길이 이어지는데, 키 큰 나무들이 숲속터널을 만들어 준다.
장안사를 중심으로 불광산 왼쪽편은 산길보다는 계곡이 좋다. 하류에서 산꼭대기 상류까지 이어지는 계곡은 금강산 계곡과 같은 장관은 못 돼도, 아기자기하면서 아름답고 운치있는 풍경이 우리나라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졸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다 넓다란 실내 수영장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폭포처럼 떨어져 작은 소를 만들기도 하면서 양옆에 가지를 늘이고 선 활렵수림과 어울린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 계곡을 따라 산꼭대기까지는 올라갈 수 없다. 계곡 물위로 또 산길 위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군부대 표지판과 철조망이 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난 71년부터 군부대 폐탄처리장으로 사용돼와 폐탄처리장 16㎡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그래서 이 폭파장 아래의 계곡에는 물고기가 전혀 살지 않는다고 한다.
73. 홍곡산
감만 여자중학교 뒷산으로 해발 125.7m. 용당동과의 경계
74. 화지산
고도 142.4m로 동래부서방 십리에 있으며 묘지로서 팔도명산의 하나인 정묘(鄭墓)가 있는 산으로 정묘산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무덤양쪽에는 천연기념물 제168호인 부산진배롱 나무 2그루가 있다.
진구 양정동과 초읍동 그리고 연제구 거제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 화지산은 아주 오래 전에 지금의 연지동 자리인 화지산 아래에 “화지언(和池堰)” 이라는 못이 있어서 그 못으로 화지산이란 이름을 가지게 됐다. 지금의 연지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못에는 연이 많아 “연못골” 또는 “연지언”이라 한데서 연지동이 되었지만 “화지언”은 그 북쪽 자리가 되어 아주 오래된 큰 무덤이다.
화지산(和池山)을 화지산(華池山)으로 쓰고 있으나 ?동래부지?에도 ?동래부읍지?에도 和池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和池山이 맞는 표기다.
|
첫댓글 매봉산에서 몰운대까지 한꺼번에 늘어놓으니 가슴이 벅차옵니다.
늘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게 정리해 주시는 회장님의 산행기에 감탄할뿐입니다.
때로는 다녀온 후에 복습하며 몰랐던 내용들을 알게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