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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자나무 그늘 아래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하늘저편
세상이 쓸쓸하고 가난할 때 빛나는 사람-고재종 시인 / 이승환
"광복절이라 술 한 잔 묵었제."
대나무의 고장답게, 8월 염천인데도 영산강변 대숲에서는 바람이 일어 한창 벼이삭이 패고 있는 들을 건너오고 있었다.그 중 몇 줄기가 담양문화원 앞뜰의 배롱나무를 건드리고, 안 그래도 간지럼을 많이 타는 배롱나무는 자못 신이 났다. 어제가 광복절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냐며, 참으로 오랜만에 작취미성(昨醉未醒)이라며, 선풍기 바람에 몸을 내맡긴 시인은 얼근한 심사를 숨기지 않았다. '고향 문화 살릴 놈은 전문가인 너밖에 없다'는 친구들의 부탁에 마지못해 맡은 담양문화원 사무국장. '월급쟁이 할 만하냐'는 물음에 그는 '시와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삶이지만 이것도 인정해야 할 우울한 내 삶'이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라도 삶은 치열해야 합니다. 시 쓰나 안 쓰나 바쁜 건 똑같습니다. 어차피 시작한 외도이니 만큼 주어진 기간 잘 마무리하고 다시 본업과 농촌으로 돌아가야지요.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고, 내 존재 가치가 반짝일 곳은 거기니까..."
당대의 농민시인 고재종은 다른 어떤 시인보다 자연과 가까이, 자연과 더불어 삶을 일궈온 시인이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삶의 세계와 맨살로 대면하는 데서 그의 시는 나왔다.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흙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며, 이웃 농부들과 나눈 대화를 옮겨 적은 문장이다. 그의 문단 데뷔는 가히 즉흥적이고 천재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등단을 이야기하자면 불행했던 그의 삶의 이력을 먼저 훑고 내려가야 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20대 후반까지의 고향에서의 삶을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빡빡 지워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술회한다. 5남4녀를 둔 빈농의 차남으로 태어난 고재종은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돈이 없어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장학금 조로 나온 소 두 마리에 자위하며 담양농고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 수재 소리를 듣던 그에게 성에 차지 않는 학교가 정이 갈 리 없었다. 1년 만에 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고, 서울에서 카페 종업원, 공사장 인부, 신문보급소 수금원 등을 전전했다. 그 과정에서도 한동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나,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삶에 그 생활이 오래갈 수는 없었다. 절망이 커져가는 만큼 입에 술을 대는 날이 많아졌고, 서울에서 희망을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3년 만에 서울 생활을 접은 그는 몇 군데 절과 교회를 떠돌다 앙상히 뼈만 남은 몸으로 귀향한다. 그리고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치고 탈출구를 찾던 중 열두 살 나이에 부산으로 식모살이를 떠났던 막내 여동생을 찾아간다. "그 어린 것이 머리는 야물어서, 그걸 익히 알아본 주인이 식모일이 아니라 양장점 일을 가르쳤던 모양입디다. 동생은 꽤 귀염을 받는 재단사가 되어 있었는데, 일자리를 구한다는 핑계로 무턱대고 부산으로 가 여동생 밥을 축냈지요. 그 당시까지도 나는 인생의 숙명적 부조리에 허우적대는 비극주의자였어요." 막상 부산으로 갔지만 워낙 몸이 약했기에 막노동 자리 하나 쉬 걸리지 않았다. 도리 없이 그가 하는 일이라곤 광안리 해변을 거닐거나 서면에 있는 영광도서에 가서 공짜로 책을 읽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주로 손에 들었던 게 시집이었는데, 끝까지 보기에 눈치가 보이는 두꺼운 소설이나 인문서적과 달리 똑똑 끊어지는 데다 읽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초.중학교 시절에는 산문으로 굵직한 상도 받아봤지만 시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던 그는 몇몇 시에서 감동을 받았고, 이만하면 나도 한번 써볼 수 있겠다 싶었다. 곧바로 시집 몇 권을 펼쳐놓고 나름대로 시 작법을 터득하며 일주일에 20편을 써 '실천문학사' 신인 공모에 투고했는데, 얼마 뒤 그게 덜컥 당선이 됐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게 됐다. 1984년의 일이다.
이후 고재종은 발붙일 데 없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농사지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키 160cm에 건강도 좋지 않고 고등학교도 중퇴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농사와 글쓰기밖에 없었다. 그는 일한 만큼, 사는 만큼만 썼다. 땅의 언어를 새겨들어 원고지에 담았고, 이웃의 가슴 아픈 현실이 있으면 시로 함께 울어줬다.
닷새 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 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 수천의 파리 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참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 기름때 묻은 머리로 하나둘 달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는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 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망길 떠난 월평 할매
- 네번째 시집 『날랜사랑』에 실린 시 '분통리의 여름' 중에서
그 시절 10여 년에 걸쳐 쓴 시가 한국 농민시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시들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1987), <새벽들>(1989), <사람의 둥불>(1992), <날랜 사랑>(1995) 네 권의 시집에 담겨 있다. 시와 삶이 일치를 이루던 그때가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등단 무렵 나에게 시를 가르친 사람은 '창작과비평사' 주간이었던 이시영 시인이었어요. 등단 후 얼마 안 있어 그분이 시를 청탁해와 다섯 편을 지어 보냈더니 '등단작의 답습일 뿐'이라며 되돌려 보내더라고요. '주변 이야기를 쉽게 쓰라'는 편지와 백석 시집 한 권을 동봉해서요. 그때부터 이시영 시인과 우편으로 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대학 노트 한 권 분량을 써서 보내면 한 편 정도 동그라미 칠까 말까 할 정도로 아주 혹독하게 가르칩디다. 그렇게 2년을 공부하니 시가 보이더군요. 이시영 시인이야말로 나를 있게 한 스승입니다." 시가 보이기 시작하자, 잠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시구가 떠올랐다. 논밭에서 일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시를 썼다. 늘 시만 생각했기에 생긴 웃지 못한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대충 시 쓰는 형편없는 놈'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광주에서 문학 하는 선배가 찾아왔는데, 청탁받은 원고를 마무리하고 술집으로 가려고 '30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무슨 시를 30분 만에 쓰냐'며 벌컥 화를 낸 것. 그가 펜을 잡았을 때는 이미 머릿속에 써둔 것을 옮겨 적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 선배는 몰랐던 것이다.
고재종의 시들(특히 초기 시들)은 20세기 후반 한국 농촌의 자화상을 다룬 민중시이면서도 그 속에 담긴 서정성 또한 한 마디로 '진경'이다. 정제된 시어, 풍성하면서도 유창한 토속어의 구사, 정한의 리듬은, 농사지으며 시도 쓴다는, 그런 시인에게는 시 자체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조금 더 점수를 줘도 좋다는 일종의 윤리적 특혜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의 물오른 서정에 동료 시인 안도현은 '잘 익은 홍시를 소반에 하나 가득 담아놓은 듯하다'고 했을 정도다. 한편 이러한 서정성을 두고 모 신문사 문학 담당 기자는 '선생의 시는 너무 아름다워 도리어 현실을 은폐한다'며 은근슬쩍 그를 비꼬았다. 아름답기만 하지 민중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예로 든 게 김수영의 '풀'이었다. 시 자체로도 좋은 명시를 굳이 바람은 압제의 칼날, 풀은 민초에 비유하며 현실참여시로 꿰맞추는 기자에게 그는 혀를 차며 물었다.
"기자 양반, 나랑 같이 들에 나가봅시다. 바람과 풀이 상극인가."
"예술이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좌지우지돼서는 안 됩니다. 시는 사회과학의 하부구조가 아닙니다. 시는 시인이 삶의 세계에 살을 맞대고 살면서 얻어내는 총체적 사유의 결정체이고, 그 속에는 당대성과 작품성 둘 다 잘 녹아 있어야 합니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2차세계대전 후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고 말했지만,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은 살아 남았습니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고,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먼저 완벽해야 합니다."
사람의 손가락 길이가 다 다르듯 시집은 하나같이 가운데손가락처럼 우뚝하다. 그의 시집들이 근작들로 오면서도 힘을 잃지 않는 것은 시집이 나올 때마다 부끄러워하며 좀더 잘 쓰지 못했음을 자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겸손을 통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를 갈고 닦는다. 또한 그는 엄청난 독서가이기도 하다. 고재종을 잘 모르는 문학판 실력가들은 그의 '가방끈'이 짧다는 것을 알고는 은근히 알은체를 하지만 이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생각은 웬만한 대학교수 뺨칠 정도다. 그는 동시대의 시인과 평론가는 물론 동서고금의 철학가, 사상가를 넘나든다.
당뇨에 혈압에 건강이 좋지 않아 고향의 농사를 접은 지도 어느덧 10여 년, 아내의 직장을 따라 잠시 곡성에 머물렀다가 광주에 둥지를 튼 이후로 고재종은 농민시를 못 쓰고 있다. 아니 지금은 농민이 아니기에, 땅 위에 발 딛고 있는 삶이 아니기에 안 쓰는 것이다. 때문에 2004년에 나온 일곱번째 시집 <쪽빛 문장>은 이전의 시집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삶에 바탕을 둔 농민시에서 출발한 그의 시풍은 1990년대 초반 건강 악화와 사회주의 붕괴가 맞물리며 자연스레 생명시로 옮아갔다. 농사속에서 태어난 생명시였다(문학평론가 정효구는 '생명시 중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고재종의 시'라고 했다). 고재종의 시풍이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은 시대의 담론이 되면서 시뿐 아니라 문학 전반과 다른 장르로도 영역을 넓혀나갔다.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모든 작가가 '가문 웅덩이에 올챙이 끓듯' 하는 것은 아쉽습디다. 시집의 저자 이름만 가리면 누가 썼는지도 모를 정도로 획일화돼서야 되겠습니까. 문학은 뒤따라 가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생명은 여전히 시대의 담론인 만큼, 이제부터라도 생명 현장에 직접 대면한 생명시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섯번째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1997년)과 여섯번째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2001년)에서 농민시를 계승하면서 생명에 천착하던 그는 1998년 광주로 이사하면서 실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시 생활에서 오는 우울과 절망이 그에게 물음표를 던진 것이다(이것은 곧 카뮈나 카프카의 부조리 문학과 맥을 같이 한다).
"살아가야 할 이유는 제시해야 하는데, 근원적 부조리를 어떻게 시적으로 극복할지는 여전히 고민입니다. 당양문화원 사무국장 자리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때의 내 시는 어떤 모습일까요? 답은 나도 모릅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참 외로운 작업입니다. 한겨울 며칠 낮밤을 혼자 골방에 앉아 글을 쓸 때는 너무 외로워 벼룩이라도 와서 좀 물어줬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시인은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자기 안의 열정을 쏟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참 '외롭고 높고 쓸쓸'합니다."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 다섯번째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에 실린 시 '수선화, 그 환한 꽃자리' 전문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고 했다. 시인은 자연의 서정성을 줄기차게 노래해야 하는데, 그 자연이 점점 실종되고 있음을 반어적으로 슬퍼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재종은 농촌으로 갈 것이고, 거기서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서정성을 발견해나갈 것이다. 지난한 작업이지만 시인이란 백지 위에 영혼을 판 사람들이 아닌가. 세상이 쓸쓸하고 가난할 때 시인은 고요하게 빛나는 법이다.
고재종
1957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났다. 1975년 담양농고 1년 중퇴로 제도 교육을 마감했지만,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 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일곱 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그의 시를 좋아한 팬이었던 김용숙과 결혼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담양문화원 사무국장 등을 맡았다.
시집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산문집 <쌀밥의 힘>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등을 펴냈다.
제11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제16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 『거친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이가서, 200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