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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유교는 살아있는가. 이 물음은 작금 무성해진 유교에 관한 담론을 보면서 엉뚱하게 자라난 것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유교에 대한 태도는 분명해 보였다. 근대화론자들과 민주주의자들, 아니 무엇보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계가 유교의 사망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여성계는 오랜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 남성지배의 질곡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유교란 말에서 그들은 전제적 폭군의 권위의식부터 떠올리고 이에 대한 투쟁을 결속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근대화론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은 유교를 사적 가치와 공적 가치를 혼동하는 연고주의와 정실주의의 원흉으로 생각한다. 합리적 절차와 이성적 판단보다 전체에 대한 몰주체적 영합주의가 개인의 존엄을 훼손하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문화계는 정치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오랜 권위주의가 사회와 문화의 제 영역에서 억압과 검열의 눈을 부라리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그렇게 유교는 인간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로 인식되었다.
우리는 단시일에 돌진적으로 눈부신 산업을 일구었고 민주화의 큰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일정한 성공이 오히려 전통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고 유교의 생명을 되살려 놓았다.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이 독점적으로 주도하는 세계역학에 맞서 태동한 새로운 민족주의가 그 역설적 회고에 일조했다. 통신기술과 교통의 발달, 그리고 단일화되어 가는 지구경제는 자체의 반정립으로 로컬리즘을 키우게 마련이다. 음양의 진실이란 그런 것이다. 待對대대의 한 쪽이 무너진다고 해서 다른 쪽이 절대적 독점을 행사하는 법이 없다. 전혀 다른 축 위에서 새로운 대대가 형성된다. 미국이 홀로 남자 유럽은 일찌감치 단결했고, 아시아 또한 새로운 블록으로 뭉쳐야하는 현실적 필요에 직면했다. 오랜 반목과 갈등을 넘어서서 화해와 협력의 아시아를 구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한자와 유교를 문화적 동질성의 토대로 삼자는 얘기도 들린다.
하여 유교에 대한 재발견과 재적응의 노력이 활발해졌다. 시동은 아무래도 밖에서 걸었다. 그들은 유교적 가치가 통념과는 달리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아시아 지역의 높은 교육열이 전문적인 산업 역군을 양성시켰고, 전체에 대한 의무와 복종이 기업의 단체문화에 적응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분석한다. 아시아적 가치는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유교는 근대적 성공을 해명하는 요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를 바라보는 전망에서 논의되기도 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몰고 온 병폐, 그래서 파편화되고 소외된 현대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유교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절차와 접목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공동체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모색의 중추일 수도 있다는 낙관론까지 생겼다.
이렇듯 유교에 대한 진단과 평가는 서로 엇갈리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 혼돈의 실험이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면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해 나갈 수도 있다. 여기서 필요한 덕목은 경화된 선입견을 자제하고 문제를 진정한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살피는 일이다. 그럼에도 상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세가 아쉽고, 그리고 유교의 실제를 성찰하는 노력이 부족하다. 한쪽에서는 유교를 살려보자 하고, 또 한쪽은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원초적 원색적 적대관계가 유교에 대한 의미있는 담론을 방해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유교를 너무 엄숙하게 혹은 두렵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흡사 근엄하게 장대를 물고 호령하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앞에서 주눅든 아이들처럼 말이다. 한쪽은 할아버지의 장죽과 기침소리를 그리워하고, 또 한쪽은 그 소리를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다. 대화를 이 지점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이 제안은 두 진영 모두에게 불만을 살 것 같다. 그들은 그 할아버지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거나 은밀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히 “유교가 옛적의 전제적 독점과 찬란한 영화는 잃었으되, 우리의 삶과 의식 깊숙이에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나는 묻는다. 유교의 코드 가운데 지금 무엇이 남아있는가. 유교문화는 이념, 전적, 습속, 문화, 의례, 관계 등의 복합체이다. 유형한 것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서원과 향교는 그 의례적 교육적 사교적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고 쓸쓸히 퇴락하고 있고, 문중의 사당 또한 집단적 결속의 중추로서의 의미를 잃었다. 정통 한복은 일 년에 두 번 명절 때 입을까 말까 이고, 생활 한복은 한복에서 그 기능적 편리함만을 살렸을 뿐, 유교문화의 의례적 수렴적 의미를 배제했다. 옛적의 의례는 冠婚喪祭관혼상제로 압축된다. 관례는 사라진 지 오래고, 혼인은 서양식으로 바뀌었다. 상례는 재래의 장중한 의식과 절차를 상실했다. 죽은 자를 보내는 꼼꼼한 예식과 섬세한 배려는 유교문화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으나 이제 죽음은 병원 영안실에서 짐짝 치우듯 황급하게 치러진다. 죽음이 이처럼 치욕인 시절이 있었을까. 문상객들도 고인과의 인연을 추억하기보다 상주의 눈도장을 찍고 봉투를 건네주기 위해서 들렀다간 곧 일어선다.
남아있는 것은 제사와 차례뿐이다. 그 또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제사와 차례는 여인네들의 가외노동, 그것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무가치한 노역으로 떨어졌다. 남자들도 제사의 구속력을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제의의 의미는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중세의 위광이었던 제사는 여성계의 거센 도전과, 기독교의 예배 앞에서, 그리고 실용적 현세주의라는 이방의 신에 밀려 장렬한 황혼을 맞고 있다. 삶의 일거수 일투족이 祭儀제의였던 시절, 눈길과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이 신성한 빛에 싸여 있었던 종교의 시절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유교는 어디 있는가. 의미는 없이 효용만 있고, 신화는 없고 합리만 있는 이 벌거벗은 세계에서. 사람들은 유교가 없다는 말을 수긍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습성화된 유교적 사고와 관행 속에 있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신화화이며, 메를로 퐁티가 말한 환각의 다리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부터 유교에 대한 우리의 인상과 통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려 한다. 어떤 것은 편견이고, 어떤 것은 인상이며, 또 어떤 것은 유교의 이념에 내재하며, 또 어떤 것은 역사적 조건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들을 하나 하나 갈라보기는 쉽지 않다. 다음에 적는 것은 유교의 사상과 문화를 후천적으로 습득한 사람이 유교문화의 코드를 읽는 한 독법이다. 나는 문화로서 유교를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두어야겠다. 나는 전통적 교육이 아니라 근대적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유교가 자기를 읽고 삶에 참여하는 방식을 배우기 위해 자발적 선택으로 유교의 경전과 문화에 접근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예외적 경우에 속하겠지만 앞으로 이런 방식이 일반화될 것이다. 왜냐.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태어나면서 그 속에 던져지던〉 문화체로서의 유교는 이미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미래에 있다.
코드 1 : 연고주의와 정실주의
유교를 말할 때 언필칭 말하는 것이 고질적인 연고주의와 정실주의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연고주의와 정실주의가 과연 유교의 결과인가이고, 그리고 둘째는 이것이 아직도 살아있느냐이다.
단언컨대 연고주의와 정실주의는 유교가 해결해야했던 도전이었고, 문제였다. 관계를 맺는 것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조건이다. 결속과 배타는 인간의 문법이지 특정 문화의 특성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규율할 것이냐 이다. 네트워크는 시대와 상황, 그리고 현실적 이해관계의 역학에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종친회와 동창회, 향우회의 전통적 조직은 유교적이라기보다 자연적 생성이다. 그리고 이들의 힘은 급속히 퇴락하고 있다. 그것이 바탕하고 있던 현실적 이해관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친회는 노인들의 사랑방 이상이 되지 못하고, 동창회나 향우회는 친목이나 상호부조를 위해 온존되고 있으며, 지역감정이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의도적으로 조장되고 증폭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부수적이다. 현실은 이들 조직이 아니라 자본과 산업에 의해 형성된 현대적 조직의 네트워크들이 움직이고 있다. 이를테면 공적으로는 노동조합이나 각종 이익단체, 시민단체, 그리고 사적으로 취미와 이념과 직업을 공유하는 동호회와 친목단체 등이 있다. 이 둘이 결합된 다양한 형태들이 이합집산하고 있다.
이들의 네트워크를 유교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현대적 네트워크를 규율하고 있는 원리를 전통적 유교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 익숙해있다. 과연 유교의 지배력은 심원하고 지속적이며 또 강고하다. 개화 이후 근대와 시민 민주의 전면적 세례를 일백년 간이나 거치고서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니. 그렇지만 물어보자. 이 판단은 옳은가. 어떤 점에서 유교적인가. 사람들은 기이하게도 전체와 객관성에 대한 고려없이, 비합리적 정서에 입각한 맹목의 파당적 결속을 〈유교적〉이라 인식한다. 그것은 유교의 정신과 완전히 상반되는 인식이며, 혹여 백 번을 양보하여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들에 유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도피하게 만든다. 그것은 유교라는 이름 아래 신화화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할 통로를 막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순이 유교 탓이라면, 그런데 그 유교는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면, 문제를 해결할 길은 바이없다. 혹은 유교가 그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면, 문제를 접근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진다. 연고주의와 정실주의의 문제는 유교를 통해 접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 합리성, 객관성과 공정성의 이름 아래 따져야 할 문제이다.
서구 합리주의 사회에도 연줄과 연고는 함께 있다. 클린턴의 참모들도 대학의 학파와 사적 교유, 그리고 선거 당시의 유대와 전문집단의 결속을 통해 구성되었다. 네트워크는 그래서 긍정과 부정의 동시적 양면성을 갖고 있다. 유교는 이 朋友의 네트워크가 사적 이익을 위해 타락하는 것을 다른 어느 사고보다 경계했다. 公私의 엄격한 구분이야말로 유교의 핵심이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신뢰를 통해 맺어질 뿐 파당을 짓지 않으며, 소인은 파당으로 세력을 만들지만 서로 간에 신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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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2 : 권위와 권위주의
연고주의와 정실주의는 합리적 이성의 진전, 그리고 이기와 일탈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의 발전과 더불어 힘을 잃어갈 것이다. 권력과 부의 재화가 비합리적으로 독점되고 있을 때는 맹목적 연고와 혈연주의가 득세한다. 이는 권위주의적 문화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렇지만 정보가 공개되고 대화가 열려가는 시기에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에 의한 연고주의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그 징후는 지금 완연하고, 추세는 앞으로 더욱 확산될 것이다.
기업에서는 능력과 성과의 지표가 분명해지는 것만큼 연고주의가 사라지고 있다. 학교 또한 교수가 연구와 교육의 질을 검증받고 학생들과 더불어 소통할수록 맹목적 정실이나 특권적 권위를 몰아낼 것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성역인 정치권마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맞고 있다. 실무적 능력과 도덕적 자질이 적절히 공개되고, 그 정보가 실시간으로 무한 소통되고 공유되는 시대에 후보자들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대학》에 이른 바, “열 사람이 지목하고 있고, 열 눈이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단순히 그가 통치자이기 때문에, 그가 상사이고 교수이기 때문에, 혹은 단순히 그가 연장자이기 때문에, 그가 남편이기 때문에 가졌던 위광과 권위는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새로운 권위는 그 직위에 걸맞은 능력과 자질의 탁월성과 더불어 자라날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 권위의 이념이다. 이 점에 비추어 유교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유교는 과연 권위주의적인가. 나는 말한다. 유교는 권위를 존중하지만 권위주의에 편들지는 않는다.
《논어》에서 공자는 주대 봉건 귀족의 세습적 권위를 부정하고 나섰다. 그는 권력과 지위가 천부의 특권이 아니라 능력과 품성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는 민주적 발상에 투철했다. 그의 제자들은 한 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층 평민계급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평등하게 태어나며(性相近), 또한 모든 사람이 교육 앞에 열려있다(有敎無類)고 가르쳤다. 한 인간은 자신이 맺는 가족적 사회적 관계에서 그에 합당한 의무와 책임을 진다. 군주는 군주의, 신하는 신하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들은 아들의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지위와 역할에 걸맞은 자질을 요구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합리적 권위의 전망이다. 유교의 변질 혹은 타협은 황제의 절대권력의 공고화와 더불어 왔다. 이 타협을 거부했기에 진시황은 그들을 생매장시키고, 유가의 문헌을 불태워버렸다. 漢代 이후 유학자들은 적극적으로 타협했다. 그렇다고 군주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종과 봉사로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유학자들은 군주의 세습적 권리를 인정하면서 그 전횡을 견제하고 전체의 이익에 봉사할 다양한 장치를 개발했다.
조선조도 마찬가지이다. 주자학이 지향하는 궁극적 이념은 理이다. 理는 황제권 너머의 보편적 이성, 혹은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산림이라고 부르는 은거적 선비들의 정신적 가치였다. 그들은 어느 편이냐 하면 군주의 전제권과 당파적 이익의 비판자로 기능했다. 그들의 비타협적 태도, 반실용적 태도는 지금 읽어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른바 선비정신이란 권위에 대한 굴종을 죽음보다 더한 수치로 여긴다.
군주는 군주다울 때 비로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사회나 세속적 인간이 주류인 것은 너나가 따로 없다. 문제는 그 세속에 대한 항체로서의 정신 혹은 기백이 얼마나 깊이 사회 속에 현실적 제어의 역할을 했느냐이다. 저항과 자존이 조선조 정신의 향기였다. 문제라면 오히려 그들이 〈군주다움〉, 즉 통치권의 정당성을 도덕적 엄격함의 측면에서만 재단하느라, 실무적 조정과 경영의 능력을 고려하는 것에 인색한 데 있다.
이런 진단은 이념적인 것일 뿐, 조선조 사회의 비합리적 권위의 현실을 간과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하면 변명이 될까. 모든 종교 혹은 이념은 위대한 천재들이 창도한다. 그들은 당대의 도덕적 지적 상황 너머에서 생기발랄한 혁명적 대안을 제출한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주변의 손가락질이나 돌팔매질을 받는다. 그 가운데 그 인격에 감화된 몇몇 제자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학파 혹은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집단적 노력이 시대적 여건과 요청에 습합되면 사회의 주류로 등록된다. 그렇지만 이때 창시자의 생생한 가르침은 부분적으로 또 불완전하게 구성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정착된 제도와 문화는 크고 작은 도전에 직면하여 수정되고 변모된다. 그렇지만 내외의 전면적 도전과 충격이 상층의 이념과 하층의 제도를 혁신하도록 요청하는 때가 온다. 그 응전의 르네상스에 실패하면 그 이념, 종교, 문화는 소멸한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조선조 유교는 실학을 시발로 이념의 전면적 수정을 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부의 역량은 있었으되, 대내외의 상황이 너무 급격했다. 만일, 실학이 정치사회적 르네상스로 이어질 수 있었다면 분명 그것은 정약용과 최한기의 실험처럼 원시 공맹의 자유롭고 탈권위적인 발상을 재해석하는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그 변화의 양상을 지금 대강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른바 민주주의나 자유, 인권의 화두와 깊이 결속하며 그 폐단에 대한 치유까지 도모했을지도 모른다.
코드 3 : 公과 私의 미분화
유학은 가정과 사회를 연속적으로 본다. 이 점은 유학의 본질적 발상에 속한 일이라 수정되거나 유보될 수 없다. 그 점을 《대학》의 모토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학의 이 구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대학》은 본시 주대 봉건 사회의 지배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지침서였다. 주대 봉건사회는 혈연집단이 곧 정치집단인 독특한 문화였다. 주 왕조는 王畿千里왕기천리를 빼고는 인척들에게 분봉해주고 자치를 하게 했다. 그것은 반독립적 왕국들이 혈연적 유대를 통해 정치적으로 연맹하고 있는 형태였다. 그런 점에서 〈齊家〉와 〈治國平天下〉는 동일한 지평에 있었다. 그 사회에 있어 가족은 바로 세계였다. 그 세계를 규율하는 원리가 바로 禮였다. 그것은 형벌이나 명령이 아니라 가부장적 위계와 귀족들간의 상호존중을 축으로 한 것이었다. 공자는 이 귀족적 가족의 원리가 일반 민중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하다면서 귀족적 예의 민주화 혹은 대중화를 선도했던 사람이다.
생산단위가 사회단위가 된다. 근대의 단위는 개인이지만 근대 이전의 단위는 가족이었다. 그 가족은 그러나 혈연의 일차집단의 성격과 동시에 사회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대가족은 좀 과장하자면 이익집단에 가깝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그 재화를 분배하는 경우, 갈등과 투쟁,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것은 불문가지이다. 핵가족이 아니라 사촌과 팔촌, 그리고 노복들까지 한 집안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을 원만하게 이끈다는 것은 거의 한 집단과 회사를 경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지혜와 역량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 공간이었다.
수렵과 농경 시대에 공적 영역은 마을공동체였고, 이것과 가족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생산은 주로 논밭에서 이루어졌다. 생산과 산업이 분화하고 정치적 영역이 발전 분화된 그런 시대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 가족과 향촌의 일상적 공간이 그의 생활공간의 전부다. 여기가 사회적 공간이며 경제적 공간이고 또한 정치적 공간이었다. 그 너머의 확대는 생각하지 않았어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근본없이 사회적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했다. 누군가 공자가 왜 정치적 참여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는 척, 잘난 척 하고 다니는 공자가 한 자리 하지도 못하고 다니는 것을 비꼬아 한 말일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書에 이르기를, ‘위대한 孝여! 우애가 형제에게 미치고, 그것이 정무에 뻗쳐가네’라고 했다. 이게 바로 정치하는 길이니, 어째 관직을 받고 국정에 간여하는 그런 따위를 〈정치한다〉 하겠는가.” 공자는 본말이 분명했던 사람이다.
공자는 인간사의 관계를 사적이든 공적이든 모두 정치, 즉 경영의 범주에 놓고 생각했다. 이 태도는 유교의 중심을 일상의 영역,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가정의 영역에 초점을 두게 했다. 정치적 관로에서는 물러날 수도 있고, 혹은 사회적 교유를 접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가정의 공간을 떠날 수 없다. 가정이 일차적 본질적 공간이라면, 사회는 이차적 선택적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가족과 사회는 확산적이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연속되어 있다.
이 발상은 수렵이나 농경의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에서 매우 자연스럽다. 그때 가정은 사회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지금도 원시부족의 생활을 담은 화면은 가정의 경계를 분명히 가르지 않고, 서로 공유된 삶의 폭이 넓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가정과 사회의 이분법은 생산계급과 유한계급이 분리되고, 가정과 정치가 구분된 그리스나 근대 이후 산업생산과 민주정치가 사회정치경제적 공간을 독립적으로 분화해간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다.
이 기회에 公과 私에 대한 유학의 입장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내가 구체적으로 타자와 관계맺을 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할 수 없다. 자타의 영역은 가변적으로 설정된다. 사람들은 가족을 넘어선 사회 관계를 일반적으로 타자라고 생각하지만 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나와 마주선 타자로서 나와 대립하면서 화해하고,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한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자이다. 나의 실존 속에는 낯선 타자가 나를 응시하면서 살고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함께 어깨동무를 하다가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몰아치며 비난을 퍼붓는다. 나는 내 속의 나와 일치되지 않는 거리를 숙명으로 갖고 있다.
유교와 불교는 방식은 다르지만 이 실존적 틈을 메꾸어 합치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심신의 지속적 훈련을 통해 일체감이 깊어지면, 무지로 인한 의혹과 불신이 풀려나가면서 자유와 해방의 폭이 커져간다. 유교를 위시하여, 동양적 전통은 자유와 해방을 사회적이기보다 실존적 지평에서 확인한다. 자유와 해방이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에고의 좁은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좁은 신체를 넘어서서 아내와 자식, 그리고 가족관계로 확장된다. 나아가 사회, 그리고 국가, 이윽고 전세계를 자아와 일치시킨다. 육상산은 내 마음이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내 마음이라고 했다. 불교 또한 분열된 자아와의 화해를 통한 우주적 자아의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老莊은 이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천지가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의 동포이다.” 동아시아의 유구한 전통은 자아와 타자의 이 같은 변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사고하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오직 공적 태도와 사적 태도만이 있다. 유교는 자기 자신에게 엄정한 공적 태도를 요구한다. 愼獨신독은 또 다른 자신을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주시하라는 가르침이다. 중용의 핵심은 誠이다. 이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나 속에 속이는 나와 속임받는 나, 그리고 속임을 주시하는 나가 혼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儒佛道에 등장하는 중심적 대립항들은 자기 속에 분열된 두 개의 자아를 가리킨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다. 에고와 양심으로 부르든, 본질적 자아와 비본질적 자아로 부르든, 불교식 용어로 不覺불각과 本覺본각으로 가르든, 性과 相으로 나누든 상관없다.
관계는 결국 하나이고 영역 사이에 근원적 구분은 없다. 私란 자신의 사적 이해와 개인적 충동을 구현하는 것을 말하고, 公이란 그것을 유보하고 절제하면서 공공의 선과 보편적 가치를 구현해나가려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공과 사는 영역의 구분이 아니라 규범의 범주이다. 즉, 전체 속에서 부분이 자신의 사적 욕망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공적 질서, 즉 전체의 협력과 조화를 축으로 할 것이냐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유가는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했다. 그것이 유가를 지탱해온 힘이다.
사적 경향에 대한 반발로서의 공적 가치는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그것은 소극적으로는 자기를 억제하고, 적극적으로는 타자를 실현시키는 일이다. “내가 서고 싶은 자리에 남을 세워주고, 내가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자신을 제어하는 것, 즉 〈하지 않음이 있는 것〉을 義라 하고, 타자를 실현시켜주는 것, 즉 〈함이 있는 것〉을 仁이라고 한다. 仁이 사랑의 원리로 봄바람 같은 것이라면, 義는 자기절제의 원리로 서릿발 같은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의 문화는 어느 편이냐 하면 인보다 의의 문화에 더 기울었다. 그래서 조선문화는 절제와 엄격함으로 특징지워진다. 이게 지나쳐서 탈이다. 나는 유교의 병폐로 혈연 지연 등의 연고주의보다 차라리 그 과도한 엄숙주의, 종교적 비타협주의, 비실용적 도덕지상주의를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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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중심 : 〈일상〉의 聖化
앞에서 유교에 대한 통념 몇 가지를 점검해 보았다. 가족중심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공사의 혼동 등이 유교 자체의 이념이라기보다 유교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였음을 지적했다. 애초에 그러했다면 어째서 그런 부당한 혐의에 시달리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다. 그 근본 이유는 유교의 이념적 지표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었던 데 연유한다. 즉, 가족을 중시하면서 가족의 맹목성에 빠지지 않으려 하고, 연고를 중시하면서 연고의 이기성에 빠지지 않으려 하며, 권위를 중시하면서 권위의 정통성을 지키려 하는 역동적 균형을 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과 사는 영역의 선명한 구분이 아니라, 자기 속의 동기라는 변경의 접점이었기 때문에 쉽게 모호와 기만에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논어》에서 우리는 늘 한 덕목과 다른 덕목 사이의 조정과 균형의 언사를 만난다. 그 균형을 한 인격과 사회에서 지켜나가기는 쉽지 않다. 현실은 대체로 한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그토록 미워하고 경계해 마지않는 〈似而非〉가 생긴다. 군자는 자주색을 미워한다. 자주색은 붉은 색을 혼동시키기 때문이다. 덕을 망치는 사람이 鄕愿향원, 즉 사교적이고 원만한 사람이다. 흠을 찾으면 딱히 찾을 수가 없는 두루뭉실한 그런 인물이 진정 인간과 사회의 적이다.
요컨대 유가의 이념적 균형은 현실적으로 위태롭다. 그래서 평가 또한 적실하기 어렵다. 현대 이후는 부정적 평가에 매달려 왔다. 나는 그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다른 면을 부각시켰다. 이는 유교를 부정적으로 본 바로 그 자리에 유교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된다. 내친 걸음이니 다음 한 가지만 더 살펴보고자 한다.
유교는 개인보다 관계를 중시하고, 그래서 지나치게 체면이나 인습을 중시한다는 평가가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유교는 관계를 중시하긴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관계한다. 맹자가 말했다. “스스로를 돌아보아 떳떳하면 천만인이 막아서더라도 나는 간다.” 자신과의 대면에서 떳떳한 것, 자기 속의 또 다른 자신과 갈등하지 않고, 화해한 바로 그 자리가 해방이고 구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다. “내가 仁을 원하면 仁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유학의 근본 정신은 그 도저한 내면성에 있다. 그런 점에서 지독한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獨善其身독선기신은 본질적이지만 兼善天下겸선천하는 우연적이다.
이 말이 유교가 사회적 관계를 방기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이 까다로운데 유가의 내면성은 자신 속으로 유폐되는 것을 경계한다. 유교가 불교에 가한 비판의 요점이 여기에 있다. 유교의 개인주의는 가정이나 사회와 대치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한다. 자신과만 대면하는 것은 병적 집착이고, 타자와만 관계하는 것은 소외의 징후이다. 그러므로 이들 관계는 이원화될 수 없다. 두 항은 이렇게 너무 가까이 있기에 때로 불안하고 때로 모호하다. 그렇지만 그 실제 사건과 수행의 場은 너무나 분명해서 가릴 수 없다.
나는 이곳을 〈일상〉이라는 말로 특칭하고자 한다. 유학은 자신과 그리고 구체적 타인과 관계하는 장, 그곳을 전부로 본다. 그 지평을 벗어난 의미의 공간은 없다. 그 실현에는 그의 정신과 육체가 함께 간다. 둘을 갈라보는 이분법은 인위적 분절이다. 삶의 공간, 그리고 한 인간의 세계는 그처럼 분절되지 않는다. 이를 통합적으로 성취하려는 기획이 바로 禮이다. 그것은 외면적 형식과 내면적 의도의 통일을 요청한다. 그래서 小學이다. “마당에 물을 뿌리고, 먼지를 쓸며, 어른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灑掃應待)”이 인간 교육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유학의 교과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그리고 적확하게 수행적이다.
유교의 學은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일상적 행동의 훈련이다. 그것은 이론theoria이 아니라 기술techne로서의 지식을 표명한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습득으로서 알려진다. 그것은 칠판 위의 수학적 지식이나 백과사전 속의 정보가 아니라 집을 짓는 목수의 기량이나 자동차 운전학원의 실기처럼 존재한다. 《논어》의 첫머리는 이 점을 극명하게 일러준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學은 그래서 늘 習과 연관되어 있고 그 결과로서 지식이 탄생한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맞느냐 틀리느냐의 단순한 선택지로 환원되지 않고, 하나의 기술에 얼마나 숙련되어 있느냐라는 정도, 그리고 체험을 통한 깊이를 갖고 있다. 그게 유교, 나아가서 동양적 학습의 개념이다.
근대 교육은 이 점을 망각했다. 오늘날 교실은 고전적 의미의 공부와는 까마득히 멀리 있다. 아이들은 생활의 일상적 규범을 훈도받지 않는다. 생활습관은 공부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그 자리에 기억과 추리, 그리고 정보로서의 지식이 자리잡았다. 교육은 특정한 문화와 전통의 관행을 습득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사회의 질서와 개인의 통합성은 바로 그 문화적 유산을 내면화하고 사회적 습속, 즉 禮를 습득함으로서 비로소 인격을 형성한다. 그런데 지금 전통의 예는 무너졌고, 근대가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의식과 규율도 아직 자리잡고 있지 않다.
이것이 지금의 지적 정신적 상황이다. 이제 그 禮를 어떻게 재건할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전통의 의식과 커리큘럼이 그대로 복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공자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예의 節目은 수정되어도 근본은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예의 원리는 보편적 승인을 받을 수 있는가. 폐기할 것인가, 수정할 것인가. 수정하여 적용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절목으로 구체화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교육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이다.
이 예의 기획은 통념과는 달리 그 동안 유교를 둘러싸고 있던 제반 요소를 필연적으로 요청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당이나 서원은 없어도 좋다. 동창회도 문중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세세한 예의 절목과 제도, 역사적으로 형성된 의례도 필요없다. 단 하나의 조건이라면 인간이 자신과 관계하고 타자와 관계한다는 실존적 조건 하나이다. 유교가 존재하는 곳은 일상의 공간이다. 그래서 서원이든, 사당이든 유교의 건축과 상징은 장식이 없고, 그토록 덤덤하고 간소하게 절제되어 있는 것이다. 방도 사람 한 둘 누울 정도밖에 없다. 그 빈 공간이 바로 유학이 있는 곳이다.
유학은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는 원리를 설정했다. 그것을 仁으로 불러도 좋고, 道라고 불러도 좋고 禮라고 불러도 좋고 智라고 불러도 좋다. 그것은 타자의 욕구와 충동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열린 자세로부터 출발한다. 그 훈련의 일차적 장이 바로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이다. 《논어》의 첫머리는 주지하다시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로 시작한다. 곧 이어 나오는 말이 仁, 즉 인간이 된다는 것이 孝悌로부터 출발한다는 선언이다.
가정은 험한 곳이다. 가정은 혈연적으로 운명지워진, 그래서 그 구성원들의 유대와 일체감이 〈이미 주어져 있는〉 천상의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은 자연적 혈연과 사회적 인연의 교직처로서 각 구성원들의 힘겨운 노력과 정성을 통해 관계를 맺고 의미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미래의 공간〉이다. 유학은 이 일대사의 영웅적 성취를 위한 노하우와 지침이다. 한 인간의 대사회적 관계와 성취는 여기에서 이미 결정된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서야 가야할 길이 생긴다. 孝悌, 즉 부모를 잘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사람이 되는 근본이다.”
부모를 자식처럼 받들고 모시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자연적 충동을 거스르는 인위적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형식적이어서는 안 되고 마음을 담아야 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책을 들거든 단 하나를 물어라. 여기에 마음이 담겨 있느냐. 그렇다면 펼치고, 그렇지 않다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라. 제자가 孝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요즘 말하는 효도란 다만 부모를 입히고 먹여주는 것뿐이다. 이런 봉양이야 개나 말도 한다. 삼가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짐승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효는 일방적 복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들이 아들다워야 하는 만큼, 부모는 부모다워야 한다.” 가정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호혜적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는 자신을 제어하고 자식들을 보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자식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는 그 인생 자체가 실패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로부터도 자발적 복종과 헌신을 기대할 수 없다. 이즈음 모두들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지만, 그러기 이전에 자신이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가부터 절실히 고민해야 한다. 그럴 때 자녀교육의 근본문제는 해결의 길이 보인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 기르는 법을 배우고 시집가는 여자는 없다.” 진정한 관심과 배려가 있다면,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가 하는 방도 혹은 길은 쉽게 찾아지는 법이다. 혹 어긋나더라도 전혀 엉뚱한 곳을 더듬지는 않는다.
원리는 하나다. “자신을 미루어 남을 살피는 것”, 즉 恕이다. 이것이 단 한마디로 집약한 유가의 황금률이다. 누군가가 물었다. 공자 당신은 잡다하게 아는 게 많은데 무슨 일관된 원칙이랄 게 있습니까. “내 道는 하나의 원리로 꿰고 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자 제자 하나가 부연해 주었다. 충서, 즉 자신의 에고에 유폐되지 말고 진정 타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서고 싶은 곳에 남을 세워주며” “늘 너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며” “나를 접고 너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학》에서 공자는 이를 ?矩之道혈구지도라고 했다. 《중용》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음 가운데 아직 하나도 다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기대만큼 아들 노릇을 못하고 있으며, 군주의 기대만큼 신하 노릇을 못하고 있으며, 친구의 기대만큼 신의와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
공부는 늘 가까운데서 그리고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순서가 엇갈려서는 안 된다. 가까운 것이란 이를테면 신체와 가정, 교우관계를 말하고 먼 것이란 사회와 역사, 국가 등을 말한다. 낮은 것이란 주변을 정돈하고 일상적 루틴을 가다듬어 나가는 일이고, 먼 것이란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모색하는 것을 뜻한다.
천릿길도 첫걸음부터이고,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그만큼 생활 속의 규율과 일상적 습관이 갖는 의미는 심원하고 결정적이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 나의 행동과 선택을 필요로 하는 〈아주 작은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 의미와 보람은 바로 그곳에서 창조된다. 《중용》은 그런 취지를 선명하게 전하고 있다. “중용의 도는 바로 부부에서 출발한다.” 가장 비근하고 친근한 인간관계. 속을 다 까뒤집고 있어 하나도 숨길 수 없는 바로 그런 자리가 의미가 구현되는 聖所이다.
세속 속에 성스러움이 있다. 일상이 곧 초월이다. 유학은 삶의 의미를 그 너머에서, 이를테면 절대적 타자를 향한 명상이나 자기부정, 무조건적 헌신을 기웃거리지 말라고 경계한다. 일상은 두려운 곳, 그래서 그 〈상황을 의미로 완성하는 것〉은 난사 중 난사이다. 중용은 말한다. “높은 지위와 엄청난 재산을 사양할 수도 있고, 나아가 흰 칼날을 맨발로 밟을 수는 있지만 중용을 지키기는 정말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활동의 영역과, 그 의미를 늘 바깥에서, 고원한 곳에서 찾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중용》은 그것을 경계한다. 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목표를 현실 바깥에서, 그리고 자신의 일상적 삶의 공간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索隱行怪색은행괴, 기이한 일을 찾고 우정 남과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말라.” 언제나 삶의 실제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인간의 현실은 가족과 이웃, 마을, 그리고 직장에서 그가 행해야 할 일과 규범의 한 가운데 있다. 그 일을 정성을 다해, 민첩하게 게으르지 않고 실천해 나가는 데 〈충실〉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다. 이 관계의 구체성 혹은 일상성을 유가는 고집한다. 그 일에 실패하거나 소홀하면 다른 관계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행실 하나 바로 하지 못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사회조직의 원리와 이념을 만들겠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고원한 자들, 허풍을 떠는 자들은 목표를 밖에 그리고 너무 멀리 잡고 그에 비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반성해 볼 줄 모른다. 이것이 두 가지 병폐이다. 구체적 관계에서의 훈련 없이 사회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과시와 기만, 그리고 소외를 결과할 뿐, 진정한 관계란 기대할 수 없다.
관건은 자신의 에고에 고착되지 않는 일이다. 그를 위해 자존과 겸허가 필요하다. 지위나 재산에 굴종해서도 안 되고 그것을 과시해서도 안 된다. 굴종과 과시는 소외의 다른 얼굴이다. 나는 강한 자에 굴종하는 정도로 그의 잔인성과 비겁을 가늠하는 버릇이 있다. 강한 자에게 떳떳한 품위만큼 그에 비례해서 약한 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커지게 된다. 타자를 지배하려는 욕구는 인간의 진정한 욕구가 아니다. 지난 시대의 현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눈먼 지배욕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소외시킨 결과이며, 훈련을 통해 본성이 출구를 찾을 때 화해와 인정 그리고 비폭력의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우리가 권력과 힘에 지배되는 것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역설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진정 강한 자는 자신을 지배한 자, 이웃을 위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은 외면적 가치에 대한 집착과 조바심을 덜어준다. 이때 부와 권력을 경멸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경멸은 선망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부와 권력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그 축적과 획득 과정이 정당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부귀는 누구나 바라는 바이고, 빈천은 누구나 싫어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그 길이 아닌 것으로 부귀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 길이 아닌 것으로 빈천을 면하려 하지 말라.” “부자면 부자인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문명인이라면 문명인인 대로, 야만인이라면 야만인인 대로 바로 그 처지와 상황에 맞게 자신을 지켜 나가는 것”이 中庸이다. 유학은 무턱대고 재산이나 명예, 행복 따위에 무관심하라고 권고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더 이상 〈근본적으로 중요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이 이전투구와 쳇바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세속적 가치를 괄호치고, 그 너머에 적극적으로 귀기울이는 개인적 결단과 문화적 풍토가 절실하다. 공자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남을 원망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 지상의 다툼을 줄이는 근원적 처방은 세속적 가치를 넘어서는 문화와 교육에 있다. 맹자는 부국강병의 비책을 궁금해하는 군주들에게 “하필 왈 이득이냐”고 힐난했다. 이해관계가 인간관계의 주축이 될 경우, 작게는 원망과 비방을, 크게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 잡아먹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같은 유학의 이념은 근대의 그것과는 축을 달리 한다. 근대는 권리와 권리, 자유와 자유가 대등하게 만나는 자리를 거중 조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正義가 화두의 중심에 있다. 유학은 이와는 달리 헌신과 보호, 복종과 배려가 비대칭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의 조화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禮를 통한 中和의 실현을 이상으로 했다. 이 두 기획이 바라보고 있는 자리는 겹쳐 있다. 그곳을 갈라보고 서로의 빠진 자리를 보완하여 새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유교에 대해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