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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는, 어쩌면 그 위에서 나눈 수많은 그리움과 보고픔과 시시껄렁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봉곳하게 솟아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고갯마루는 사라져도 그 정서만은 길 위에 남아 두런두런 그리움의 꽃을
피워내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고갯마루가 있어 그 추억의 꼭대기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보고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집 고갯마루에 서서
기억의 고개를
넘다
고갯마루, 그 구멍가게 / 글·장동하

그림/
은영
어린 시절 나는 눈물이 많았다. 그 눈물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집착도 컸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헤어진 뒤 한없이 그리워했다. 그날도 고갯마루에 서서 울고 있었다. 아침부터 집을 나선 어머니께서 늦도록 소식이 없던 날이었다. 분명히 맛있는
것을 사온다 하셨는데 종일 기다렸지만 결국 어머니께서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울다 지쳐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내려왔다. 여름방학이 되면 형과 나는 종종 시골 외가에 맡겨지곤 했다. 집을 떠나 당분간 새로운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설렘도 잠시, 유독 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나였기에 어머니께서는 방학 동안 우리 형제와 떨어지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쓰실
수밖에 없으셨다. 나는 다음날도 고개로 나갔다.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울어봐야 어머니께서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고갯마루 구멍가게 아주머니께서 쥐어주신 과자 한 봉지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고개와의 인연은 방학 내내 나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겨 주었다. 고갯마루에는 버스정류장이 하나 있었다. 이 동네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곳에서 내렸다. 물론 저 아래에도 정류장이 있기는 했지만 동네에 가게라고는 고갯마루에 있는
구멍가게 뿐이었기에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읍내 차부(지금의 ‘버스터미널’을 어른들께서는 꼭 이렇게
부르셨다)에 가게들이 더 많았지만 사람들은 꼭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랜만에 고향에 왔다고 신고라도 하듯 반드시 그 가게를 들르곤
했다. 어르신들도 자식들이 올 무렵이면 늘 차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그곳을 서성이고 계셨다. 도시에서 출세한 자식을 동네 어귀부터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셨을 게다. 사람들이 마을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향 부모님께서 바리바리 싸주신 채소며, 장이며 모든 것을 들고
고갯마루까지 올라와서 버스를 탔다. 물론 떠나는 사람이야 아무 곳에서나 버스를 타면 그만일 것이요, 무거운 짐들을 이고 지고 고갯마루까지
올라오기가 귀찮을 수도 있지만 그들을 보내는 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어르신들이 떠나는 자녀와 손자들을 배웅하는 장소는 반드시
고갯마루여야 했다. 손에 과자 봉지라도 쥐어주시고 손자, 손녀들이 탄 버스가 아스라이 사라질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면서 하루 이틀이 지났고 방학이 끝날 즈음, 나 또한 어머니께서 우리 형제를
데리러 오시는 날 아침부터 고갯마루를 서성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 곧이어 닥친 외가 식구들과 헤어짐에 나는 고갯마루에 서
계시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들, 그리고 바둑이까지, 그들의 모습이 버스 창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또 하염없이 눈물지어야
했다. 그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길은 사람 사이에 오가는 사랑뿐이었다. 어쩌면 그때 고개에서 내가
느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눈물과 그리움이 나를 시인으로 키워줬는지도 모른다.
복수동 고개 끝 자취방
/ 글·강은미
 작은 읍이었고 읍에서도 이십 분은 떨어진 우리 집은 신작로가 보이는 한적한 곳에
있었다. 4일 9일 장이 서면 물건을 팔러가는 이와 사러가는 이로 길이 비어있을 새가 없었다. 처녀들 사이에서 ‘이곳으로 시집 못 간 내
팔자야.’라는 노래까지 불렸다니 그 빈번함을 다시 무엇하러 새기리. 서해 바닷물건의 집산지, 충남 광천읍. 부두와 읍까지 신작로로 이어진
읍내에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고개다운 고개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고개’보다는 차라리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기차를 사라지게 하는
‘모퉁이’가 내겐 더 익숙하달까.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닷물이 들어차면 건너기가 불안했던 하천의 건넛마을 ‘저녁노을’이 더
익숙하고, 하루의 마지막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갈 때면 무궁하게 펼쳐지던, 그러나 실제로는 시골의 초등학교 운동장이 전부였던 ‘지평선’이 더
익숙하다. 내 기억이 문맥을 잃지 않고 남과 비슷하게 기억하며 어렴풋이 일관성을 알아차릴 무렵이었던 중학교 2학년 때 드디어 나는
어머니가 엄중히 주관하는 몇 가지 행사에 참관할 수 있게 되었다, 제사음식, 명절음식 만들기, 포도주 담그기, 정월 보름이면 열리던 당골네의 경
읽기 구경. 지치지 않는 날들, 평이한 시간들이었다.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결정한 뒤 나는 이 모든 것을 떠나야 했다. 가면 무엇을
하리라 결심한 바도 없이 나는 가족, 깨끗한 새 집, 입에 맞는 저녁, 한밤중이면 반지하 연탄보일러실에서 열리곤 하던 간식시간과도 결별하기로 한
것이다.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지만 말리지도 않았다. 원서를 쓰고 수험표를 받아들고 처마 낮은 한 여관에서 인솔교사, 친구들과 숙식하며 하루 밤낮
시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대전으로 가는 짐을 쌌다. 어머니는 그때 첫 바깥 나들이길에 동행했다. 학교 근처 복수동 고개
끝에 자취방을 정하고 교복과 외투를 사고 책상, 쌀, 그리고 자잘한 살림가지를 산 뒤 논길 끝에 있는 복수동 고개를 넘었다. 전화국에 들러
시외전화하는 법도 가르쳐주고, 김치찌개 끓이는 법, 들깨 볶는 법, 계란부침 하는 법, 연탄 가는 법, 물을 데워 쓰는 법, 와이셔츠 다리는
법도 가르쳐주셨다. 방문을 열면 낮은 담 너머 까마득한 길가에 들어찬 집들이 보였다. 불을 켜고 바깥 살림살이를 가지러 나왔다 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이 밟고 지나가는 세수한 어린애 얼굴 같은 길보다 낮은 마당들. 시멘트를 부어 만든 길가에 연탄재가 얼어 있고 어린 아이들은
펑퍼짐한 고갯마루 가로등 아래 공을 차고 놀았다. 나는 처음으로 외지, 찬기가 가시지 않은 낯설고 좁은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딸의
대전살이 준비를 마치신 어머니가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가방을 들고 자취방 문을 나섰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서 있는 ‘고개’를
보았다. 자취방을 담고 있는 대문을 쿵 닫았을 때, 쿵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자박자박 발걸음 멀어지실 때, 어머니 등 뒤에 서 있던 내가
복수동 고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빈 목이 섬뜩해지도록 찬바람이 불었다. 한 번 뒤를 돌아보고 손을 저어
들어가라 해놓고는 고개 아래로 총총히 사라지시던 분. 지금 내가 아주 조금씩 겪으며 알아가듯 이 모든 일을 치러낸 어머니는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한 수없는 고개를 날마다 넘었는지도 모른다. 슈퍼마켓에서 포도주를 고를 때, 깨끗한 세탁물을 찾아올 때, 목욕탕 수리로 쩔쩔맬 때,
생각해 본다. 복수동 그 아득한 고갯마루에 있던 어머니의 딸은 어머니 나이가 되도록 무얼 배웠나. 찻상 앞에 앉아 콩을 고르고 있는, 저렇게
작고 잔잔하게 나이가 든 어머니는 도대체 어떤 고개를 얼마나 건너온 걸까.
토끼 눈이 와 그래 빨간 줄
아나? / 글·전건우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와 마을을 향해 나 있는 좁은 논두렁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고갯마루를 만나게 된다. 그 아이와 나는 종종 그 길을 함께 걸었다. 그 아이는 부반장이었고, 나는 반장이었다.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모두
운동장에 세워 놓고 국민체조를 시켜 봐야 채 삼백 명이 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 그런 학교의 육학년 반장과 부반장은 유독 할 일이 많았다.
일학년 코흘리개들의 이름표 만들기나 토끼장 치우기, 그리고 환경미화 같은 일들을 우리는 함께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학교는 텅 비어 오후의
게으른 햇살 몇 점만이 걸상에서 꾸벅꾸벅 졸곤 했다. 그 아이와 나는 낡고 삐걱거리는 그네와 토끼와 햇살들을 뒤로하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한
손엔 신발주머니가 팔랑거리고 가방 안에서는 빈 도시락이 달그락달그락 장단을 맞추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늘 고갯마루가
있었다. 고갯마루는 이제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그 아이의 작은 가슴처럼 봉곳했다. 그곳에는 우리 허리만큼이나 긴 강아지풀과 크고 우렁찬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들 사이로 몇 가닥의 바람이 불면 이제 막 가슴이 자라기 시작한 계집애와 이제 막 수염이 돋기 시작한 사내놈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고갯마루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 아이의 집과 우리집은 반대편이었다. 함께 걷던 두 마음이 서로 다른 길로 접어들어야 했던 그
지점에서 우리는 강아지풀을 뜯거나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헤어짐의 시간을 뒤로 미루곤 했다. 그런 때면 그 아이와 나는 여러 이야기를 했다.
“토끼 눈이 와 그래 빨간지 아나?” “아니, 몰라. 니는 아나?” “내도 모르겠다.”
정말로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감정이 그토록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눈부시게 하는지. 그 좁은 고갯마루에 머뭇거림의 발자국을 수없이 찍게
하는지. 내일 또 만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나온 논두렁길을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지, 그때의 나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 아이와 나는 수도 없이 고갯마루에 올랐고, 토끼 눈이 빨간 이유를 끝내 몰랐으며, 나는 한 번도 그 아이가 사는 마을로 내려가 보지
않았다. 사랑은, 고갯마루 어디쯤에서 말없이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작년 여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마을을 다시 찾았다. 하루에 한두 대 마을버스가 다니던 게 고작이었던 마을엔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밥풀처럼 작던
학교도 번듯한 신식 건물로 바뀌었고 논은 대부분 아파트 건립 예정지라는 팻말이 붙은 채 공터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흔하디흔한 신파 영화 한
장면처럼 그 아이와 내 추억이 강아지풀처럼 길고 수줍게 자랐던 그 고갯마루는 평평한 아스팔트길로 변해 있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그 맵시 없는
길을 보며 이제는 사라진 고갯마루를 생각했다. 그 아이의 마을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바라보며 그 아이가 사는 ‘세계’로 달음질치고 싶었던 그
시절을 생각했다. 나는 까닭 없이 슬펐다. 그 아이 이름이 더는 생각나지 않았던 어느 날처럼, 그렇게 슬펐다. 그때였다. 손을 꼭 잡은 두
아이가 내 곁을 달려간다. 1학년이나 2학년쯤 되었을까? 자기보다 큰 가방을 멘 남자애와 여자애는 평평하게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두 갈래인 그
길에서 긴 이야기를 나눴다. 만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시시껄렁하고 사소한, 하지만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에는 더없이 빛나고 중요한 이야기들이었다.
슬픔도 잠시,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갯마루는, 어쩌면 그 위에서 나눈 수많은 그리움과 보고픔과 시시껄렁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봉곳하게 솟아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고갯마루는 사라져도 그 정서만은 길 위에 남아 두런두런 그리움의 꽃을 피워내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고갯마루가 있어 그 추억의 꼭대기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보고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옛날 그 아이와
나만의 고갯마루가 있던 것처럼 말이다.
장동하 님은 평생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 젊은 시인이다. 공군 장교이면서 시와 명상 글을 연재하며 장병들의 지친 하루에 따스한 기운을 불어 넣고 있다.
강은미
님은 시를 사랑하며 삶이 묻어나는 글을 쓰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들에게 한국역사를 통해서 생각 있는 글쓰기를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전건우 님은 몽상가라는 이름으로 한 줌의 글과 사랑을 전하는 시골 청년이다. 천성산이 있는 양산시 웅상읍 어느 고개
아래가 고향이다.
은영 님은 새만금과 천성산에서 만난 벗들과 함께 작은 생명들과 마주하며 그림 그리고 만드는 일이 마냥
신나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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