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골육살상의 쟁탈전 끝에 마침내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재위 중에는 놀라울 만큼 선정을 베풀고 갖가지 치적을 거두어, 건국 초의 국가를 확립해 놓은 명군이었다. 그는 끔찍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던 이로서, 종로 네거리에 신문고 를 매달아 놓고, 백성들이 마음대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느 때는 그가 메뚜기를 잡아오라 하여, 그 중에 큰 놈 한 마리를 골라 가지고,
"네가 곡식을 먹어 백성을 괴롭히니, 차라리 내 오장을 긁어 먹어라."
하고는 산 채로 집어 삼켰다. 그것을 본 좌우 제신들이 대경실색하였으나, 마침내 무사하였는데 당시 조선 팔도 안에 극성을 부리던 메뚜기들이 그로 인하여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사원의 중들이 부패하였음을 개탄하여 무위도식하는 여러 중들을 환속시켰으며, 흉년에는 술을 빚지 말라 하고 자신이 술을 끊었으므로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그는 제위 18년 만에 세종에게 전위하고, 상왕으로 있기 3년 째인 춘추 56세에 승하하였다.
그가 승하할때, 날이 몹시 가물어서 백성들이 애타가 비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죽으면 상제께 아뢰어서 비를 얻어 보내리라."
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과연 그날 밤에 비가 왔으므로, 사람들은 그 비를 가르켜 태종우(太宗雨)라고 이름 지었다.
지금도 음력 유월 초 열흘이면 이 태종우가 내린다.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
세종 대왕에 대한 일화는 상당히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에는 나와 있지 않군요..^-^; 제가 아는 일화를 적어보겠습니다.
세종이 어느날 밤에 궁궐을 거닐다 밤 늦도록 책을 읽고있는 관리를 보고 그가 잠들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이 입고 있었던 외투(?)를 벗어 덮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관리가 그유명한 집현전 학사가 되고 이후 조선 명신이 되는 신숙주였다네요..
음악에 관심이 높았던 세종이 편종 제작하는것을 보던중 한번은 신하가 이 편종 한틀을 만들어 세종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세종께서는 그 중의 어느 음이 높이가 아주 조금 높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신하가 그 음을 내는 돌을 자세히 살피니 석공이 돌을 덜 깎아내어 아직 돌에 깎아내도록 지정해준 먹줄의 흔적이 남아 있는걸 보고 먹줄을 다시 깎아낸 후에 연주를 하니 음높이가 정확히 들어 맞았다고합니다 . 세종의 음악적인 귀가 그만큼 밝았음을 알려주는 일화로 볼수 있겠네요
조선 7대 임금 세조
묘답(猫畓)
고양이를 위하여 제사를 지낸다 하면 누가나 다 웃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양이에게 제사지내기 위하여 묘답 5백 석지기를 월정사에 바친 이가 있으니, 그가 다른 사람 아닌 세조 그였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이인데, 그는 임금이 된지 몇 해 후부터 차츰 전신에 종기가 퍼지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말인즉, 그가 단종을 죽이기 전날 밤 꿈에 형수인 형덕왕후(단종의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서 무수히 꾸짖고 욕하던 끝에 그에게 침을 뱉었는데, 그 꿈에 침을 맞은 자리에서 부터 종기가 발창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세조는 그 종기를 고치려고 무진 애를 쓰며 온갖약을 다 썼고 심지어는 무당 굿풀이까지 하였으나 종시 낫지 아니하여 마침내 명산 대찰을 찾아다니며, 산천 기도와 불전공양을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어느 해 여름, 오대산 상원사로 행차하였을 때의 일이다. 시원한 숲 속을 흐르는 시냇물에 목욕도 하고 영험 깊은 불전에 기도를 드르기도 하면서, 그는 거기서 아내인 정희왕후와 함계 피서 겸 요양차 한 여름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하루에도 몇백 몇 천 번씩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등을 염하곤 하였다.
하루는 그가 곤룡표 익선관으로 위의를 정제하고 기도를 드리려고 막 법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순간웬일인지 갑자기 머리가 쭈삣해지며 공포의 기분에 휩싸여 들었다. 그는 그대로 법당안에 들어서기가 서먹서먹하여, 주춤하고 섰을 때 어디서인지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늘어 지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곤룡포 자락을 잡아 떨치면서
"이 놈의 고양이가...."
하고 쫓았다. 그러나 고양이는 피하려 하기는 고사하고 더욱 악착같이 달려들며
"야옹 야옹..."
하고 쫓았다. 그러나 고양이는 피하려 하기는 고사하고 더욱 악착 같이 달려들며,
"야옹 야옹..."
하고, 왕의 옷자락을 물어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
세조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머리속을 스치어 지나갔다. 분명히 무슨 곡절이 있는 일 아닌가 생각한 그는,
"어허!"
하고,고양이를 피하여 물러섰다. 그리고는 시위 군사에게 명하여 법당 안을 샅샅히 뒤져보라 하였다.
이윽고 아니나 다를까, 법당 불탑 아래 세 명의 도부수가 시퍼런 칼을 빼어들고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군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잡아내어 문초해 보니 그들은 단종을 위하여 세조를 암살하려는 일당들이었다.
이리하여 세조는 하마터면 죽을 뻔한 목숨을 고양이 덕으로 구제 받았으므로,이미 어디로 사라져 버린 그 고양이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해 마지 않았다.
그는 불공을 마치고 회정할 때에, 강릉에서도 가장 기름진 땅으로 5백 석지기를 장만케 하여 그 고양이를 위하여 제사지내 주도록 절에 헌납하였던 것이다. 이 묘답은 지금도 월정사 상원암에 가면 남아 있다 한다.
조선 9대 임금 성종
관리의 도리(吏道)
성종 때, 중앙의 어느 고위 관원이 왕명을 받들고 지방에 내러 갔다가, 비단 열 필을 뇌물로 받고 잘못된 일을 남몰래 숨겨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그가 일을 다 마치고 미처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뇌물을 수리한 소문이 퍼져서 마침내 임금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런 줄을 모르는 관원은 돌아와서 성종 앞에 왜곡된 복명을 하게 되었다. 왕은 시치미를 뚝 떼고 그를 조용히 편전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는,
"요번 일에 그대가 매우 수고 했을 줄 믿으오 들으니 그대는 이 물건을 매우좋아한다기로 내 상급으로 주는 것이오."
하며 비단 열 필을 내놓았다. 관원은 그제야 뇌물 받은 사실이 탄로났음을 깨닫고, 머리를 조아리며 죽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죄는 깨달았으면 다시는 범하지 않으면 되지 않소."
하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또 어떤 재상은, 자기의 척속되는 사람이 해변가 어느 고을 수령으로 내려가 있는데, 하루는 그에게서 민어와 석어 몇 마리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재상은 그것이 뇌물이 될까 크게 겁내어, 그 생선을 조회 때 가지고 들어와서 탑전에 내어놓고 사실을 아뢰었다.
"신의 척분되는 아무 고을 수령이, 신의 노모가 생선을 좋아하신다고 듣고 찬수에 쓰라고 보내 왔기에 이 물건을 받았나이다."
그 말을 들은 임금 성정은 빙그레 웃으며,
"그거야 정으로 보내온 예물이거늘, 받은들 어떻겠소. 예와 뇌물은 다른 것이요"
하였다.
사실 성종 당시는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하여 가장 관리의 도리가 바로잡혔던 때였다. 사사로운 정으로 공사를 그르치는 일이라 든가,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기는 따위의 왜곡된 관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