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인간의 존재가치는 이 지구보다 무겁다. 아니 우주만큼이나 크다. 그 무엇도 인간 자신의 가치보다 우선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그 피값으로 사신 목숨이며 인생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속이는가? 오늘의 우리 개개인의 존재가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멀리 있지 않다.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바쁘다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게 살아간다. | |
H씨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뚜렷한 성과 없이 그만그만한 실적으로 겨우 회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일상은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서둘러 출근한 후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과 현장을 오고 가는 반복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사업이 잘 되지도 않건만 다소 큰 사무실과 직원 수를 유지하기에, 매달 직원들 월급과 운영자금 걱정하면서 그 자신 또한 2~3인 이상의 업무를 감당했다. 뚜렷한 대안이나 해결책도 없이 바쁜 업무와 만성피로에 짓눌린 생활이었지만, 열심히 일을 한다는 그 한가지 사실이 그에게 위안을 주며 그러한 어려움들을 잊게 했다. 어쩌면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의 여러 가지 삶의 질고를 잊게 만드는 큰 방편이 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그의 정체성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의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했다.
유명전자회사의 신상품 개발팀장인 K씨는 새제품을 타 회사보다 일찍 시장에 내어 놓기 위해 늘 낮과 밤이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며 보수도 남 부럽지 않게 주는 넉넉한 직장생활이었기에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어느덧 분주한 생활이 몸에 배여 버린 그는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냈다. 휴일도 별로 가지지 못한 채 연속되는 출장과 다양한 프로젝트 수행으로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과의 편한 시간을 가진 때가 기억 속에 가물가물했다. 그의 팀원들은 그의 업무 스타일을 좇아 그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고 늦은 밤에 자주 갖는 팀원들간의 소주한잔 속의 대화가 그들에겐 잠시 해방된 시간이었다. 그들과 협력관계에 있는 회사들이나 하청업체도 그들의 패턴에 맞춰져, 휴일이나 늦은 저녁 시간 관계없이 그들과 업무 공조를 맞추며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의 생활패턴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위 사람들에게 복제시키고 있었다.
분주하게 일을 하는 그들에게 오늘이란 늘 바쁜 가운데 사는 정신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재정적인 궁핍함에 시달리거나 혹은 업무의 고달픔에 무감각하게 짓눌리거나 두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쉼표와 여유였다. 내일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지 몰라도, 적어도 오늘의 생활이 무채색인 것은 분명했다. 세속적인 쾌락이나 유흥으로 낭비되는 인생은 분명 아니었지만, 또 다른 그 무엇인가가 그들의 삶을 은근히 기만하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생활의 기쁨이나 환한 웃음의 시간은 무엇으로 시작될까? 주변의 친한 사람들 중에 그들의 분주함과 틀에 박힌 생활을 보고 무심코 던지는 말 중에 가장 흔한 것이 하나 있었다…."왜 사는데?…"
사람들을 미혹하는 우상은 결코 먼데 있지 않다. 그것은 꼭 물질적인 형상을 취할 필요도 없다. 쾌락적인 욕망의 모습을 띄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이나 색다른 모습일 필요도 없을 수 있다.
논어의 '선진편(先進篇)'에 보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나온다. 너무 지나친 것은 조금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정도를 넘어서는 것은 약간 미진한 것보다 못하다는 지혜의 말이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들은 어느덧 우리의 우상이 되고 만다. 그것이 재물이거나 혹은 사람이거나, 자신의 욕망이거나, 사회의 가치관이거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목표이든지 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흐트리며 인생을 몰아 붙이는 것들은 이미 우리 삶의 우상이 되고 목적같이 되어버린다.
한 인간의 존재가치는 이 지구보다 무겁다. 아니 우주만큼이나 크다. 그 무엇도 인간 자신의 가치보다 우선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그 피값으로 사신 목숨이며 인생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속이는가? 오늘의 우리 개개인의 존재가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멀리 있지 않다.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바쁘다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게 살아간다.
현대인들 모두는 먹고 마시고 일하고 노는 그 모든 것을 바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바쁠까?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바쁜 것이다. 심지어 쉬러 여행을 가서도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한다. 일의 목적이 모호하게 변형되어 버리고 주객이 전도 되어 결국은 무엇이 우선되는지도 잊어 버리고 만다. 앞서 예로 든 두 사람의 경우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우리들의 모습이지는 않는지? 일이라는 것은 응당 올바른 삶의 필수요소이지만, 사람들은 일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에 끌려가는 자신을 방임하다 결국 일이 자신을 주장하게 놓아둔다. 일은 마땅히 프로의식을 가지고 진실되이 수행해야 하는 진지한 것이지만 일이 삶의 목적이 되고 그 일을 위한 삶의 패턴이 정형화 되면 우리의 사고(思考)는 자유를 잃어버리기 쉽다. 매몰되어 가는 현실 속에 느리게 반응하거나 무덤덤하게 굳은살이 배이기 쉽거나 혹은 공허의 늪에 빠질 수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더 심한 모습으로…
현재 우리가 수고하고 행하는 그 모든 일들이 혹시 목적을 잊고 방향을 잃은 것인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그 목적에 맞는 분명함이 있어야 한다. 혹 우리를 바쁘게 하는 그것들이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하고 귀중히 여겨야 할 본체를 잊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삶의 중심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이 구절에서 말하는 곤고한 날이란 사람이 세상의 모든 일과 수고와 쾌락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자각의 날을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의 결국은 공허다. 삶의 의미는 창조주와의 동행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고 우리의 인생을 분주하게 만드는 것들은 유감스럽게도 우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방해하는 것들 또한 우상이 될 수 있다. 창조주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그 모든 것들은 우상이 될 수 있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로 사람들을 그럴 듯 하게 속인다. 쾌락이든, 재물이든, 일이나 야망이거나 혹 그 어떤 무엇이든…
당신은 어디로부터 와서 이 땅에 삶을 영위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열심히 사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그 대답의 처음은 여기서 출발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 | |
첫댓글 맞습니다 맞고요 우리의 처음과 시작은 예수님이란 사실을 잊지 않아야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