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자치주는 면적 4만 3547㎢, 인구 219만 5000명(1998)이다. 주도(州都)는 옌지시[延吉市]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옌지[延吉]·투먼[圖們]·둔화[敦化]·허룽[和龍]·룽징[龍井]·훈춘[琿春]의 6개 시와 왕칭[汪淸]·안투[安圖] 2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조선족이 41%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한족(漢族)·만주족(滿州族)·후이족[回族]의 순이다.
지린성 동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헤이룽장성[黑龍江省]과 접한다. 창바이산맥[長白山脈]과 라오예링산맥[老爺嶺山脈] 경내로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옌지분지가 펼쳐진다. 이 때문에 해발고도 500∼1,000m 지점이 많다. 이 산지에서 흘러 나오는 하천은 둥베이수계[東北水系]의 근원이 된다.
주요 하천으로는 투먼강·쑹화강[松花江]·무단강[牡丹江]·쑤이펀강[綏芬江] 등이 있다. 투먼강 유역에 있는 중국의 국제개발지인 훈춘경제개발지를 ‘동북아 금삼각주(東北亞金三角州)’라고 부른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나 변화가 잦고, 강수량은 산지가 많기 때문에 하천의 수량이 풍부하다. 연평균기온 2∼6℃, 1월 평균기온 -14.1℃, 7월 평균기온 21.6℃, 연평균강수량은 500∼700mm이다. 농업은 주로 곡저평지(谷底平地)에서 이루어지며, 쌀·콩·조 등의 곡물을 생산한다. 특히 벼농사는 한국인이 이주한 뒤에 발달하였으며, 9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또 잎담배는 지린성 생산량의 4분의 5를 생산하며, 그밖에 특산물인 인삼과 과일도 많이 난다.
산지에는 삼림이 우거져 중국의 중요한 임업지대를 이룬다. 투먼·둔화·다스터우[大石頭]에 3대 제재소가 있으며, 그밖의 여러 곳에서 목재공업이 이루어진다. 또 이 목재를 원료로 하는 제지공장이 투먼·스옌[石硯]·카이산툰[開山屯] 등에 산재한다.
동부에는 각종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며, 그 중 허룽과 훈춘의 석탄, 왕칭의 오일셰일(유혈암), 톈바오산[天寶山]의 구리·납, 훈춘의 금 채굴이 손꼽힌다. 공업으로는 농업기계·철강·정유·전자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지며, 공장은 옌지 등의 시 지역에 분포한다.
교통은 창춘[長春]·지린·투먼을 잇는 창투철도[長圖鐵道]가 지역안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옌지에서 허룽과 카이산툰으로 지선(支線)이 분기한다. 또 투먼에서 무단강과 함경북도 온성(穩城)으로 통하는 무투철도[牡圖鐵道]가 갈라진다. 도로는 철도를 따라 뻗어 있는데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항공편으로는 옌지공항이 있는데, 국내선으로는 베이징·창춘·선양까지 운항하고, 국제선으로는 한국 부산까지 운항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므로 청산리항일전승지(靑山里抗日戰勝地)·봉오동(鳳梧洞)항일전승지·일송정(一松亭) 등 유적지가 많다. 그밖에 백두산천지·정줴사[正覺寺]·전샤오공주묘 [眞孝公主墓]·룽후석조각[龍虎石刻]·이커당아비[依克唐阿碑]·시구청[西古城]·아오둥청[敖東城]·바롄청[八連城] 등의 고대유적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연변대학·연변의과학원·연변사범대학·연변예술학원·농업학원 등이 있다.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삼성(三省)과 그 밖의 중국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족(韓族)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들을 말한다.
한말(韓末)에 외세의 침노로 한국의 국권이 흔들리면서 나라 안팎이 어지러워지자,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둥베이 지방과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이주해 가는 한국교포의 수가 갑자기 늘어났다. 이 유민(流民)의 행렬은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면서 더욱 늘어났다. 게다가 토지조사 등의 명목으로 일제가 한국인의 농토를 잠식하고 강제수탈하자 땅을 잃은 농민과 생업을 상실한 유랑민은 더욱 그 수효가 늘어나서 전국에서 만주(滿洲)로 흘러 들어갔다.
이 유민의 대열에는 조국 광복과 국권회복을 다짐하며, 독립투쟁을 하기 위하여 조국으로부터 망명해 가는 독립운동가도 많았다. 여러 경로로 만주땅에 흘러든 이들 한교(韓僑)들은, 거기에서 불모지를 개간하고 산림을 개척하여 어렵게 생활 터전을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해서 마련된 한인 마을에는 독립군이 뿌리를 내리었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교민들의 개간생활과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투쟁이 연계를 이루고 어울려 이어져 갔다.
일제에 의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만주가 더욱 개척되면서 한국인의 이주는 더더욱 활발해졌다. 한국에서 나는 쌀 약 1,500만 섬 중 1,000만 섬 이상을 일제가 수탈해 가니, 절량(絶量)에 허덕이는 한국 농민은 개간할 황무지가 있는 만주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8·15광복으로 일제가 패망하였을 때에는 본국에 생활근거가 없는 조선인이, 조국 귀환을 못하고 만주에 무수히 처져 남게 되었다. 이들이 조선족의 1세대요 거기서 난 자손이 2세대들이 되었다.
게다가 조국이 3·8선 때문에 남북으로 갈리고, 이념과 체제가 다른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자, 조선족의 일부는 중국정권과 밀착된 북한으로 들어갔고, 상당수의 조선족은 그대로 둥베이 지방을 비롯한 중국땅에 처져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해오고 있다. 현재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을 포함한 약 200만 정도로 추산되는 조선족은 국적이 중국인이므로 모국에의 귀환이 성사되기 어려운 현상황에서는 중국땅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서 그곳에 착실하게 정착해 가는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 상태로 나날이 중국화되어 가고 있다.
1820년 12월 22일 북태평양의 작은 무인도.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에 부딪쳐 조난당한 포경선(고래잡이 배) 에식스호의 선원들은 33일 동안 표류 끝에 섬에 도착했다. 먹을 걸 찾아 헤매던 그들은 유난히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큰 매가 작은 몸집의 열대조(熱帶鳥)를 '등 쳐먹는' 희한한 장면을 보게 된다.
매는 열대조의 둥지 주위를 맴돌다 새끼에게 먹일 물고기를 물고 오는 어미 열대조의 등을 부리로 쪼아 물고기를 게우게 한 뒤 이를 가로챘다. 새끼를 굶길 수 없는 열대조는 다시 물고기를 사냥해올 수밖에 없었고 그 때마다 매는 같은 수법으로 먹이를 빼앗아갔다. 이는 허먼 멜빌의 인기 소설 『백경』의 모델이 됐던 에식스호 조난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열대조의 모성(母性)을 악용하는 무인도의 매처럼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을 잡아 중국동포의 인권을 유린하고 착취하는 일부 내국인들의 몰상식한 행위가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밀입국 등을 통해 외국인 근로자가 국내로 몰려드는 상황에 편승해 이런 범죄가 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아 중국동포들 사이에 원성이 점점 높아지는 형국이다.
올해 6월 말 현재 국내에 불법 체류 중인 중국동포는 6만2천여명으로, 1999년의 꼭 두 배 규모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임금체불이나 폭행.사기.성적 학대 등 갖가지 유형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동포를 돕는 서울 한 교회의 상담 창구에는 최근 1년간 3백여건의 피해 사례가 접수됐다. 한 시민단체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내국인의 야비한 행위를 고발하는 글이 연일 오르고 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외국인 고충상담실에는 올 들어 6월까지 약 6백건의 민원이 접수됐다.
사회단체나 정부기관에 접수되는 사례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불법 체류자로 신고하겠다" 는 협박에 1년 동안 일하고도 봉급을 거의 받지 못하고 쫓겨났거나, 신분증을 압류당한 채 반(半) 감금 상태에서 중(重)노동을 강요당했는가 하면, 직장 상사로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한 뒤 해고까지 됐다고 한다.
이런 인권 침해를 방치할 경우 불법체류자들이 국내에서 사회불만 세력으로 등장하거나,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 반한(反韓)감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난 9일 서울 한복판에서 중국동포 1백여 명이 "강제 추방을 중단하고 인권 침해 실태를 시정하라" 고 요구하며 집단 농성을 벌여 관계당국을 당황하게 했다. 지난달 말 불법체류자에 대한 집중단속 때 추방돼 중국으로 되돌아간 청년들이 우리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고 한국인을 원망하면서 반한 단체를 조직하려 든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불법 체류자를 너무 관대하게 처리해주면 불법 밀입국이 크게 늘어나 사회나 경제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엄정히 법을 집행할 수밖에 없다" 는 정부 당국의 견해에도 분명 일리는 있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를 단호하게 관리.단속하는 것과는 별개로 기본적인 인권만큼은 철저히 보장해줘야 마땅하다. 이는 2백년 가까이 중국 땅에 살면서도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간직해온 중국동포들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이기도 하다.
정부는 앞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개인이나 회사를 엄하게 처벌하고, 불법 체류자를 단속.추방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인권침해 요소를 과감히 제거해야 할 것이다. 강제 추방의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도록 정부와 종교.시민단체가 손 잡고 신고 창구를 개설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년 전 "중국동포를 우리 민족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 천명한 바 있다. 이 발언이 인권 대통령임을 홍보하기 위한 구두선(口頭禪)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현재 법무부와 정치권에서 중국동포의 인권을 보호하고 불안정한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왔으면 한다.
목전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분포는 역사적으로 형성된것이며 19세기중엽부터 시작된 몇차례 조선족 대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언제부터 이동하기 시작했는가, 어떤 시대배경과 사회원인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연구하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 동북아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보면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개 단계를 거쳤다. 제1단계는 19세기중엽으로부터 1910년 《한일합병》까지로서 조선족은 주로 중국 동북으로 이사왔다. 제2단계는 《일한합병》으로부터 1931년의 《9.18》만주사변 전야까지이고, 제3단계는 《9.18》만주사변으로부터 1945년 제2차대전 종말까지로서 동북아지역의 조선족분포가 거의 형성되였다.
제1단계 조선족의 이동과 우리나라 동북에 분포된 상황을 보면 1906년까지 조선족은 서쪽의 안동, 흥경(興京), 류하로부터 돈화 일선의 남부지역에 국한되여 있어 서북쪽으로는 휘발하(煇發河), 동쪽으로는 녕고탑(寧古塔)과 목릉하(穆稜河) 일선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에는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로야령(勞爺岺)을 넘어 목단강연안과 삼성(三姓)지방 즉 동북경내지로 점차 이주해들어갔다. 그리하여 동북에 이주해온 조선족인수가 부쩍 늘어났다. 1894년까지만 해도 도합 7만 8,000인이던 조선족인구가 1910년에는 10만 9,000인으로 늘어났다.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1904년의 5만여으로부터 1909년의 18만 4,867인으로 늘어나 당지의 만족, 한족을 초과했다.
한일합병으로 망국 노의 운명을 벗기 위해 대량의 조선인민들이 다투어 동북아 여러 나라로 이주해갔다. 이는 조선족이 동북아 여러나라로 이주해간 제2단계이다. 이시기는 주로 정치원인으로 하여 이주해갔다. 조선 족은 그냥 우리나라 동북으로 이주해오는 동시에 다른 나라로 이주해가기 시작했다. 특히는 1919년 《3.1》운동 후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군과 반일군중들이 동북으로 흘러 들었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발동, 동북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을 침략전쟁의 공고한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1936년 4월 20년사이 100만호 500만인 일본이민을 이민하려는 이민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파산된 농민을 강압하여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또 《만족 조선 적개 척주식 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이민사업을 관리, 사후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 족의 《이민과》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구가 희소한 흑룡강성 북부는 일본이 강제이민을 실행한 주요지역의 하나이다. 1940년 한번에 눈가,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조선 족만도 2,810호나 된다. 1941년이후 일본식민당국은 강북지역의 신이 민지들을 《이민 개척 단》으로 만들어 북만주와 내몽고 지역에로 내몰아 논을 만들게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동북으로 강제이민은 조선의 가난한 농민이 3만 856호에 14만 7,744인 된다. 일본의 강제이민으로 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 족인가는 날로 늘어났다. 1945년에는 216만 3,015인으로 껑충 올라 1932년의 67만 2,649인에 비해 2.2배 늘어났다.
이 시기 일본의 강제이민때문 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7.7》사변전야에 만주 관내로 들어온 약 3만여명 조선 족들은 다수가 반일장병들과 각종 혁명조직 혹은 군중단체의 책임자이다. 또 장사군도 있고 다른 원인으로 하여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들은 화북, 화중, 화남 등 지역에 분포되 여 있었다. 명년간 급격히 늘어나 1945년까지 우리나라 관내 조선족이 10여만인에 달하였는데 그중 화북지구에 좀 많았다. 재일 조선 족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기간 일본에 《강제징용》되여 간 노역 자들이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숫자에 따르면 침략전쟁 발동이래 일본식민당국에 끌려 참군 한 조선 인은 36만 4,000여인으로서 그중 태평양전쟁시기(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참군 한 사람만 해도 11만 6,294인이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1920년의 45만 9,400여인으로부터 1930년의 63만 982인으로 늘어났다. 그중 연변 4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약 40만 9,402인으로서 64.9%를 차지하고 안동과 통화 지역에 5만 545인으로서 8% 차지하고 봉천과 철령 지역에 9만 7,169인으로서 15.4% 차지하고 길림과 장춘지역에 2만 4,157인으로서 3.8% 차지하고 북만(흑룡강에 속함)에 4만 4,463인으로서 7% 차지하고 려순, 대련 지역에 1,747인으로서 0.27% 차지하고 기타 지역이 약 1,000인좌우였다. 위의 숫자에서 볼수 있다싶이 길림성 연변지역은 이미 우리나라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구로 되였으며 료녕성도 조선족인구가 비교적 집중되고 흑룡강은 장성세를 이루었다.
북한에서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15년간(1910-1925) 조선측에서 해외로 이주해간 난민이 30만호를 초과했다. 1919년까지 약 10여만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 토목건축과 석탄채굴 등 노동에 종사하였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만족, 몽골족 지역과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이 5만 6,000인이며 22만 5,000여인이 연변지역에 이주해갔고 1926녀부터 1930년 사이에 또 10여만인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갔다. 1922년 12월 구쏘련 극동지역의 외국무장간섭이 철저히 분쇄되고 소비에트공화국이 창건됨에 따라 구쏘련에 이주해간 조선족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구쏘련측에서 통계한데 따르면 1926년 구쏘련 시베리리아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이미 8만 7,000여인에 달했다.
또 600만 조선인이 로력자로 끌려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전쟁가운데서 목숨을 잃었거나 제명에 죽지 못했다. 적지 않은 《행운자》들은 또 일본으로 강압적으로 끌려갔다. 1945년 일본투항때 재일조선족은 약 200만인좌우였다. 구소련 인구통계에 따르면 1939년 구소련 경내에 거주한 조선족인구는 18만 2,300여인으로서 1926년에 비해 1.1배 늘어났다. 《9.18》사변후 소련에 이주한 조선족들은 일본식민주의통치와 일본의 강제이민에 못이겨 구소련에 이주해간 사람들이 많다. 해당 서적,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조선광복까지 세계 각국에로 이주해간 조선족은 무려 당시 조선반도 총인구의 15%좌우 차지하는 400만인이나 된다. 그중 중국동북에 정착한 사람이 대략 160만, 중국내지에 대략 10만, 구쏘련 씨비리아와 극동 지역에 대략 20만, 일본에 대략 210만, 기타 다른 나라와 지역에 대략 3만인 이주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종말후 조선족의 대량적 이주는 거의 끝났다
1990년 제4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국 조선족인구는 192만 597인으로서 전국 총인구의 0.169%를 차지, 그 절대치는 전국 56개 민족가운데서 17위를 차지했다. 제1차 인구조사때부터 제4차 인구조사때까지 37년간 조선족인구의 평균성장률은 1.5%로서 전국 평균장성속도인 1.8%보다 낮았다.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186만 4,760인(그중 요녕 23만 378인, 길림 118만 1,964인, 흑룡강 45만 398인)으로서 전국조선족 총인구의 97.09%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하고 기타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했다. 동북3성에 조선족이 1만인이상인 시, 지구(인구에 따라 배렬)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길림성 길림시, 흑룡강성 목단강시, 길림성 통화지구, 흑룡강성 송화강지구, 료녕성 심양시, 흑룡가성 가목사시, 료녕성 무순지구, 흑룡강성 계서시, 길림성 백산시, 료녕성 철령지구, 흑룡강성 이춘시, 료녕성 본계시 등 19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 1990년 전 주 조선족인구는 82만 1,479인으로서 전 주 인구의 39.5% 차지, 전국 조선족 총인구의 42.77%이다. 전 주 8개시, 현의 조선족인구분포(인구에 따라 배열)를 보면 룡정시 18만 3,994인, 연길시 17만 7,547인, 화룡시 13만 6,894인, 훈춘시 9만 2,100인, 왕청현 8만 5,049인, 도문시 6만 9,166인, 안도시 2만 4,745인이다. 다른 한 조선족자치지방인 장백조선족자치현의 1990년 조선족인구는 1만 4,508인으로서 전 현 총 인구의 16.7%를 차지한다. 이상 분석으로부터 볼수 있다싶이 동북아지역 조선족 인구분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점이 있다.
1.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였다.
중국조선족은 98%이상의 인구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집중되여있고 구쏘련의 조선족은 99.5%의 인구가 로씨아와 중아세아 4개 나라에 분포되여있다. 재일조선인은 주로 서해안지역과 혹까이도에 분포되여있다. 조선족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여 있는것은 조선족의 벼농사를 짓는것과 밀접한 련관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해들어 온후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대소하천류역과 평원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것이다. 비교적 집중하여 거주했기에 조선족들은 민족 향심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
2.대부분이 변계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지구, 시, 현은 대다수가 중, 로, 조 3국 변계에 위치했다.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 로, 조 3국변계에,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집안현, 료녕성의 단동시는 중조변계에, 흑룡강성 목단강시, 가목사시, 계서시와 내몽골자치구, 만주리시는 중로변계에 위치해있다. 상술한 지역의 조선족인구는 동북조선족총인구의 62%좌우 차지한다.
조선족은 또 다수가 철도연선과 철도와 가까운 주위에 거주, 인구는 변계로부터 내지로 들어오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구쏘련의 조선족은 당초 구쏘련의 극동지역에 분포되여있었는데 후에 우리나라와 인접한 지역과 중아시아 지역에로 확장되였다. 그것은 10월혁명 후와 제2차세계대전 전야에 국제국내형세의 핍박에 못이겨 대량의 조선족들이 구쏘련의 내지로 재차 이전했기 때문이다.
중, 로, 조 3국 조선족들이 이웃하여 가까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또 바다를 사이두고 일본과 마주하고있기에 변계 민간사이의 상호래왕은 100여년 역사를 갖고있다. 구역경제협력이 발전됨에 따라 각국 조선족지간의 연계는 더한층 발전하게 될 것이다.
3.특수한 인적관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아직도 교포, 교포가족, 친족들이 5,000여인 있다. 조선족가운데는 조선, 구쏘련, 일본 등 나라인들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중, 로, 조 3국 교접점에 있는 훈춘시에는 조선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만 5,000여인, 일본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000여인, 러시아 교포가 5,000여인 된다.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이런 특수한 인적 관계는 구역 경제협력발전을 추진하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4.전문가 학자 사회명인과 갑부들이 적지 않다.
구쏘련의 조선족학자가운데는 학술계에서 명망이 높은 원사(院士)와 통신원들이 있다. 이를테면 막씸 빠블로위치 김은 구쏘련문화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1979년 구쏘련과학원 원사칭호를 수여받았다. 끄오끼 빼뜨로위티 김은 역사학자이자 교수로서 1976년 통신원사 칭호를 받았다. 그는 구쏘련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소장대리이며 《구쏘련대백과전서》(1980년 로어판)에 수록되였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조선족 가운데서 각종 전문가인재가 도합 5만 3,528명 되는데 그중 고급직함을 갖고있는 분만도 2,281명 된다. 어떤분들은 과학연구면에서 조예가 매우 깊어 국내외의 공인을 받고 있다. 길림성에는 박문일, 정판룡, 조봉빈 등 조선족박사와 같은 저명한 전문가, 학자들이 나타났다. 목하 동북아 각국 조선족지간의 과학기술, 문화 교류의 발전은 구역경제협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200만명을 상회하는 중국동포, 속칭 중국의 소수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은 우리7600만 민족의 장래를 위한 귀하고 소중한 종자입니다. 종자라 함은 풍성한 결실을 준비하기 위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중국동포사회가 우리민족의 장래를 위한 희망의 씨앗으로 여김은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민족 집단 중 유일하게 남북한을 자유왕래하고 있는 동포사회라는 점입니다. 재미동포나 재일동포사회와는 달리 중국동포들은 남북한을 왕래하면서 남북주민들에게 상호간의 실정이나 인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어 한민족의 동질성을 바탕으로한 남북통일의 민족의 숙원을 풀수 있는 열쇄를 가진 동포집단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민족의 장래 번영에 있어 중국동포사회가 큰 힘이 되어질 것이란 이유입니다.
인구 14억을 넘어선 중국은 개방과 경제개혁으로 그 시장의 규모가 엄청난 속도로 커져가는 현실입니다. 동양적 가치와 특히나 사업적 거래가 인관관계의 성립 후에야 가능한 독특한 중국식 시장을 공략해 나가는데 있어 중국동포사회는 우리에게 통역 이상의 큰 버팀목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7600만 민족은 중국시장의 효과적인 관리에만 성공하더래도 부강한 집단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미주동포들과는 달리 중국동포와 일본동포들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를 잃었을때 강제이주 또는 징용 등의 강압으로 이주하고 해방 후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이 대부분으로 국권을 상실했던 치욕적 역사 앞에, 우리 모두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피해자들입니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중국동포사회는, 지금으로서는 우리민족 가운데 낙후되고 후진의 입장에 있지만, 대우해야 할 동포사회 입니다.
"역학자들이 국운상승을 예견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방위를 동북간방이라고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가 동북방에 있는 나라입니까? 아시아의 정동쪽에 있지 동북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터를 진짜 동북방으로 잡아야 합니다. 동북간방은 우리민족의 두뇌입니다.
국경선이니 국토니 하는 것은 원래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따라 상황에따라 옮겨지는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는 국경선이란 말이 없어지는 시대가 옵니다. 그것은 하늘이 도울것이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우리민족의 고향이 저 광활한 대륙이었다는 것을 잊지말고, 가슴을 더 크게 열어야 합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2천년 동안에 그 정기, 그 기상을 다 잊었습니다. 한 줌도 안되는 땅에서 남한이니 북한이니 싸우는 것도 우리민족이 앓고 있는 중병의 하나입니다. 하물며 경상도 전라도 감정싸움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일제 때 수많은 우리동포들이 바로 우리민족의 머리땅으로 이주해간 것은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민족의 성조께서 도왔으리라 생각듭니다.
200만 중국동포는 민족의 장래를 위한 소중하고 큰 종자입니다. 지금은 남한이 한민족의 주류이자 맏형의 입장에 있지만, 그래서 중국동포들이 서울에 와서 돈벌이 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지만, 그 분들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그 분들은 우리 미래의 자원입니다. 그 분들 대부분은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잊고있는 동안 조상의 묘자리를 지켜준 분들입니다. 환웅의 무덤이 있고, 단군의 무덤이 있고, 동명성왕, 광개토대왕, 을지문득, 강간찬 등 우리 민족사의 영웅들이 다 그 곳에 묻혀있고, 그 자리를 지켜준 분들이 바로 중국동포들입니다.
그 분들을 존경하고, 교육시키고, 바로 그 곳에 투자를 해서 우리 머리땅을 개척해야 합니다. 상해니 심천이니 하는 엉뚱한 데를 찿아가지 말고 남한 경제의 역량을 우리의 머리땅으로 모아야 합니다. 경제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민족의 분열과 갈등으로 닺쳐올지 모를 엄청난 불행을 예방하고 민족화합으로 우리에게 찿아 올 국운을 되찿는 길입니다. 아시아 대륙을 향하여 포효하는 백두산 호랑이를 보게되는 날입니다."
중국의 개방과 자본주의적 개체경쟁을 도입하며 그리고 동포사회에 불어닥친 한국행 돈벌이 바람으로 조선족사회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이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북경 또는 천진같은 대도시로, 뿔뿔이 흩어지고 가정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90년대 한국업체들이 중국에 진출한 다음부터 연변 조선족사회는 도시집중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조선족 총수의 10% 인 20만명가량이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선족들이 떠난 농촌에는 한족들이 들어와 산다. 이는 그만큼 조선족의 주거지가 축소됨을 의미한다. 현재 계획중인 북한 두만강 개발계획이 실현되면 연변의 조선족 인구비례는 총인구 대비 현재의 40%에서 20%이하로 축소된다. 인구의 분산이 가속화될수록 한족과의 동화속도도 빨라진다.
만주족은 원래 중국인들과 문화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족은 문화적으로 많이 다르고 우리 부모들이 이 문화를 지키려 애썼는데 동화되면 많은 문제들이 파생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시로의 급속한 인구진출은 농촌의 붕괴를 의미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소학교는 85년 4백 19개였는데 95년에는 1백 77개로 줄었다. 중학교는 1백 18개에서 49개로 줄었다. 이는 한국어를 할줄 아는 조선족의 감소를 의미한다.
중국에서 연 변이 <한국화> 된다는 비판이 나올 경우 <한국화> 라는 말속에는 향락 풍조나 고물가 현상 등도 포함된다. 향락풍조의 전파는 심각하다. 가라오케 바의 급속한 증가가 그 상징이다. 연길의 가라오케 바들이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것들이지만 조선족들도 자주 찾는다 가라오케 바의 경우 여급에게 주는 팁만 200원(한국돈 2만원 가량)이다. 중국에서 정교수 한달 월급이 8백원이다. 그런데 가라오케 바에 가서 술 한번 먹고 수만원씩 쓰고 나온다. 일상 생활에서도 조선족들은 과소비와 낭비들이 심해졌다. 예전에는 벼농사를 하는 조선족들이 옥수수 농사를 하는 중국인들보다 잘 살았다. 요즘에는 조선족들보다 중국인들의 저축이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북경인구 1천1백만 가운데 조선족은 3만 여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북경에 등록된 가라오케바 1백 80개소 중 1백 60개소가 조선족 소유이다. 이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 론 농촌 출신 조선족들이 많다. 올 봄 북경당국에서 범죄타격운동을 벌려 매춘부를 구속했는데 3분의1이 조선족이다 옛날 조선족 여성들이 북경으로 관광 갈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조선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다녔다. 부분적 청년들도 도시로 진출한 후 적지 않게 범죄로 빠진다. 한마디로 조선족사회는 그 기초인 가정까지 무너져 가는 실정이다.
첫댓글 좋은자료 퍼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