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주택을 선호하고, 규모를 줄이고 있다.
베이비부머들 대부분은 단독주택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들은 단독주택을 선호한다. 다만, 선호와 선택 간의 현실적인 괴리로 인해 은퇴이후 주택유형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거주 주택을 처분하고 단독주택 거주를 감행하거나 거주 주택의 규모를 줄여 일부를 오피스텔 등의 수익형부동산에 재투자하는 등의 다운사이징을 통해 단독주택 거주를 실현시키고 있다.
땅콩주택, 살구나무집. 단독필지 하나에 두 개의 주택이 땅콩처럼 붙어있어서, 그리고 두 개의 단독주택 사이에 살구나무가 있어서 그렇게 네이밍 된 두 주택은 책이나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된 바 있다. 이들 주택은 단독주택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남이 지어준 것이 아니라, 내가 지어 내가 사는 ‘내 집’이라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물론 일부 설계와 시공은 전문 업체에서 진행했다) 도심에서의 전세보다 도심 외곽의 택지개발지구에 ‘내 집’을, 그리고 아파트 거주에서 단독주택에서의 주거를 선택한 것이다. 또한 전원풍의 주택으로 작품처럼 부각되는 단독이 아니라 우선 본인의 보유한 예산에 부합하는 보통 수준의 건축비로 지은 건실하고 품격 있으면서 동네풍경과 어울리는 집이라는 공통점은 이들 주택의 미덕이다.
많은 베이비부머(baby boomer)들이 이와 유사한 선택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가운데 720만 명(14%). 베이비부머의 기억, 또는 추억의 ‘복기’가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만든다. ‘세시봉’이 그렇고, 얼마 전 모 TV 방속국의 스페셜 쇼를 통해 본 ‘이장희’가 그렇다. 본인들이 태어난,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주택이지만 본인들이 마지막으로 살고 싶은 주택은 ‘단독주택’이다. 이런 이유로 주택연금도 예외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는 무엇이 또 그럴까? 그것은 바로 베이비부머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로부터 비롯된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기억하는 이전의 과거로 ‘퇴행’한다. 베이비부머는 지금 이전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과거로 기억이 ‘퇴행(?)’하고 있다. 본인들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본인들의 미래를 위한 방법론 모색에 적용하고 있다.
최근 개봉된 영화 ‘건축학개론’은 ‘짝사랑’과 90년대를 배경으로 복고풍의 소품으로 인해 ‘보는 재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의 소재가 ‘짝사랑’이라는 점에서 제목인 ‘건축학개론’은 어찌 보면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그런데 등장하는 배우의 직업이 건축가라는 것과 상대 여배우가 ‘살 집’을 건축가 남자 배우에게 클라이언트로서 의뢰하게 되면서 짝사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집’과의 연관성 내지는 ‘집’에 대한 사람의 기억을 건드린다. 짝사랑이라는 것이 결국 ‘마음의 집’에 누군가를 담는 것이라는 점에서 건축되는 건물로서의 ‘집’이 짝사랑과 다름없음을 영화 내내 묵시적으로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건축가(남자)를 좋아했던 여자는 남자에게 제주도 어느 곳, 기존 주택이 있던 자리에 ‘살 집’을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건축가는 기존 주택을 헐고 새로운 주택을 신축하는 것을 전제로 몇 가지 평면을 제안한다. 그러나 여자는 어려운 건축 용어만큼이나 새롭게 디자인된 평면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 현장 답사를 겸해 들린 어느 날, 기존 주택에 남아 있는 자라는 성장기 어린이의 키를 쟀던 빨간 벽돌 위 낙서와 아버지가 만든,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여섯 살 아이의 발자국이 선명히 찍힌 초라하고 조그만 시멘트 어항에 대한 여자의 기억과 추억을 보게 된다. 결국 건축가는 신축이 아니라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하기로 한다.
다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현재의 공간을 살리면서 불편한 공간을 손보기로 한다. 기존의 기억이 남은 현장은 그래도 두되 바다 쪽으로의 시원한 조망을 위해 슬라이딩 창문을 설치하고 더 멀리의 바닷가를 볼 수 있도록 기존 단층 주택의 지붕으로 이어지는 지붕 위 잔디 올레길(?)을 디자인한다. 건축가인 남자는 여자의 과거(아버지와 가족과의 기억)를 통해 현재를 살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이 기억이, 추억이 함께 자라는 ‘집’을 만들어 준 것이다.
남자의 집, 아직 건축가가 되기 이전의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남자의 집은 강북하고도 정릉의 단독주택이다. '게스(GUESS)' 짝퉁인 'GEUSS'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호기롭게 걷어찬 문짝이 20여년의 세월을 통해 녹이 슨 그 집은 여전히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어머니의 ‘집’이자 자신의 발길질을 기억하고 있는 ‘찢어진 녹슨 대문’이 있는 집으로 남아있다. 현재도 남아있는 찢어진 녹슨 대문은 남자의 추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한 장면이지만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집에 대한, 집을 위한 건축, 사람을 위한 집에 대한 건축가로서의 철학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첫 눈’이 오면 한옥 빈집에서 보기로 약속한다.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누군가에게로 향한, 누군가를 담고 있는 마음의 집처럼 그 집은 두 사람의 서로에게 향한 마음 그 자체로 서의 ‘집’이다. ‘집’이 아니라 두 사람 각자의 ‘마음’이었던 셈이다. 마루 안쪽에서 CD와 CD 플레이어를 놓고 가는 여자를 보는 시선은 남자는 볼 수 없었지만, 언젠가 그 곳에 남자가 들렸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대문을 향해 있다. 한옥은 닫혀있는 듯, 밖으로 향한다.
베이비부머뿐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택이 아닌 주거를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택이라는 것이 단순히 환금성 차원의 투자재가 아니라 삶의 일부, 가족의 기억이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소 늦었지만 그러한 선택과 결정을 언제 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더 이상 주택가격이 이전과 같이 오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로또’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살고 싶은 집을 선택해야 한다. ‘살고 싶은 집을 선택하지 않으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다’. 이러한 주거선호에 대한 의식 변화에 향후 주택정책의 방향이 ‘숨은 그림’처럼 감쳐줘 있기도 하다.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