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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다가 소개 해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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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땅 사이의 상생조화
땅이 좋아야 뛰어난 인재가 태어난다는 뜻의 '인걸은 지령(地靈)'이란
말은 3세기 중국 동진 시대의 곽박이 쓴 교과서적 풍수서 [금낭경(錦囊經)]에 처음 나온다. 따라서 풍수에서는 본래부터 자연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왔다고 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서양에서도 있었던
지리사상이다. 그러니까 풍수든, 서양 지리든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에
의심을 품은 쪽은 없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위인 전기에는 위인이 산천수려한 곳에서 태어났음을 첫머리에 붙이고 있지 않은가?
다만 서양 지리학이 환경결정론적 시각에 매달려왔다면-물론 이것은
제국주의에 악용된 측면이 있다. 예컨대 열등한 환경이 열등한 민족을
배출했다는 식으로-풍수는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상호교감에 중점을
두어왔다.
따라서 풍수, 즉 자연풍토가 인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 인정하지만 어느 한쪽의 주도(主導)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가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나쁜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만 있다는 것은 이런 논리에서 나온 말이다.
흔히 풍수를 좋은 땅 잘 골라 그 음덕(蔭德) 좀 보자는 술법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생적 풍수 사상의 원류인 도선풍수는 그런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지리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선풍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땅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랑은 훌륭한 것, 좋은 것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다.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면 나 아니라도 사랑해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지고지선(지고지선)한 사랑이란
다른 것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 문제가 있는 것,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랑일 때 의미가 있다. 도선풍수에서의 땅 사랑은 그런 근본적인 인식 속에서 출발한다. 명당(明堂)이니, 승지(勝地)니, 발복(發福)의 길지(吉地)니 하는 것은 도선풍수의 본질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개념들이다.
결함이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이 바로 도선풍수가 가고자 하는 목표이며
그것이 바로 비보풍수(裨補風水)이기도 하다. 앞으로 많은 사례들을
들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두 개의 큰 물이 모이는 합수(合水) 지점으로
홍수 때 침수 위험이 상존하는 곳, 낭떠러지 밑이나 바로 위여서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 땅을 골라 절을 세워 비보를 하는 식이다. 절에 상주하는 스님으로 하여금 경계와 일단 유사시 노동력 역할을 맡게 하자는
의도이다. 마치 병든 어머님께 침을 놓아드리는 듯한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란 말이 있다. 완전한 땅이란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건 땅이건 결함이 없는 것은 없다. 결함이 없는 곳을 취함은 사랑이 아니다. 일부러 결함이 있는 땅을 골라 그를 고치고자 함이 도선풍수의 근본이다. 그래서 도선풍수는 우리 민족의 고유의 '고침의 지리학', '치유(治癒)의 지리학'이 되는 셈이다.
풍수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땅(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생조화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 간과(看過)되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적 개발에 대하여 인식론적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풍수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풍수가 현대의 국토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지니고 있는 건전한 지리관, 토지관, 자연관 때문이다.
풍수는 땅을 어머니 혹은 생명체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한 물질로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땅이 소유나 이용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누가 감히 어머니(땅)을 이용할 수 있으며 누가 어머니(자연)를 소유하는 패륜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풍수가 국토 재편(再編)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풍수의 공도적(公道的) 자연관에 있다고 본다. 개발을 어머니에게 의지한다고 생각하고 자연 보전을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관념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지혜를 오늘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의지한다는 것과 이용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의지는 신세를 지는 일이며 은혜를 입는 일이다. 그런 사고 방식이라면 누가 감히 땅을 함부로 대하고 많이 소유하려 할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풍수가 현대인들의 소박한 자연주의로 몰아갈 우려가
있다. 그것은 도선풍수가 가지고 있던 자연과의 조화, 대동적 공동체
관념에 어긋나는 일이다. 도선은 적극적으로 어머니인 국토의 병통을
고치기 위하여 비보의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다. 도선의 지리 철학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치유의 지리학'이 되는
것이고, 이는 바로 살아 있는 땅으로 재생시키자는 운동 원리가 되기도 한다.
"자연의길[自然之道]을 방해하지 말라.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라"
아마도 이것이 오늘이 우리에게 풍수가 해줄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국토 재편은 이 지리 철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 생존을 위한 싸움터로서의 국토가 아닌, 삶터로서의 국토를 가지게 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인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모르게 느끼고는 있다. 다만 그것을 분명하고도 합리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청주에 살 때와 전주에 살 때, 그리고 관악산 아래 봉천동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사고방식이 다름을 느낀다. 세월의 변화에 의한 나이 탓도 있겠지만 그것 말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성격의 변화를 느낀다는 뜻이다. 청주에
살 때는 무심천변이었다. 길게 뻗은 둑길을 보며 언제 저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전주에 살 때는 조경단 부근 숲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 가려진 어떤 것을 추구했었다. 지금 관악산의
바위 봉우리를 보면서는 쓸모도 없는 투쟁심에 젖어 몸과 마음이 상하고 있다.
대륙의 벌판에서 느끼는 마음은 허망함과 고적감이다. 간접적으로 경험한 히말라야 설산을 보며 느끼는 감상은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신비에의 동경심이다. 그래서 대륙인들은 사람과 땅과의 관계에서보다는 인관 관계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교에 자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장하는 바의 요체는 인간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설산을 보며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은 그러한 신비감을 종교적 성취욕으로 풀어가려 한다.
누구나 산을 보면 그 너머에 있는 땅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 넘어가 보면 그곳에도 별 게 없다는 것을 체감한다. 허망과 고적과 신비는
그렇게 쌓여간다. 그들의 삶의 본질과 실체를 잃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점차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 자연을 잃고 인간 관계에 집착하며 있지도 않은 신비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자연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이해 관계에 얽혀서만 사람을 사귀고
광신적 종교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자연은 본래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이는데 뜻이 있다. 나이를 먹어가며 허망과 고적과 신비를 넘어 자연을 온몸으로 맞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풍수적 삶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길고 복잡한 과정을 경험하지 않고도 자연을 온몸으로 맞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풍수적 삶이란 것도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발췌... 땅의 눈물, 땅의 희망(글쓴이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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