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나르시스트(원고지 78장)

[ekkk]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가만히 놀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뭐라도 끄적거립니다...ㅠㅠ)

나르시스트.

그는 깊은 잠에라도 빠져있는 듯이 내가 제법 기척을 내며 방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
무런 미동도 없이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다. 나는 슬며시 다가가 침대 위에서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로 편안한 미소를 짓고 누워 있는 그를 바라본다. 그가 미소를, 더구나 더없이
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는 침
대에 연결된, 그의 몸을 꽁꽁 묶고 있는 밧줄을 만져보며 생각한다. 그가 미소를 짓고 있는
까닭은 이렇게 현실 속에서 너무나 답답하기 때문일 거야. 현실과 꿈은 반대의 심리적 상태
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무심코 밧줄을 쓰다듬던 나는 그만 놀라고 만다. 조금 지저분
하고 닳아져 있을 것이라는, 상식처럼 자리잡은 내 판단은 보기 좋게 틀린다. 밧줄이 깨끗하
다. 그것은 곧 환자의 반항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긴 생각해보니 그가 침대에서 반항
을 한 것은 보지 못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어제 처음 병원에서 그를 진료하려고 하였을
때, 그는 도저히 진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증상을 보였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밧
줄로 강제로 묶어두자 그는 마치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가지게 된 아이처럼 고분고분해졌
고 얼굴에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 환자들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 예외적인 현상이
다.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본다. 그러나 이 방이 매우 단순한 구조로 구성되
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이내 고갯짓을 멈춘다. 대신에 시선을 올려 이 방의 유일한
출구라고 할 수 있는 ― 출입문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늘 열쇠로 잠겨있기 때문에 환자 입
에서 그것을 출구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다 ― 자그마한 창문을 바라본다. 어느 병실에서
있는 창문에 새삼스레 눈길을 둔 까닭은 어제 그가 창문을 보며 중얼거리던 말들이 생각났
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피로한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왔는데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나의 한없이 답답했던 과거를 말소시켜주기에는 저 좁은 창문보다 나을 듯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오전에는 그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예정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했는데,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약속 시간을 잡아 나를 찾아왔고, 나 또한 만일 그녀
가 오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저,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그녀가 그렇
게 먼저 입을 떼었다. 죄송하다뇨, 그게 당연한 겁니다. 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제 저녁 무렵에 그녀가 그를 데리고 병원에 왔다. 그녀는 환자인 그보다도 훨씬 초췌하고
창백해 보였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편에게 신경치료를 받게 하기 위하여 병원에 데
려오는 심정이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와 대면하고 진료를 시작하려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발동을 부렸고 하는수없이 그를 강제
로 침대에 묶기로 하였다. 그런 도중에 그녀는 말없이 돌아갔다. 남편의 그런 모습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어쩌시겠습니까. 허나 곧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금
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감사합
니다, 라고 말했고, 나는 어쩐지 그 목소리가 심한 우울에 젖어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오
늘 이렇게 연락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을 겁니다. 내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단지 환자의 증상을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게 된 계기를, 계기라고 하기에는 좀 멋쩍은 것일지라도,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좋습
니다. 그간에 어떤 일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들으려다가 말고,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기 때문에
그녀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조금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그녀는 내 말에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나는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게 진료
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자해 증상을 보이고 있는 환자를 어떻게 이곳까지 데려오실 수
있었습니까? 여간 힘드시지 않았을 텐데. 내 말에 끝나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마치 저질러서는 안 되는 큰 죄라도 지은 듯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
정제를, 먹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나는 할 수 없이 위로하듯, 제가 실
수를 한 모양입니다. 기운 내십시오, 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잠시 동안 고개를 숙이고 가만
히 있다가 갑자기 어떤 결심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힘차게 들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
다. 휴, 죄송합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죠.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체념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억울함이라도 호소하려는 듯한 분명한 한이 서려있었다. 어디서
부터 말해야 할지, 제 남편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회사에서
실직을 당한 뒤로부터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남편이 그렇게
될 만한 일은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의 일상은 정말 평범했거든요. 그녀가 혼란스러운 표정
으로 말했다. 회사에서 실직 당하셨다고요, 그것에 대해 조금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
니까? 내가 추궁하듯이 물었다. 남편은, 제 남편은 평범한 회사원이었어요. 그것도 매우 고
달픈, 제약 회사의 영업사원이었죠. 저희는 그다지 넉넉하게 살지 못했어요. 남편의 실적도
그다지 좋지 못했고요. 아마 남편이 해고된 것은 영업 실적이 부진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녀
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마, 라고요?, 하고 물었다. 예. 자세히는 모르지만 남
편이 회사에서 해고된 두에 중얼거리던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깟 약 몇 개 때문에 사람
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냐고, 그것에서 남편의 해고원인이 영업실적 때문이라는 것을 짐
작해낼 뿐이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음, 하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남
편 분은 그 회사에서 몇 년을 일했습니까?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고 생각하더니 곧 대답을
해냈다. 정확히 17년입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회사를 다니기 이전에는 다른
곳에 다닌 적이 없습니까? 그녀는 즉시 고개를 가로 저으며 덧붙였다. 그런 일은 없었어요.
남편은 군대를 다녀와서 바로 그곳에 취직을 했고,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회사에만 충실했
죠. 심지어 부업이라고 부를 만한 일도 한 적이 없어요. 나는 대충 짐작해보았다. 보통 그런
증상은 선천적인 경우가 아니면 스트레스가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천적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혹시 회사를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기색을 발견하신 적 있나요, 혹
집에 들어와 심하게 짜증을 낸다던가. 내가 물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물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거나 하면 조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
었지만, 그건 어느 누구에게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거였어요. 전혀 특이하다고 생각될만한 거
리가 아니었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일 것이라는 쪽에 마음
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파고들었다. 그래도 혹시 회사의 선후배 관계라든가 하는 점에
는 문제가 없었나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젓는 대신 손가락을 이마에
짚고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결국에는 실없는 대답을 내뱉어버렸다. 모르겠어요. 나는 좀처럼
틀리지 않는 나의 짐작이 틀렸다는 실패감보다는 그녀의 무성의한 대답이 더욱 거슬렸다.
모르겠다구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오
히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심정
으로 뻘쭘하게 앉아 더듬더듬 말했다. 이상할 건 없지만, 그래도 남편의 회사 사람들을 모른
다는 것은, 좀 그렇네요. 내 말에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하다구요?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저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네요. 저는 남편이 회사를 다
니는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곳에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러니 회사 사람들을 알
기회가 없었죠. 저희는 그저 각자의 일을 분담하며 살아갔을 뿐이에요. 저는 집안일을 했고
남편은 회사에서 일을 했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요? 저는 남편의
회사를 찾아가지 않았지만, 남편 역시 회사의 동료들을 데리고 한번도 집에 온 적이 없었어
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 같아 손을 내저으며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그러한 질문을 한 의도가,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녀의 책
임이 있다는 것처럼 물어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체념을 뱉
는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혹시 선천적인 건 아닐까요? 그녀는 아니라고 단
호하게 대답했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살았어요. 한번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나
는 다소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라고. 그러나 별로 기대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아쉬움도 크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일종의 예의라고 생각하고 그
렇게 한 것뿐이었다. 나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바쁘실텐데 시간을 내주셔 감사합니다.
장담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갔다. 나는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복도로 나가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담배를 피워 물며
생각했다. 이거야 원 벽에다 이야기하는 기분이군.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것 같네. 저렇게 남
편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야, 나는 쉴새없이 투덜거렸다. 부부라기에는 의심스럽기까지 하군
그래. 하기야 요즘은 다들 알아서 살더래두 말야.

어느새 그의 눈은 뜨여 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그가 정확히 언제부터 눈
을 뜨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는 마치 계속 그래왔다는 듯이 익숙하게 시
선을 움직이며 동공을 돌리고 있다. 나는 그의 초점이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려다가 서로 눈
이 마주친다. 그는 그러나 별로 개의치 않는 듯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나는 말
없이 그의 시선을 좇는다. 그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내가 어색하
게 입을 뗀다. 그는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지 나의 말에 대답을 해주기보다
는 계속 창문을 응시하는 쪽을 행하고 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나에게 말한다. 무슨 일인가? 퍽 묘한 느낌이 든다. 그는 마치 내가 자신의 집에라도 불쑥
찾아온 것처럼 말하고 있다. 기분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내가 말한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러면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까. 그는 또다시 고개를 흔든다. 나는 눈을 찡끗 한다.
가끔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예사롭게 여기고 다시 말
을 하려는데 그가 갑자기 입을 연다. 그다지 기분이 좋은 건 아냐. 허나 기분이 나쁠 것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어. 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다시 창문을 바라본다. 방금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기분이 좋았지. 아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꺼리고 있다든가 혹은 지금
의 기분이 지독하게 나쁜 것만은 아냐. 그저 유쾌할 이유도 불쾌할 이유도 없을 뿐이지. 나
는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듣는다. 동화라도 듣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오늘은 날씨가 좋
군. 비록 저 좁은 창문으로 보인다 해도, 그 정도는 알아챌 수가 있지. 그가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저기, 물어볼 게 있습니다. 내가 말한다. 방금 전에 제가 오기 전까지는 기분이 좋다
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럼 그때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당신이 오기까지 기분이 매우 좋았어. 허
나 당신이 오고 나서 나의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말은, 당신이 나의 유희를 중단시켰다
는 말이지. 그가 말한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는다. 유희라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
다. 그래, 유희. 나는 당신이 이 방에 오기 전까지, 아, 생각해보니 말을 수정해야 될 것 같
군. 당신은 분명 내가 잠에서 깨기 이전부터 이 방에 들어와 있었지. 마치 내가 잠에서 깨어
나기를 기다리는 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옆에 있건 말건 상관
없이 저 창문을, 그는 창문에 시선을 둔 채로 말한다. 창문을 보고 있었어. 정말 행복한 기
분으로 하염없이 말야.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신경쓰
이는 거였어. 결국 나는 순간적으로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당신을 바라봤지. 우리는 눈이 마
주쳤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조금 불쾌했어. 내가 마주한 사람이
당신이어서가 아냐.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이 유희를 중단시킬 만큼의 큰 가치가 없었
기 때문이지. 그가 말한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는 그의 말의 요점만을 이해한 뒤
그에게 말한다. 조금 귀찮으시더라도, 제가 지금부터 무언가를 끊임없이 물을텐데, 답변을
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는 예상외로 매우 흔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가 나
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그와의 대화
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우선은 가까운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가기로
생각한다. 나는 몸을 그에게 가까이 기울인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저 창문을 보고 있는 일
이 유희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그게 유희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제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
니까? 내가 묻는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답하기 시작한다. 나의 과거는 우울했어. 과
거에 만났던 사람들, 과거에 살았던 집, 과거에 존재했던 나, 어느 것도 즐거운 것이 없었어.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그러한 불온했던 과거를 씻겨줄 수 있는 것이 바
로 저 좁은 창문이야. 비록 빛조차 희미하게 관통되지만 과거에 내가 살았던, 어둠만이 존재
하던 도시에 비해서는 한없이 행복할 수밖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의 말을 쉽게 이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무언가 숨겨진 뜻이라도 있는 것인지 고민을 해보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나는 그에게 과거라고요? 하고 넌지시 물음을 던진다. 그래, 나
의 과거들. 생각할수록 비루한 일상들만이 존재했지. 그가 말한다. 나는 조금 복잡한 생각이
들어 딱히 무슨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회사에 다니셨다고 들었
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내가 묻는다. 그곳은 나의 비루함을 완성시켜주는
곳이었어. 과거에 나는 그곳에 갇혀 지내야만 했지. 그가 말한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의 아내에게 듣기로 그는 분명 제약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회사 내에서 갇혀 있다고 생
각될 정도로 따분한 사무 직업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그는 그러한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여 말한다. 과거에 나는 분명 활동적으로 움직여야만 했어. 우습고 비굴한 모
습으로 말야. 게다가 손에는 항상 약을 광고하는 광고지를 가지고 다녔고, 지갑에는 항상 명
함이 들어있었지. 그러나 나의 그러한 움직임은 결코 의지적인 것이 아니었어. 그렇게, 과거
에 살았던 곳에서는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죽어지내야만 했어. 이렇게, 나는 부활했지
만 말야.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그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의문만 커져간다. 도무지 그
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허나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추측컨데, 그의 입에서 반복해서 튀어져 나오는 '과거'라는 말은, 아마 이곳으로 오기 전에의
도시 생활을 표현한, 일종의 특이한 화법과도 같은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
기 그가 내뱉듯이 말한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이런 곳에 와야 할 정도로 말이지. 하지만
여기에 온 것이 후회가 되지는 않는군. 그는 그리고 나서 다시 창문을 바라본다. 속으로 웃
으며, 미친 사람이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라고 나는 생각하
고 있는데 그가 말한다. 어쩌면 당신은 정말로 내가 미쳤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헛소리
들이나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나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란다. 혹시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희귀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미친 사람
이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돼. 물론 그들이 미치지 않았
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이거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도 억울하게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당할 때, 당연히 자신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라고 말하지 절대로 미
쳤다고 주장하지는 않아. 그러나 그 말이 과거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라면 조금 납득이
되긴 되는군. 그들은 자신이 죽음에 덮여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따지
고 보면 비슷한 논리라고 할 수 있겠군. 그가 말을 마친다. 나는 혼란이 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을 느낀다. 그의 말을 돋고 있으면, 그는 지극히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정신이 이상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누구도 알아들
을 수 없는,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조차 든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럼 당신은 스스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말이죠? 말을 내뱉고 나
서 조금 실언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상대가 상대라도 말을 조금 우회적으로
했어야 했는데, 너무 쉽게 내뱉은 듯한 느낌이 든다. 다행히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말투로
대답한다. 물론 나는 지극히 정상이야. 아무리 내가 강력히 주장한다고 해도 당신은 믿지 않
겠지만. 내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스스로가 정상이라고 생각
하시는 분이. 그는 씨익 미소를 짓는다. 어쩐지 소름이 돋는 웃음이다. 나쁘지 않다는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야. 나는 어떤 계기로든, 과거에 내가 살았던 곳을 탈출하고 싶었어. 그렇
다고 이곳이 나의 과거를 완전히 해체시킬 수 있는 장소는 아니지만, 적어도 외부와 차단된
이 방만큼은 나의 그러한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지. 그래서 여기 온 걸 후회하지
않는 거야. 그가 말한다. 나는 짧은 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그와의 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뾰족한 대화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부인
께서 당신에게 진정제를 먹였던 것을. 그렇기 때문에 난동을 부리던 당신이 얌전히 이곳까
지 올 수 있었지요. 내가 말하자, 갑자기 그는 이상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눈만 껌벅인다. 이거,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녀가 나에게 진정제를 먹이
긴 했지.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깟 것으로 나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어. 나는 그때 부활
중이었으니까 말야. 나는 그저 나쁠 것 같다는 생각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
이곳에 온 거야. 그가 말한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점점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머리
를 감싸안고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그가 묻는다. 만일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나? 나는
그가 또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나를 놀려먹듯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애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당신의 말처럼 심각한 증
상이라면, 또한 이렇게 밧줄로 꽁꽁 묶어둬야 할 정도라면, 이렇게 우리 둘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상황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나? 일반적으로 생각을 해보란 말야. 만
일 내가 그렇게 심각한 증상이라면 지금 나는 필시 몸을 뒤흔들며 소리를 지르겠지. 이보다
더한 발악은 없다는 듯이 말이야.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가. 그의 말에 나는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지른다. 그걸 이제서야 알아차리다니, 나는 속으로 무한한 나의 우둔함에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방에 들어와서는 오전에 있
었던 일을 생각했고, 생각을 마치자마자 깨어있는 그를 발견하고 즉시 대화를 나눴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하지만, 하고 어설프게 말을
얼버무릴 뿐이다. 그러나 이건 내가 이상한 것이지, 자네가 이상한 게 아냐. 당연히 이런 상
황이라면 발버둥을 치고 반항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우지. 하지만 나는 예외야. 이미 나는
부활했으므로. 그는 또다시 부활이라는 말을 들먹이며 말한다 나는 도무지 그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부활이라니, 어디 말이 될법한 소리인가.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
고 목소리도 좀 높이고, 어느새 짜증도 섞어가며 묻는다. 대체 부활이 뭡니까? 그는 나를 물
끄러미 바라본다. 의사라는 사람이 그런 사소한 단어의 뜻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나의 말
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가. 허지만 내 말에는 어떠한 속뜻도 감추어 있지 않아. 나는, 죽
었다가, 다시 살아났어. 그러므로 부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지. 그가 말한다. 나는 조
금, 아니 매우 미약하나마 그의 문제를 알아챈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죽은 적이 없어요.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냐, 분명히 나는 죽
어 있었어. 그가 말한다. 아닙니다. 내가 거듭 소리를 높여 말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오히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
지 않고 서로를 바라본다. 짧은 침묵이 흐른다. 그가 먼저 침묵을 깬다. 나의 죽음은 매우
오래 전에 내려진 결정과도 같은 거였어.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르지. 나는 오랜 세월동안 나의 죽음을 삶이라고 믿어왔어. 내가 과
거에 존재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그가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해를 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에는 약간의 체념도 들어가 있다. 그래도
내 머릿속의 회로는 계속 돌아가고 있다.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당
신은 어떻게 부활했죠? 내가 다급하게 묻는다. 갑자기 생각난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는 이 질문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는 자신이 말하는
부활의 순간을 기준으로 현재와 과거를 나누고 있다. 나는 초조히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고 또한 거기에는 행운이 작용했지. 그 행운이
란 바로 이 병실에 들어오는 거였어. 이 병실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이곳은 나에게 너무
나 행복해. 내가 나 자신의 의지대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비록 이렇게 몸은 밧줄에
묶여있더라도 말이지. 나는 그가 말하는 밧줄을 만지며 생각한다. 빛, 머릿속에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드디어 이야기가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부활에 필요한 부
단한 노력이란 어떤 것이었죠? 내가 묻는다. 그는 약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걸 여태 몰랐다는 거야? 나는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불평하듯이 말한
다. 나는 내가 뭘 잘못한 것인지도 모르고 있음에도 그저 초조한 마음에 재빨리, 죄송합니
다, 라고 내뱉는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것만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입을 여는 대신에 밧줄에 묶여 있는 팔을 간신히 움직여 환자복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
어올린다. 그의 팔에는 무수한 상처투성이 뿐이다. 모두 자해의 흔적이리라. 그런데 이걸 왜
보여주는 겁니까? 그의 행동에 영문을 모르는 내가 묻는다. 그러자 그는 눈살을 찌푸린다.
정말 내가 이것을 왜 보여주는지 모른단 말인가. 당신이 물어왔잖아, 나의 부단한 노력이 무
엇이냐고. 그가 말한다. 순간 내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던
희미한 빛은 어느새 너무나 커져버려 통제가 불가능하다. 나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한다. 대
신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당황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 나의 모습이 재미
있기라도 한 듯이 그는 헤죽 웃어 보인다. 그리고 입을 연다. 이 상처들이야말로 바로 나의
노력이지. 이것들로 인해 나는 부활할 수가 있었어. 그간 나에게는 많은 역경이 있었어. 차
라리 부활을 포기하는, 그래서 다시 죽어버린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도 느꼈어. 그런 충
동이 들 때마다 나는 내 몸에 상처를 내면서 그것의 고통을 실감하며, 나는 아직 살아있어,
라고 중얼거리기를 반복했지. 나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
해본다. 아마도 그의 정신에 이상이 생긴 때는 그가 회사에서 해고당한 직후일 것이다. 이십
여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충실히 몸담았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났으니 그 정신적 고통이
란 알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무슨 이유인지 자신이 원래 죽어있었다고 생각하며, 자해 행
위를 함으로써 고통을 느끼고, 그것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갈망을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충격에서 기인한 관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깊게 관여
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그는 이곳에 오게 되었고, 여기에서는 더 이상 자해행위를 할 필요
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남아
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그가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것에 대한 이유를
앎에도 그다지 성취감 따위가 들지는 않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지. 생각에 잠겨있는데
그가 질문을 던져온다. 나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왜 하는가 싶어 조금 이상한 생각으로 그
를 바라봤지만, 그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할 뿐이다.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그는 내 대
답을 듣고도 여전히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뗀다. 이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매우 행복한 사람이야. 정말로 당신에게 이름이 있는 것인지는 내가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그가 또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을 하려는지 그냥 지켜보기 시작한다. 과거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어. 당시에는 나도 예외가 아니었지. 우리는 모두가
자신만의 고유한 제품번호를 이름이라 여기고 생활했던 거지. 그들이 조금만 자신을 사랑했
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
고 있는데 말야. 나는 그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혹시 그에게 나르시시즘적
인 본능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일까? 나는 유심히 그를 지켜본다. 그들은 자신을 너무 사랑
하지 않은 나머지, 자신이 죽어 있고 또한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
타인에게 무관심한 것 이상으로 그들은 자아에 대해 애정이 없었던 게지. 허나 나는 달라.
나는 나 자신을 무한히 사랑해,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을만큼. 그가 말한다. 나는 그의 말을
전부 귀에 담고 있다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날카롭게 내던진다. 그럼 당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신단 말씀입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다. 그래, 이미 말했듯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사랑해. 사랑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살려야 했어. 나는 그래서 손톱으로 팔을
할퀴고, 칼로 발등을 찌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지.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낸다. 그에게는 나르시시즘적인 본능이, 기이한 방향으로, 자신을 해치는
방향으로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쉰다. 이제 진료를 거의 마친 듯
싶다. 나는 혹시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없는가를 머릿속에서 점검해본 다음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그대로 나가려다 말고, 그에게 얼굴을 두고 묻는다. 저, 밧줄을 풀어드릴까요? 갑
갑하실 것 같아서.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인다.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라고 좋아. 나를 풀어조는 것은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만일 내가 여기서 풀려난다면 방안을 생각없이 서성이다가, 저 열쇠로 굳게 닫혀 있
는 문을 발견하겠지. 그러면 나는 순간적으로 문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테고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마치 누군가가 나를 이곳에 가둬두고 있다는 착
각에 빠지겠지. 나는 또다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밧줄에 묶여있
는 쪽이 편해. 몸은 불편하더라도 그것은 자의적인 결정이므로,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
가 되는 셈이지. 그가 말한다. 내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가 잠
깐, 하고 짤막하게 외치며 나를 불러세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휴, 힘들구만.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한다. 뭐가 힘드십니까? 내가 묻는다. 그는 인상을 계속해서 찡
그리기를 반복한다. 마치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스러운 표정이라도 지으려는
듯이. 불현 듯 지금의 내가 괴롭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가 신음을 섞어 말한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그에게 다가간다. 밧줄을 풀어드릴까요? 그러나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런 문제가 아냐. 내가 괴롭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야. 그가 말한다. 그러
나 나는 도무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는 그것도 익숙하다. 나는 제법 여유까지
섞어가며 물어본다. 저 때문에 괴롭다고요?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맞아. 바로 당
신 때문이야. 이건 정말 갑자기 든 생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맞는 생각이기도 하지. 그가
덧붙여 말한다. 나는 방금 당신의 요구대로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지. 그러는 동안에 내 가
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우울과 고독이 밀려왔어. 나느 단지 그것이 과거의 불온했던 일을 떠
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바로 당신 때문이었지. 그가 목소리를
높인다. 잠시 침대가 들썩인다. 그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기 위해 팔을 비틀어댔기 때문
이다. 그게 왜 저 때문인가요? 내가 묻는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방금전
까지 대화를 나눴던 당신이 불현 듯 나에게는 한없이 두꺼운 벽처럼 다가왔어. 빛도 통하지
않는, 소리도 울려오지 않는 벽. 그건 과거에 내가 살았던 죽음의 공간에 즐비해있던 거였
지. 그런 생각이 들고나자, 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 당신은 벽이므로, 그러므로 분명
죽은 것이 틀림 없어. 한데 나는 살아있는데,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당신을 불러세웠어. 당신이 그대로 나가버리면 미쳐버릴 것만 같
았기 때문이야. 죽은 자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거지.그러나
그렇다고 지금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건 아냐. 나는 지금 마치 당신이 그냥 나가버리는 것
이상으로 견딜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에도 나에게는 뭔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
고 있어. 그래서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는 말을 마친 후 숨을 크게 몰아쉰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나는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
하다가 그가 다른 말을 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한다. 이윽고 그가 눈을 번쩍인다. 좋
은 생각이 났어. 그가 말한다. 그게 뭔가요? 내가 묻는다. 아니, 생각해보면 꼭 좋은 생각은
아냐. 하지만 지금에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그가 다소 불안한 얼굴로 말한다.
그게 뭐죠? 내가 재차 묻는다. 나는 그의 눈을 본다.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정말 미
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밧줄을 풀어주지 않겠어, 물론 풀어주겠지? 좀전에 먼저 당신이 제의
해 오기도 했으니까. 그가 말한다. 나는 그에게 한걸음 다가간다. 그러나 밧줄을 풀어줄 생
각은 없다. 단지 그가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밧줄을 풀면 무얼
하시려구요? 내가 묻는다. 그가 갑자기 웃는다. 마치 그 후에 의도된 행위에 대하여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나는 증명을 할 거야.. 부단한 노력을. 그가 쉴새 없이 말을 이어간다.
갑자기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이 느껴져. 나는 지금 상상하고 있어. 손톱으로 나의 살갗을 파
헤치는 쾌감을 말야. 이제 밧줄을 풀면, 나는 나의 전신을 괴롭히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거야. 그리고 다시 부활을 하겠어. 지금은 너무 혼란스러워 내가 살은것인지 죽은것인
지조차 판단을 내릴 수가 없거든. 말을 마친후, 그는 몸에 심한 경련이 이는 듯이 부르르 떨
어댄다. 얼굴이 샛노랗게 변한다. 그는 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여 자신의 육체를 더듬는다. 만
족스러운 웃음후 이어지는 것은 끔찍한 광경이다. 그는 손톱으로 자신의 살갗을 짓누르며
즐거워한다. 그는 연신 신음을 연발하며 중얼거린다.. 아, 나는 살아있어. 나는 역겨운 마음
이 들어 그만 고개를 돌려버린다. 새삼스럽게 그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재
빨리 병실의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다. 문을 통하여 그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마르시아스]

이 게시판을 볼 때마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살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 참 잘쓰네요^^ 정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