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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애굽기 3:1~4 / 신명기 4장 15절~40절
제목: 나를 기다리는 호렙산 & 그 이후
우리는 지난주에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경험하는 “하나님 체험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호렙산 체험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단연, 모세입니다. 파라오의 궁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그는 40년간 미디안(아라비아)광야 한 모퉁이에서 시골촌부가 되어, 자신의 소유도 아닌 자기 아내의 아버지 양을 치며 살아왔습니다. (모세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상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그날도 모세에게는 전혀 특별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그날도 40년을 매일같이 반복해 온 양치는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날에 비범한 사건, 즉 하나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리 편에서 부던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훈련해야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도 하면 특별기도회 정도는 해야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매일같이 예배(일주일부흥회, 4박5일 수련회)를 드리는 열심을 보여야만이 하나님의 우리의 미팅요청에 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모세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 체험은, 사람 편에서 그 어떤 준비도 없었다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모세에게 호렙산 체험은 갑작스런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철저하게 그야말로 430년간 완벽하게 준비된 사건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그 날, 그 시간의 호렙산에 대해서 출애굽기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다함께 읽습니다.) 출애굽기 3: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렀다”
이 본문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호렙산’입니다. 그런데 그 산은 하나님의 산이었습니다. 출3:1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호렙산에 이미 와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모세가 저 멀리서부터 40년 동안 매일같이 반복한 일상대로, 양떼를 힘겹게 이끌고 호렙산으로 점점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 좀 더 하나 하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구요? 호렙산 체험이 우리에게도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호렙산 체험이 왜 필수적인지를 조금 후에 나누겠습니다. 우선은 호렙산 체험이 일어난 상황에 집중하겠습니다.
[호렙산 사건 현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실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은 하나니의 움직임을 전혀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본문에서 모세는 양떼들과 함께 광야길을 걸어서 하나님이 계시는 호렙산으로 이동하여 오는 것입니다. (이 모세의 움직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움직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세는 하던대로 양 떼를 데리고 움직이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대 그 40년간 반복해온 모세의 일상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호렙산의 위치는 미디안 광야 안에 있는 곳입니다. 미디안 광야는 모세가 40년간 양을 치는 자기동네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모세의 동네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만나주기 위해서 모세를 특별한 산(예를 들어, 가장 높은 에레레스트 산)으로 불러내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한 의도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위치인 호렙산 정상(특별할 수 있는)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호렙산 산자락중 한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떼를 인도하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일상을 아시고 호렙산에서 기다리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상중에서 우리를 만나시려고 이미 거룩한 작업을 시작하셨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만나려면 하나님을 간절히 불러서 그분을 불러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셔야 한다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에 대한 거리감이 조금이라도 더 느껴지면, 그 거리감을 상쇄하려는 듯 더욱 힘을 주어 “주여 주여”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위 ‘신’을 부르는 방식은 소위, 미신이나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중요하게 사용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무당이 굿을 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귀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예배의 시작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예배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으라 구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나에게로 오시도록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난 이후에야 우리에게로 다가와 앉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구한다는 것, 찾는 것, 두드린다는 것의 의미는, 이미 내 삶속에 와 계신 하나님을 내가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미 내 삶의 현장에 미리 오셔서 서 계시는 그 하나님께 우리가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체험,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결국에 목적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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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에게 왜 호렙산 체험이 필수적인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체험이 없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일을 시키거나,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체험의 가장 필수적이고도 우선적인 동기”는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실제로 모세의 호렙산 체험은 먼저 모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신뢰하도록 이끄시기 위해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정말인가? 증명
그런데 출애굽기 본문에서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기 이전에,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명칭이 무엇입니까 ? “이스라엘”입니다. 의미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본문을 보면, 출애굽기 기자는 출1:1에서 ‘이스라엘’을 등장시킵니다. 7절 이스라엘 ,9절 이스라엘,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바뀌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출애굽기 기자가 사용하는 명칭인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의 후손들을 부르는 명칭이 나타납니다. 물론 하나님도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정의하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백성 ”이라는 “암미(내백성)”입니다. 그런데 본문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서 “내백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성경전체에서) 그 전환점이 무엇입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 사건입니다.
호렙산 전에, 야곱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남들이 불러주는, 객관적인 호칭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교인, 성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이 불러주는 명찰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그리스도이이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보고 너는 한국인이야 그러는데, 정작 나는 한국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모세의 호렙산 체험 이후에, 성경본문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내백성”입니다. 내백성이라는 표현은 물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이 아니라, 주님으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뒤에 하나님을 부르는 명칭이있습니다. “여호와”입니다. 이 여호와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등장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라고 발음하는 대신에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도나이입니다. 이것이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 체험한 이후에 모세가 사용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호렙산에서의 하나님 체험 이후로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항상 ‘아도나이(주님)’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공동번역)” 이와같이 성령님이 함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신명기의 그 GOD는, 하나님이십니까? 주님이십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신명, 하나님은 그것은 이스라엘인지는 몰라도, 내백성은 아직 아닙니다.)
이스라엘민족 전체가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 체험을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이제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 양지공동체에게 이것을 동일하게 행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규례와 법도”인 십계명을 친히 써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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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십계명(공동체가 붙잡아야할 법)을 주시기 전에 서두가 좀 길게 나옵니다. 그것인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내용의 줄거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체험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그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체험과 우상숭배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에 경배하고 섬기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가 40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명기4:16~40)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듣고 기억해야하는 구체적 대상이 좀도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그저 이스라엘백성 전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호렙산 체험을 가진 이스라엘입니까?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불길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 그런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
하나님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문제(십계명)”는 곧, 하나님 체험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체험하고서도 이후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참 무서운 말입니다만) 배고프면 밥을 찾는 것이 너무나 쉽고 당연하듯이,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 반복하여 우상숭배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이 부분에 너무나 약하다.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또한 아시기에...본 계명인 십계명을 주기시 전에 미리부터. 4장 전체를 할애하면서까지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것, 그 대신에 다른 것을 의지하게 하는 것, 그것은 모두 죄입니다. (사람을 의지, 예배행위 자체를 의지하게, 기도행위 자체를 의지하게, 사람들의 규모를 의지하게, 분위기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
[특별함]
신명기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체험”이 갖는 의미는 “특별함”입니다.
신명기4:7절, 8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특별한 신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와는 반대로, 십계명, 특히 하나님체험을 잊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지는 우상숭배 금지는 하나님의 특별함을 훼손하지 말라는 명령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을 용납하지 않습니다.(만들어진 우상으로도 그 특별함은 훼손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특별한(유일한) 하나님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에게 특별한 백성(하나님체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이 됩니다. 하나님에게 우리교회공동체는 유일한 특별함입니다. 그렇기에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전부 드러내고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유일한 특별함입니까?
(정리)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데 핵심 키워드, 그것이 “호렙산 체험”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핵심축에 “하나님 체험”이 있습니다.
(그 체험은 상호간에 특별함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당진에 위치한 신리성지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묻혀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의 순교자 고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고을을 전부다 준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흥선대원군이 보낸 군인들에 의해 목이 베어져 땅에 묻혔습니다.
우리 양지교우들 모두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특별함. 하나님의 교회공동체에 대한 특별함을 갖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