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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 바사,바사왕국=페르시아,페르시아왕국(이란)
* 파르스(Fars) →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부른데서 비롯됨.
페르시아(Persia) → 파르스(Fars)의 라틴어화(化).
바사 → 한글성경에 페르시아를 [바사]로 번역.
바사, 바사왕국은 성경에서 페르시아, 페르시아왕국(제국)을 지칭하는 말이다.
페르시아(Persia)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피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구약 시대의 바사 왕국은 동으로는 인더스강,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고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북쪽으로는
카스피해를 국경으로하는 광대한 영토를 갖인 제국이었다. 즉, 페르시아 제국은
이란 고지대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던 고대 제국을 통칭하는 말로, 그 기원은 아케메네스 제국
(BC 550~ BC 330)이다.
[ 페르시아 제국의 왕들 ]
- 고레스 2세(Cyrus Ⅱ, 고레스 대왕 ,BC 559~530) )
-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 ,BC 530~522)
- 가우마타(Gaumata ,BC?~,BC 521) * 캄비세스 2세의 동생
- 다리오 1세(Darius Hystaspes,다리우스 ,BC 522~488)
- 크세르크세스(Xerxes,아하수에로, BC 485~465)
-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Ⅰ,BC 465~424)
*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 다리우스 2세(BC 423~404)
- 아하수에로 2세(BC 424~423)
- 아닥사스다 2세(Artaxerxes Ⅱ, BC 404~359/358 재위, 5~6년간)
* 다리우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
- 다리우스 3세(BC 336~330)
* 알렉산더에게 패함
바사 (Persia=페르시아)
(1) 지역의 역사:통칭 `페르시아'라고 하는 이 제국의 역사는 고레스 Ⅱ세 대왕(Cyrus Ⅱ,BC 539-530 재위)에서 비롯한다. 물론 바사의 경우도 많은 고대 제국과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기까지의 전사가 있다. 바사의 땅은 대략 현재의 이락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란'이 이 땅의 원명이다. 바사는 동쪽은 인더스 강에서 서쪽은 티그리스, 유브라데 강에 이르기까지의 이란 고원 지대에 위치한다. 이 지방에는 카스피 사람(Caspians)이 원주민으로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BC 1500년 경 아리아 사람(Aryans)이 이 땅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란'이란 아리아 사람의 (땅)을 의미한다. 이란 고원에 침입한 아리아인중 메대 사람과 바사 사람이 역사상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메대인은 바사인보다도 한걸음 앞서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신바벨론과 협력하여 앗수르를 멸망시키기 위해 한몫을 했다. 그러나 고레스 Ⅱ세는 바사의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의 외가인 메대 왕가를 멸하고마침내 바벨론도 그의 군문에 투항하였다(BC 539). 이사야서는 이 고레스 Ⅱ세 대왕을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사 45:1)라 부르고 있다. 고레스는 크게 관용한 종교 정책을 취하였다. 바벨론의 말룩 성전을 부흥시키고, 바벨론에 포수민(浦囚民)으로서 끌려간 유대인을 해방하였다. 고레스는 바사 제국의 영토를 사드라비(Satrapies=Provirces)라 불리우는 약 20의행정단위로분할하고, 제각기 지방 행정관, 또는 태수(太守)를 두었다. 모든 사드라비에서는상당히 광범위하게 자치와 자유가 인정된 듯하다. 피정복 백성의 종교나 법률이나 풍습을될 수 있는 대로 존중하는 유화정책은 그후부터 바사 왕의 정통으로서 계승되었으며, 바사제국이 200년 동안의 수명을 보존한 요인으로 되었다.고레스는 바르사가르다(Parsagarda)에 왕궁을 건조하였다. 이 왕궁에는 앗수르, 바벨론, 힛타이트, 애굽 등의 건축 양식이 정교하게 수입되었으며, 거기에 그의 이상과 새 바사 제국의실태가 잘 반영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고레스의 후계자로 된 것은 그의 아들 감부세스Ⅱ세(Cambyses Ⅱ, BC 530-522 재위)였다. 그는 애굽을 정복하여 그의 지배하에두고 바사 제국을 유사 이래 최대의 국가로 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이란의 풍습이 아닌 제매 결혼(第妹結婚)을 하거나, 애굽 원정시 빈 틈을 타서 왕위를 빼앗길까 보아 자기 동생을암살하여 성격상의 파탄이 인정되었으며, 또 극도로 시기심이 강하였다. 감부세스는 애굽에게 승리를 거두게 한 후 곧 발광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감부세스의 사후 가우마다(Gaumata란 암살된 감부세스의 동생 스메르디스=바르디아, Smerdis, 고바사어Bardia)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하고 바사 왕위를 빼앗았으며, 한편 바벨론에서도 모반이일어났다. 바사 제국의 이와 같은 혼란 상태를 진정시키고 제국의 통일을 회복시킨 것이 다리오 Ⅰ세 대왕(Darius Ⅰ, BC 522-486 재위)이었다. 다리오는 가우마다를 죽이고난을 평정하려고 했지만 제후(諸侯)는 가우마다가 정통의 왕이라고 오신(誤信), 쉽게 다리오를 좇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이들 제후를 정복하기로 하고 마침내 제국의 통일사업을 완성했다. 그 경위를 적은 전승 기념비가 유명한 `베히스단 암벽의 비문'(Inscriptions ofthe Behistun Rock)이다. 이 바위에는 아브라마즈다신의 비호하에 반역자를 굴복시킨 광경을 새긴 양각 바넬이 있다. 베히스단의 바위는 엑바다나에서 바벨론에 이르는 교통 중심지에 있어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다리오 왕의 위광(威光)을 널리 알리는데 다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다리오 왕은 각지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레스에 의해 시작되었던 제국내의 행정 조직의 완성을 꾀하였다. 전토를 20 사트라비로 나누고 각각 방백(Satrap, 스 8:36기타, 에 3:12기타,단 3:2-3기타 참조)을 두고 제국내의 신민을 그 전통이나 습관을 중히 여겨 평등하게 처우하도록 유의하였다. 다리오 왕은 사드라비를 과세 단위로 하는 신세제를 마련하여국가 재정을 확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폐를 발행하여 국가 경제의 진흥에도 진력하였다.이렇게 하여 제국내 각지에 경제적 번영이 재래되었으며, 그에 따라 지방 경제권 사이에 유통성이 생겼다. 이리하여 제국 경제가 진전했을 뿐만 아니라 곧 헬라나 지중해 연안 지방과의 교역으로 발전하여 갔다.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교통의 편도 좋아졌다. 수산에서 사대,에베소에 이르는 `왕의 길'은 특히 유명하다. 또 파발마(擺撥馬)의 제도도 창설되고, 평전시를 불문하고 제국의 통일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다리오는 또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대궁전의 건축을 개시하였다. 그 공사는 크세르크세스 Ⅰ세(Xerxes Ⅰ)가 인수하여 완성하였다. 그 후 아닥사스다가 증축하였기 때문에 이궁전 건축은 3대에 걸친 셈이다. 특히 `알현실' `주랑(柱廊)'은 유명한데, 그 규모의 크기,장려(狀麗)함은 왕을 배알하려 오는 모든 왕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 건축양식에는 메대 바사적인 전통 예술에 바벨론, 앗수르, 애굽, 헬라의 양식을 교묘히 수입하였으며, 이를테면 당시의 일대 종합 예술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리오 왕은 아브라마드다신(神)에 대하여 깊은 신앙을 가졌고, 경건한 문장을 많이 남겨 놓았다. 그러나 종교 정책에관해서는 매우 관용한 태도를 취하고 바벨론, 애굽, 유대인 각기의 고유한 신앙에 대하여 자유를 인정하고, 자신도 이방신들에게 헌금하거나 예배를 하기도 하였다. 유대인이 다리오 왕시대에 예루살렘 제 2성전 건립을 허락한 것도 이와 같은 바사 제국 전체의 종교 정책하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다.다리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Ⅰ세(BC 486-465 재위, 스 4:6의 `아하수에로스')가 즉위하였다. 그는 헬라와 싸워 살라미, 브라다이아의 해륙전에서 대패배를맛보았다. 헬라 원정에는 실패하였지만 제국의 기초는 아직 견고하였고, 호사한 궁중생활을보내다가 드디어 신하들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크세르크세스 I세 암살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닥사스다 Ⅰ세(BC 465-424 재위, 스 4:7의 왕)이다. 그는 아덴과 화목하고 그 결과 바사가 헬라에 대하여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을 주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동서의 문화 교류가 왕성하게 되어 헤로도터스가 제국내의각지를 여행하여 역사를 써 데도크리터스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또 바사의 미술은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바사는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하강선을 더듬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바사 제국의 왕은 크세르크세스 Ⅱ세(BC424-423 재위), 다리오 Ⅱ세(BC 423-401 재위), 아닥사스다 Ⅱ세(BC404-358 재위, 스 7:1의 왕), 아닥사스다 Ⅲ세(BC 358-338 재위), 아르세스(Arses, BC 338-336 재위), 다리오 Ⅲ세(BC 336-331 재위, 느 12:22의왕)로 이어지나 왕실 내의 내홍(內訌)이 꼬리를 잇고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리고드디어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이 익소스의 싸움(BC 333)과 가우가메라 아르베라 회전(BC 331)에서 바사 제국군을 격파했다. 이리하여 바사 제국은 멸망했다.
(2) 종교:`아베스다'(Avesta)는 고대 이란의 종교 문서이며, 여러 가지 점에서 인도의 `르그베다'(R. Veda)와 대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드라(Mitra), 바루나(Varuna), 인드라(Indra), 쌍둥이인 나사두아(Nasatya) 등의 신들이 아베스다에게서도 발견되어 고대에 있어서 인도와 이란 간에 공통적인 신앙적 배경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란 사람은 인도의 신들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고 몇 가지 개혁을 했다. 이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후라마르다(Ahuramazda)가 최고 신으로서 숭배되고, 미드라(Mithra=인도의 Mitra),하오마(Haoma=인도의 Soma) 등은 아후라마즈다보다 하위에 있는 신들이었다. 가다(Gatha)는 아베스다의 일부인데, 그 안에 조로아스터교(拜火敎)의 설교가 보존되어 있다. 그 설교는 윤리적 이원론과 더불어 아후라마즈다의 유일신교적 경향을보이고 있다. 이원론은 진리와 허위, 선한 정신과 악한 정신이라는 대립으로 표현되어 있다.그런데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옹호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다. 즉,다리오Ⅰ세 대왕의 아버지인 비스다스바란 인물이 조로아스터에 귀의하여 그 옹호자로 된인물이라고 하는데, 조로아스터의 연대는 전승에 의하면 BC 660년 경부터 BC 583년 경 이었으므로 이 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비스다스바를 좀더 빠른 연대에 산 동명의 인물로 보느냐, 조로아스터의 연대를 BC 570년 경까지 끌어 내리느냐 하는 문제로 견해가 갈라지는 것이다. 양자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결정짓는 것은 곤란하다. 여하튼간에 다리오Ⅰ세가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열심히 신봉하여 아후라마즈다의 열렬한 신앙자였다는 것은틀림없다. 신앙의 점에서 바사의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이란 고지대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던 고대 제국을 통칭하는 말로, 그 기원은 아케메네스 제국(BC 550~ BC 330)이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피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원은 BC 815년경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Susa)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Parsumash)에 정착한데서 시작한다. 이들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Elam)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왕자가 안잔(Anzan) 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키루스 1세(Cyrus Ⅰ)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는 메디아왕국(Media)의 공주 만다인(Mandane)과 혼인함으로서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캄비세스의 장남 키루스 2세(Cyrus Ⅱ, BC 559~529 재위)는 쿠루쉬(Kurush)라고도 불렸으며,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초석을 마련했다. 왕위에 오른 키루스 2세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BC 545년).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앙과 제례의식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서 B.C. 529년 아랄해 연안의 자카르테스(Jaxartes)유역의 스키타이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선 키루스 2세는 전쟁 중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사망했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Kambyses II)가 왕위에 올라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멸망한 메디아의 종교지도자 가우마타(Gaumata)가 캄비세스 2세의 동생임을 자처하며 왕권을 차지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집트에서 돌아오던 캄비세스 2세는 재위 8년만인 B.C. 522년에 이집트의 시와(Siwa)에서 사망했다.
캄비세스 사후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그를 도와 페르시아의 군인으로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던 아케메네스의 왕족 다리우스1세(Darius Ⅰ: B.C. 521~486 재위)가 이집트로 돌아와 B.C. 522년 가우마타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B.C. 521년 12월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1세와 그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Ⅰ: B.C. 486~466 재위)의 통치 기간 중 아케메네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다리우스 1세와 크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은 동서로는 히파시스 강에서 리비아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카프카스 산맥과 아랄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전국토를 20개 주로 나누었으며, 징세와 병역을 부과했다. 또한 정복민에 대해서도 관대했으며, 각 지방마다 ‘사트라프’로 불리는 총독을 파견하는 한편, 왕의 직속 관리들이 총독을 감찰해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리우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다(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활발한 건축 사업을 벌여,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엘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세웠다. 특히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을 묘사한 비수툰(Biston) 부조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과 세공품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뛰어난 예술 양식을 보여준다. 도로망의 확충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총 2,400 km에 달하는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도입하여 각 역에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쟁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여러 국가의 모범이 되었다.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BC 500년 경의 페르시아제국]
다리우스 1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를 정벌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유능한 지휘관 마르도니우스가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ses Ⅰ: B.C. 424년 사망)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부터 왕족 내부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세(Xerxses Ⅱ)는 소그드인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후계자 다리우스 2세(Darius Ⅱ) 역시 그 정통성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리우스 2세의 장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ses Ⅱ)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리스 용병을 고용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 3세(Cyrus Ⅲ)의 반란으로 바빌론에서 사망했으며, 왕위는 키루스 3세에게 이어졌다. 아르타크르크세스 3세(Artaxerxses Ⅲ) 때에 이르러 아케메네스 제국은 B.C. 358년에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B.C. 343년에 이집트 다시 정복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3세(Darius Ⅲ: B.C. 336년 즉위)가 즉위할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Alexander Ⅲ),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제국 깊숙히 동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리스군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으며,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다음해 6월 다리우스 3세가 자신의 부하 베수스(Bessus)에게 암살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인해 헬레니즘 문명에 의한 페르시아 통치가 지속되다가 BC 250년에 파르티아 제국(250 BC-AD 226)이 들어서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그 후 사산왕조 페르시아(226~651), 사파비 왕조(1500~1722), 팔레비 왕조(1925-1979) 등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인터넷자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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