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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로
(1)
삼남대로 소사점에서 분기한 충청수영로
통영별로에 이어 곧 시작하려던 충청수영로 걷기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봄 맞을 준비를 전혀 해놓지 않은채 집 떠나 제주로와 통영별로에 24일을
바치고 돌아왔을 때 앞마당의 많은 꽃들이 늙은이의 귀환을 반겨 주었다.
무심한 주인영감에 대해 불만이 많았을 텐데도.
라일락이 향을 내뿜기 시작했으며 진달래를 비롯해 매화, 앵두 등이 이미
활짝 피었으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겨울을 이겨낸 나무와 꽃들.
겨우내 거의 외면하고 멀리만 쏘다녔기 때문에 북한산, 도봉산의 불만도
큰 듯이 느껴졌다.
봄으로 미뤘던 원근 지인들과의 약속도 이행해야만 했다.
그래서 두 달이 살 같이 가고 6월 4일 다시 집을 나섰다.
고산자의 대동지지에 의하면 충청수영로(忠淸水營路)는 해남대로(삼남
대로)의 소사점(素沙店/평택시 비전2동 소사마을)에서 분기한다.
소사점에서 충청수영(보령시 오천항)까지는 210리 길이다.
경도 ~ 소사점의 150리를 더하면 한양에서는 총 360리가 된다.
아침 9시 30분쯤에 평택시 소사마을(碑前2동)'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
施行記念碑)' 앞에 당도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다.
포승면까지 100리가 되는 평평하고 넓은 들(소사평야)의 마을이라 해서
소사동이며 소사점(素沙店)은 삼남대로 나그네의 편의시설이다.
소사마을 대동법시행기념비
대동법시행기념비는 대동법의 시행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碑)다.
대동법이란 각지방의 특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쳐야 했던 폐단을 없애고,
미곡으로 환산해 바치도록 개정한 이조 중기의 납세제도다.
이조14대 선조41년(1608/광해군즉위년)에 선혜청(宣惠廳)을 두고 경기도
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인조때에는 찬반 양론으로 시련을 겪었으나 17대효종2년(1651) 영의정이
된 김육(金堉)이 왕의 허락을 받아 호서지방에 실시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공부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방납(防納)의 폐해가
없어지고 민간상거래까지 원활해짐으로서 백성의 주름이 펴지게 되었다.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명했다.
단지 알리기 위함뿐이었겠는가.
자기의 치적을 드러내고 싶었겠지.
이무렵(1658년) 영의정 김육이 사망했다.
그의 공을 잊지 못한 호서지역 민초들이 부의금을 갹출하였으나 상가(喪
家)에서 받기를 사양하므로 백성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비를 세웠단다.
그렇다면 충청땅에 세우지 않고 왜 경기지역에?
이 지역이 지금은 경기도지만 당시에는 충청도 진위군이었음을 의미한다.
효종10년(1659), 지금의 위치에서 50여m 남쪽 언덕에 세워진 ‘김육대동
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湖西宣惠碑)’다.
이 해 5월에 효종도 사망했으니 망정이지 살아있었다면 아마 비명이 문제
되어 소동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1970년에는 현 위치로 이전했고 비명도'대동법시행기념비'로 바뀌었지만.
청풍인(淸風人)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 ~ 1658).
그는 대동법과 시헌력(時憲曆) 시행을 비롯해 양수용 수차제작, 상평통보
주조 유통시도 등 혁혁한 족적을 남긴 상신(相臣), 명신(名臣)이다.
그럼에도 그는 두 아들(佐明, 佑明)의 과욕 때문에 유사 이래 최초의 호화
분묘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쟁을 더욱 격화시킨 '김육 묘수도사건'(墓隨道事件)이다.
출생지는 외가가 있는 서울 마포지만 본가는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잠곡
마을(청평리)이며 그곳에 그를 기리는 잠곡서원이 있었다.
그의 호(號)도 본가 마을 이름에서 나왔다.
한데 그의 묘가 왜 남양주 땅에 있을까.
평해대로를 걷다가 남양주시 상패동에서 그의 묘를 만났다.
옛 평해대로 지역으로 평구도찰방역이 있던 평구마을에서.
한국JC의 발상지
기념비 이웃에는 '역사유적근린공원이' 있다.
소사지역의 개발과정에 청동기시대 유적들의 발견이 계기가 되어 공원을
조성한 것 같다.
임진. 정유의 양 왜란때 소사벌 대첩이 있었던 전적지 소사교와 청일전쟁
(1894)이 전개되었던 소사벌이라는 역사성 외에도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유적을 비롯해 신석기, 청동기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
소사지역 유적발견지와 유적공원
남반도 최초, 최대의 유적발견지는 충남 공주시 석장리다.
단양(충북) 수양개, 서울 암사동, 대전 노은동, 양양(강원) 오산리, 울주
검단리, 제주 삼양동, 연천(경기) 전곡리 등 유적 발견지는 전국적이다.
평택지역 역시 도처에서 유적이 발견되고 발굴됨으로서 선사문화의 보고
라며 선사박물관의 건립을 바라고 있단다.
소사에서 15리 어간인 팽성읍으로 갔다.
삼국시대에는 팽성군(고구려) 지역이었으며 이조시대 초기에 평택 치소
였던 팽성읍.
충청수영로에서 평택(平澤)으로 되어 있으나 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와
안정리의 향교와 객사 마을이다.
KTX철로(위)와 보호수(아래/팽성읍 두리):450살 향나무로 백일기도를
드리면 소원을 이룬다 해서 주민들이 보호한다는 나무
평택향교(위)와 팽성읍객사(아래)
오늘날에는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안 남아있으나 두 기능을 함께
수행했던 향교.
객사리에 있는 경기도문화재자료제4호 평택향교의 안내판에 창건시기를
이조3대 태종13년(1423년)이라 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수차에 걸쳐 재건 중수를 하였다는 향교의 이력을
알리는 안내판이 오류를 지닌채 얼마나 더 서있으려 하는가.
태종13년에 창건했다면 1413년이고 1423년이 맞다면 세종5년이다.
왜냐하면 태종은 1418년에 세종에게 선위하고 1422년에 사망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있는 지방관아의 중심건물이었다.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이 전패 앞에서 망궐례(望闕禮)를 올렸으며
용무가 있는 중앙 또는 타지방 관리들이 숙식하던 곳이다.
팽성읍객사(彭城邑客舍/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7호)는 이조9대 성종19년
(1488)에 지은 후 18대현종과 19대숙종때 중창 중수했다는 것.
330개 현(縣) 중에 가장 작아서 객사의 규모도 작고 초라했다지만 일제는
이 객사를 민간인에게 불하였단다.
그들은 다른 지역의 옛 동헌도 매각처분했다.
한민족의 역사성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한 그들이다.
전주(전북)의 동헌은 한 문중의 제각으로 재활용되었는가 하면 이 객사는
양조장과 개인주택으로 사용되었다니까.
1994년(1995년?)에 해체 복원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는데 향교는 말할 것
없고 객사까지 굳게 잠겨있다.
팽성읍사무소에 들러 항의(?)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란다.
기가 찰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읍사무소 직원들의 무관심과 불친절은 가히 챔피언 감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팽성레포츠공원변에 서있는 '한국청년회의소발상지'
기념비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다.
한국청년회의소 발상지 기념비(위)와 팽성읍사무소(아래)
6.25민족동란으로 온 나라가 참담한 지경에 빠져있던 1951년에'한국청년
회의소'가 이곳 팽성에서 태동했단다.
당시, 평택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5공군 정훈장교 스포츠우드(Manning
W. Spottwood) 중위에 의해서.
이 곳에서 그로부터 JC(Junior Chamber/청년회의소)를 소개받은 청년
12명이 한국청년회의소를 발기하게 되었다는 것.
JCI(Junior Chamber International/국제청년회의소)는 미국인 기센비어
(Henry Giessenbier/1892~1935)에 의해 창시된 순수 국제민간단체다.
한국JC의 강령은 "시대적,사회적 사명을 자각하고 JC본연의 이념을 같이
하는 청년들의 웅지와 정열을 한 데 모아 자주적, 자립적, 자발적 실천력
으로 복지사회 건설과 세계평화를 이룩하는데 총력을 다한다"는 것.
우리나라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비정부기구, 민간 공익
단체)의 선두주자라는 자부심을 가진 단체다.
그런데도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그들의 관심은 도대체 무엇인가.
별악암은 어디에?
팽성객사에서 송화삼거리와 팽성초교, 송화사거리를 지나며 국도(45번/
팽성로)를 피해 군계천(노성교)을 건너 둔포면소재지에 당도했다.
군계천(郡界)은 경기도와 충청남도, 평택시와 아산시,팽성읍과 둔포면을
가르는 하천으로 옛 탁천(濁川)이며 둔포면소재지가 옛 탁천점일 것이다.
소사점~평택 15리, 평택~탁천점 7리 등 22리인데 소사점에서 아교(牙橋)
와 맹간교(盲看橋)를 건너 곧바로 가면 소사점~탁천이 17리란다.
팽성을 경유하지 않는 지름길이었던 듯.
아교는 궁말(宮里)에 있었던 안성천의 다리로 좁고 길어서 '애고' 소리가
절로 난다 해서 애고다리로 불리었으며 맹간교(현 안성교)는 정유재란때
왜군이 조명(朝明) 연합군에 대패한 소사벌전투 다리로 망군(亡軍), 망근
다리로 불렸단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염로국 지역이었다는 아산시(牙山).
백제시대에는 탕정군, 아술현, 굴직현, 통일신라시대에는 탕정주, 기량현,
고려시대에는 온수군, 인주현,신창현이었다가 이조시대에 온양군,아산현,
신창현으로 나뉘었으며 일제강점기(1914)에 아산군으로 개편된 고을이다.
1986년 온양읍이 시로 승격해 분리되었으나 1995년에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 아산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둔포면은 아산시의 최북단이다.
이조때만 해도 같은 호서지방이었는데 팽성읍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행정상으로는 도가 다르고 시와 읍면이 다르지만 바로 이웃인데도.
둔포면사무소 총무팀장과 팀원은 요로원 길을 내게 설명하려고 PC에서
지도를 출력해 자상하게 알려주었으니까.
둔포면사무소(위)와 45번국도(아래)
둔포천을 건너 둔포교차로 이후에 잠시 45번국도를 따랐다.
국도에 흡수되지 않은 자투리 길이 이따금 있으나 통행 차량이 많지 않아
걸을만 해서.
관터삼거리에서 관대삼거리까지 옛길을 들락거리며 '별악암(別惡巖)'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탁천점에서 8리라면 관대리 어느 지점일 텐데도 면사무소 직원들은 물론
관대리에서 어렵사리 만난 노옹들도 금시초문이란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둔포관대보건진료소, 관대복지사거리로 나왔으나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196호 윤보선(海葦 尹潽善/1897~1990)
대통령 생가 1km' 안내판 외에 알게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나라 유일한 내각책임제 정부의 대통령이었으며 군인들의 쿠데타로
도중 하차한 분이다.
실권이 없는 상징적 원수지만 '영국신사' 라는 별칭으로 존경받던 분인데
이곳 둔포면 신앙리(新項)에서 태어났단다.
장기집권과 독재정권에 항거한 4.19민주혁명(1960년)으로 탄생한 정부가
겨우 9개월이 되었을 때 처숙질 두 군인이 주동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터진 봇물처럼 분출한 욕구로 인한 혼란이 이유였다.
그들의 쿠데타 계획은 진즉 꾸몄으나 4. 19혁명으로 인해 시기를 늦춘 것.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미국의 시사주간지(TIME?)는 '9개월구정권
(9 Months Old Government)'이라고 쿠데타를 비아냥댔다.
미국식으로 보면 허니문 기간(6개월)이 겨우 지났을 뿐인 새 정부를 무력
으로 내쫓고 차지해 18년 반이나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깊숙히 들어온 서해를 따라 소금배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둔포천,둔포(屯
浦)라 했다는 지역.
옛 천안군 모산면의 모산부곡(毛山部曲)과 면 사무소 지역이었다 해서
관터 또는 관대(館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마을에 별악암은 없다.
(부곡이란 통일신라와 고려때, 천민 집단의 거주마을을 말하며 특히 고려
때는 특수지방 행정단위로 조직화하여 목축, 농경, 수공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일반 백성들과도 함께 살 수 없는 천민의 거주지역을 의미했다)
어디에도 없는 별악암 찾기를 포기했다.
'벼락바위'의 한자표기일 수도 있겠다 싶어'벼락맞은 바위'의 전설이라도
있나 백방으로 알아보기도 했으나 도로(徒勞)였을 뿐이다.
음봉면과 경계인 봉재리(鳳在里)의 긴 봉재저수지에 평일(木요일)인데도
많은 조사들이 낚시삼매경에 빠져있다.
혹시나 하고 말을 걸어보았으나 역시나였다.
악명 높았던 어라산이 성지가 되다
'요로원길' 안내판이 나타나고 '요란슈퍼' 간판도 눈에 들어왔다.
음봉면 신정1리(陰峰面新井)로 둔포면사무소 직원들이 말한 옛 요로원
(要路院) 마을이다.
관영 숙박소가 있었으며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라는 해학적 풍자
야담이 만들어진 곳이다.
이조19대 숙종 때 이야기다.
1678년(숙종4년) 박두세(朴斗世)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야담이다.
과거에 낙방하고 낙향 중인 충청도 선비가 이곳 요로원에서 만난 오만한
한양 양반을 골탕먹이는.
주인공을 1인칭으로 하여 2인칭과 밤샘하며 나눈 육담풍월(肉談風月)을
통해서 세태를 비판한 것.
우리 말로 나눈 대화에 한문이 몇줄 나온다.
서울사람:
"아관향지도 괴저형체조(我觀鄕之徒 怪底形體條)"/내가 시골내기를 보니
생김새가 괴상하더라.
이에 더하여
"부지언문신 하괴진서소(不知言文辛 何怪眞書韶)"/언문을 모르는데 진서
모르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는가.
시골사람:
"아관경지표 과연거동융(我觀京之表 果然擧動戎)"/내가 서울사람을 보니
과연 하는 짓이 오랑캐로다.
옛 요로원 마을
요란슈퍼에서 한 초로의 귀인을 만났다.
음봉 땅의 농토를 가진 둔포주민으로 모심을 논을 살피러 가는 중이라는
그가 벼락바위 전설을 알고 있단다.
기대하지 않고 무심코(습관적으로) 물었을 뿐인데.
이야기를 들으려면 잠시 그의 차를 타고 그의 논 앞까지 가야 했다.
늙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청상과부가 흉년에 살 길이 막막했다.
구걸에 나섰으나 빈 손으로 귀가하던 중 고개마루의 한 바위에 양식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있을 때 개가 생쌀과 보리쌀을 토해내고 지나갔다.
그녀가 그 쌀들을 가지고 돌아와서 깨끗이 씻은 후 죽을 쑤어 시부모에게
드렸을 때 벼란간 뇌성벽력에 천지가 무너지는 듯 했다.
자기 행위에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한 며느리는 고개로 돌아가 그 바위를
향해 다시 빌었다.
용서를 빌고 있을 때 벼락은 그 바위를 때렸고 두 조각난 바위 안에서는
황금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 고개를 '청동고개'라 부르며 며느리의 효성을 기리고 있는데 구전과정
에서 '청댕이고개'로 변했으며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 한다는 것.
그럴싸한데 이럴 수가.
어이없게도 이 고개는 둔포에 있지 않고 아산시내 온양동에 있단다.
풍기사거리와 읍내사거리 사이?
허탈한 기분으로 되돌아나와 어라항현(於羅項峴)을 넘어야 했다.
국사봉과 금산, 반대편에는 둔덕산과 연암산 등산로가 있는 고개다.
요로원에서 4리가 되며 "이즘에는 어래현이라 부르며 충청우도의 요해지"
(今稱御來峴 湖右要害/大東地志)라는 고개다.
고개아래 주유소에서 듣기는'어리목고개'지만 어라산 자락의 고개라니까
'어라목고개'가 맞을 것 같다.
어리목고개로 불리는 어라항현
한데, 어리목고개에도 전설이 있단다.
온양에서 음봉을 경유해 둔포, 성환 방면으로 통하며 한양길 길목 고개라
나그네는 물론 장사꾼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래서 어라산을 거점으로 한 도적떼에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 넘어야 했다.
여럿이 무리지어 넘던 고개라 해서 어리목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
의적 임꺽정도 한 때 여기 어라산에 웅거하며 재물을 탈취했다는 고개.
몰락한 양반 가문을 일으키려고 과거를 보러가던 빈한한 과부의 아들도
이 고개에서 도적떼에 당했다.
간신히 탈출해서 과거에 급제,벼슬길에 오른 후 이 고개의 도적떼를 소탕
함으로서 그 후로는 편히 넘어다니게 되었다나.
악명높았던 어라산이었지만 1614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가 들어
섬으로서 성지가 되었다.
이 충무공 없는 아산은 바람 빠진 타이어?
어라항현에서 6리 밖인 주막 신점(新店)에서 여럿이 모이면 함께 고개를
넘어 요로원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점은 어딜까?
곡교천이 8리, 신창과 온양이 각 20리라면 음봉면소재지 어디쯤이겠다.
'새터말길' 표지판으로 보아 짐작해 보지만 해가 이미 사라져 그 위치를
찾아볼 시간이 없었다.
별악암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탓이다.
음봉면 소재지
음봉사거리에서 음봉천(삼거교)을 건너면 얼마 가지 않아서 옛길은 45번
국도에 흡수되고 음봉면은 염치읍으로 바뀐다.
곡교천(曲橋) 충무교를 희미한 불빛 속에서 건너야 했다.
차령에서 발원해 아산시를 거쳐 삽교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예전에, 염치읍(아산시) 일대의 하천에 나무로 놓은 굽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하천 앞 동네를 고분다리마을(曲橋里)이라 불렀단다.
그래서 마을 앞 하천이 곡교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섬진강처럼 일부 구간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르단다.
풍세면(천안시)에서는 한천(漢川/한내)또는 봉강천(蓬江川)이 되고,배방
읍(아산시)에서는 쑥개, 봉호(蓬湖), 봉강천(蓬江) 등.
통영에서 "충무공 없으면 통영도 없다"고 말했는데 아산시야 말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없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팥소 없는 찐빵보다 더한 공기 빠진 타이어 같다고나 할까.
임진(1592년),정유(1597년) 두 왜란이 끝나던 해(1598년),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의문스럽게 전사(戰死)했다.
자진해서 적의 살을 받았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니까.
충남지방 유생(儒生)들은 그의 호국,애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조정에
건의했고 어명으로 숙종(19대)32년(1706)에 현 위치에 사당을 지었다.
숙종이 이름을 짓고 사액한 현충사(顯忠祠)로 사적제155호다.
별칭은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 李忠武公 遺虛)'.
시련을 겪어오다가 성역화(聖域化) 된 현충사를 제하면 아산시는 참으로
공허할 것이다.
아산에는 이순신(李舜臣/1545~1598) 외에도 쟁쟁한 인물들이 있다.
고려말~이조초기의 맹사성(孟思誠/1360~1438),세종때의 장영실(蔣英實
/생몰연대불명),선조때의 이지함(李之函/1517~1578).이조말엽의 김옥균
(金玉均/1851~1893), 현대의 윤보선(尹潽善/1897~1990) 까지 있으나 이
충무공이야말로 군계일학이다.
그래선지 둔포에서 음봉을 거쳐 아산도심을 지나는 45번국도가'충무로'다.
예전에 비가 많이 내리면 배를 이용했다는(潦則用船) 곡교천에 놓여 있는
다리도 '충무교'다.
밤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충무교의 핸드레일은 갑옷 입은
충무공의 형상과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듯 했다.
해마다 4월하순(?)이면 충무교(염치읍쪽)~현충사((顯忠祠/염치읍백암리)
일대에서 성웅 이순신 장군 축제가 벌어진단다.
곡교천 충무교
충무교를 건너면 아산시의 다운타운이다.
신창 길은 밝은 날로 미루고 찜질방을 찾아나섰다.
충청수영로에 들어선 늙은 길손의 첫 날밤 안식처는 온양온천지역에 있는
온양팔레스호텔 찜질방.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