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원주안디옥장로교회
 
 
 
카페 게시글
성도의삶 스크랩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그리고 소명
오늘 나는 추천 0 조회 11 11.10.06 22: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그리고 소명

 

1.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번번히 놓치는 나쁜 습관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 자체에 그릇된 개념을 갖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여 따라야 할 미래의 길로 언급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은 성경에 거의 없다.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미래를 넘겨짚어 염려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해주며, 현재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명한다.

2. 하나님의 뜻에 관한 전통적 접근

전통적 접근에서 보는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따라야 할 미래의 구체적 길로 규정된다.
하나님은 그 길을 하시며 우리가 따르도록 정해 놓으셨다.
우리의 책임은 그 길(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따를 수 있는 많은 길들 중 정작 따라야 할 길을 찾아내야 한다.
바른 선택을 내리면 그 분의 은혜를 얻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

자연히 이 모델에 따르면, 결정을 내릴 시점이 되면 삶은 갑자기 미로가 된다. 출구는 하나 뿐이다. 다른 길은 다 막다른 골목이요 잘못된 선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의 결과는 막중하다. 바로 선택하면 그분의 복을 누리며 성공과 행복을 얻는다. 잘못 선택하면 길을 잃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놓친 채 영원히 풀 수 없는 미로에 갇혀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고, 표징을 바라고, 조언을 구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성경을 읽고,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하나님이 분명한 신호를 보내주실 거라는 희망 속에 기다린다. 하늘에서 분명한 음성이 들려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침내 선택을 피할 수 없는 시점이 찾아온다. 다른 모든 길을 거부한 채 유독 한 길을 택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끈질기게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친다면?"

3. 전통적 접근의 문제

① 날마다 내리는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결정 대신에 미래의 중요해 보이는 결정에 마음을 쏟게 한다.


"내가 어느 길을 택하든 그것이 정말 중요한가?"
어느 길을 가든 결국 내 직무 수행은 내 성품의 질과 믿음의 깊이와 능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
의학이냐 신학이냐를 택일하는 것이 문제의 요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내리는 작은 선택-부지런한 학생, 자상한 남편,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충실하지 않는 한 어느 길을 택하든 내가 내 삶에 진정 이루기 원하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에는 이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든 미래에 관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전혀 안달할 필요가 없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지 모른다는 끔찍한 가능성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현재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 분명히 밝혀야 할 부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밝혀 놓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 아닌 지의 여부는 날마다 내리는 선택-말다툼 후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 퉁명스런 직장 동료를 존중하며 대하는 것, 부엌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 기분 내키지 않을 때도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반응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미래에 관해 어려운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그 선택이 나머지 모든 것의 궤도를 결정한다. 성경에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말은 별로 없고, 오늘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그토록 많이 나와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② 하나님관이 잘못되어 있고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접근 방식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든 당신의 뜻을 숨겨두고 우리가 찾게 만드신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숨기시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분은 우리의 일을 어렵게 만들기를 즐기신다. 그분은 발견되는 것보다 숨기는 것을, 우리를 즐겁게 하시는 것보다 낙심케 하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찾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분명해야 할 부분에서는 분명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설득하시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는 이미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 뜻을 숨기심으로 당신과 우리를 더 힘들게 하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③ 앞날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내 힘으로 통제하려는 욕심과 다르지 않다.

미지의 미래가 우리 앞에 서서히 펼쳐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모험보다는 미래를 미리 아는 안전을 원한다. 만사를 미리 알 수 있도록 인생 여정 전체를 훤히 보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찾아내 행해야 하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손바닥 보듯 알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큰 의미를 잃게 된다. 책만 보고도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에게 교사가 무의미한 것만큼이나 말이다.

누가 미래를 알고 싶지 않겠는가? 누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당신의 미래는? 한마디로 우리는 모른다. 알 수 없다. 알아서도 안 된다. 미래를 안다면 우리는 극도의 충격이나 공포에 사로잡혀 매사에 지혜롭게 반응하지도 못하고 최선의 유익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미래가 힘겹고 고달프며 고난으로 점철될 것임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몸을 사리며 그 끔찍한 실체를 불안스레 기다릴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고난이 가져다 줄 지혜와 성품도 놓치고 말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만일 우리의 미래가 탄탄대로일 것임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나태하고 안일해질 것이다.

4. 지금이 중요하다.

① 약 4:13∼17
야고보는 앞날을 결정할 때 조심하여 속단을 삼가라고 권하고 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분명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그들에게 헛된 안정감을 심어주었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전부 조건적이다. 우리의 모든 계획에는 '주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이 붙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해야 할 일은 이미 알고 있다. 야고보가 보기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미래적인 뜻보다는 현재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주제넘게 미래를 속단하기 보다는 현재 하나님의 뜻에 충실해야 한다.

② 마 6:33∼34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 일에 힘쓰라고 권하신다. 우리는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의 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도 채워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이 내일을 책임지시기에 우리는 오늘 일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의 상황이나 미래의 문제에 대해 불신자들처럼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바로 하여 첫째 것을 첫째에 놓을 것을 요구하신다.

10가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100가지 취할 길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할지 그 선택 과정을 하나님이 정확히 일러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구는 단순하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고 동기가 순수하며 기본 방향(하나님 나라)이 옳은지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여러 바람직한 대안들 중 선한 양심으로 아무 길을 선택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쩌다 한번씩 내려야 하는 큰 결정들이 아니라 날마다 행애야 하는 모든 작은 일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 원하신다. 작은 책임을 감당함으로써 우리는 이후에 큰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자로 준비된다. 작인 일이 큰 일의 길을 닦는다.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에 충실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해 보이는 직무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③ 눅 6:10


④ 롬 12:1∼2
사도 바울도 예수님만큼이나 단순하고 직집적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현재 하나님을 섬기고 높이는 것이지 미래의 거창한 계획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⑤ 엡 5:15∼17
주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품고 계신 구체적인 비밀계획인가? 그분은 우리가 몇 날, 몇 주 몇 년이고 소비해가며 그 뜻을 찾아내기를 원하실까?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뜻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성령의 능력 안에 살아가는 근실한 삶이다. 바울의 일차적 관심은 신자들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다.

5. 우리의 놀라운 자유

하나님의 뜻은 미래보다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동기를 살핀다. 미래에 대한 중대한 결정보다 날마다 내리는 작은 결정을 중시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도록 우리에게 진정 주어진 유일한 시간은 현 순간이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미래가 아무리 희미해 보여도 우리는 일상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다. 내일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해서 오늘 그분의 뜻대로 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놀라운 자유가 생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미래에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우리가 취하여 따를 수 있는 길과 방향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하나님을 구하는 한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그분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길-우리가 택하는 길-만이 그분의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 품고 계신 뜻은 하나가 아니라 많다. 예컨대 그분은 당신이 결혼할 사람을 정해두지 않았다. 당신은 정해진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의 길을 택할 때 당신이 결혼할 대상은 많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직업도 정해두지 않았다. 당신은 정해진 그 직업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다. 실제로 여러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선택해야 하며 그 중에는 힘겨운 선택도 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융통성이 많은 것은 그분이 현재에 대해 극도로 융통성이 없기 때문이다. 주경이와 결혼하든 금주와 결혼하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컴퓨터 전문가가 되든 유치원 교사가 되든 우리의 자유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위에 놓을 자유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첫째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드리기만 하면 갑자기 세상은 온통 가능성 천지로 변한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담대하게 이렇게 고백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22∼23)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유익을 위해 미래를 비롯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중요한 단 하나의 조건은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하고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훈련해야 한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에 몸담아야 한다. 성품을 개발하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생의 소명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삶을 내어드려야 한다.

6. 불확실하게 하신 까닭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종교적인 것 몇 가지-예컨대 십일조, 자원봉사, 매주 성경공부 참석...-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원자로서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요구하시며 당연히 우리를 지배하신다. 삶 전체가 종교적이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

참된 헌신의 효과란 당연히 삶 전체로 넘쳐흐르게 마련이며,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모든 구분을 없애준다. 참된 헌신이란 삶 전체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참된 헌신은 삶의 상황이나 직무에 전혀 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삶을 풍부하고 매력있게 해준다. 헌신은 가족 부양을 순조롭게 해주고, 부부간의 사랑을 진실하게 해주며, 모든 종류의 직업을 더욱 즐겁고 멋있게 해준다.

대학생들은 대학 시절 '방종의 씨앗'을 뿌릴 권리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어른이 되어 직업과 결혼과 자녀 양육이 있는 '진짜' 세계에 들어서기만 하면 보다 진지하게 살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뒤로 미루는 태도는 나쁜 습관으로 굳어진다. 처음에는 첫 직장을 잡을 때까지 미룬다. 다음에는 결혼하여 아이들이 생길 때까지 두고보기로 한다. 그 다음에는 안정된 중년에 이를 때까지 핑계를 댄다. 늘 지금이 아니라 항상 나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은 지금이다. 한번도 나중이 아니라 항상 지금이다. 시작이 이를수록 좋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렇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미루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았다. 완전한 복종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진실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구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길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정표 없는 교차로 앞에 설지라도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내가 어떻게 결정하든 하나님이 함께 가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내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 됨을 알기에 안전을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절대 실패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 뜻 '바깥에' 있는 결정을 내일 수 없다. 우리가 이미 그분의 뜻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현 순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 계획을 알게 된다. 그렇게 인생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꼭 알고 행해야 할 일을 적시에 알게 된다. 한 문으로 한 방에 들어서면 시간이 가면서 차차 다음에 통과할 문을 알게 된다. 혹 분명한 인도가 없을 경우라면 내가 문을 골라 통과하면 된다.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인생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면서 그 과정은 계속된다. 우리는 걸음마를 배울 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한번에 한 걸음씩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 뒤돌아볼 필요도 없고, 지난 결정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았나 염려할 필요도 없다.

7. 직업과 소명

직업이란 세속적 용어이다. 직업이란 수입을 제공하고, 교육이나 훈련이 필요하며,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한 사람의 특정한 일의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명이란 신학적 용어이다. 소명이란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명은 최소한 네 가지 면에서 직업과 다르다.

① 소명은 직업을 초월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소명은 능력과 지위와 기회와 배경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② 소명이 결코 직업으로 격하돼서는 안되지만 종종 소명에는 직업이 사용된다.
③ 소명은 전통적 직업이 가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를 보낼 수 있다.
④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소명은 단일 직무인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우리가 받은 소명은 복합적이다. 우리는 단순성과 균형과 유연성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모든 소명을 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소명을 발견하는 길과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을 이루는 길은 깔끔하고 질서정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 여정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일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벌어들이는 수입과 필요한 교육과 문화적 지식인들로부터 받는 시간과 무관하게 모든 일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똑같이 유용하다.

소명은 지문처럼 나만의 톡특한 것이다. 소명은 나의 기질과 재능과 인생 경험에서 자란다. 궁극적으로 소명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소명이란 우리 존재의 일부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두신 것의 일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나라를 섬기는 방식의 일부다. 자신의 소명을 찾기도 해야 하지만, 소명이 이미 우리 정체의 한 부분으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8. 직업의 문제

직업은 사회에 유익을 주는 모종의 일로 이루어진다. 직업은 전체 사회의 필요와 복지와 이익에 이바지한다. 직업이란 서로 공생의 역할을 한다. 일종의 경제 생태계라도 되는 듯 순환 체계를 만들어 자체를 존속시킨다.

직업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① 모든 소명이 다 구체적 직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이나 동기와 별 상관없는데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하는 경우가 있다. 보람이나 소명의식을 별로 못 느끼는 일을 평생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먹여 살릴 가족들과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있기 때문이다.

② 때로는 직업이 오히려 소명의 발견이나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직업은 그 분야 사람들을 하나로 연대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직업을 통해 사람들은 전체 사회의 필요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소속 단체의 이익을 꾀하는 가치 기준에 매달리게 될 수 있다.

③ 어떤 소명은 결코 공식적 직업이 될 수 없다.
가사와 자녀양육을 핵심으로 알면서도 단지 공식적 직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문화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왔다.

직업은 협력보다는 경쟁을, 나눔보다는 부를, 봉사보다는 권력을, 진실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업은 사리사욕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직업을 갖는 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전복 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9. 소명의 의미

직업은 사람들이 수입과 권력과 직위와 위신을 생각하게 한다. 소명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필요와 도덕적 기준과 전체적 시각을 고려하게 한다. 인간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소명도 직업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규정하고 그 인간에게 소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로이 직업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소명의식이 직업 선택보다 선행돼야 한다. 소명을 발견하는 주된 방법은 각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되었고 재능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네가 하는 일이 곧 너'라고 말하지만 소명은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 그 일을 하라'고 말한다.

소명이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단 두 사람도 세상을 정확히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건강치 못한 사람들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베푸는 직업을 택한다.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우리는 여정에 오름으로 소명을 발견한다. 소명에 이르는 여정은 소명 자체의 필수 부분이다. 많은 경우 어렸을 때는 자신의 소명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언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처럼 말이다. 봄이 오면 씨앗은 땅을 헤집고 나온다. 우리는 깊은 소명 의식에 이끌려 발견의 여정에 올라야 한다.

10. 생의 본분 찾기

소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여정을 가는 것과 같다. 길가며 만나는 경험들의 효과가 누적되어 우리를 장래 일에 준비시켜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내가 미래에 하게 될 일에 대한 정보 이상이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다음 근무지로 명령을 받는 군인이 아니다. 우리가 삶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다. 시도와 실험과 실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소명이란 여정과 불가분의 관계다. 어떤 의미에서 소명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다.

경험은 우리를 가르치고 준비시키고 단련시켜 다가올 미래를 잘 맞이하게 해준다. 이 현 순간에 하나님께 귀기울일 때 그 영광스런 발견의 과정은 시작된다. 우리는 여정 중에 배워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간다. 성품과 신앙이 자라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며, 전체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러다 때가 되면 소명의식이 싹튼다. 국토를 횡단할 때 만나는 수려한 경관처럼 드디어 소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11.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당신은 당신의 소명이 열 번째 방에 있다고 확신한다. 현재 서 있는 곳에서도 그곳이 분명히 보인다. 당신은 과녁을 향해 똑바로 신속하게 날아가는 화살처럼 10개의 열린 문을 통과해 최대한 빨리 곧바로 그 방으로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일단 첫 번째 문을 지나 옆방으로 들어가면 그 방에 또 다른 문들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들어가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문들이다. 그 문들 중 하나로 들어서는 순간 당신이 가는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가는 곳들과 하는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문제들과 성취하는 목표들과 추구하는 직업들 중에는 우리의 현 시야에는 들어와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12. 방향감각을 제시하는 유의해야할 신호

① 가장 깊은 동기
자신의 내면을 살펴 어떤 일에 동기를 느끼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내 흥미를 끌고 내게 힘이 나게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재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흥미와 에너지와 열정까지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들 안에 그 길이 들어 있다.

1924년 올림픽 육상 400m에서 금메달을 딴 에릭 리델은 올림픽 1년 후 선교사로 일하고자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는 다분히 잊혀진 존재로 여생을 보냈다. 리델로 하여금 명성과 부를 등지고 중국의 선교 사역에 뛰어들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의 전기작가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가 리델에게는 그것이 단순하고 쉬운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리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소명에 자신을 바칠 수밖에 엇었다.

② 재능
적절한 재능은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안 된다. 일을 해내려면 은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마땅히 그 일에 필요한 재능도 주신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꼭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닐 수 있다.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 놓아두는 편이 더 좋을 일들에 매달리게 된다.

물론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 재능은 소명의 단서는 되지만 소명의 필수 조건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자신의 재능을 다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에릭 리델은 전문 육상선수가 될 수 있었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유명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학생들 중에도 마음만 먹으면 어느 전공이든 통달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시간이 허용하지 않을 뿐이다. 반면, 능력은 보통 수준인데도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③ 인생경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우리를 소명으로 떠미는 경우도 있다. 남편을 암으로 잃은 젊은 과부가 호스피스로 일하게 된다. 수년간 구타당하며 산 여자가 구타당하는 여자들을 위한 클리닉을 개설한다.

④ 열린 문(기회), 닫힌 문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기회를 '환경'이라 표현했다. 그녀는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고 믿었다.

⑤ 공동체
소명이 공동체와 동떨어져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의 은사를 평가하고, 꿈을 들어주고, 사고에 도전을 던져주고, 계획을 격려하거나 말릴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잘 아는 사람은 친구들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의 장단점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내가 누구이며 평생 할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환경과 아울러 사람을 사용하여 우리의 소명 분별을 도우신다. 철저히 혼자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우리에게 극히 드물다.

⑥ 일의 기쁨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살기 원하신다. 그분은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을 통해서도 소명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 소명을 알게 된다.

⑦ 들음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도 바울은 들었지만 디모데는 듣지 못했다. 바울의 신앙 동료들도 대부분 듣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들에게 대부분 소명이란 세월의 흐름과 경험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살면서 배움으로, 성공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 실험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들음을 통해 소명을 발견한다.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13. 다양한 소명의 관리

우리의 소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이 다양한 소명들은 때로 충돌을 일으킨다.

① 단순성
   첫째 것을 첫째로 삼고 인생에 하나의 최고 관심사(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를 잃지 않음.

② 균형
균형이란 적절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을 택하는 것, 자신이 가장 전념하는 것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는 것을 뜻한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이 세상에 본질적으로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악이란 단순히 선을 뒤집어놓은 것이요 삶을 혼란케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결혼이란 선한 것이지만, 결혼을 인생이 목표로 삼는 것은 나쁜 것이다. 성공도 좋은 것이지만, 가정과 우정과 공동체를 희생하고 얻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 악은 마지막을 첫째에 놓고 첫째를 마지막에 놓는다. 악은 건강한 우선순위의 왜곡을 통해 창궐한다.

③ 유연성
머피의 법칙처럼 "일이 꼬이려면 항상 꼬이고 그것도 언제나 최악의 시간에 꼬인다." 인생이란 언제나 탄탄대로가 아니다. 큰 위기 하나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앞길에 장애물을 두시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인생이란 우리가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통제권 밖의 상황에 최대한 창의적이고 신실하게 반응하면서 늘 유연성을 잃지 않았다.(빌 4:12)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삶을 홀가분한 자세로 살려고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꿈을 추구하고 경로를 구상하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따라야 하며,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는 일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홀가분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학에 낙방할 후 수도 있고, 시즌 최다 연속 패배 기록을 세울 수도 있고, 딸아이가 나를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딸을 묻을 수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날들을 사실상 혼란 속에 살며, 늘 바빠 보이는 것에 비해 실속이 없을 수도 있다.

영영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충실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다. 아무리 인생의 경로가 자주 바뀌어도 우리는 늘 하나님께 진실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한 경로를 따르려 하다가 불가항력적으로 다른 길로 바꿔야 할 수도 있다. 배우자나 자녀를 잃고, 직업을 바꾸고, 사업에 실패하고, 휠체어를 타게 될 수도 있다. 면접 보러 가는 길에 타이어가 구멍날 수도 잇고, 결혼식 전날 독감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유연성을 잃지 않고 인생을 홀가분한 자세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14. 하나님이 계시된 뜻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나와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으뜸으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한다. 자신을 경건하게 훈련하고 성품을 개발하고 지혜를 좇으며 성경적 진리를 따라 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라고 명한다.

그런 주제라면 성경에 명확히 나와 있지만, 명확하다고 해서 삶의 선택이 조금이라도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성경이 인도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미래를 결정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성경은 상황마다 일일이 우리가 할 바를 말해주지 않는다. 지침과 원리는 주지만 장황한 행동 목록은 없다. 전체적으로 방향만 제시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을 믿으며 많은 실제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15. 하나님의 숨은 뜻

소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두 번째 길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이 두 번째 의미에서 보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뜻이다. 하나님이 그 섭리로 모든 역사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방식을 우리가 주어진 순간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큰 그림의 작은 일부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확실히 믿을 수 있지만 그 방법을 언제나 아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분이 끝내 영광의 목적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그분의 주권에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16. 평범이 곧 비범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날마다 내 주변이 일상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범한 환경 속에서 당신의 뜻을 행하는 법을 보여주셨다. 평범한 환경이야말로 대부분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그 환경은 너무도 평범하여 관심과 에너지조차 쏟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평범한 환경을 무시하면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앞으로 언젠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잠시 있다. 사라질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거창하게 하고 싶어하는 큰 일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만 하는 작은 일들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날마다 순종하기 원하신다. 그분은 가난한 자를 섬기고 자녀를 사랑하고, 이웃의 친구가 되고, 부정직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며, 무엇보다 당신을 먼저 구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평범한 상황에서 날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다.

17. 기초를 튼튼하게

미래가 아무리 오리무중이어도 우리는 언제나 현 순간에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앞으로 어느 분야로 나갈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지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 지금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 그것이 준비가 되어 나중에 더 큰 문제들도 풀 수 있다. 일상 생활에 대한 단순한 헌신이 미래의 기초가 된다. 지금 부지런하고 충실할수록 장차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역량이 그만큼 커진다.

결혼을 생각해 보라. 결혼 여부나 배우자의 선택보다는 지속적인 우정을 가꾸기 위해 날마다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결혼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매순간 사랑을 선택하는 삶이다. 많은 부부가 결혼에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밖에'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이 관심사가 되기 이전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물어야 할 기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

소명을 생각해 보라. 선택하는 소명의 분야보다는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날마다 하는 작은 일들이 더 중요하다. 요즘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평생 한 직업에 머물지 않는다. 대학이 하나의 특정 직업만 준비하는 곳이라면 그런 교육은 함량 미달이다. 그러나 대학이 학생들의 삶에 지식과 기술과 습관과 신념의 기초를 튼튼히 놓아주는 곳이라면 학생들은 무슨 일에든 준비된 셈이다.

18. 평범한 삶의 의미

평범한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이다. 우리가 가장 큰 도전에 부딪칠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웅적, 희생적 삶을 요구하실 때가 아니라 매일의 일상에 충실하도록 부르실 때다.

평범한 것의 영적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놀라운 선물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선물은 바로 그분의 사랑의 임재다. 기도 시간이 다른 시간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기도할 때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못지 않게 행동할 때는 행동으로 철저히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진정 우리의 일상사는 하나님께 반드시 의미가 있다.

19. 작은 일의 중요성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미국의 대학 스포츠 팀으로 UCLA 농구팀(1960년대, 70년대)이 소개되었다.(News week) 이 팀은 전국 우승을 열 번이나 휩쓸었고 그중 1976년부터 1973년까지는 7년 연속 우승이었다. 열 번 모두 우승 당시의 코치는 존 우든이었다. 뉴스위크 기자가 그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다. 그러나 우든은 성공적인 공격플레이, 선수 발굴 전략, 장거리 슈팅 따위를 꼽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을 내놓았다.

"선수들을 처음 만날 때마다 제가 맨 처음 가르쳐주는 것이 있습니다. 좀더 시간을 들여서라도 신발과 양말을 제대로 신는 법이지요.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신발과 양말을 신는 일입니다. …
몇 분 안 걸리는 일이지만 저는 선수들에게 '신발과 양말을 똑바로 신는' 법을 가르쳐 주곤 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작은 일이다.

20. 바른 시각 유지

영원한 시각은 우리의 선택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원하는 일보다 필요한 일을, 즐거움보다 섬김을, 일보다 사람을 중시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은 영원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일시적인 것이다. 영원한 것에 투자하라.

75세된 사람이 40세 때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며 후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가족들을 돌보거나 이웃을 섬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다. 바른 시각은 마음 속에 전체 그림을 잃지 않게 해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바른 시각을 제시하면 좋은 결정을 내리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영적 스승들과 친구들이야말로 훌륭한 조언의 출처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가장 신실한 신자라도 동기가 얽혀있어 엉뚱한 조언을 줄 수 있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권한 남용에 능한 자들이 있다.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권위를 주장하며 사실상 독재자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교인들에게 결혼 대상과 취직할 직장과 돈 쓰는 방식과 시간 사용 방식을 정해줄 권리가 있는 사람인 줄로 착각한다.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신중하게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선한 지도자는 양들을 지배하지 않고 섬긴다.

사회학자들은 사람들이 이단에 들어가는 이유를 연구했다. 이단의 영향에 가장 쉽게 넘어가는 자들은 권위적 기독교를 경험하며 안전을 얻기 원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신약성경에 약속된 것-사랑, 봉사, 높은 기준, 진지한 헌신-을 실현하는 듯 보이는 단체에 들어간다. 그러나 머지 않아 덫에 걸린다.

우리가 바른 시각을 구할 수 있는 현명하고 노련한 사람들이 또 있다. 오래 전에 살았던 성도들이다. 만나본 적도 없고 얘기해본 일도 없고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그들에게서 지도를 받을 수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그들의 책과 전기를 읽음으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다.

21. 다 잘될 것이다

우리의 선택이 현명하든 어리석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되어 있기에 끝까지 그 선하심을 거두시지 않는다. 우리가 네팔의 카트만두로 이사가기로 한다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가실 것이다. 우리가 경영학 대신 교육학을 택하면 그분은 끝까지 우리에게 신실하실 것이다. 우리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 그분은 그 서약을 지킬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자식 중 하나를 암으로 떠나보내면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며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가 새로 사업을 시작하다 파산하거나 결혼에 실패하거나 전신마비가 되거나 감옥에 간다해도 그분의 섭리와 다스림은 계속될 것이다. 집안을 청소하고, 장애인 이웃을 챙겨주고, 매일 직장에 출근하고, 자녀를 기르는 등 날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보며 그분은 미소를 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다. 우리의 선택이 아무리 중요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보다는 그분이 이미 내려놓으신 선택과 훨씬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는 삶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인 것은 그분이 이미 우리를 구하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며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구속하신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 그분은 우리를 불러 평범한 삶 속에서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마땅히 현명한 선택을 내려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택이 정말 그분의 뜻이라는 확신은 우리의 선택의 지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담대한 확신으로 삶을 행진해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분 자신 때문이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내 속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지금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최선을 다해 현명한 선택을 내리는 것, 내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의 기적이 계속 펼쳐지는 것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것. 우리는 다만 그것으로 족하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

우리의 뜻은 실패해도 하나님의 뜻이 끝내 승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당신께 속한 자들의 선을 이루신다.

일이 어떻게 풀릴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안다. 그분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직장을 옮기고, 사랑하는 이를 땅에 묻고, 아이들과 작별하고, 먼 도시로 이사하고, 증권시장에서 재산을 날리고, 전쟁에 나가고, 연변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삶을 택할 때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삶을 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실 것이다. 그것이 그분의 성품이기도 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